posted by 해이든 2020. 2. 7. 16:06

 

 



예술인가, 외설인가를 묻는 포스터를 기억한다.

이 영화를 보던 당시 내 기준에선 외설이었다. 그것도 10대 고등학생이었던 소녀의 도발은 외설 뿐 아니라 어른의 탈을 썼었다. 내가 생각하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연인의 제인 마치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도 잊히지 않는 여배우와 남자 배우의 잔상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녀가 베트남 촐롱을 떠나 인도양을 건너던 어느 날,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울던 모습과 부둣가 외진 곳에 세워둔 차안 뒷좌석에서 그녀를 지켜봤을 중국인 남자, 그 잔상은 이리 오래되었음에도 내 기억속에 깊게 슬프게 자리잡고 있다.

과거 내가 외설로만 이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까지 영화제목 <연인>과 남자 모자를 쓰고 배 갑판에 기댄 소녀의 모습과 애잖은 남주의 모습을 왜 이리 슬프게  품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끄집어 봤다.

내가 본 야한 영화고  또 슬픈 영화였다. <색계>와 <연인>이 내게는 절대 외설로 분류할 수 없는 스토리를 가진 이루어지지 않은 슬픈 영화였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정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색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잔잔한 듯 요동치고 요동치는 듯 하다 잔잔해지는 그런 여운을 주는 영화다. 다시보니 더 짙은 사랑이 느껴진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을 빛나게 하는 것이 진심이라고 말하듯.

 

영화 <연인>의 양가휘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촐론은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중국이라 여길 만큼 중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남자 모자를 쓴 백인 아가씨(제인 마치)가 원주민이 타는 배 갑판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매콩강을 건너 호찌민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인으로 호찌민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이었고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라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배 위에 세워진 차안에서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보던 중국 남자가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다.

 

영화 '연인'

 

그 남자의 눈빛이 이 외국소녀에게 끌렸음을 말하고 있다. 소녀에게 담배를 권하는 손이 떨렸고 말을 걸어보지만 소녀의 반응이 별로 없자 민망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녀가 그에게 누구냐고 관심을 보이자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는 32살의 중국인, 파리에서 경영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촐론에 기거하고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는 식민지 베트남의 부동산을 장악한 소수의 중국인이었다.

학교까지 태워 주겠다는 남자의 호의에 같이 차에 오른 두사람.

 

 

차 안에서 남자는 점점 그녀에게 끌렸고 그녀의 손을 스치듯 잡는다. 소녀 역시 그 남자의 유혹이 싫지않다.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그녀의 학교 앞에 세워진 그의 차를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데리고 간 촐론 그의 방, 그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대했을까, 그녀는 그 방을 '정부의 방'이라 불렀다.
그의 집은 시장 한가운데 번잡스럽고 소란스러움 속에 있었다.


같이 자기에는 그녀는 너무 어렸다. 욕정보다 양심이 그래도 앞에 나와 속삭일 때 32살의 부잣집 아들 백수에게  온정을 가졌다. 그는 그녀가 너무 어려 두려웠다. 그러자 그녀가 적극적으로 그를 탐닉해 들어갔다.


"내가 돈이 많아서 따라온거야?"
그가 물었다. 전혀 아니라고는 못했다.

 

그녀의 가족은 불행한 엄마, 죽어버렸으면 하는 오빠는 엄마 돈에 손대며 아편에 빠져 있었고, 여린 남동생으로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의 삶은 극도로 가난했고 부동산 업자에게 사기당해 엄마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절망과 가난에 대한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가난과 삶의 잔인함속에서 모두 건조했고 그녀의 내면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자리했다. 또 칙칙한 집은 철장으로 둘러 싼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녀 앞에 부자인 그가 나타났고 묘하게 끌렸으며 그의 접근이 싫지 않았다. 단지 그 뿐이 아니라 모르는 남자와의 쾌락도 그녀를 점점 빠져들게 했다. 그는 그쪽으로 그녀를 채워줄만큼 능숙했다.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나이들어 버렸다.

그는 이미 집안에서 20년 전에 결혼이 결정된 여인이 있었다.
아버지의 재산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백수인 남자, 전통 풍습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이런 모든 걸 서로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녀는 언젠가는 베트남을 떠날 것이고 남자는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저 그 남자의 정부로 그남자는 그녀의 물주로, 사랑해서는 안될 전제를 깔고 만나는 것이었다.

 

 

 

학교에는 중국인과 잔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가족들마저 창녀라 몰아세웠다.
가족들에게 돈 때문에 만나는 남자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와 연인이라는 걸 수치스러워서라도 숨겨야하는 그런 존재였다. 단지 돈 때문에...만나는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아버지를 찾아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아무 힘이 없다.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하고 그녀를 원하지만 그에겐 그럴 힘이 없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남자는 사랑때문에 고통스럽다 말해도 그녀의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게 습관이 되었다. 가난할수록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더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널 만나기 전에는 고통이란 걸 몰랐어 ᆢ난 죽은거야ᆢ널 향한 욕망도 없고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더는 원치 않아. 너를 향한 사랑때문에 죽을 것만 같아"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죽은 사람처럼 아편만 피웠다.

 

 

남자가 가엾다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여자, 돈 때문에 자신에게 온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생전 처음으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욕정도 사랑도 사라져 죽어간다고 말할 때는.

그 남자가 오빠의 아편 빚을 갚아주고 여행경비까지 대주었다고 엄마가 그녀에게 말한다. 너그러운 사람같다고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묻는다. "진짜  돈 때문에 만나는 거니?" 그녀는 그때도 그렇다고 대답 했다.

그 남자의 결혼식을 지켜보던 그녀, 그런 그녀를 또 눈에 담는 그 남자.
결혼 후 '정부의 방'에서 한 번 꼭 보자는 그녀의 말에도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남자를 보지 못한 채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배가 출발한다는 뱃고동 소리에 그녀는 슬펐다. 눈물없이 슬펐다.

 

 


부두를 떠나 배가 출항하자 부두 외진 구석에 그가 타고 있는 차가 보였다. 그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뒷좌석에 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염없이 그가 타고 있는 차를 바라봤다.
나는 남자가 차에서 내리지않고 차안에 있다는 게 너무 아펐다. 차라리 감독이 그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덜 아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하게 놔둔 것이다. 형체도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학교 앞에 차를 세워두었듯 부두 외진 곳에 세워두고 그녀가 떠나가는 배를 아프게 담고 있었을 터.

 

 


부두에서 멀어질수록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게 무언지 그녀는 몰랐다. 부둣가 그의 차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니 보이지 않음에도 계속 눈을 떼지 못했다.

인도양을 건너던 어느 날, 배 갑판 위로 들려오는 쇼팽의 왈츠 선율 그 음악에 이끌려 가듯 따라갔고 그가 보고 싶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 채,

아주 서서히 사랑에 젖어 들었고 아주 천천히 그 남자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감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는 그 남자를 가슴 한 곳에 담았던 것이다. 그 남자가 그랬듯이 사랑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원하고 그가 보고 싶어 우는 것이다. 사랑은 이유없이 끌려 들어가는 웜홀처럼 피아노 선율처럼 불가항력의 힘으로 그녀와 그 남자를 이끌었다.
둘은 연인이었다.

 

 

 

그녀는 '내삶은 어렸을 때 이미 늦어버렸다.'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세월이 그녀를 덮어 버렸을 때 회상하며 말한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드는 내 생각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