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95건

  1. 2020.07.04 ☆자비에 둘란 감독의 [마미]
  2. 2020.05.30 스페인 영화 <일요일의 병>
  3. 2020.02.15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주인과 하녀에서 화가와 뮤즈로
  4. 2020.02.07 <연인> 예술인가, 외설인가
  5. 2020.02.05 말이 가지는 독과 약
  6. 2020.02.05 <킹스 스피치> 말더듬이 왕 조지 6세의 도전!
  7. 2020.02.02 힘들고 지칠 때 보는 영화, 윌 스미스 부자의 <행복을 찾아서> 1
  8. 2020.01.31 가족이 주는 무게와 사랑 <길버트 그레이프> 조니 뎁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26년전 모습
  9. 2020.01.29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의 영화 : 기생충 2
  10. 2019.10.24 재난 영화 2012, 지구 멸망 앞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11. 2019.10.01 케빈에 대하여
  12. 2019.08.12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1
  13. 2019.08.06 색,계 - 사랑과 표적의 경계
  14. 2019.08.01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5. 2019.07.31 블라인드(Blind,2007)
  16. 2019.07.20 사랑의 기적 : 로버트 드 니로, 로빈 윌리엄스 출연 영화
  17. 2019.07.12 줄리엣 비노쉬, 조니 뎁의 초콜렛(Chocalat,2000)
  18. 2019.07.10 흐르는 강물처럼 1
  19. 2019.07.08 노벨 문학상에 숨겨진 진실 <더 와이프>
  20. 2019.06.27 마농의 샘 1- 2부
  21. 2019.06.21 언터처블: 1%의 우정
  22. 2019.06.16 영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23. 2019.06.15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
  24. 2019.06.15 콘택트(Contact): 조디 포스터 주연의 SF영화 (스포주의)
  25. 2019.06.12 영화 <가버나움> : 엄만 감정이 없나 봐요?
  26. 2019.06.11 일본 영화 <어느 가족> 1
  27. 2019.06.05 영화 위대한 유산(1998): 기네스 팰트로, 에단호크출연작
  28. 2019.06.01 12년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 <보이후드>
  29. 2019.05.31 마틴 스콜세지 감독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 : '로버트 드 니로',조디 포스터 출연
  30. 2019.05.31 [벨벳 골드마인] 글램 록의 전설 '데이빗 보위'를 연기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posted by 해이든 2020. 7. 4. 12:42


자비에 둘란 감독의 영화 [마미]는
사랑과 구원은 별개라는 주제로 아들을 향한 엄마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엄마가 아들을 덜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 시간이 갈수록 너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거야. 넌 갈수록 엄마를 덜 사랑하겠지만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니 적응해야 돼. 그게 세상 섭리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부모자식간에 끝은 없다. 설사 죽는다한들 부모 자식의 관계가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끝나지 않는 관계, 자식이 잘 살든 못 살든 그들의 희로애락, 굽이굽이 지켜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인생이다.

마흔여섯 살의 디안, ADHD증후군과 애착장애를 가진 통제되지 않는 16살의 아들 스티브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엄마이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러 삶의 주름이 펴지지 않아 제대로 쉴 수도  없지만 아들과 평범한 삶을 사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현재가 고단하고 힘들지만 훗날 이 또한 추억이라 기억할 만큼 다 지나가리라는 희망,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리란 희망, 무거운 어깨가 조금씩 가벼워지리란 희망 말이다.



아들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은 앞집 카일라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준 건 다름 아닌 상처 투성이 디안과 스티브다. 스티브는 카일라에게 마음을 열고 카일라는 디안과 스티브에게 마음을 연다.
카일라는 다시 세상 밖으로 질주하고, 시설에서 나와 엄마와 살게 된 스티브는 자유에 입 맞추고, 아들과 함께라서 따분할 틈이 없는 디안은 작은 희망에 부푼다.

모두가 세상에 맞설 용기와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고 산다. 또 누구나 극복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작은 위안이, 작은 관심이 큰 물살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고통이 즐비하게 늘어져도 헤쳐나갈 원동력은 가족이고 사랑이다.

이제 세상 밖으로 질주하면 되는데 현실의 벽은 자주 앞을 가로 막아선다.
아들을 다시 시설로 돌려보내는 선택을 하고 만 디안, 그로 인해 멀어진 카일라, 자유를 억압당한 스티브.
다시 좁고 어두워진 세상.
디안은  태연한 척 겉을 포장했지만 속은  깊은 상실의 아픔과 죄책감과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신을 누구보다 자책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무거운 현실의 껍질에 둘러싸여  나만 그 속에서 초라한가, 나만 아픈가. 남의 시선에 아들을 시설에 버린 무정한 엄마로 비쳐지려나, 아무리 겉을 단단하게 무장해도 여린 속까지 커버되는 건 아닌 디안, 엄마니까 강해지려 애쓰는 중이다.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을 구원할 수 있는 건 나뿐이지, 자식을 사랑할 사람도 나뿐이지'라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자식이니까 조금씩 삐걱거리고 부딪히면서도 사랑으로 품고 나아간다.
하지만 사랑과 구원이 별개라는 말에 경험으로 공감하게 된다. 사랑 하나면 다 될 것 같은 마음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 벽에 막혀 다시 아들을 시설로 돌려보내는 선택을 하고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희망을 잡고 꿈을 꾼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포커 같다. 그녀는 애초에 패할 패로 인생에 뛰어든 것일까? 형편없는 패로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만 삶, 혼자 치면 낭패는 없을텐데.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부모로 살면서 몇 번을 되뇌고 살았을까?
스티브 없이 혼자였다면 그녀는 잘 살았을까?
내가 부모임에, 엄마로 살아감에 카일라의 상실도 디안의 현실도 다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그대로 내보내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옳든 아니든 자신에게 맞는 최선책을 찾으며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낸다.

디안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 디안의 감정에 어떻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아프게 만든 어미의 심장을 어떤 고통에 빗대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고통을 경험한 카일라가 하는 말이라 솔직히 잔인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인 사람이 아들을 시설에 보내야 했던 엄마인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 그녀의 쥐어짜는 고통의 연기가 오롯이 전해져 왔다. 어느 누구도 당사자의 아픔만큼 클 수는 없다. 오로지 그녀의 몫이다. 아픔도, 절망도, 희망도.


슬픔을 타인에게 내보이지 않으려 디안은 애써 밝은 척했다. 겉으로 속을 속단하는 카일라, 그냥 안아주며 토닥토닥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자신은 맞서지 않고 숨으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디안도 자신처럼 슬픔에 잠겨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디안은 그렇게 지낼 수 없다.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고단한 삶이라, 힘을 내지 않으면 아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기에.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
가족의 인정, 이웃의 인정, 세상의 인정.
'나는 그런 인정 따윈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자체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다. 잘하고 싶은 욕구 자체가 그렇다. 보이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posted by 해이든 2020. 5. 30. 11:37

 

영화 <일요일의 병>

 

키아라(바바라 레니)는 8살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35년이 지나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10일간 함께 보내줄 것을 부탁한다. 지금 키아라의 나이는 43살,

헤어질 때 8살이었던 아이가 마흔을 훌쩍 넘어 찾아왔지만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어머니 아나벨, 오히려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딸을 버리고 떠난 아나벨(수지 산체스)은 사교계에서 성공한 유명 인사가 되어 지금의 남편과 딸과 함께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아나벨은 지금의 남편에게 자신의 35년전에 버리고 온 딸이 자신을 찾아왔고 10일간 자신과 함께 있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는 말을 건넨다.

남편은 왜 굳이 이제와서 10일을 같이 지내자고 하는 걸까, 자신을 버렸다고 복수하려는 걸까, 아니면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걸까 의심스러워 변호사 입회하에 키아라와 대면한다. 키아라는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달리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10일을 같이 보내달라는 것뿐이라는 뜻을 전한다. 아나벨의 남편은 키아라의 요구 조건에 응하면 친족 포기서를 작성해달라는 계약서까지 들이민다. 키아라는 고민할 것도 없이 서명한다. 남편과 변호사가 그 모든 과정을 키아라와 협의하는 동안 아나벨은 창밖만을 응시할 뿐 키아라를 쳐다보지 않았다.

영화 일요일의 병 아나벨 역 '수지 산체스'
   영화 <일요일의 병> 키아라 역 '바바라 레니'

 

키아라가 어머니를 데리고 간 곳은 아나벨이 35년 전에 떠나온 시골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허영심과 자기 애착이 강한 아나벨이 시골에서 옷에 흙을 묻히며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키아라는 아나벨과 10일을 함께 하려고 모셔 온 어머니와 아무것도 함께 하지 않았다. 혼자 있게 두었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당신도 기다림이 어떤 건지 외로움이 무언지 느껴보라고 혼자 두는 것처럼.

키아라는 주로 혼자 시간을 보냈다. 홀로 호숫가에 앉아있거나 마당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러려면 왜 데리고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버린 원망으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도 도대체 딸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아나벨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왜 멀쩡히 살아있는 전남편 마티외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는지도 의문이었다. 딸이 자신을 버린 것에 대해 사과받으려는 건가 싶어 미안하다고 말하자 키아라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는 것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도 사과를 받으려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아나벨은 딸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어가고 있는 딸이 병 때문에 자신이 필요해서 데려온 거로 여긴다. 그래서 키아라에게 묻는다. 내가 널 돌봐주면 좋겠니? 그렇다면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에 갑자기 이제 와 가여운 듯 동정하는 엄마의 태도에 화가 난 키아라, 침체되었던 감정을 쏟아내며 말한다. 딸을 버리고 간 여자는 아무것도 몰라, 늘 창가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고 지금도 여기 앉아 기다린다고 .. 억눌렸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지고 순간 치솟은 분노에 그만 들고 있던 컵을 아나벨에게 집어던지고 만다. 아나벨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자신을 아프게 한 엄마지만 키아라는 엄마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아나벨은 놀란 키아라를 달랜다. 엄마에 대한 상실과 끝없는 기다림에 보낸 날들로 하염없이 창가에 앉아 엄마를 기다려 온 키아라의 마음에 상처에 비하면 아나벨 이마의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영화 일요일의 병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키아라
꽃씨를 심고 있는 아나벨

 

아나벨은 우아하게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마당에 꽃씨를 심었다.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꽃을, 딸이 죽어가는 사실이, 자신이 비운 척박한 땅에서 아프게 자란 딸이 행복하지 못했고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간다는 것에 대한 아픔으로 작용했을 터.

씨앗을 심는 엄마의 모습을 창가에 서서 지켜보던 키아라는 사진에 담는다.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딸의 모습, 난 이 모습이 참 아프게 느껴진다. 마흔이 되어 노년의 된 엄마 앞에서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보다 더 말이다. 성장하는 일상 속에 있어야 할 엄마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던 삶이었기에 더 애잔한지도 모르겠다.

키아라는 엄마에게 다가가 매일 물을 줄 수도 없으면서 왜 씨를 심느냐는 듯 묻는다. 아나벨은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강한 녀석, 캄파뉼라라고 말한다. 엄마의 손길 없이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 딸이었으면 했을 테지만 죽어가는 키아라에 대한 죄책감이 아나벨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키아라는 아직 약속한 10일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혼자 죽어가는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아나벨. 매정하고 차갑던 아나벨에게도 엄마라는 피는 흐르고 있었다.

키아라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원하는 것이 있어 자신을 찾아 데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재차 묻는 아나벨이다. 키아라는 진짜 원하는 걸 말해줄 테니 원치 않으면 돌아가라고 하면서 아나벨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끝까지 키아라의 의도를 대사로 내보내지 않고 두 배우의 행동이나 표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왜 그렇게 표정이 돌처럼 굳은 것일까?

아나벨은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전남편 마티외를 만나러 간다. 키아라가 만나보라고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티외와 나눈 대사로 짐작해볼 뿐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키아라, 세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감정에 대한 정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아나벨로 인해 침체되어 있는 아픈 기억과 녹슬지 않는 고통을 이제 털어내는 것,

시골에서 사는 지루한 삶보다 성공에 대한 열정을 가진 아나벨의 행동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가도 그녀의 부재와 상실은 키아라나 마티외에게 힘든 여정이었다. 아나벨은 마티외에게 원한이 있냐고 묻는다. 마티외는 그러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변했으니까, 시간이 흘러 아픔이 사그라들고 미움이 희미해지지 않으면 사람은 그 덫에 갇혀 제대로 살 수 없다. 우리가 살게끔 기억은 희미해져 우리가 앞을 향해 살아가게 도와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도 더러 있다. 키아라에게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고 마티외에게도 말없이 떠난 아내 아나벨이었을 것이다. 인사도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그들의 내부에 침체되어 있었고 그 기억에서 아빠가 살아갈 수 있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것 같다. 서로에게 인사할 수 있게 서로의 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일요일의 병> 전 남편 마티외를 만나는 아나벨

 

아나벨은 마티외를 만나고 다시 키아라에게 돌아온다. 방이 아닌 헛간 땅바닥에 누워있는 키아라, 일으켜 세우려 하자 피곤해 더는 힘을 낼 수 없다는 딸, 죽어가는 고통으로 하루를 힘겹게 견디던 키아라, 키아라를 수레에 싣고 호숫가로 데리고 간다.

그녀가 엄마에게 원했던 부탁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키아라가 아나벨에게 부탁했던 것이 존엄사였고 아버지가 "누구나 쉴 자격이 있어 "라고 말한 것은 이 죽음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멈추어주는 것, 생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엄마의 품에서 죽는 것,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버렸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던 아나벨과의 마지막 인사, 엄마의 품에서 쉬고 싶은 키아라의 희망이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엄마에게 마지막을 부탁한 건 인사 없이 떠난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고 생을 마감할 생각을 굳힌 그녀가 이 생에서의 엄마와의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키아라는 마지막 "엄마"라고 부르며 "이해해요. 전부 다요." 말했고 아나벨은 딸을 꼭 끌어안았다. 호수에서 조용히 키아라를 보내는 아나벨의 표정은 너무 압권이었다. 처음 딸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보다 내적 변화는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슬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재로 살아온 딸을 보내고 그녀가 돌아와 딸이 머물던 집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수지 산체스가 맡은 아나벨은 속을 알 수 없이 차겁게 잘 도포된 여자이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을만큼 사교계에서 잘 포장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직도 만족한 삶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힘든거고. 10일간 함께 하자는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리고 딸과 그동안 추억을 쌓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그녀의 품에서 삶을 부여받았듯이 그녀의 품에서 그녀의 죽음을 거두었다. 아무리 딸이 원한 부탁이지만 그녀는 너무 침착해서 내내 고여있는 아픔처럼 분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그곳에서 다시 자리를 옮겨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딸은 이해했고 용서했다지만 자신은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가 버린 35년동안 딸과 보낸 10일이 아마 더 큰 무로 다가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스페인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잔잔한 것은 아닌가했는데 역시 후반부 강렬하게 쐐기를 박았다. 

 

 

posted by 해이든 2020. 2. 15. 15:41

 

스칼렛 요한슨(그리트 역)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모티브로 소설이 써지고 그 소설을 각색하여 2003년에 만들어져 개봉된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콜린 퍼스(베르메르 역)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콜린 퍼스)는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았고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그는 작품을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을 소요함에 따라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외상을 달아놓고 고기를 사고 약을 구입해야 했기에 아내 카타리나 (에시 데이비스)는 남편에게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집안 사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작업실에만 틀혀박혀 그림만 그리는 남편에게 말이다. 화가로서 실력은 뛰어났으나 집안 가장으로서는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임신한 아내와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가 그림을 완성해서 후원자인 라이벤에게 팔아야 했다.

 

 

주디 파핏(마리아 틴스 역)

 

카나리나의 엄마이자 베르메르의 장모였던 마리아는 베르메르가 완성된 작품을 후원자에게 파는 중개인같은 역할을 했다. 딸은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다. 보석이나 들여다보며 귀부인처럼 우아를 떨 뿐이었다. 실질적 집안 살림과 경제를 관리하는 건  장모 마리아였다. 그녀는 라이벤의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그가 원하는 그림을 사위가 그리면 파티를 열어 라이벤에게 선보였다. 그녀에게 사위의 그림은 그저 돈벌이에 지나지않았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원자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야 파산하지 않는다.

 

 

 

에시 데이비스(카타리나)

 

보석을 팔 정도로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화가 난 카타리나는 화실에서 싸우다 남편의 소중한 그림을 망쳐버렸고 이에 남편이 화를 낸 후로 다시는 남편의 작업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그의 집에 아이는 계속 늘어나고 하녀 타네케로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도자기 화가였던 아버지가 시력을 잃게 되자 집안형편이 어려워진  그리트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집안의  하녀로 들어오게 된다. 카타리나는 자신이 들어가지 않는 남편의 작업실을 그리트에게 청소하라고 지시한다.

 

 

 

작업실을 청소하던 그리트는 베르메르가 그린 작품을 매료되어 감상하게 된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인지 그리트는 글을 읽지는 못해도 그림을 보는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작업실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느 날 창문을 닦는데 갑자기 베르메르가 들어와 그대로 포즈를 취해보라고 한다. 창문을 닦고 있는 그리트를 보고 그림의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베르메르는 그녀가 그림을 보는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녀에게 물감을 섞게 한다. 물론 질투심이 심한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베르메르는 그리트에게 그의 작업실에서 색을 섞는 일, 빛과 색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 가르쳐주고 설명해주며 점점 감정이 싹튼다.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위 베르메르가 예상과는 빨리 새 그림을 시작했다. 그게 그리트로 인해 영감을 얻은 걸 안 장모는 딸이 그리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데도 그녀를 내보내지 않는다. 사위가 그림을 그려 후원을 받아 돈을 벌 수만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긴다.

 

 

 

마리아 심부름으로 온 그리트를 보고 혹한 라이벤(팀 윌킨슨)은 베르메르에게 그리트를 옆에 앉혀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한다. 라이펜의 속내는 그녀를 탐하려는 의도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그리트를 담고 있던 베르메르는 라이벤에게 자신의 예술적 뮤즈라고 말하며 그의 옆에 앉혀 그리는 걸 거절했다. 대신 그의 후원이 끊기면 생계가 안 되는 베르메르로서는 다른 제안을 한다.  라이벤이 거실에 걸어두고 혼자 볼 그림으로 그리트만 그려주기로 한다.

라이벤은 흑심을 잠시 숨기고 허락한다. 그러나 그리트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라이벤은 그녀를 찾아와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돌아간다. 이에 그림을 빨리 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으로 분을 표시한다. 라이벤이 감정이 상해 후원이 끊길까 걱정하던 마리아(주디 파핏)는 베르메르가 그리트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예민한 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예상해 비밀로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

 

 

 

라이벤의 독촉에  마리아는 딸이 외출하는 날,  딸의 보석함에서 진주 귀걸이를 훔쳐 그리트에게 주며 사위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돕는다. 베르메르가  딸의 진주 귀걸이를 그리트의 귀에 걸어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 카타리나가 알게 되면서 작업실에 들어와 그림을 보여달라며 난리 친다. 그림을 본 카타리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그리트를 내쫓는다.

마리아는 딸에게 그저 돈벌이에 불과한 것이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림 속 그리트의 눈빛을 보면 결코 의미 없지 않다는 걸  카타리나는 확인했던 것이다. 그림을 볼 줄도 모르는 카타리나에게도 전해지는 두 사람의 감정이.

 

 

 

비록 신분차이로 서로를 향해 적극적일 수 없었지만 그리트의 속마음을 꿰뚤어보듯 화폭에 담겼고 베르메르는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그의 붓의 터치로 담아낸 것이다.

신분의 벽 앞에서 서로를 향한 감정을 억누르고 억압해야 했던 두 사람의  뜨거운 속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내에게 쫓겨나는 그녀를 잡지도 못한 채 작업실에 앉아 떠나가는 그녀를 차마 보지도 못하는 베르메르, 주인의 작업실 문 밖에서 그저 머무르는 것으로 그들은 이별을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그리트의 손에 진주귀걸이가 전달된다.

 

대화보다는 두 사람의 눈빛과 닿을 듯 말듯한 접촉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전류를 느낄 수 있었다. 포즈를 취하는 그리트의 눈빛과 그녀를 화폭에 담기 위해 바라보는 베르메르의 눈빛 속에서도 충분히 터질 듯 말듯한 욕망과 감정이 전달되었다. 그녀의 귀를 뚫어주며 그녀의 귀를 감싸안는 손길,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바라보는 탐스러운 눈빛과 표정.... 크게 명대사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으나 연기자들의 눈빛 연기로 어찌 보면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자극적이었고, 예술적이었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속 소녀와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스칼렛 요한슨을 동시에 바라보며 피터 웨버 감독의 절제미가 돋보였다 생각된다.

 

 

 

 

posted by 해이든 2020. 2. 7. 16:06

 

 



예술인가, 외설인가를 묻는 포스터를 기억한다.

이 영화를 보던 당시 내 기준에선 외설이었다. 그것도 10대 고등학생이었던 소녀의 도발은 외설 뿐 아니라 어른의 탈을 썼었다. 내가 생각하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연인의 제인 마치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도 잊히지 않는 여배우와 남자 배우의 잔상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녀가 베트남 촐롱을 떠나 인도양을 건너던 어느 날,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울던 모습과 부둣가 외진 곳에 세워둔 차안 뒷좌석에서 그녀를 지켜봤을 중국인 남자, 그 잔상은 이리 오래되었음에도 내 기억속에 깊게 슬프게 자리잡고 있다.

과거 내가 외설로만 이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까지 영화제목 <연인>과 남자 모자를 쓰고 배 갑판에 기댄 소녀의 모습과 애잖은 남주의 모습을 왜 이리 슬프게  품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끄집어 봤다.

내가 본 야한 영화고  또 슬픈 영화였다. <색계>와 <연인>이 내게는 절대 외설로 분류할 수 없는 스토리를 가진 이루어지지 않은 슬픈 영화였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정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색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잔잔한 듯 요동치고 요동치는 듯 하다 잔잔해지는 그런 여운을 주는 영화다. 다시보니 더 짙은 사랑이 느껴진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을 빛나게 하는 것이 진심이라고 말하듯.

 

영화 <연인>의 양가휘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촐론은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중국이라 여길 만큼 중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남자 모자를 쓴 백인 아가씨(제인 마치)가 원주민이 타는 배 갑판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매콩강을 건너 호찌민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인으로 호찌민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이었고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라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배 위에 세워진 차안에서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보던 중국 남자가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다.

 

영화 '연인'

 

그 남자의 눈빛이 이 외국소녀에게 끌렸음을 말하고 있다. 소녀에게 담배를 권하는 손이 떨렸고 말을 걸어보지만 소녀의 반응이 별로 없자 민망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녀가 그에게 누구냐고 관심을 보이자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는 32살의 중국인, 파리에서 경영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촐론에 기거하고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는 식민지 베트남의 부동산을 장악한 소수의 중국인이었다.

학교까지 태워 주겠다는 남자의 호의에 같이 차에 오른 두사람.

 

 

차 안에서 남자는 점점 그녀에게 끌렸고 그녀의 손을 스치듯 잡는다. 소녀 역시 그 남자의 유혹이 싫지않다.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그녀의 학교 앞에 세워진 그의 차를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데리고 간 촐론 그의 방, 그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대했을까, 그녀는 그 방을 '정부의 방'이라 불렀다.
그의 집은 시장 한가운데 번잡스럽고 소란스러움 속에 있었다.


같이 자기에는 그녀는 너무 어렸다. 욕정보다 양심이 그래도 앞에 나와 속삭일 때 32살의 부잣집 아들 백수에게  온정을 가졌다. 그는 그녀가 너무 어려 두려웠다. 그러자 그녀가 적극적으로 그를 탐닉해 들어갔다.


"내가 돈이 많아서 따라온거야?"
그가 물었다. 전혀 아니라고는 못했다.

 

그녀의 가족은 불행한 엄마, 죽어버렸으면 하는 오빠는 엄마 돈에 손대며 아편에 빠져 있었고, 여린 남동생으로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의 삶은 극도로 가난했고 부동산 업자에게 사기당해 엄마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절망과 가난에 대한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가난과 삶의 잔인함속에서 모두 건조했고 그녀의 내면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자리했다. 또 칙칙한 집은 철장으로 둘러 싼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녀 앞에 부자인 그가 나타났고 묘하게 끌렸으며 그의 접근이 싫지 않았다. 단지 그 뿐이 아니라 모르는 남자와의 쾌락도 그녀를 점점 빠져들게 했다. 그는 그쪽으로 그녀를 채워줄만큼 능숙했다.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나이들어 버렸다.

그는 이미 집안에서 20년 전에 결혼이 결정된 여인이 있었다.
아버지의 재산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백수인 남자, 전통 풍습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이런 모든 걸 서로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녀는 언젠가는 베트남을 떠날 것이고 남자는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저 그 남자의 정부로 그남자는 그녀의 물주로, 사랑해서는 안될 전제를 깔고 만나는 것이었다.

 

 

 

학교에는 중국인과 잔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가족들마저 창녀라 몰아세웠다.
가족들에게 돈 때문에 만나는 남자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와 연인이라는 걸 수치스러워서라도 숨겨야하는 그런 존재였다. 단지 돈 때문에...만나는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아버지를 찾아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아무 힘이 없다.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하고 그녀를 원하지만 그에겐 그럴 힘이 없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남자는 사랑때문에 고통스럽다 말해도 그녀의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다.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게 습관이 되었다. 가난할수록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더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널 만나기 전에는 고통이란 걸 몰랐어 ᆢ난 죽은거야ᆢ널 향한 욕망도 없고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더는 원치 않아. 너를 향한 사랑때문에 죽을 것만 같아"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죽은 사람처럼 아편만 피웠다.

 

 

남자가 가엾다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여자, 돈 때문에 자신에게 온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생전 처음으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욕정도 사랑도 사라져 죽어간다고 말할 때는.

그 남자가 오빠의 아편 빚을 갚아주고 여행경비까지 대주었다고 엄마가 그녀에게 말한다. 너그러운 사람같다고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묻는다. "진짜  돈 때문에 만나는 거니?" 그녀는 그때도 그렇다고 대답 했다.

그 남자의 결혼식을 지켜보던 그녀, 그런 그녀를 또 눈에 담는 그 남자.
결혼 후 '정부의 방'에서 한 번 꼭 보자는 그녀의 말에도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남자를 보지 못한 채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배가 출발한다는 뱃고동 소리에 그녀는 슬펐다. 눈물없이 슬펐다.

 

 


부두를 떠나 배가 출항하자 부두 외진 구석에 그가 타고 있는 차가 보였다. 그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뒷좌석에 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염없이 그가 타고 있는 차를 바라봤다.
나는 남자가 차에서 내리지않고 차안에 있다는 게 너무 아펐다. 차라리 감독이 그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덜 아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하게 놔둔 것이다. 형체도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학교 앞에 차를 세워두었듯 부두 외진 곳에 세워두고 그녀가 떠나가는 배를 아프게 담고 있었을 터.

 

 


부두에서 멀어질수록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게 무언지 그녀는 몰랐다. 부둣가 그의 차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니 보이지 않음에도 계속 눈을 떼지 못했다.

인도양을 건너던 어느 날, 배 갑판 위로 들려오는 쇼팽의 왈츠 선율 그 음악에 이끌려 가듯 따라갔고 그가 보고 싶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 채,

아주 서서히 사랑에 젖어 들었고 아주 천천히 그 남자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감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는 그 남자를 가슴 한 곳에 담았던 것이다. 그 남자가 그랬듯이 사랑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원하고 그가 보고 싶어 우는 것이다. 사랑은 이유없이 끌려 들어가는 웜홀처럼 피아노 선율처럼 불가항력의 힘으로 그녀와 그 남자를 이끌었다.
둘은 연인이었다.

 

 

 

그녀는 '내삶은 어렸을 때 이미 늦어버렸다.'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세월이 그녀를 덮어 버렸을 때 회상하며 말한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드는 내 생각도 그랬다.

posted by 해이든 2020. 2. 5. 22:20

1001번가의 스토리보드

<해는 다 당도하여 벌써 이불자리를 펴는데 너는 이제야 당도하면 어쩌자는거야?>
<내가 좀 느리지 않소>

<느린 걸 알고 있으면 좀 일찍 출발했으면 되는 거 아니냐. 너도 참 쯔쯧>  혀를 찼다.

<좀 늦었다고 어찌 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한심한 표정이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자가 있지. 자신이 느리다는 걸 모르는 이와 자신이 느리다는 걸 아는 자, 자신이 느리다는 걸 모르는 자는 남의 속은 태워도 제 속은 편하지, 근데 자신이 느리다는 걸 아는 자는 제 속도 타고 남의 속도 태우지. 바로 너같은 자, 느리다는 걸 알았으면 좀 일찍 출발했으면 지금처럼 땀 흘리지 않았을 걸..>

<그럼 이제 제가 한마디 하죠. 저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죠.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다른 사람이 느리다는 걸 알고도 힘들게 온 사람을 배려하여 수고했다고 하는 이가 있는 반면 남의 약점을 들추어 타박하고 맥 빠지게 하는 이가 있지요. 당신은 앞인 것 같소, 뒤인 것 같소?>

<뭐야? 네가 잘했다는거야?>

<잘잘못을 떠나 당신이 행복하다면 내가 잘못했소, 됐소.>

<진심 빠진 사과 사양하지>

<배려없는 조언도 사양합죠!>

말이란 건 이렇다.

말이 가진 효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자들이 참 많다. 말로 상대를 깍아내리는가하면 말로 상대를 치켜줌에 따라 다른 마음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 말이란 하늘에 닿기도 하고 바닥에 붙기도 한다. 천지차이다. 말 한마디 말끝에 따라 꽃이 피기도 하고 벌처럼 쏘기도 한다.

말은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이다. 그 무기를 잘 사용하지 않으면 독이 될 것이다. 약이나 독을 구분하지 못하는 말버릇은 주위에 빛을 잃게 한다.

또 변명이나 해명을 자주 하고 있다면 당신의 말버릇을 둘러봐야 한다. 좋은 말과 나쁜 말은 누구나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버릇이 되어버렸다면 무의식적으로 행해져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수고했다 한마디면 꽃 피웠을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혀를 차는 모습에 반감이 생겨 서로를 벌처럼 쏘는 꼴이 되었다.

아무리 좋은 충고나 조언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다. 말을 함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진심을 전달하는 도구가 얼마나 잘 정제되어 있느냐에 따라 마음이 움직인다.

 

 

posted by 해이든 2020. 2. 5. 13:48


이 영화는 영국 역사적 사건보다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사생활과 컴플렉스를 다룬 것이라 해야겠다.
영국 황실의 화려한 앞면과는 다르게 뒷면의 그림자 안에 갇힌 왕세자 에드워드와 엘버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유분방한 형 에드워드(가이 피어스)는 왕실의 규율에 갇히는 걸 거부하던 위인이다. 유부녀 심슨 부인과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왕실의 위엄을 실추시켰다. 그에 반면 엘버트(콜린 퍼스)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말더듬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집안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국민과 대내외적으로 소통해야 했던 왕실로는 개인의 약점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었다. 여러 방법으로 언어치료를 하고자 노력했으나 마이크 앞에 서면 소용이 없었다.

조지 5세가 서거하자 형 애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갇혀 지내는 것도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도 에드워드 8세와는 맞지 않았던 걸까. 두 번이나 이혼하고 또 이혼 준비 중이던 심슨 부인과 결혼을 하겠다 나선다. 온 유럽이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전쟁이 발발할 위기에 있음에도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유부녀와의 스캔들도 모자라 결혼까지 하려하자 내각과 교회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되고 퇴위를 거론하게 된다. 결국 에드워드는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하고 왕위를 엘버트에게 넘긴다.

엘버트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젊은 형이 사랑을 찾아감으로 자신에게 씌워진 왕의 자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헬레나 본햄 카터) 역시 왕실의 가족으로 왕의 아내로 살기 싫어 두 번이나 청혼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운명이 그들을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다.

말더듬이 왕 조지 6세는 말더듬는 언어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시)를 만난다. 라이오넬 로그는 호주 출신으로 교육도 학위도 없는 언어치료사였다. 물론 처음에는 몰랐다. 나중에 대관식 준비하면서 그가 학위도 교육도 받은 적 없는 공인되지 않은 언어치료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라이오넬 로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제1 차 세계대전 전쟁 후유증으로 말을 더듬는 병사들을 여러 치료한 경험으로 언어치료에 자신감을 보였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며 많은 이들을 치료했다고.
그 경험으로 학위는 없지만 자신 있다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이다. 처음 라이오넬 로그를 찾아간 날 치료는 안하고 엘버트의 사생활을 물었다. 이에 엘버트는 화를 냈었다. 사생활 빼고 치료만 하라고.

 

엘버트는 선천적으로 말더듬이로 태어난 게 아니다. 어떤 외부적 요인이 그의 말문을 더듬게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인 문제만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게 로그의 이론이었다. 말을 더듬게 하는 내부적 요소를 밖으로 꺼내 던져버려야 했다.

선왕 조지 5세는 엘버트에게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였다. 형 에드워드와는 달리 아버지 맘에 드는 아들도 아니었고, 말을 뱉으라 윽박지르던 아버지와 버벅 버티라고 놀리던 형 사이에서 그는 심적 무게감과 열등감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왼손잡이였던 엘버트는 아버지에게 혼나며 오른 손으로 바꾸었고 안짱다리로 인해 철제 부목을 대고 지내야했다. 유모의 괴롭힘으로 위장병을 앓고 있는 등 그의 성장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이제는 원치 않은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으로서 연설도 해야 한다. 온 유럽이 히틀러의 야욕으로 먹힐 판이었다.
평화를 지향
하는 그는 전쟁을 막아보고자 했으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런 막중한 전시상황에서 첫 전시연설을 생방송으로 해야하는 조지 6세 .
국민 모두에게 왕으로서 마음을 담아 이 상황을 헤쳐나가자 해야하는데 마이크 앞에 서면 그는 더듬는다. 과연 멋지게 해낼까? 조지 6세는 마이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통해 리더로서의 자질 중  '스피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리더의 자질로 '스피치'는 갖추어야 할 덕목처럼 느껴졌다. 스피치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계적 리더 중 모두가 그 자질을 갖추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이도 있고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인물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고 그가 한 말 한디가 가지는 파급력도 크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SNS 세상에서는 더.

영화에서 금수저 태어난 조지 6세와 흙수저였던 히틀러가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니 단순히 동시대를 살았다는 걸 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한 나라의 전장의 리더로서 존재했다는 것.

말로 전쟁을 일으킨 선동가 히틀러와  말로 고생한 더듬이 왕 조지 6세....수많은 관중 앞에서 마치 웅변을 하는 듯한 히틀러와 발음 하나 하나 입술 근육을 다 사용해 내뱉는 콜린퍼스가 연기한 조지 6세...한 사람은 말더듬는 컴플렉스를 안고 오직 마이크가 설치된 방안에서 혼자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손에 긴장감을 주는 반면 세기의 선동가인 독일의 히틀러는 말만 번지르하게 온 유럽을 핏빛 바다로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며 세기의 스캔들의 주인공인 심슨 부인과 에드워드의 사랑도 대단하다 느껴서인지 그들의 삶에도 관심이 쏠린다.

 

posted by 해이든 2020. 2. 2. 23:26



어느 날 멋진 차를 타고 행복한 표정을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그 모습이 근사하고 행복해 보였던  가드너는 그에게  두 가지 물음표를 던졌다.
"무슨 일 해요. 어떻게 성공했어요?"
"주식 중개인이에요."
"대학 나와야 하죠?"
"아뇨. 숫자에 밝고 사람과 잘 어울리면 돼요."
말을 마친 그가 계단을 올라 빌딩 속으로 들어간다.
그 주위로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보였다. 밝은 미소와 햇빛이 주위에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런 표정으로 살 수 있을까?
근사한 남자가 들어간 높은 빌딩을 올려다 보며 기회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다. 행복을 찾아서ᆢ

크리스 가드너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나름 수학을 잘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증권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낸다. 60대 1이란 경쟁률을 뚫기 위해 회사 입구에서 자주 눈도장을 찍으며 기회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고 어렵게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한다. 여기까지가 다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에게 기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어떤 것부터 들을래?" 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먼저 선택하는지?  나는 나쁜 소식부터 듣는다. 다음에 들을 좋은 소식이 나쁜 감정을 조금 덜어줄 거란 기대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소식부터 전했다. 그가 증권회사 인턴생활할 기회 만들어냈다고.

그가 기뻤을까? 당연히 기뻐겠죠. 면접을 보기까지 그가 공들인 노력에 비하면. 그런데 마냥 기쁘지가 않다. 생활고에 지친 아내가 그를 떠났다. 거기다 밀린 집세로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상황이고 미납된 세금 독촉과 아들의 유치원비 등 그는 지금 살기 위해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6개월간의 인턴생활이 월급 한 푼 없다는 것이다. 또한 6개월의 견습이 끝나면 20명의 인턴 중에 단 1명만 정직원이 된다. 그 한 명이 자신이 되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또 6개월간의 경력으로 다른 곳에 취직하는 것도 어렵다는 게 현실이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를 절박하게 몰고 갔다. 아내가 떠나고 엄마를 잃은 아들과 살아내야 하는 그로서는.

또 한 편으로는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걸 그가 모를리 없다. 고민 끝에 그는 기회를 잡기로 한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어린 아들과 노숙생활을 하면서도 6개월의 인턴생활을 성실히 해나간다. 그의 삶은 바닥이고 절망적이지만  아들의 행복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집은 없지만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기회를 잡아야 했고 어린 아들을 위해서라도 절박했다. 6개월의 힘든 과정을 견디고, 드디어 단 한 명만이 정직원이 되는 기회를 가져온다. 그 짧은 순간의 기쁨이 그에게 행복이었다. 

 

한 남자의 성공적인 스토리보다 한 아들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부성애에 눈물이 나는 영화였다.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가드너가 자신의 아들만은 아버지 없는 삶을 살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도 아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아내에게 아들만은 넘겨주지 않았다.  낮에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밤에는 아들을 재우기 위해 교회 쉼터 긴 줄을 서야했고 아들이 잔 후 합격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이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 가슴 먹먹하게 했던 장면이 두 군데가 있다. 첫째는 지하철 화장실 안에서 아들을 재우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이 장면에서  눈물 흘렸을 것이다. 가드너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합격통보를 받고 회사를 나와 인파속에서 기쁨의 순간을 표현했던 장면, 단숨에 아들의 유치원을 찾아가 아들을 꼭 끌어안던 크리스 가드너의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장면이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물도 마시지 않고 고객에게 전화를 돌리던 그가 정직원이 되었다는 걸 전해 들을 때  속에서 올라오는 많은 감정을 억누르는 듯, 눈물을 참는 듯 하얀 눈동자가 뻘개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모든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을 각색해서 만들어졌다. 노숙자에서 최고 경영자가 된 투자회사 가드너 리치의 설립자 '크리스 가드너'의 인생을  윌 스미스가 맡아 연기한 것이다. 영화 맨 마지막 부분에 윌 스미스가 아들과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스쳐 지나간 남자가 실제 크리스 가드너이다. 깜짝 출연했다는 사실.


영화에서 크리스 가드너의 아들 '크리스토퍼'를 연기했던 배우는 윌 스미스의 친 아들 제이든 스미스다. 
윌 스미스와 그의 아들 제이든 스미스가 동반 출연한 <행복을 찾아서>는 2006년에 상영된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지금에야 봤다. 세상에는 모성애를 다룬 영화가 많고 부성애를 다룬 영화도 많다.
이 영화에서 다룬 부성애는 좀 남다르다. 보면 안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은 남자,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던 그 남자는 행복을 찾아서, 무엇보다 아들을 위해서 매 순간을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해냈다. 부모를 강하게 하는 존재...그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posted by 해이든 2020. 1. 31. 16:47


지금부터 등장할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우리와 다르다는 건 아니다. 가족은 남들이 알 수 없는 강한 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의 관계는 밖에서 보는 풍경과 안에서 보는 풍경이 다르다. 그 체감 또한 다르다.

 

 

 

길버트(조니뎁)는 가장이다.
엄마 같은 누나 에이미가 살림을 맡고, 길버트는 식비를 대려고 시간 외 근무를 할 뿐 아니라 지적장애인 18살의 남동생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감당 해야했다. 일터를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고 하루종일 쏘다니느라 엉망인 어니의 목욕도 매일같이 시켜야했다. 어니에게 길버트는 따뜻한 형이다. 아빠 같은 형이다. 길버트는 아빠의 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10살에 죽을거라던 어니는 18살이 되었고 걸핏하면 높은 가스탱크에 올라 경찰차가 출동했다.
15살의 사춘기 소녀 여동생 엘렌도 있다. 형은 이미 오래 전 집을 나갔다.

길버트가 일하는 램슨 식료품점은 대형 푸드랜드로 인해 파리만 날리고 아버지가 지은 집은 낡고 낡아 손 볼 곳이 너무 많았다. 어머니가 앉아 있는 거실 소파 아래는 어머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낡아 아슬아슬했다. 임시방편으로 튼튼한 합판을 대놓았다.
17년 전 아버지가 한마디 없이 목을 매 자살을 했고 그 후 어머니는 충격으로 먹을 것을 달고 살았다.
그 후유증으로 초고도 비만이다. 7년간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고래 아줌마'라 부르며 창문으로 구경한다. 구경거리, 놀림거리의 대상이다.
길버트는 자신의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구경하러 온 아이를 안아 자신의 엄마를 보여주기도 하고 엄마를 '뭍에 올라온 고래'라 표현했다. 붙박이장처럼 거실 소파에서 자고 먹으며 자신의 삶도 자식도 몸무게도 감당 못한 채 살아 있다. 자식들이 생계와 어니를 감당하고 사는 데도 말이다. 한 때는 미인에 쾌활했던 그녀가 아버지가 사라진 후 그 충격으로 서서히 망가져 간 것이다.

 

 

 길버트의 기억 속 아버지는 속마음을 알 수 없고 표현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의 어떤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서도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길버트는 어른들의 무너짐으로 많은 것을 떠안았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가족이란 가까이 있고 싶은 반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가 하면. 예속 되고 싶은가 하면 독립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미움과 사랑이 동시에 왔다갔다 한다. 반대 감정이 양립하는 것이다. 관계가 주는 중압감이 크면 클수록 , 가족으로 인해 힘들거나 심적 부담이 크면 클수록 더 자주 ㅡ
어니가 살아있었으면 하다가 반면 그 반대이기도 하는 길버트의 마음이 그렇다. 눈을 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어니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이 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엄마에 대한 마음 역시 그럴 것이다. 사랑과 미움, 부끄러운 반면 불쌍하기도 한.
에이미나 길버트의 표정에 지친 그늘이 질 법도 한데 삶이 버겁기도 할텐데 에이미,길버트, 엘렌 어느 누구 하나 엄마에게 불평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고 엄마와 어니를 돌봤다. 정말 모두 착하다.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무게는 다르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다. 내리사랑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 같지만 그 반대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게가 있다.

그가 사는 작은 마을 엔도라를 벗어난 본 적이 없는 길버트, 어쩌면 가족한테 꽁꽁 묶여 자신을 위해 어떤 자유도 어떤 변화도 시도조차 해 볼 생각도 못했다. 매일 답답하고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고 변화도 없는 마을과 길버트의 일상이 닮아 있다.

 

 

 

그런 마을 엔도라에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하던 베키(줄리엣 루이스)가 자동차 고장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된다. 베키는 길버트와는 다른 면을 가졌다. 엔도라를 벗어난 적이 없는 길버트와는 달리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자유로운 삶을 산다. 베키는 어니를 대하는 따뜻한 길버트에게 호감을 느낀다. 길버트도 그렇다. 하지만 길버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베키가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다가간다.

길버트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베키가 묻는다.
엘렌도 얼릉 컸으면 좋겠고, 어니도 멀쩡해줬으면 좋겠고, 어머니도 에어로빅 수업을 들었으면 하고, 새집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족에게 삶의 코드가 맞추어지듯 원하는 게 다 이런 것이다. 너 자신을 위한 것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을 감당하고 살아야 길버트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로 들렸다. 달리 말하면 자기가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고 싶은 갈망일 줄도. 엘렌이 얼릉 커 독립하고 어니가 멀쩡해져 돌봄이 필요없게 되고 엄마가 바깥 세상과 어울려야 부담없이 자신을 꿈꿀텐데. 가족이란 게 그렇다. 가족의 고통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가 없다. 때론 외면할수록 가슴을 더 옥죄여 온다. 죄책감과 사랑은 다르지 않다. 가까이 있는 감정이다.

 

18살 생일 파티를 위해 더러운 어니를 씻겨야 했던 길버트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어니를 심하게 때리고 만다. 사고치는 어니로 힘들었던 그가 폭발한 것이다. 길버트는 그 길로 차를 몰고 집을 나가 버린다. 엔도라를 벗어나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멀리 못가 다시 어니를 찾아 돌아온다. 그는 가족이 밟혀 떠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심성을 지녔다. 착한 아들, 착한 형이다.
엄마는 길버트가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엄마 역시 자신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놀림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괴물 보듯 쳐다보는 이웃의 시선에 상처받은 엄마의 표정에 길버트는 어떤 말도 못한다.

차를 고친 베키도 엔도라를 떠나고 18살 어니의 생일에 엄마는 갑자기 계단을 힘겹게 올라 2층 침대에 눕는다.그리고 아들 어니가 보고 싶다던 엄마는 어니가 2층에 올라왔을 때 이미 죽음으로 사라진 후다.
아들에게 사라지지 말라더니.

 

 

엄마의 죽음도 슬프지만 엄마의 시신을 옮기려면 크레인을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사람들이 몰려들거고 엄마는 구경거리가 될거다. 길버트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엄마를 더 이상 놀림거리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다.

엄마가 움직일 때마다 거실바닥이 흔들렸다. 엄마의 무게를 감당 못한 건 자식이 아닌 엄마 자신과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아버지가 목을 맨 집, 여기저기 낡은 집, 붙박이처럼 엄마가 앉아 있던 집, 엄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집과 함께 침대에 고운 얼굴로 잠든 엄마를 놀릿감이 되지않게 이별식을 치른다.

집을 불태운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타는 집을 한없이 바라볼 뿐이다. 아, 삶이 무어라 말인가. 가슴이 아프다. 가족 이야기만 하면 가슴의 추가 흔들린다.
마음이 이쪽 끝에 가 있다가도 저쪽 끝에 가 매달린다.
가족의 구성원은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이다. 가족은 사랑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연으로 엮여 있다. 책임이나 사랑의 크기를 수치로 드러낼 수 없고 한쪽 끝에만 있을 수 없는 감정과 무게다.

 

 

 

일단은 작품 속에서 나와 배우들 이야기를 좀 하자면 어니 역을 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지적 장애를 가진 연기실력이 26년 전에 이 정도라면 그냥 타고난 연기꾼이다. 그런데 상복이 안 따라준 거네. 잘 모르는 사람은 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서너 번 받은 줄 안다. 하지만 후보로만 오르고 상을 거머쥐지 못했다. 오죽하면 오스카가 버린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2015년에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길버트그레이프, 이 남자가 바로 조니 뎁이다. 와우?
캐리비안 해적의 잭 스패로우, 그 남자다.
젊을 때 무지 꽃미남이었네.
이런 모습을 보니 세월이 야속하네.

 

posted by 해이든 2020. 1. 29. 23:02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과 그의 대표 간판 배우라 불리는 송강호의 만남이 또 이루어 낸 영화다.
이미 우리에게 봉준호라는 이름은 그의 작품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에서 인정받은 감독이다.
<괴물>, <마더>,<살인의 추억> 등 그의 영화를 거의 다 관람했다.
그러니 기대감은 이미 깔려있는데다 황금종려상까지 거머쥐었다고 하니 더더더, 기대되는 영화일 수밖에.
영화를 보고 나면 여러 갈래 의견들로 나뉘어진다. 감동적인 면이 부각되거나 스토리적 해석의 다양성, 또는 배우라는 캐릭터의 능력치, 또는 연출적인 요소 같은 것이다.


기생충이 가진 영화 제목이 강해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기생충이란 의미를 상황상황마다 대입해 보기도 했다.
핸드폰 요금도 못내고 와이파이도 끊겨 이웃의 와이파이를 잡아보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당기는 아들 기우와 딸 기정의 모습에서도 기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주인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얄금얄금 내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생이라 한다면 이 상황에서 숙주는 이웃이 되는건가.

 

 


또 기생과는 다른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공생!
사람은 서로간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집안 일을 전혀 못하는 교연을 대신해 가정부 문광이나 충숙의 손을 빌리고 교연은 그에 대한 값을 치른다. 문광이나 충숙은 그 돈으로 생활유지를 하는 것처럼. 모두가 상리상생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회사도 마찬가치다.
부잣집 박 사장네 가족과 기택의 가족도 그런 공생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거짓으로 위조한 증명서를 들고 가는 그 순간부터 공생의 의미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느낌이다.
거기다 여동생까지 위조된 학력과 문서로 가족인 걸 숨기고 추천하면서 사기에 합류시키고 가정부 문광과 운전기사를 부당한 방법으로 해고 시켜 부모를 그 자리에 취직시키는 행태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박사장네 가족을 숙주라 하고 기택의 가족을 기생이라 한다면 박사장네에게 큰 폐를 끼치는 게 아니면 별 문제가 있겠냐 싶다는 맘도 살짝 들지만 엄연한 불법이다. 더 큰 문제는 숙주가 아니라 기생 관계에 있는 이들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다.
기택 가족이 문광과 서로의 약점을 쥐고 다툴 것이 아니라 서로 살기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결국 기택 가족과 문광이 아웅다웅 붕괴 되어간다.

서로의 밥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생하는 법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누구보다 서로의 처지를 잘 알 수 있었음에도 그들은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다.

 

문광의 남편 근세는 확실한 기생이 맞다. 집주인도 모르는 지하공간에 숨어 박사장의 삶에 피해를 주었다 할 수 있다. 문광 역시 이 지하공간을 집주인에게 비밀로 하고 남편을 기거하게 했다. 박사장 입장에서 보면 문광의 남편 근세는 엄연한 기생충이다.그것도 아들을 공포에 떨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집주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아들이 아프다고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 출연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뭐 송강호는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을 것 같으니 패스.


천진난만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부잣집 사모인 연교 , 조여정의 연기는 그녀에게 너무 딱 맞는 옷 같았다.
캐릭터를 잘 살린건지, 아니면 감독이 조여정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인지 ..뭐 어떤 것이라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솔직히 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 조여정이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훌륭한 선택인 것 같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가 있었기에 기택의 가족이 이 집에 침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의 캐릭터 역시 찰떡 남매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다.

 

기택(송강호)를 비롯하여 아내 충숙, 아들 기우, 딸 기정 네 사람은 변변한 직장도 없이 반지하방에서 살고 있는 온 가족이 백수인 집안이다.
아들 기우(최우석)가 박사장네 딸의 과외 면접을 보기위해 이 집을 방문을 하면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기우는 온 가족을 이 집에 입성시킨다.
자신들의 한 가족인 것을 비밀에 붙히고 여동생을 박사장의 아들 미술 선생으로, 기정은 기존에 있던 운전기사를 모함하여 내쫓고 아버지를 박사장의 운전기사로 취직시키고, 가정부 문광마저 내몰고 어머니를 그 자리에 앉힌다.
박사장 집안에 과외선생,가정부, 운전기사로 네 명이 다 취직한 셈이다.

어느 날 박사장네 가족이 캠핑을 떠나고 기택 가족은 박사장네 거실에서 마치 자신의 집인냥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 때 이 집 가정부로 있던 여자 문광, 하루 아침에 쫓겨난 그녀가 박사장네 집에 찾아온다. 자신들이 한 가족임을 들켜서는 안되는 상황에 문광의 출연이 반가울 리 없는 기택의 가족.
그런데 그녀의 출현이 그만 이 집의 숨겨진 지하공간을 드러내게 한다. 박 사장도 모르는 공간에서 가정부의 남편 근세가 숨어 살고 있었다. 기택이 박사장을 속이고 온 가족이 이 집안에 취직한 사실과 박사장 모르는 지하공간에 그녀의 남편이 빚쟁이를 피해 몇 년간 기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대립하다 문제가 커지게 된다.


좀 독특한 소재로 호러인지 공포인지 약간 모호한 스토리다. 감독은 빛을 통해 빈부격차를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박사장네 집과 기택의 반지하방, 그리고 박사장네 지하공간에 빛이 다르다.
부잣집과 가난한 집의 만남을 통해 계층에 대한 갈등이 아닌 빈부격차로 인해 생기는 냄새, 그게 이 영화속에서 사건을 유발시킨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에 대한 도발을 냄새로 드러낸다.
그 냄새는 가난의 냄새로 풀이된다. 가난한 자에게 가난은 치부일 수 있다. 거기다 기택은 퀴퀴한 반지하에서 살고 있다.

그 냄새를 박사장이 아내인 연교에게 말하고 있다.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박사장도 기택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예의가 아니니까. 기택의 가족에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하는 박사장 아들의 후각도 결국 반지하방에 같이 사는 그들의 냄새가 같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사람에게 나는 냄새가 있다. 대놓고 무례하게 냄새가 난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상당히 불쾌하고 예의가 없는 사람으로 비추어지기도 하고 서로 언짢아질 수 있는 문제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 차원의 문제나 인격의 문제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제3자에게 말은 해도 당사자에게는 못하는 것이다. 박사장이 아내에게 기택한테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것을 아들 기우, 딸 기정과 함께 몰래 엿듣게 되었다. 기택은 자신에게 냄새가 난다는 그 말로 수치와 모멸감을 가졌을 것이다. 거기다 연교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유리창문을 열 때 기택의 표정을 보면 눈치 챌 수 있다.

 

밤새 내린 폭우로 반지하방이지만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물에 잠겼다. 누군가의 입에서는 비 때문에 미세먼지가 사라져서 좋겠다 하는데 누군가는 생활터전이 침식된 것이다.

빛으로, 비로 삶의 온도가 다르고 색이 다르다.
박사장은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각자의 선이 그어져 있는 듯, 선을 넘는 호의도, 관심도, 배려도 다 싫다는 것이다. 그건 가난한 기택에게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를 냄새로 설정하고 배우 송강호를 통해 열렬히 표현하게 했다. 자신에게 나는 냄새가 단순히 가난에서 오는 박탈감이 아니라 인간적 모멸감을 받아 우발적 사고를 저질렀을 것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모두가.
영화'기생충'의 상승곡선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황금종려상도 우리 영화에 처음 있는 일인데 골든글로브 외국인 영화상에 이어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에 기뻤다. 봉준호 감독이 정말 사고를 제대로 치셨네. 더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이만.

posted by 해이든 2019. 10. 24. 21:16

2012 재난 영화

지질학자 헴슬리 박사는 지구 중심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고, 대륙판의 이동으로 곧 지구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미국 대통령 토머스 윌슨에게 보고한다.

이에 윌슨은 비밀리에 G8 세계 각국 정상 회의를 열어 인류 생존에 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댐 건설로 위장해 40만 명이 탑승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가 중국에 건설하게 된다.

정부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국민에게 어떤 발표도, 예고도 하지 않는다. 국민이 알면 대혼란이 야기될 것이 뻔했다. 그러면 새로운 인류와 문명을 계획하고 생존전략을 세우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 멸망이란 대재앙은 국가기밀로 봉합됐다. 국가는 국민이 알아야 할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정부가 알고 있었음에도, 과학자들이 미리 경고했음에도 알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만의 생존을 마련했고 극비로 소수만을 살릴 탈출 계획을 세웠다.

국민 대다수는 아무것도 모른다. 죽으면서도 몰랐을 것이다. 40만 명을 태울 '노아의 방주'가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도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도 모른 채 사라질 터였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우리가 알아야 권리를 얼마나 강탈당하고 사는 것일까. 세상에는 나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을까?

국가는 한 사람을 더 살리는 일에 몰두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 살 수 있는 기회마저 소수의 몫으로 정해져 있다.

몇십 명을 더 살릴 수 있음에도 살릴 수 있는 자들이 살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 알려야 할 시간에도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만을 설계하고 자신의 입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지구의 멸망도 멸망이지만 국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국민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씁쓸하다는 기분이 든다.  한 인간으로서 최후를 위한 기본적인 것까지 부여되지 않음에, 죽음의 순간까지도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는 기회마저  권력을 가진자, 부를 지닌 자등 소수에만 제공된다는 사실에, 그 불평등이 지구가 망하는 순간에도 살아있다는 것이.

지진과 쓰나미로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노아의 방주'의 탑승 표를 산 부자들과 정보를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 빼고는 지구의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야 했다.

설사 정보를 알고 대처했더라도 돈이 없으면 탑승할 수 없는 '노아의 방주',

그것도 모자라 지구가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마저 빼앗겼다. 끝까지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설사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내 경제력으로는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없다. 그러면 최소한 미국의 대통령처럼 작별 인사 정도 나눌 기회를 줄 지도자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미국 대통령은 '노아의 방주'에 타는 걸 거부하고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지금 일어나는 재앙이 지구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발표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게 양심 한 자락을 내밀고 국민과 함께 그 재앙을 받아들였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국민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거나 용서를 구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일에 그 마지막 순간을 썼다.

모든 걸 내려놓고 마지막 자신이 몸담았던 자연 앞에서 숙연하게 맞이하기도 했다.

가슴 찢어주는 순간에도 가져갈 고마움을 챙겼다. 마지막 순간이기에 진심을 내놓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영화를 보면서 인류멸망이 공상이나 영화 속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재앙일지도.

어떻게든 살려는 자, 죽음을 받아들이며 고요히 눈을 감는 자, 여러 가지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인간의 본성과 기회의 불평등과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봤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가족 간의 따뜻한 연결고리를 느끼게도 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네가 있어 행복했다, 미안하다." 마지막 순간에 전하고 갈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고 본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작별 인사를 적어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지구가 멸망한다면 대혼란을 잠식시키기 위해 그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가축이 탈 공간은 있어도 내가 노아의 방주에 탈 기회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작별의 순간이나마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전화로 딸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가 할 때도 대통령이기보다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몰입했다. 헴슬리 박사의 아버지가 아들 헴슬리에게 전하는 작별 인사가 또 그렇게 슬프면서도 따뜻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다 내려놓고 편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따뜻한 마음을 다 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 마음의 준비도 없이 죽는 건 너무 허망하고 아픈 일이다. 최소한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필요하다. 윌슨 대통령 같은 지도자, 정치인이 필요한 것이다.

최소한 마지막 가는 순간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사랑을 전달할 수 있게

 

posted by 해이든 2019. 10. 1. 20:59

감독 린 램지 

케빈에 대하여 

이 영화는 엄마로 사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 비추어 보게 만들고,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 있는 고민을 던져 주고 있다.

자꾸 영화 속 캐릭터들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케빈의 감정을, 엄마 에바의 감정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 사람의 감정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케빈의 입장이 되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엄마인 에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한다.

또 나라면, 하고 대입도 해본다. 영화 속 미스터리 한 부분에 대해 왜 그랬을까? 를 곱씹게 만든다.

왜 케빈은 아버지를 죽였을까? 케빈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길래? 엄마에 대한 케빈의 진짜 마음이 무얼까? 저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을 수는 있을까?

인생에는 엄마와의 관계만 있는 게 아닌데 왜 케빈은 엄마에게 저렇게까지 집착하며 분노하는 것일까?

왜 아무 상관도 없는 학생들을 죽이면서까지 엄마에게 잔인하게 굴까?

엄마에 대한 분노나 증오였다면 그냥 엄마를 죽이고 말 것이지, 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여야 했을까?

살인을 통해 엄마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엄마는 케빈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무얼 보여주고 무얼 표출한 것일까?

한참 생각해보면 케빈은 엄마를 미워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케빈의 세상에는 엄마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증오심이 지배적인 것 같다. 확인하고 싶은 심리와 원망이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 듯한.

 

 

자유로운 여행가로 살던 에바가 원치 않은 임신으로 엄마가 되고 육아로 인해 힘들어했다. 마치 아이는 에바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케빈은 어린애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엄마 에바를 괴롭혔다. 아빠와 엄마에게 대하는 어린 케빈의 이중적인 모습을 통해 에바가 가졌을 감정에 가까이 가니 엄마가 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사실, 교묘한 방법으로 에바를 괴롭히는 어린 케빈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어린 케빈의 증오가 엄마에게 보내는 것이라서.

보통의 아이들은 사랑을 확인하고 인정받고 싶어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한 행동을 하는데 케빈은 끊임없이 엄마를 괴롭히고 조소하는 행동만을 자행했다.

케빈과 에바는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엇나갔다. 에바는 엄마로서, 케빈은 자식으로서 서로를 제대로 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서툴렀다.

그렇게 서서히 쌓아 올린 불신과 증오가 그런 끔찍한 불행의 예고편이라는 걸 몰랐다. 아버지는 에바와 케빈 사이에서 훌륭한 조율자가 되지 못했고 계속 방관자처럼 존재했다.

케빈은 분명 엄마에 대한 갈증이 깊은 아이였다. 가족으로 만들어졌지만, 가족으로 담아지지는 못했다.

어려서도 커서도 그들의 틈은 메워지지 않았다. 서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케빈이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 엄마는 타고나야 하는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케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또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나는 자식이기도 하고, 또 엄마이기도 하다.

과연 엄마는 자식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일까?

엄마도 사람이다. 엄마라고 그 모든 행동을 감수할 만큼의 아량을 가진 신이 아니다.

엄마는 본능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자리이다. 여러 사람의 응원과 도움으로 말이다.

케빈도 성장해 가지만 엄마인 에바도 엄마로서 성장하는 자리다.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준비되고 완벽한 엄마는 없다.

엄마이기에 그 모든 걸 감내하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요구다.

엄마가 된 그 순간부터 육아는 마치 엄마 혼자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게 만들어 놨다. 그러나 육아는 나누어 가져야 할 아주 힘든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다.

사랑으로만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환상 따위는 엄마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환상이다.

남편을 비롯한 사회는 여자에게 엄마라는 족쇄를 채웠고 희생을 숭고하게 미화시켜 놨다.

엄마들은 감정을 많이 짓누르면서 절제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사랑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감당해 내지만, 육아로 인해 자유를 가장 많이 억압당하는 존재임은 확실하다.

엄마로 산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그 무게감과 두려움을 모든 여자가 다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가슴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고민에 대해 남자들은, 사회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무조건 사랑스럽다면 문제 될 게 없겠지. 아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포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

오랜 세월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서 모성은 여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본성처럼 길들어 왔다.

엄마라면 ~~ 엄마라면 당연히 제 자식을 위해 자신을 놓아버릴 만큼 희생적이어야 하고 자식은 다 소중하다고 자연스럽게 심어줬다.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아도, 원치 않은 임신이고 출산이라도 엄마니까 양육은 물론이고 아이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어야 할 건 엄마의 몫이라고 말이다.

엄마로 살기 위해 자신을 얼마만큼 내려놓을 수 있는지 끝없이 자극하고 위협받아 본 적이 있다면 에바만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공사 현장의 소음으로 덮어버릴 만큼 육아를 버거워해 본 적이 있다면 에바를 모성애도 없는 여자로 치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한 행동에 대한 세상의 비난과 마을 사람들의 공격을 다 받아들이고 살아낸다.

감옥은 케빈이 갔지만, 감옥 밖 현실에서 죗값을 치르는 건 엄마 에바였다. 부당하다 억울하다 생각지 않고 누구보다 살 떨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엄마에게 자식이 때로는 견뎌내야 할 대상으로, 때로는 살아낼 이유로, 때로는 존재 이유로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자식이 주는 게 다 행복이지 않듯이, 부모가 주는 것이 다 사랑이지 않듯이

 

posted by 해이든 2019. 8. 12. 13:54

감독 켄 로치

나, 다니엘 블레이크

 

목수로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그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사 소견에 따라 질병 수당을 신청하고 심사를 받는다. 하지만 정부가 고용한 파견업체 의료전문가는 심장 말고는 다 멀쩡한 댄에게 심장과는 관계없는 전화 버튼은 누를 수 있느냐, 손발을 쓰는지 질문을 묻는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말도 안되는 행정 매뉴얼만을 따지며 팔, 다리 멀쩡한 것만 보고 취업 가능하다 판단하는지, 눈으로만 보고 어떻게 댄의 담당의사보다 더 잘 안다는 걸까.

어떻게 질병 수당을 신청함에 있어 의사 의견소견서가 첨부되지 않고,

이런 기본도 없는, 융통성도 없는 의료전문가의 견해만으로 심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댄은 심사관으로부터 노동 가능상태로 질병수당 수령 자격이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댄은 항고하려 하지만 심사관이 재심사한 후 다시 기각돼야 항고할 수 있다 한다.

수입도, 연금도 없고, 질병수당 심사도 탈락해 수당도 못 받는 상황에 놓인 댄은 항고까지의 기간이 얼마나 걸리지 기한이 없다.

구직 수당 하려고 관공서를 찾아간 댄에게 직원은 인터넷 신청이라고 말한다.

컴퓨터 근처도 안 가봐 못 할 것 같다고 하니 직원은 "디지털 시대잖아요"라 말한다.

그는 "난 연필 시대 사람이오. 그런 사람들 배려는 안 하나 "말하지만 모든 게 인터넷에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댄이 인터넷을 할 줄 아든 모르든 그건 댄의 사정이지 우리가 알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가 인터넷을 배워하느니 차라리 집을 한 채 지으라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직원은 그냥 무시할 뿐이다. 모르쇠다.

빠른 변화 속에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그들에게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일러주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존중도 없고, 어르신에 대한 기본예절도 없는 냉랭한 태도뿐이었다.

 

 

무조건 원칙만을 따지며 모르면 관두라는 식으로 밀어버리는 태세다. 구시대와 노동계층과 하층민, 노약자를 위한다는 국가의 복지가 과연 누구를 배려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처음 인터넷을 이용하여 구직수당 신청하는 댄은 계속 오류 나고, 멈추고, 또 오류 나고, 그러다 이용시간이 끝나 결국 신청하지 못한다.

다시 관공서에 가서 앤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 등록은 하려 하자, 관공서 상사는 잘못된 선례를 남긴다고 앤이 댄을 도와주지 못하게 한다.

인터넷이 필수라고 하면서 못하는 어르신을 위한 시스템은 준비되어있지 않으면서 도와주지도 못하게 하는 건 무어라 말인가.

마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들 듯 지금 댄 역시 인터넷 사용법을 몰라 완전 바보가 된 듯하다.

끝내 오류로 인해 인터넷 신청을 못하고 돌아온다.

"진짜 못해 먹겠네."는 말이 절로 나왔고 인터넷 신청 때문에 며칠을 고생하다 옆집 총각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으로 구직 등록을 마친다.

옆집 총각이 질병 수당 항고 신청서 양식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인쇄해 준다.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게 뽑아 줄 수도 있는 걸 기관에서 안 해주었다는 게 어이없었다.

"앞으로도 아저씨를 물 먹일걸요. 바닥 치게 하는 게 놈들 작전이죠. 우연이라는 건 없어요. 수당 포기자도 많아요"

 

"난 포기 안해 개처럼 물고 늘어져 주지 "

국가나 정부가 내세우는 복지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거였다. 스스로 보조금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국가의 복지전략이라 말인가. 그래서 공무원들을 매뉴얼대로 원칙만 고수하게 만드는 것인가.

 

 

관공서는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구직활동을 하고 증거도 모으라고 한다.

그가 발로 뛰면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직접 이력서를 내고 다녔다. 하지만 직원은 증명해보라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이런 방법이 증거도 못된다는 걸 그가 구직활동을 했는지 직원이 무슨 수로 아냐고 말이다.

수령증이나 핸드폰 사진 없냐고.

이력서도 인터넷으로 작성하고 등록해야 하고

구직활동도 구직사이트 같은 곳에서 해야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아니면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고 보조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심장병 때문에 취직을 해서 일할 것도 아닌데 보조금을 받기 위해 구직활동이란 헛짓을 하느라 여러 사람의 시간을 잡아먹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결국 댄은 제재 대상이라고 보조금이 끊기게 된다는 말만을 듣는다. 그는 그들이 만들어놓는 원칙과 통하지 않는 의사소통의 벽 앞에서 슬슬 한계를 느낀다.

그는 가스 전기요금 독촉에 주택 보조금도 부족한 상태다. 낡은 가구를 팔아 조금의 돈을 마련한다.

 

댄은 구직 수당을 받기 위한 행정절차가 어찌나 복잡한지 계속 제자리걸음에 미칠 노릇이었다.

나가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의지는 바닥을 쳤다. 너무 지쳐 그만하고 싶었다.

 

댄은 관공서 직원 앤에게 이제 구직수당 신청을 그만 하겠다고 구직수당 신청 명단에서 자신을 빼 달라고 한다. 항고 날짜나 다시 잡아 질병 수당을 다시 받아야겠다고.

관공서 직원은 재심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 항고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당마저 포기하는 건 위험하다고 만류해보지만 댄은 할 만큼 했다고 말한다. 결국 나가떨어진 셈이다. 정부가 보조금을 못 받게 연필 시대 사람을 복잡하고 어려운 행정절차로 인터넷을 모른다는 이유로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들이 만들어놓은 원칙이 누구를 위한 원칙이었을까. 배부른 자들이 배고픈 자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했을까, 아니 이해하고자 맘 자체가 애초에 없었고 도와줄 생각도 없었다. 굴복시키고 포기시킬 원칙뿐이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봐야 돌아오는 건 수치심뿐이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관공서를 나온 댄은 더이상 직원들과 씨름하는 게 시간낭비이고,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관공서를 나와 관공서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라고 쓴다.

그가 쓴 문구를 본 지나가던 행인들은 댄의 용기 있는 행동에 환호성을 지르며 호응하고 지지한다. 또 다른 행인은 그에게 영웅이라고 악수를 하고 자신의 옷을 벗어준다.

관공서 직원은 관공서 벽에 낙서한 그를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댄을 기물파손, 공공질서법 위반, 기물 파손 혐의로 잡아간다. 행인은 댄을 체포하는 경찰에게 저택 살면서 주택 보조금이나 깎는 장관이나 잡아가라고, 빌어먹을 민영화, 망할 보수당 놈들, 엘리트들이라 지들끼리 잘났지라고 분노를 표출한다.

경찰에게 체포된 댄은 훈방조치로 풀려나고, 댄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항고 날짜가 잡히고 댄은 케이티와 동행하여 재심사를 받기 위해 복지사를 만난다. 복지사는 질병수당 자격심사가 너무 허술하였고, 심사에 탈락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며 이번에는 댄의 담담 의사의 보고서와 치료사의 소견도 첨부되었기에 분명 승소할 것이라고 말해준다. 댄은 집에서 심사관 앞에서 말할 것을 적어왔다고 말했다.

왜 자신의 인생이 아무것도 안 하고 형식이나 절차나 따지는 저들 손에 죽고 사는 게 얼마나 우습고 어이없는 일인지를 그는 분노했다.

긴장했는지 어지러웠던 댄은 세수하러 화장실로 갔다가 그만 지병이었던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끝내 항고심사도 받지 못하고 항고 때 읽으려고 연필로 쓴 글을 끝내 읽지도 못하고 댄은 가버렸다.

 

그는 가진 거 없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이웃을 도운 누구보다 부자였다. 댄은 관공서에서 보조금을 받지 못한 미혼모인 케이티를 도와줬다. 고장 난 변기를 고쳐주고, 전기요금으로 쓰라고 얼마의 돈을 주고, 아이들을 돌봐주고 집안을 손 봐준다. 정부는 모든 부를 누리면서도 마음이 가난했지만 댄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품을 만큼 따뜻했다.

이웃과 많은 것을 나눈 훌륭한 사람을 정부가 너무 빨리 죽음으로 이끌었다. 댄이 남긴 글을 케이티가 장례식장에서 읽게 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복지라는 가면을 쓰고 그들이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나라. 영국의 복지 시스템에는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결국 허울 좋은 복지에 인간은 없고 각종 냉소적이고 복잡하고 원칙을 고수하며 하층민과 노동층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삶의 사각시대로 내몰았다.

원칙이 사람보다 위에 있는 듯하고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8. 6. 15:19

감독 이안

색, 계

욕망이란 뜨겁고 위험한 색, 色

신중하면서 , 그 잔인하고 차가운 경계, 戒

감정과 이성의 경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흔들리고 色으로 戒가 무너진다.

 

<색, 계>는 '탕웨이'와 '양조위'의 파격적인 노출 연기가 논란이 된 영화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국주의적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1939년 중국 홍콩과 1941년 상하이를 배경으로 친일파로 살아가는 정보부 대장 '이'와 그에게 접근하여 그를 암살하려는 '왕치아즈'가 色으로 인해 戒가 무너지면서 극으로 치닫는 그들의 운명을 다룬 이야기이다.

 

1939년 홍콩,

홍콩대에 다니는 왕치아즈는 광위민에게 끌려 저항 연극을 하게 되고, 첫 연극이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성황리에 끝나자 왕치아즈와 연극단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항 연극의 성공에 힘입어 학생신분이었던 그들은 투쟁의 일환으로 그 범위를 넓혀 홍콩으로 온 친일파 관료 '이'를 암살하고자 계획한다.

 

그들은 홍콩 상인과 그의 아내 막부인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이'의 아내에게 접근한다.

왕치아즈에게 '이'의 존재는 이 때만 해도 그저 경계할 암살 대상일 뿐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

그저 신분위장한 막부인이란 연기에 집중하면 되었다.

 

친일파 관료였던 '이(양조위)'는 예리하고 치밀한 인물로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왕치아즈의 두려움 없는 눈빛에 서서히 호감을 드러냈다.

연극단원들은 그녀가 '이'와 성관계를 가질 것을 대비해 첫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성관계를 미리 연습하게 했고, 그녀와 관계를 가질 남자는 광위민이 아니고 유경험자인 연극단원과 가지게 된다. 왕치아즈는 광위민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왕 하는 거라면 호감을 가진 광위민이었으면 했지만 광위민은 나서지 않았다.

연극단원과 관계를 가지고 난 후 그녀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먹지도 않았다. 그녀를 그렇게 몰아넣은 단원들과 어색하고 껄끄러운 거리감이 생겼다.

그녀 혼자 이에게 접근해 연기를 하는 동안 연극단원들은 지켜만 봤다.

경계를 풀지 않는 '이'로 인해 뜻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고, 이가 다시 상해로 돌아가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망연자실한다.

대학생이었던 왕치아즈가 막부인으로 신분위장을 하는 순간 그녀는 色을 미끼로 유혹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지만 '이'를 암살하기 위한 色은 시도도 못하고 같은 단원에 의해 처녀성만 상실했다. 연극단원들과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거기다 광위민과 연극단원들의 계획을 눈치챈 광위민의 선배가 찾아오고, 발각된 일로 인해 선배와 말다툼 끝에 단원들은 선배를 살해하게 된다.

상처와 좌절,수치심으로 얼룩진 그녀의 계획은 실패하고 왕치아즈는 그 길로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 일이 있고 난후 왕치아즈는 넋이 빠진 채 텅 비어 버린 것처럼 3년의 시간을 보냈다.

 

 

3년이 흐른 후, 때는 1941년 일제 강점기의 중국 상하이, 광위민이 그녀 앞에 나타난다.

다시 만난 광위민의 제안으로 저항군의 협조 아래 3년 전에 실패한 정보부 대장 '이'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다시 세우게 된다.

이는 그동안 일본군의 감시견이 되어 반일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살해했고, 경비는 더 삼엄하여 접근조차 불가능한 위치에 올랐다.

왕치아즈는 어리석었던 3년전과는 다르게 밀수 장사를 하는 막부인으로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해 '이'에게 다시 접근한다.

3년 전에 막부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였다. 막부인은 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하자 이의 입에서 "당신이 와 준 게 선물이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던 이의 경계는 쉽게 무너질 거라는 예상이 드는 대사였다.

 

 

그가 막부인을 밖으로 불러 가진 첫 정사신은 굉장히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녀의 몸을 가지면서도 그녀의 진심을 뚫어지게 파고들며 그녀를 강압적으로 제압했다.

색으로 유혹하려던 막부인의 계획 안으로 이가 첫발을 내디뎠다. 경계가 일단은 풀렸다는 것에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띤다.

막부인은 그의 집에 기거하고 이에게 더 깊숙이 접근해 들어갔다.

 

 

그는 뼛속까지 잔인한 사람이 아니다. 친일파로 살고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 겁이 많고 여린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의 외로움을 안 왕치아즈는 "많이 외로웠겠어요"라고 말하자 그는 "그 덕분에 살아있지"라고 말한다.

그는 친일파로 사느라 모든 이의 표적의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그는 누구보다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내면의 공허감은 누구보다 깊었다.

그가 초조하고 불안한 자신의 내면을 숨기면 숨길수록 가슴의 공허가 깊고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낄 만큼 그녀를 통한 성적 탐닉으로 파고든다.

그녀의 말처럼 "그는 내가 매번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만 만족해요. 그때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죠."

두려움이 가득 찬 자리에 욕망이 들어가 그녀를 삼킴으로써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녀를 파고드는 깊이가 깊을수록 그의 공허는 컸을 것이다.

 

 

"날 안을 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요. 내 심장까지"

그녀가 진심인지를, 진짜 감정인지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서로의 몸이 엉켜있는 침대에서 더 강렬하고 차갑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섭게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이나 눈빛,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간파하려 했다.

 

나는 그 둘의 정사를 결코 뜨겁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고, 달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육체가 서로 엉키는 순간에도 매서운 눈빛이 서로의 심장을 치명적으로 파고들어 찔러대는 모습이었다. 지독한 공허를 성적 탐닉으로 보상받으려는 처절한 몸부림 같았다.

 

색으로 포섭하려던 戒는 잠식되어갔다. 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막부인은 이제 연기가 아닌 실제로 진심에 가 닿게 된다. 이제 혼란스럽고 두려운 건 왕치아즈였다.

 

저항군은 빨리 이를 제거하지 않고 왕치아즈를 최대한 이용하여 그에게 빼앗긴 무기들을 찾아내려는 계획을 설계하고 무기 정보까지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광위민은 왕치아즈가 전문요원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만류하지만 저항군 대장은 이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왕치아즈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할 뿐 그녀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하물며 저항군 대장은 그녀에게 조직, 지도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명심하라고 요구하며 "그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아"라고 말한다.

"뭐로 사로잡아요. 내 몸으로? 당신은 그를 몰라요.. 연기라면 그가 몇 수 위죠."

그녀는 조국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 따윈 모른다. 그녀는 처음 광위민에 대한 호감으로 암살 계획에 가담했고 지금 자신의 마음은 이로 인해 흔들리기에 두려웠다. 처음 그녀는 이 앞에서 두려움이 없었다. 이에 대한 감정이 없었기에

하지만 지금 이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심장까지 스며들었다.

연기에 있어서 막부 인보다 이가 한 수 위라는 걸. 가까이서 겪은 그녀만 알 수 있는 것. 연기는 통하지 않았기에. 막부인은 연기가 아닌 이에게 빠져든 진짜 욕망을 표출해야만 했다.

자신의 역할에 미치도록 빠져든 막부인, 그녀를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이에게 연기는 실제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이러다 사로 잡히는 건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이미 戒를 계획했던 왕치아즈는 사라졌고, 막부인으로 色만 남아있다. 그녀에게도 色은 더 이상 미끼가 아닌 본능 그 자체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

"점점 두려워져요. 마침내 그가 내 심장에 들어오는 순간 내내 구경만 하고 있던 당신들이 뛰어 들어와서 그의 머리를 쏴버릴까 봐."

이제 두려움의 위치가 바뀌었다. 저항군의 압박은 강해지고 둘의 관계는 깊어져 이미 경계는 무너졌고, 그녀는 이제 뜨거운 욕망으로 심장까지 내려가 있는 이를 저항군이 죽일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녀의 가슴에 그 뜨거운 불꽃의 감정이 들어와 버린 것을.

 

치명적일 정도로 뜨겁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육체적 교감을 나눈 이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스며든다.

그들이 이를 암살하려는 시간을 지연시킬수록 그녀의 욕망이 그가 아닌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두려움이 없던 치아즈는 없고 이에게 무너진 막부인만이 있었다.

 

이는 왕치아즈에게 6캐럿짜리 다이아반지를 선물해주고 저항군은 바로 그 순간 그를 암살할 계획을 가지고 , 다이아반지는 관심 없고 반지를 끼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이.

내적 갈등하는 왕치아즈.

저항군은 그녀를 그저 이용도구로만 여겼지만 이에게 왕치아즈는 특별한 존재였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이의 사랑 앞에 무너진다.

그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에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점령당했다.

이에게 특별한 건 왕치아즈이지, 다이아가 아니라는 사실, 자신이 지켜줄게라는 말에 그녀의 갈등은 멈추고 자신을 버리고 그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저항군의 암살 신호를 알리며 그에게 도망치라고 말한다.

이를 간파한 그는 총알같이 몸을 날리다시피 차에 올라타고 그곳을 빠져나간다

그가 몸을 날려 차 안까지 뛰어들 때까지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총알처럼 뛰어나가는 모습에서 그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그의 삶이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도망가지도 자결도 하지 않고 유유히 적진의 입으로 들어갔다. 연극단원과 같이 잡혀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단원들과 총살 직전에 선 그녀의 표정은 그를 죽이려 했던 동지들과 그곳에 같이 있다는 것에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의 부하는 이미 치아즈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이가 포섭되었을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부하들마저도 그를 의심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로부터도 감시의 대상으로 사는 이의 존재,

그녀를 비롯한 연극단원들에게 총살을 명령하고 이는 그녀가 머물렀던 침대에 앉아 쓸쓸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다. 영화는 끝이 났다.

암울하기만 했던 시대,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암살을 위한 계획으로 무장한 머리가 욕망으로 심장이 뚫리면서 비극적인 운명 앞에 무릎 꿇는다.

이에게 적으로 다가간 왕치아즈는 냉철하고 투철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재혼하여 자신을 떠났고, 맘에 있던 광위민은 자신의 감정을 내놓지 않았고, 저항군은 그저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도구로 사용할 뿐 자신을 아끼고 배려하지 않았다.

연극단원들은 3년 전과 똑같이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피 흘리고 두려움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건 혼자이고 맘 하나 기댈 수 없이 외롭고 두렵기는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외로움을, 서로의 두려움을 안았고 누구보다 그들은 뜨겁게 심장까지 내놓듯 자신들을 욕망으로 채우고 또 누구보다 심장 가까이에 갔다. 유일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말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8. 1. 11:12

감독 조나단 드미

양들의 침묵

이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 역을 맡은 앤서니 홉킨스의 존재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식인 살인마로 불리는 그는, 상대를 눈빛으로 제압할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버펄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보다 존재감이 100배는 되는 듯했다. 뛰어난 분석력과 심리파악에 능통한 정신과 의사였던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려주지는 않았으나 FBI 훈련생 스탈링과 감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다.

 

<양들의 침묵>은 FBI정식요원이 아닌 훈련생과 미제 연쇄 살인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해 다른 살인마의 도움을 받아 연쇄 살인범을 추적해나가는 형태의 스토리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양의 울음소리'와 '나방'이다.

FBI훈련생인 스탈링은 '양의 비명소리'로 인한 어릴 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이 트라우마가 연쇄 살인범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방'은 연쇄 살인의 희생양이었던 피해자의 입안에서 나온 증거물로 범인을 잡을 단서가 된다.

 

스탈링은 어린 시절 자신의 전부였던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게 되자 고아가 된다.

고아가 된 스탈링은 양과 말을 키우는 엄마의 사촌부부인 목장에서 두 달을 살다 도망치게 된다.

목장에서 도망친 이유는 어느 날 새벽 비명소리에 잠에서 깬 스탈링은 비명소리가 들리는 헛간을 들여다보게 된다.

양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새끼양들이 도살되고 있었던 것이다.

양들이 불쌍했던 10살의 스탈링은 양들을 풀어주려고 울타리 문을 열었지만 양들은 도망가지 않고 어리둥절해서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것이었다.

스탈링은 양 한마리라도 구하겠다는 생각에 양 한 마리를 안고 힘껏 도망쳤다.

하지만 양은 상당히 무거웠고, 얼마 못가 경찰차에 붙잡혔다. 화가 난 목장주는 스탈링을 고아원에 보내버렸고 양은 목숨을 잃었다.

스탈링은 지금까지도 꿈에서 양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양들의 울음소리는 일종의 양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만든 스탈링 내면의 소리다. 또 스탈링이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영화 제목이 된 양들의 침묵은 희생자를 구해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녀가 강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영화 속 주인공이 사건 해결을 통해 양의 울음소리가 멈추게 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는 연쇄 살인 미제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해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에게 수감 중인 연쇄 살인범을 인터뷰하라고 한다.

그녀가 만날 살인범은 정신과 의사였던 한니발 렉터로 8년째 수감 중이다.

한니발 렉터는 자신의 환자 9명을 살해한 다음 살을 뜯어먹은 식인종 괴물로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채 창문 하나 없는 정신이상 범죄자 수감소에 수용되어 있다.

계속되는 연쇄 살인범 버펄로 빌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한 FBI는 한니발 렉터를 통해 사건의 단서를 얻으려는 것이다.

간호사의 혀를 뜯어먹거나 조사원의 간을 먹는 엽기 살인마라 스탈링과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렉터는 스탈링의 체취나 냄새만으로도 스탈링의 세세한 것까지 추리해내고 파악할 뿐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듯했고 굉장히 냉철하고 예리했다.

살인마 치고는 스탈링에게 차갑지만 예의를 지키는 것 같았고, 공감능력이 느껴졌고, 명석한 파워력도 있었다.

스탈링이 맘에 든 것인지, 테스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작은 단서들을 내준다.

렉터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게 도와주는 대신 자신이 자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상원의원의 외동딸 캐서린이 버펄로 빌에게 납치당하게 되고, 스탈링은 렉터에게 캐서린을 구할 수만 있다면 상원의원이 재향군인병원으로 이송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잭 크로포드가 스탈링을 시켜 렉터에게 가짜 제안을 한 것이다

 

렉터는 사건파일을 바탕으로 버팔로 빌을 정신 분석해주고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계속되는 연쇄 살인범 버펄로 빌은 여자의 피부를 벗겨내어 시체를 전리품처럼 내 다 버리고 있다.

스탈링이 희생자들에게서 누에고치가 발견되었다고 말하자 렉터는 나방이 갖는 의미는 변신으로 모충에서 번데기로, 다시 성충으로 아름답게 변신하는 것으로 범인도 화려한 변신을 원하는 것이라고.

범인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곳에서 수술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했을 거라는 것과 그가 몇 년간 계속된 학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며,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오한 나머지 자신을 성전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범인의 정체에 대한 분석과 함께 단서를 내준다.

 

렉터는 스탈링에게 범인에 대한 단서를 알려주면서 그 대가로 계속적으로 스탈링에 대한 것들을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게 요구한다.

범인의 단서를 얻으려는 스탈링과 스탈링에 대한 관심이 많은 렉터,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교류들이 오고 간다. 그렇게 살인마와 FBI 훈련생의 공조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교도소장 프레데릭 칠턴은 렉터에게 클라리스 스탈링과 잭 크로포드가 가짜 제의를 한 것을 폭로한다.

칠턴은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렉터를 이용하여 사건을 인수받아 직접 상원의원과 딜을 하여 그를 멤피스로 이송시킨다.

렉터는 칠턴의 볼펜을 입수하여 자신을 감시하던 경사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된다.

 

 

스탈링은 렉터가 준 단서로 범인이 여자를 죽이는 건 부수적이고 본질은 탐욕이라는 사건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고 추적하여 범인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캐서린을 구해낸다.

연쇄 살인범은 여성이 되고 싶어서 덩치가 있는 여자를 납치해 굶겨서 마르게 한 후 여자의 부드러운 피부를 벗겨 옷을 지어 입는 등 광적인 정신병자였다.

스탈링은 사건을 해결한 후 정식 요원이 되고, 탈출해서 자유의 몸이 된 렉터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양들의 비명의 멈추었냐고 묻는다.

 

렉터는 그때 양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아직도 양의 비명소리를 듣는 것이고 스탈링의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지금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된 캐서린을 구하면 그 비명이 멈출 거라고 여겼다.

캐서린을 구함으로서 구하지 못한 양에 대한 죄책감에 벗어나 더 이상 양들의 비명소리가 들지 않게 되었냐고 스탈링에게 묻는 것이다.

영화에서 다룬 버펄로 빌 사건은 미국내에서 일어났던 에드 게인 사건을 모델로 삼고 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7. 31. 15:58

감독 타마르 반 덴 도프

네덜란드 영화 : 블라인드

 

루벤(요런 셀데슬라흐츠)은 후천적으로 눈이 먼 젊고 잘생긴 청년으로 포효하는 동물처럼 고함을 지르고, 난폭한 행동을 한다.

다리가 불편했던 엄마는 아들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를 고용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려 애썼다.

하지만 루벤의 난폭한 행동에 모두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어느 날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흉터가 있는 30 후반의 여자가 이 집을 찾아온다.

그녀는 루벤이 던지는 물건을 손으로 받아내고 난폭한 행동을 제지했다.

루벤은 자신의 난폭한 행동을 완력으로 제압하는 마리(핼리너 레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책을 읽는 마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호감을 가졌다.

마리는 그가 스스로 면도하고 목욕하게 훈련시켰다. 루벤은 고분고분하게 그녀를 따랐다.

몇 살이냐고 묻는 루벤의 질문에 마리는 21살이라고 거짓대답을 했다.

앞을 볼 수 없는 루벤에게 자신을 21살에, 빨간색 머리와 초록색 눈을 가졌다고 속였다.

루벤은 21살의 빨간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마리를 상상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루벤에게는 손이 눈 역할을 한다. 만지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녀를 손으로 만진 루벤은 "너무 아름다워요, 그냥 만져보면 알아요, 얼음꽃 같다" 고 말한다.

그녀의 흉터는 나무 껍질 같은데 그런 자신을 아름답다, 얼음꽃 같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어려서 마리는 흉칙하다, 못 생겼다 학대받아온 상처가 깊다. 그래서 검은 천으로 거울을 가리고 자신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했던 그녀였다.

어쩌면 그녀의 외모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루벤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루벤은 엄마에게 마리가 21살에 빨간머리냐고 묻자 루벤의 어머니는 그렇다고 그녀의 거짓말을 덮어둔다.

아들이 마리로 인해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걸 보며 마리의 외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들의 상상 속 그대로 놔둔다.

그건 마리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닌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라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걸 바란 어미의 마음이었다.

 

루벤은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기를 권하고 그녀도 동의했다. 루벤은 마리로 인해 마음의 평화를 찾고 마리에 대한 사랑도 커졌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관계는 점점 깊어진다.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챈 어머니는 걱정이 앞서고, 건강도 점점 나빠졌다.

마리 덕분에 루벤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녀가 책을 읽어주려고 온 사람인 걸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당신은 우리 루벤을 속여왔어요."라며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앞도 못 보는 여리고 섬세한 루벤을 속인 눈먼 사랑이라는 말을 한다.

루벤이 수술을 해서 시력이 돌아올 거라는 말을 전해 들은 마리는 불안해진다.

수술을 받기 위해 루벤이 병원에 입원하고 마리는 병원에 찾아가는데 어머니와 친분이 두터운 의사는 마리에게 나이가 너무 많아 루벤과 계속 관계 유지를 하기 힘든 나이가 아니냐고 충고한다.

그리고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쓰고 사람들 앞에 자기 얼굴 드러낼 용기도 없으면서 어떻게 루벤을 보려는 거냐, 자신을 보여줄 용기도 없으면서.

그녀의 흉터는 지울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흉터보다 세상에, 아니 루벤에게 자신을 보여줄 용기도 없으면서 어찌 이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현실의 벽도 넘지 못하면서 루벤에게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해놓고 그녀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루벤이 수술을 끝나고 자신을 볼 수 있기 전에 마리는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건강이 좋지 않던 루벤의 어머니는 아들의 눈이 회복되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라는 유언과 마리가 남긴 편지 한 장을 의사에게 남기고 죽는다.

눈 수술을 받고 세상을 보게 된 루벤 앞의 현실은 엄마는 죽고 마리는 사라지고 없다. 시력을 회복하고도 행복하지 못했다.

 

의사는 루벤에게 아름다운 여자들이 모여있는 유흥가에 밀어 넣어준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마리를 잊을 수 있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루벤은 마리를 잊지 못하고 삶에 정착하지 못한다. 마리 역시 앞을 볼 수 있는 루벤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루벤은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면도를 하고 정원에 앉아 손끝으로 마리의 사랑을 느끼려 애썼다.

 

어떤 것으로도 마리를 잊지 못한 루벤은 이스탄불을 향해 떠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도 마음이 평안해지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고 루벤은 다시 돌아오고 시내 도서관에서 마리와 만나게 된다.

그녀의 첫 얼굴을 보고 루벤은 놀랬다. 그리고 눈을 감고 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마리는 묻는다. "내가 아직도 예뻐? 보이는 대로 말해. 볼 수 있잖아?'' 하지만 루벤은 눈을 감고 그녀를 만진다.

그녀가 거짓으로 말한 21살의 빨간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냄새로 그녀라는 걸 느꼈고 만지는 촉감으로 그녀를 기억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동화는 동화일 뿐 시력을 되찾은 루벤이 같이 살자는 사랑을 믿지 못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루벤의 눈에 의지하려는 사랑까지 원하는 것일까. 첨부터 거짓된 출발을 한건 마리였다.

"내가 아직도 예뻐?"라는 질문이 먼저여야 했을까.

<미녀와 야수>에서 공주는 야수를 보고도 사랑했다. 야수는 자신의 왕자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주는 야수를 사랑했다.

그녀는 진실하지 않았으면서 그래도 찾아와 같이 살자고 하는 루벤에게 눈에 보이는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인가.

진실한 사랑은 루벤의 입에서 나올 말이지 마리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루벤에게 거짓말에 대한 용서를 먼저 구해야 하는 건 아닌지.

 

의사는 어머니가 남긴 마리의 편지 한 장을 루벤에게 건네고 루벤은 그 편지를 읽는다.

그녀는 루벤으로 인해 놀라운 사랑을 봤고. 가장 아름다운 건 손끝으로 본 세상이니 손끝, 귓가에 남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진실한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리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눈을 기피할 정도로 그녀의 외모로 인한 상처는 깊었다. 루벤으로 인해 사랑을 배웠고, 루벤의 순수한 사랑을 온몸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가 시력을 회복하고 그녀는 루벤의 시선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만 담아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손끝으로 느끼는 것만 사랑이 아니다.

마음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랑은 그게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아름다울 수 없다. 마리는 루벤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에 갇혀 루벤의 순수한 사랑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 같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얽매여 있는 건 루벤이 아니라 마리가 문제인 것 같다.

루벤은 눈이 안 보이는 거지만 그녀는 세상을 눈에 담으려 하지 않고, 마음 또한 닫혀있는 것이다. 루벤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그녀의 사랑은 눈먼 사랑이다.

그 눈먼 사랑으로 인해 루벤이 다시 시력을 잃게 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죽은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눈먼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아들의 선택을.

 

posted by 해이든 2019. 7. 20. 00:36

사랑의 기적

감독 페니 마샬

사랑의 기적

 

실화를 근거로 하고 있다.

1969년 브룽크스 베인브리지 병원, 그 해 여름은 특별했다.

15명의 환자들과 관리인인 간호사, 의사들에게 기적의 계절이라 말할 정도의 재탄생이 있었다.

오직 연구만 해오던 세이어 박사(로빈 윌리엄스)가 베인브리지 병원에서 만성질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그들은 특이한 정신분열증,신경장애, 히스테리 등으로 마지막 치료 뒤에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 환자들 뿐이다.

만성질환자는 오직 음식과 물만 주면 된다는 남자 간호사의 말처럼 말 그대로 몸만 있을 뿐 정신은 죽어있는, 실체가 없는 귀신같았다.

어느 날, 세이어 박사는 만성질환 환자가 떨어지는 안경을 잡아내는 걸 보고 환자들의 어떤 행동에 반응하는 걸 발견한다.

공을 받아 치고,걷지도 못하는 환자가 간호사를 의지해 걷는다거나, 음악에 반응했다. 그들은 몇십 년 동안이나 움직이지도 못했다.

세이어는 그들이 공의 의지를 빌렸다고 표현했다.

다른 의사는 그저 반사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했지만 환자의 이름을 부르거나 음악을 들려주거나 인간적인 접촉을 갖는 것 등으로 인해 그들의 내면이 살아있다고 확신한 세이어는 환자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여기 오기 수 년 전에 뇌염에 걸렸다가 살아난 뇌염 환자들이었다. 뇌염을 앓은 후, 뇌염으로 인한 혼수상태인 것이다.

대다수 어린 아이였던 때 감염이 뇌에 얼마나 큰 손상을 입혔는지, 세월이 흐르면서 이 기괴한 신경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몰랐다.

지금은 혼자 입지도 먹지도 말도 못 했다.

 

세이어는 파킨슨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엘 도파라는 신약에 관심을 가졌다.

이 약을 뇌염 환자에게 투약해 보기로 결정한다.

엘 도파라는 신약의 개발로 파킨슨병 환자가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으니, 비슷한 뇌염환자에게 투약할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요구한다.

병원 측은 부작용을 염려해 레너드에게만 투약해보라고 허락해 준다.

세이어 박사는 환자 중에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를 주의 깊게 봤다.

그는 11살에 손에 떨리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게 되면서 천천히 나빠졌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의 정신은 사라졌다. 30년이나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엘 도파를 가족의 동의와 서명을 받고 레너드에게 복용하기로 한다. 세이어는 레너드 어머니에게 그를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엘 도파 약을 복용한 레너드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깨어나 말도 하고, 글도 읽고, 맘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레너드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라져 있다 이제 돌아왔다. 그는 처음엔 잃어버린 30년을 슬퍼했으나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병원은 그를 깨워놓고는 새장에 가둬 버린 채 내보내 주지 않자 레너드는 분노를 표출한다.

그는 부활한 게 아니라 세이어가 준 약을 복용한 것이고, 그 약의 기적 같은 효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련에 손을 떨고, 머리를 흔들고, 말을 더듬다 난폭해지기까지 했다.

약 효과가 떨어지고 부작용이 생겼다.

세이어는 레너드를 포기하지 않고 투약량을 조절하면서 계속 실험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고, 레너드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레너드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자신이 흉측해지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는 게 자신인지 경련들인지 알지도 못하겠다는 레너드를 바라보며 세이어 박사의 시름도 깊어진다.

레너드 어머니는 투약을 멈추라고 한다.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니 멈추라고.

하지만 세이어 박사는 그는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그 애는 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레너드를 시작으로 모든 환자가 다시 실체 없는 귀신으로 만성질환자로 돌아갔다.

세이어는 자신이 그들에게 삶을 줬다가 다시 빼앗아 가는 사람이 된 것에 고통스러워했다.

 

 

과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약 때문에 실패했다고도 단순히 병이 재발했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환자들이 잃어버린 세월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그러나 진실은 뭘 잘못했는지 우린 모른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린 뭘 잘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건 약을 통한 해결의 길이 막혀도 또 다른 깨어남이 발생하리라는 것,

인간의 정신은 어떤 약보다도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 정신은 다음과 같은 것들과 함께 커간다는 사실, 일과 놀이와 우정과 가족

중요한 건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잊고 지내왔던 아주 단순한 것들

<말콤 세이어 박사의 강연 중에서>

 

 

 

posted by 해이든 2019. 7. 12. 17:36

감독 라세 할스트롬

초콜렛

우린 남을 함부로 평가해선 안된다.

우리와 다르고 생각이 틀리다고 멀리 해선 안된다.

우리의 선함은 남을 인정하고 함께 나눌 때 인정받을 수 있죠.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북풍이 불었다.

북풍이 불면 떠나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떠돌이 모녀.

비앙(줄리엣 비노쉬)은 그의 딸 아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찾아온다.

비앙은 아드 망드(주디 덴치)의 건물에 세 들어 바로 교회가 보이는 앞에 초콜릿 가게를 열었다.

이 마을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오래된 구습에 의해 마을을 통제하려는 레너드 시장이 있다.

그녀를 찾아온 레너드 시장에게 비앙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하필 사순절 기간에 초콜렛 가게를 열어서 레너드 백작의 눈밖에 난다.

비앙은 매우 긍정적인 소유자로 시장의 말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가 만든 초콜렛은 이상한 마력을 발휘했다.

초콜릿을 먹은 사람들은 그 달콤 쌉싸름한 맛에 놀라고 초콜릿의 유혹에 점점 빠져들고, 조금씩 변해간다. 

초콜릿을 먹은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과 정열에 빠지게 했고, 활력이 넘치게 했다.

아무 의욕이 없던 삶에 활기를 집어넣었다.

 

그녀가 만든 초콜릿은 고대 마야인들이 마시던 칠리 초콜릿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약제사로 천연 약제 연구차 중앙아메리카로 원정을 갔다 가고 대 마야인들이 마셨다는 카카오에 칠리를 타서 마신 것이다.

그걸 마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운 마음이 생겨 사랑에 빠지게 하는 묘약과도 같았다.

비앙의 아버지 조지는 아름다운 마야의 여인 치차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조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치차는 신붓감으로 부적격하다고 사람들이 경고했지만 둘의 사랑 앞에 엄격한 종교의 법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결혼하여 프랑스에서 잘 살았다. 하지만 북풍이 불고 치차는 어린 딸 비앙을 데리고 사라졌다. 북풍이 불면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초콜릿 유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레너드 시장은 무신론자 비앙을 마을 사람들에게 멀리하게 만들고 초콜릿이 악마의 유혹이라고 경계하라 한다.

전통을 고수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시장은 그녀를 경계하고, 추방하려고 중상 묘략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전부 시장의 기대를 채워주려고 하지만 비앙은 그러지 아니했다.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갈 뿐이다.

시장은 자신의 가치에서 어긋나거나 시장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거나 미친 사람 취급받게 했다.

자기주장만 있고 타인의 소신 따윈 받아들일 소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시장 한 사람의 판단으로 마을을 통제하려고 한다. 하물며 마을 신부의 설교마저 사전 검토하고 일일이 수정하는 시장이라면 그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외면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판단을 옳다, 그르다 말하지 못했다. 시장의 가치에 따라야 왕따 당하지 않는 마을이었다.

한 사람을 미친 사람 만들고 쫓아내는 건 시장에게 아무 일도 아니다. 이 마을은 한마디로 숨 막혔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흡수할지 모르고, 딸과 엄마가 한 마을에서 살면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살고 있으며, 손자가 보고 싶은데도 보여주지 않는 딸로 인해 서로 남보다 못한 거리를 유지하고, 아내를 때리고, 아이를 잘 못 키우고 남편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미쳤다고 취급하고, 교회를 다니는 않는 자를 악마나 병균처럼 취급하고, 고해성사를 시장이 주도하에 하게 하고, 교회 목사의 설교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쓰고 수정하고, 아내가 떠났는데 여행 간 것처럼 말하고, 음식에 대한 절제로 다들 예민하고 거칠고 이타적인 마을, 오래된 구습과 관습에 묶여 이방인을 내치기만 하는 잘못된 편견과 독선에 의해 변화를 두려워만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시장이 있다.

 

마을 강가에는 집시들이 배를 타고 나타난다. 레너드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비앙보다 더 심하게 그들을 배척한다.

마치 집시가 병이라도 옮기는 듯 병균 취급하고, 그들을 강제로 쫓아내지 못하니까 제 발로 떠나게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물도 팔지 않는다.

하지만 비앙은 집시와 파티까지 열고 가깝게 지낸다. 짚시와 비앙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과 집시를 배척하고 경시하는 시장과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로 인해 자유분방하고 긍정적인 비앙마저 점점 지쳐간다.

결국 파티를 마친 아르망드 할머니가 숨을 거두자 힘이 든 비앙은 마을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그녀를 옹호하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그녀는 주저앉는다. 파티를 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초콜릿을 만들어 놓는다.

시장은 초콜릿 가게를 때려 부수려 비앙의 가게에 몰래 들어갔다. 그러다  입에 묻은 초콜렛 조각을 맛 본 후 그 맛에 홀려 초콜릿을 허겁지겁 먹다 잠이 든다.

결국 비앙은 마을에 변화를 가져왔고 시장 또한 그 변화의 문을 열었다. 다름을 수용하지 못했던 자신을.

이 마을은 오래된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남을 인정해야 남도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마을을 떠나려던 그녀는 이제 여기 이 마을 사람들과 정착해서 살게 된다.

이 마을에도 남풍이 불어왔다.

영화가 동화 같은 면이 많다.

 

 

 

 

posted by 해이든 2019. 7. 10. 19:41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가끔 감동을 글이나 말로 표현 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그렇다. 한 가족의 인생을 흐르는 강물처럼 그려냈다.

한 폭의 그림같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못하겠다. 폴의 죽음이 허망해서.

흐르는 강물만 봐도 폴이 송어를 잡기 위해 온 몸을 던지던 그 장면이 떠오른다.

빅 블랙풋 강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이 낚시를 하며 보낸 행복했던 그 순간.

 

아버지 맥클린(톰 스커릿)은 목사이다. 그는 아들 노먼과 폴에게 낚시를 가르쳤다.

그는 아들 노먼(크레이그 셰퍼)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그의 방식대로 가르쳤다.

아들 노먼에게 글을 쓰게 하고 다 쓴 글을 또 반으로 줄여 써 오게 하고, 그러면 노먼은 머리를 쥐어짜듯 다시 써가면 또 반으로 줄여 쓰라고 한다.

그렇게 또 반으로 줄여서 아버지의 서재로 가지고 들어가면 아버지는 <잘했다. 이제 찢어버려라>라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노먼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그렇게 세상의 군더더기를 제거하듯 아들의 글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압축할 수 있게 가르치고, 맘에 들면 이제 찢어버리게 했다.

노먼은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글 쓴 종이를 손아귀에서 마구 구겨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노먼은 낚시대를 가지고 강가를 향해 달려 나간다.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에도 균형이 있었다. 보상 같은 자유가 있었고, 질서가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는 오후 시간을 그에게 자유를 허용했다.

흐르는 강 수면위로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형제는 플라잉 낚시를 하며 자연과 함께 숨 쉬었다.

그렇게 자연과 더불어 그들은 성장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도 흘렀다.

 

두 형제는 성장하여 노먼은 시카고에서 대학을 다니고 6년을 공부하고 돌아왔고, 동생 폴은 고향에서 신문기자로 살아가고 있다.

두 형제는 서로 다른 성향이다.

폴은 모험심도 강하고, 겁도 없고, 재미있고, 자유분방했다. 식사자리에서도 부모님을 재미있게 해주는 아들이었다.

폴은 꽤 유명한 어부 낚시군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폴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가르쳐준 낚시법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리듬을 타던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그의 낚시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

자기의 방법으로 줄을 수면에 길게 드리우는 무지개 송어 유인법을 사용하는 폴의 모습을 본 노먼이 '그 순간 나는 완벽을 목격했다'라 감탄할 정도로.

형 노먼은 문학을 좋아하고 신중하고 재미없는 소유자로 폴과는 반대 성향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노먼은 제시 번즈(에밀리 로이드)란 여인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제시 번즈는 재미없는 노먼에게 크게 끌림을 받지 못한다.

 

폴은 도박에 빠져 있었다. 도박을 말리는 노먼에게 다음 날 삼부자가 낚시를 하러 가자 제안했고, 그게 마지막이 된 낚시여서 그런 것인지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폴이 송어 낚시하는 장면은 완전 예술 작품 같았다.

아버지 또한 큰 송어를 잡은 폴에게 '넌 훌륭한 낚시꾼이다. '칭찬했고,

<동생은 빅 블랙풋 강둑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초월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예술 작품처럼>

큰 고기를 잡은 동생의 모습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을 때 동생의 모습은 노먼의 눈에 작품처럼 다가왔다.

그게 마지막인 된 것이다. 인생은 예술품이 아니고 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란 걸 느낀 노먼의 확신이 폴의 주검을 암시한 것이었을까?

위대한 낚시꾼 폴이 결국 위험한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폴을 잃은 아버지와 노먼은 그의 빈자리를 서로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그리고 목사인 아버지의 마지막 설교가 가족을 이보다 더 가슴 깊게 설명할 말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처한 걸 보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거의 돕지 못합니다. 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고 있으며 때로는 그들이 원치 않는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과 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린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 없이도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기족이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 가까이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죽으나 살아있으나 그렇게 교감할 수 있는 관계인 게 가족이다.

낚시를 통해, 흐르는 강물을 통해 인생을 정말 멋지게 승화시킨 영화이다. 브래드 피트의 젊은 날 풋풋하고 잘생김! 지금 다시 봐도 흐뭇하다.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이 된 노먼이 폴과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빅 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하며 <난 강에 넋을 잃고 있다>란 내레이션이 나온다.

영화를 보면 안다. 난 강에 넋을 잃고 있다는 말이 어떤 감흥을 주는지...

난 이 영화가 그랬다. 넋을 잃고 봤다.

 

 

 

 

posted by 해이든 2019. 7. 8. 21:11

감독 비욘 룬게

 

더 와이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조셉 캐슬먼 (조나단 프라이스), 그의 아내 조안(글렌 클로즈)과 아들 데이빗(맥스 아이언스), 세 사람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안과 그의 아들인 데이빗은 이 상황을 크게 즐기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조셉을 옆에서 챙기며 지켜보고 있는 조안의 표정도 그렇고, 아들 데이빗 또한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환한 미소를 걸쳐 놓지 못한다.

작가 지망생인 데이빗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남들 앞에서 시원찮게 소개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고 못마땅한 감정을 감추지를 못한다.

노벨상을 받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은 아들에게 그저 따뜻한 한마디를 해주지 못하는 조셉, 자신의 기쁨에 아내나 아들의 감정은 뒷전이다.

아니면 원래 저런 사람인가.

노벨 수상자를 축하하는 사람들과 취재진들 틈바구니 속에서 온전하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조셉뿐이었다. 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안의 표정에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허탈함이 눈에 들어왔다.

장막에 가린 빛이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노벨 문학상에 숨겨진 진실이 조안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조셉의 전기를 쓰려는 기자의 추리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제 조안의 그 허탈하고 미묘했던 감정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조안이 손목시계를 풀고 그 시계를 들여다보며 과거로 들어간다.

조안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녀의 글 재능을 알아봐 준 사람은 지금의 남편 조셉이었고, 당시 그는 그녀의 교수이자 유부남이었다. 제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가정도 있는 스승이ᆢ

조셉이 아끼는 재능있는 제자였던 조안이 여류작가와 나눈 대화에서 당시 여성작가가 세상에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현실을 보여줬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여성작가가 쓴 책은 그저 학교 졸업생 작품으로 책꽂이에 꽂혀 있을 거라고 했다. 작가라면 당연히 책을 써야 하지만 그녀는 쓰지 말라고 한다.  작가라면 책을 쓰는 게 아니라 읽혀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세상은 여자가 쓴 책을 읽어 줄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혼자 작가라 하는 세상에서 먼지 낀 채 살아갈 것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여자의 재능을 재능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였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여성이 억압된 세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여류작가란 말에 분노하고, 어떤 직업 앞에 '여'가 붙는 것에 종종 불합리하다고 외친다. 설사 '여'가 붙지 않아도 숨겨져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음을.

남자들이 만들어진 세상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되는 생물체로 존재하기를 그렇게 제도화하고 사회적으로 인식화시킨 세상과 그런 세상에 남편의 이름으로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도 그건 오로지 조셉에 가는 빛만 있다.

노벨상을 축하받는 자리에서 조안을 무시하는 발언도 그녀를 화나게 했다.

조셉은 그녀에게 있는 재능이 자신에게 없다고 불평등하고 울부짖었지만 조안에겐 세상이 더 불공평했다. 그녀는 조셉의 대필작가로 살았던 것이다.

두 사람만 아는 비밀, 지금 노벨문학상은 조셉의 것이 아닌 조안의 것이었다. 조셉은 작가로 살려고 했지만 그의 글은 그녀의 재능에 비하면 출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그녀는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다 결국 자신이 쓰고 조셉의 이름으로 책을 발간했다. 철저히 아이들을 속이고 세상까지 속이며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신이 쓴 책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남편이 누리고 있는 저 옆자리에서 그저 내조나 한 여자로 서 있는 심정이.

거기다 남편은 사람들 앞에서 "제 아내는 글을 안 써서 다행이에요"라고 거짓도 모자라 수모를 안겨주고 있다.

세상은 몰라도 조셉은 조안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조셉에게 다 손뼉 치고 존경한다고 해도 조셉은 조안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이름뿐인 상이 아닌가. 그 내용은 모두 조안의 것이 아닌가. 그 축하는 오로지 그녀의 인생이고 그녀의 작품이 아닌가.

자신의 글임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서 있지 못하는 조안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조안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직업을 킹메이커라고 말할 때 조안의 표정을 보았는가!

[더 와이프]라는 영화에서 보여 준 '글렌 클로즈'의 표정 연기는 정말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 45년간의 연기 내공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고도 남았다.

이 영화는 14년간의 제작기간을 통해 탄생한 영화이다. 그리고 '글렌 클로즈'의 압도적 표정연기와 함께 젊은 조안을 연기한 배우 '애니 스타크'가 '글렌 클로즈'의 친딸이다.

모녀가 같은 배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녀는 골드 글러브 수상소감으로 이 영화를 하는 내내 남편에게 헌신했으면서도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고 하는 엄마를 떠올렸다고 한다.

여성들이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요구당하며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엄마의 말은 옳지 않다고, 자신의 성취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여자도 자신의 꿈을 좇아야 하며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혀 기립박수를 받았다.

노벨 문학상에 숨겨진 진실, 평생 남편의 성공을 위한 아내 조안의 헌신이었다. 조셉이 리무진 안에서 했던 행동에 너무 몰입해서 격분을 감출 수 없었다.

여든까지 남편을 위해 헌신했는데도 평생 이룬 게 없다고 말해야 하는 여자의 삶을, 그런 삶을 강요당하는 것도 부당한데, 그런 여성들의 희생을 당연하다 여기는 남편들의 태도에 화가 나는 영화였고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6. 27. 15:10

마농의 샘 1부

 

1.2부를 합쳐 총 4시간가량 상영된 이 영화는 지루할 새가 없었다.

1부는 도시에서 시골 프로방스로 이사온 장이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고군분투하는 과정이고, 2부는 10년을 뛰어 넘어 양치기로 홀로 살아가는 마농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면서 복수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보게 될 것이다.

작가 마르셀 파뇰의 작품을 클로드 베리 감독에 의해 1986년에 제작된 영화이다. 프랑스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농업을 소재로 한 집안의 3대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다.

땅을 둘러싸고 샘을 둘러싸고 백부 세자르와 그의 조카 위골랭이

장의 땅을 빼앗기 위해 샘을 의도적으로 막아 버리고 땅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한 계략을 꾸몄고, 그 계략으로 장은 농작물이 메말라 땅을 저당잡히고 우물을 파려다 사고로 숨지게 된다. 그리고 세자르와 위골랭은 그 땅을 헐값에 사들이고 막았던 샘을 파고 카네이션을 재배하기 시작한다. 남편을 잃은 장의 아내와 마농은 결국 그 곳을 떠나간다. 이게 1부에서 간략적인 내용이다.

그럼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병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위골랭 스베랑(다니엘 오떼유)은 카네이션 묘종을 가지고 와 시험재배를 한다.

백부 세자르 빠뻬 스베랑 (이브 몽땅)에게 위골랭은 스베랑가의 유일한 혈육이다. 위골랭이 곡식이나 올리브나 과실나무가 아닌 카네이션을 재배한 걸 보고 마땅치않아 하다 그 꽃을 시장에 내다 파는데 생각 외로 높은 가격에 팔렸다. 세자르는 그가 카네이션을 재배하는 것에 동의하고 투자하기로 한다. 하지만 카네이션을 재배하려면 많은 물을 대야 하지만 그의 땅에는 물이 부족하다.

그러자 세자르는 인접한 카모완 가의 토지에 샘이 있다는 걸 알고 땅을 사려고 노인을 찾아 갔지만 노인과 시비끝에 노인이 죽게 된다. 원칙으로 치면 세자르가 죽인거다. 고의든 아니든 노인을 나무 밑에 내버리고 온 것이다. 노인이 죽고 그 땅과 집은 상속받을 사람은 세자르의 옛 애인 플로레뜨였다. 세자르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고, 편지를 받을 무렵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장에게 넘어갔다. 세자르와 위골랭은 땅을 싸게 사기 위해 샘을 찾아 시멘트로 막아 버린다. 헐 값에 사들일 계략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도시에서 세금장을 하던 플로레뜨의 아들 장은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딸 마농을 데리고 프로방스로 이사를 오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위골랭과 세자르는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초조해진다. 샘을 막아버려 물이 부족하면 어떻게든 땅을 팔 수밖에 없을 거라고 설사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기다리자고 말한다. 위골랭에게 친절한 척 도와주는 척해서 자신에게 땅을 팔 수 있게 가깝게 지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세자르와 위골랭은 마을사람들에게 장이 플로레뜨의 자식인 걸 숨기고 그를 이방인 취급받게 만들고, 꼽추라 따돌림받게 유도해 나간다.

하지만 (제랄드 드빠르디유)은 세금장이로 머리가 명석하고 제법 많은 지식을 토대로 토끼를 기르고 농사를 제법 성공적으로 일구어간다.

하지만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하고 작은 당나귀로 먼 거리의 우물에서 물을 길러오는 것은 한계가 있었으며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돈은 바닥이 나고, 아내의 목걸이마저 팔았지만 생활은 점점 궁핍해간다. 위골랭과 세자르의 계략대로 물이 부족하여 옥수수는 다 말라버리고 토끼는 다 죽게 된다. 결국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리려 하는 장의 계획을 알고 세자르가 돈을 빌려주고, 땅을 챙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장은 자신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물이 농사를 짓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다이나마이트로 우물을 폭파하던 중 낙석이 장의 머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만다.

그리고 세자르와 위골랭은 그의 아내를 찾아가 저당 잡힌 땅을 넘겨받는다.

위골랭과 세자르는 자신들이 새로운 샘을 찾는 척하며 막아놓았던 샘을 도로 튼다. 그 장면을 어린 마농이 보고 경악하며 소리를 지르고, 그들은 축배를 든다.

이렇게 1부는 막을 내린다. 악의 승리로 끝났다. 하늘이 비만 제대로 주었다면, 장에게 좀 더 많은 시간과 여유가 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탐욕이 얼마나 인간애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지를 다 보여주었다.

어느 누군가 샘이 있다고 귀뜸해 줄거라 예상했지만 프로방스 마을사람들에게 장과 그 가족은 철저하게 배척되어야 하는 이방인에 불과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나쁜 행동은 마을 사람들 집단적 침묵과 방관으로 한 가족을 무너지게 했다.

결국 세자르와 위골랭의 계략대로 땅은 그들의 손에 넘어 갔다.

마농의 샘 2부

2부는 10년을 훌쩍 뛰어 넘었다. 장이 옥수수를 심던 땅은 이제 빨간 카네이션으로 넘실대고 샘에서 나오는 물길은 카네이션 주위로 콸콸 흘러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옥한 땅에서 카네이션은 무럭무럭 자라 세자르와 위골랭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충분히 부를 안겨준 것 같다.

마농(엠마뉴엘 베아르)은 어엿한 숙녀가 되어있다.

마을 사람들과 동떨어진 산중턱에서 양치기로 혼자 살아가는 마농은 새 덫을 놓으며 산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다 어느 날 사냥을 하러 온 마을 남자들의 말을 엿듣게 된다. 그건 아버지의 땅에 샘이 있다는 걸 알고 세자르와 위골랭이 계략을 꾸몄고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샘이 있다는 사실을 한 마디 해 주지 않아 아버지의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세자르와 위골랭에게 분노를 갖게 된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위골랭은 산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마농을 발견하고 완전히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는 매일같이 산에 가 그녀가 놓은 새 덫에 새를 넣어 두거나 토끼를 넣어둔다. 그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어 그녀에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자신을 못생겼다고 싫어한다는 걸 알지만 자신의 카네이션이며 모든 걸 다 주겠다고 하지만 이미 마농에게 그들은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일 뿐이다.

그를 피해 도망간다. 그녀를 향한 마음은 깊어지고 그녀가 흘린 머리끈을 가슴 맨살에 바늘로 꾀맬 정도로 집착을 보였다.

어느 날 마농은 양 한마리가 내려간 절벽 동굴안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샘물의 근원지를 발견하고 물줄기를 차단해 버린다. 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묵인하고 방관자였던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한다.

갑자기 연못이고 샘물이 말라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고 마을로 당장 먹을 식수정도가 트럭으로 배달올 정도지 농사까지 해결할 수 가 없다. 카네이션에 당장 물을 대야 하는 위골랭은 노새로 우물로 물을 퍼 나른다. 마치 예전 장이 하던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마을사람들은 성당에 모여들고, 가뭄으로 인한 기우제를 지내자고 한다.

이 마을에 새로 온 학교 선생인 베르나르(히프폴리떼 지라르도)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마농에게 마을사람들은 기우제에 앞장서줄 것을 부탁하는데 마농은 세자르와 위골랭이 자신의 아버지의 샘을 막아버린 것을 밝히며 거절한다. 세자르는 거짓이라고 말하자 그들이 땅을 파 샘을 막는 걸 본 목격자가 나타난다. 이제까지 침묵하다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으니 마치 그들의 죄인냥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듯

모두가 마농이 플로레뜨의 손녀라는 것을 알고 마을사람들의 태도는 더 달라진다.

그들이 샘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한 무엇 때문일까?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이상 남의 일에 나서서 미움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집단과 다른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그들의 행동이 세자르나 위골랭과 무엇이 다를까?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오거나 불이익이 가해져야만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아우성치는 것이다.

마농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위골랭은 이 상황에서도 청혼을 하며 모든 것을 주겠다고 그녀에게 매달리자 그녀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베르나르 옆으로 피한다.

위골랭은 그녀가 어릴 적 그네를 타고 놀던 나무에서 목을 매 자살하고, 세자르는 유일한 혈육이 죽고 허무함에 웃음을 잃어간다.

마농은 베르나르와 함께 막아 놓았던 동굴 속 샘의 물길을 다시 열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날 마농의 할머니 친구도 참석한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플로레뜨의 옛 친구로 세자르에게 플로레뜨가 임신을 했고, 군에 간 세자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아 결국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한 것과 그가 세자르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아들이 꼽추라는 사실까지 말이다.

군에 간 세자르는 그녀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 운명의 장난도 이정도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그 꼽추는 자신의 계략 때문에 죽은 장이고, 마농은 세자르의 손녀인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군에서 돌아와보니 그녀가 딴 남자랑 결혼을 해버렸고, 세자르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플로레뜨의 목걸리와 그녀의 머리빗을 간직한 채 품고 살았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망했던 것이다. 마농에게 플로레뜨의 모습을 보았는데 못 느꼈던 것이다.

그 땅을 빼앗으려고 자신의 아들인 줄도 모르고 아들의 삶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위골랭을 앞세워 결국 조카와 아들을 다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세자르는 마농의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그녀를 먼발치에 바라보다 결국 그녀에게 모든 재산을 남기고 죽는다. 많은 재산을 이루고 손에 쥐었으나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과 아들과 손녀를 품어보지 못했다.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다.

세자르나 위골랭을 맘껏 미워할 수도 없다. 인과응보라고 막 밀어넣어두고 질타할 수도 없다,

찢어지게 가난하여 그 땅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이라면 좀 나았을려나

정당한 방법을 취했다면 남의 이 난다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고 죽음으로까지 이루게 하고 자신들의 삶이 윤택해진다면 양심은 없어도 되는 것이었던가,

알고도 내 일이 아니니 방관한 이웃들도 똑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방관이 있었기에 세자르가 자신에 대한 행동에 수치심을 갖지 못한 것이다.

증인이라고 나선 사람은 왜 말하지 않았냐는 말에 내 일이 아닌 일에 나설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 일이니깐 당장 물이 없어 내게도 손해가 오니까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 나쁜 짓을 한 그들보다 더 아프게 들려왔다. 선은 자신에게 만족하기 우해 나가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내보는 것이라 여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으므로 하지만 그런 심리도 내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샘이 있다고 귀뜸만 해 주었다면, 그가 플로레뜨의 자식이라는걸 알았다면 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범죄자다. 이방인이라서 꼽추라서 멸시하는 맘이 크게 자리잡았던 그들의 내면은 그들도 같은 범죄자들이다. 그러면서 누가 누구에게 양심있는 척 죄를 물을 수 있단 말인지.

선과 악, 인간의 탐욕, 인간의 내면, 집단적 배타심, 인과응보, 참 많은 걸 풀어놓았다.

 

posted by 해이든 2019. 6. 21. 19:50

 

언터처블 1%의 우정

 

실화라서 좋은 영화, 만들어진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진짜 인생, 진짜 감정이라 몰입이 더 되는 영화이다.

타인의 아픔을 보며 내 아픔의 크기를 알게 되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 내 행복의 가치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최고의 샴페인을 만드는 회사 경영자인 ‘필립 포조 디 보고’의 이야기다.
그는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고 투병중이던 아내가 3년만에 죽으면서 암흑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


드리스 역할의 실제 주인공은 빈민촌 출신의 청년 애브델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장애를 다룬 영화가 유쾌하고 행복하기도 힘든데 그걸 해냈다.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남자의 만남으로 유쾌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여기서 언터처블의 뜻은 과거 인도 계급제도에서 불가촉 천민의 의미를 가져온 것이라 한다.

고대 인도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4계급으로 구분되는데 언터처블은 이 4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즉 제 5의 계급을 의미한다.

카스트 제도 최하위 계급을 뜻하는 언터처블은 극 중 드리스가 처해있는 환경과 상황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누구도 함부로 방해하거나 건드릴 수 없는 두 사람의 세상 1% 소중한 우정을 상징한다.

 

 

상위 1%인 귀족과 하위 1%의 무일푼이 우정을 나눈다.

기울어도 너무 기울어진 사이에 우정이 어떻게 존립할까?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작가의 머릿속 우정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실화라는 것에 구미가 당겼다.

 

1%의 우정이라,

시소는 두 사람이 타야만 되는 놀이 기구이다. 제 역할을 하려면 혼자서는 영 재미가 없는 기구인데, 한 명이 올라가면 한 명이 바닥을 치고, 또 한 명이 바닥을 치면 한 명이 올라간다.

둘이 마주보기 위해서는 서로가 같이 무게와 균형을 잡아야 한다. 한 사람으로의 노력만으로는 균형을 잡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우정은 시소와 같은 도구로는, 상대의 배려 없이는 형성되기 어려운 관계라 본다.

 

아~ 필립이란 이 남자 전신 불구인데 너무 밝은 것 아냐?

필립 역을 맡은 프랑수아 클루제의 미소에 마음이 따뜻하다. 웃는 게 너무 천진난만한 아기 같기도 하고, 자상한 아빠의 미소 같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가 앉고 싶을 만큼 끌렸다.

정말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전신마비로 고통받는 환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리 밝게 웃었던 데에는 무일푼 백수 드리스(오마 사이)의 유쾌하고 자유분방이 한 몫을 했다.

 

 

 

6개월을 강도죄로 복역하고 나온 드리스는 생활보조금을 받기 위해 남자 간병인을 구하는 필립에게 면접을 보러 간 것이다.

세 번 거절하면 생활보조금을 못 받게 된다는 말에, 필립은 <못 받게 할 순 없지?> 라고 말하며 낼 서류를 받으러 오라고 한다.

그들의 시작은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간병인 모집에 지원하고 면접을 봤지만 필립은 무경험과 무경력인 드리스를 채용한다.

"저런 거친 애들은 연민 같은 게 없다."

필립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에 연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드리스의 모습에 끌렸다.

산만하고 폭력적이고 전과기록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송장 취급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필립의 마음이 움직였다.

드리스는 굽신거리지 않았고 당당하게 제 할 말 다하는 거침없는 성격의 청년이었다.

 

 

 

일단은 그가 상위 1%의 백만 장자이다 보니, 거짓 웃음이나 거짓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런 가식 없는 드리스가 필립은 맘에 들었다.

드리스의 자유분방하고 거친 말을 무게감없이 유쾌하게 받아들였고, 산송장 취급 안하고 자신을 대하는 드리스로 인해 필립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걸 잊고 사는 것 같거든. 이 산 송장한테 전화기까지 건네 줘. 날 보통 사람처럼 대한다니까”

 

"죽는 것도 팔 다리가 움직여야 죽지"라고 말하는 필립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다. 타인에 의지하지 않고는 죽는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그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건네지를 않나, 개도 아니고 사람을 뒤에 태울 수 없다고 자동차 앞좌석에 앉히지를 않나, 환자인 필립에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려주고 답답한 마음을 해소해 주려 새벽 질주를 하는 등 삶에 스릴감을 누리게 해 준다. 전혀 환자 취급하지 않으니 그와 있으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던 것이다.

필립과 함께 오페라 관람을 보러 간 드리스는 오페라의 우스꽝스러움에 배를 잡고 껄껄 웃는다. 이런 것에 비싼 돈을 내고 보는 그들이 더 광대 같아 보였다. 다른 시선,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지만 서로 통하는 문이 마음이다.

나이 50에 비행 청소년처럼 소소한 일탈들을 안겨주는 드리스로 인해 필립은 자주 웃었다.행복해 보였다.

불편한 몸으로 돈이 있어도 온전히 자유를 느낄 수 없는 필립과 자유가 원없이 있음에도 스스로 방황하며 현실에 구속되어 버린 드리스는 서로를 통해 많은 것을 채우게 된다.

 

 

 

어느 새 가까워진 두 사람.

이 영화의 명장면은 필립의 생일파티 장면에서 들려주는 클래식과 팝의 어울림이다.

클래식을 듣는 필립과 힙합을 듣는 드리스,

힙합에 맞춰 춤추는 드리스와 필립을 위해 연주되는 클래식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가끔은 영화를 직접 봐야만 되는 종류의 것들이 있다.

표정에서 오는 감정들을 글로 쓰면 감정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6. 16. 00:08

감독 마츠오카 조지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릴리 프랭키의 자전적 소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어쩌면 영화제목 도쿄타워보다 소설 제목이 이야기의 핵심을 잘 드러낸 것 같다. 엄마와 나의 이야기이고, 아버지의 존재는 때때로 스쳐지나가는 바람같았기 때문이다.

아들 역을 맡은 '오다기리 죠'와 엄마 역에 '키키 키린'의 조합이 너무 맘에 들었다. 젊은 엄마 역을 맡은 '우치다 야야코'가 키키 키린의 진짜 딸이라는 사실을 흥미로웠다.

도쿄의 중심, 일본의 중심에 있는 도쿄타워라기 보다 삶의 중심, 마음의 중심에 엄마가 있는 이야기였다.

자유로운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워내고 이제 커서 엄마의 품을 떠난 아들을 뒷바라지 한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엄마를 찾아 만나다

자신보다 아들의 꿈을 위해 힘찬 응원을 보낸다.

하지만 아들 마사야는 매일같이 지각에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엄마가 준 돈으로 담배나 피고 엉망진창으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모자라 미술을 전공한다고 도쿄대학에 갔지만 고무줄처럼 늘어질대로 늘어져 타락해버린 자유에 몸을 맡긴다.

누구보다 빈둥거리며 4년동안 공부도 거의 안해 졸업을 못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엄마는 가게를 하면서 1년 더 힘낼테니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하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받은 졸업증서를 가게에 걸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 자식을 위해 더 힘내본다는 엄마이건만

졸업후에도 취직도 못하고 도쿄에서 사채 빛만 늘어간다. 누구보다 자유롭기 없는 그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일까,

아버지는 평생 무책임하게 혼자의 자유만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 핏줄일까, 마사야도 엄마의 삶이 눕는 것도 모르고 애쓰지 않았다. 열심히 자기 꿈을 그리지않았다.

도대체 도쿄에 왜 온것일까?

모두가 꿈을 꾸며 중심으로 몰려가지만 그 중심은 치열하지 않은 자에게 배려할 마음이 전혀 없다.

절실하지 않으면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고바야시 카오루)의 사진 속 도쿄타워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마사야의 도쿄타워는 완성되었다.

사회가 개인에게 거는 기대치가 도쿄타워만큼 높아졌기에 뛰지 않는 자에게 성공은 그저 사진속에 존재할 뿐이다.

도쿄가 마치 꿈과 미래로 가는 터널인냥 마사야도 그 터널을 통과하려 했지만 그 터널을 통과한 마사야는 쓰레기통같은 생활을 했다.

졸업후에도 취직을 못한 데다 긴장 풀어진 날들과 사채빚으로 인한 독촉뿐이었다.

엄마 키키 키린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엄마는 유쾌하게 성대는 살려야 해서 수술했지, 덕분에 목주름을 줄였다며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일까?

마사야는 더 이상 엄마에게 빈대 붙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좀 더 치열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지독하게 게으름을 피웠던 그가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리고 빚을 갚아가고 적자인생에서 겨우 본전을 찾는 삶을 산다.

마사야가 정신 차릴 때까지 엄마가 잘 버텨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사야는 자신이 빼 먹은 건 엄마의 돈이 아니라 엄마의 건강과 인생인 것 같아 미안함이 컸다.

마사야는 엄마에게 도쿄에 와서 같이 살자고 한다.

엄마는 가도 되려나, 그래도 될까? 아들에게 재차 묻는다.

엄마와 마사야의 도쿄생활

15살에 엄마 품을 떠나 15년만에 엄마와 같이 살게 된 마사야는 그동안 엄마가 준 거 다 갚을거라고 말한다.

엄마는 외로웠을 터이고, 힘들었을 터인데 항상 밝았다.

연금을 낼 형편도 못되어 받아먹을 연금도 없고, 아들 뒷바라지에 적금 하나 가지고 있는 게 없다.

그런데 엄마는 아들의 졸업증서를 꺼내 여기다 다 넣었다고 말한다. 아들의 인생에 아낌없이 다 부었다.

빈둥대지 않고 좀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엄마의 인생을 덜 힘들게 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마사야는 도쿄로 온 엄마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엄마의 유쾌함과 긍정적인 모습은 마사야의 주위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음식에 매료된 친구들은 자주 모였고, 엄마와 친구들은 아주 가까워졌다.

한 끼 식사로 다 모여 앉아 시끌벅적하게 즐기는 것이 엄마의 행복이자 모두의 축복이었다.

엄마는 도쿄와서 아들과 맛난 거를 먹고 여기저기 구경다닌 그 1년 동안에 평생 받을 효를 다 받았다고 말한다.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엄마

재발한 암으로 인해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이 어렵게 되자 엄마는 항암치료를 받는다.

아프고 힘들면서도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고 살려고 버텼다.

하지만 2번째 항암치료로 엄마는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고, 끝내는 그만하자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에 더욱 고통스러워한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도쿄의 중심에 왔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 엄마이고, 처음으로 사랑을 준 존재이고, 죽어서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을 존재다.

자식의 못난 구석까지 기쁘게 안아주는 엄마, 자식은 영원히 크지 않는 존재인 것 같다.

결국 엄마는 그렇게 아들의 곁을 떠났다. 너무 잘 버텨준 엄마였다.

아들을 따라 도쿄에 온 엄마는 도쿄타워 밑에서 잠들었다.

아들이 책을 내줘서 고맙다 했고, 아들이 일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적자인생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열심히 좀 하지' 좀 진작에 '열심히 좀 하지?'

엄마가 번 돈을 잘도 빼먹고 살았다.

엄마를 그리고 있는 아들 마사야

엄마의 장례식에 마사야는 엄마의 시신 앞에서 원고 마감 독촉을 받고 안쓰려다 자신이 일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던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열정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친구들이 북적북적 떠드는 가운데 엄마를 즐겁게 보내준다.

소중한 것을 잃는 아들이 보내는 평범하지만 가슴 아픈 메시지 이다.

어영부영 젊음을 낭비하고 빚에 쫓기는 삶을 살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나서야 그 존재의 크기를 감당하게 된다.

항상 존재할 것 같은 사람이 곁에서 사라졌다. 처음으로 어른이 되어 엄마의 손을 잡아 주었다.

엄마가 병으로 약해져서야 아들은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었다. 엄마와 아들 마사야의 인생을 통해 굵직한 감정들이 소용돌이 친다.

소소한 이야기라 말해 놓았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사랑을 가슴 깊이 걸어주고 간 엄마의 마지막 편지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죽으면 보라는 상자를 열어보니 한장의 사진이 눈에 담긴다. 아기인 마사야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 자신의 인생을 자식에게 다 바치고 간 엄마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남긴 편지 한통!

힘차게 자신만을 응원하던 엄마의 편지를 고등학교를 가기위해 엄마 품을 떠난 기차안에서 읽었었다.

이제는 엄마가 떠나면서 남긴 편지이다.

 

엄마는 행복하게 인생의 막을 내리니 아무것도 여한이 없다. 잘 있거라 아들아!

 

posted by 해이든 2019. 6. 15. 23:52

감독 미아 한센 로브

영화 다가오는 것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나름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혼자인 엄마가 수시로 자신을 불러대기는 했지만 자식들도 다 키워놨고, 교사로서의 지위도, 책도 출판할 정도로 입지가 다져진 중년 여성의 삶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작스럽게 25년을 함께 했는데 여자가 있다고 고백한다.

"왜 그걸 말해?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살 순 없었어?"

그랬다. 젊은 것도 아니고 중년 후반으로 가는 삶이다.

그냥 지금까지 몰랐던 채로 살아갈 수 없었던 거냐고 말하는 것이다.

뜨거운 감정으로 유지된 결혼생활도 아니고 한울타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며 늙어가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웠던 걸까.

사랑이 무너진 게 아니라 신뢰가 무너졌다.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중년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

나탈리는 이 상황이 힘들지만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몰랐다면 좋았겠지만 알아버렸고 터져버린 일, 비참하고 초라하게 쓸어 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순응해나간다.

배신감에 떨며 울고 불고 난리 치지도 않고, 세상이 다 무너진 듯 삶을 잠수시키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다 독립하여 살아가고 있고, 남편이란 늙어가는 여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걷어찬 남편에게 기대 같은 건 없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중에서 '이자벨 위페르'

철학교사로서 그녀는 항상 책 있는 삶을 살았다.

그 책으로 인해 그녀의 내공이 참 단단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보낸 별장에 가 이것저것을 정리하다 감정이 넘쳐버린다.

아이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고, 자신의 손으로 일일이 가꾼 화초와 정원,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와 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남편은 "오면 되지?"라고 말을 참 쉽게 꺼내놓는다.

이혼으로 남이 되는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걸까, 신뢰와 과거가 다 무너졌다는 것을 인지 못하는 걸까, 너무 아무 일도 아닌 듯하는 남편에게 화가 난다.

뭐가 저리 간단한 건지, 그동안의 추억이 아무 것도 아닌건지 어이가 없다.

그저 둘만 헤어지는 간단한 것이 아닌 문제들, 그 동안 서로 일구어 온 모든 것들이 다 거짓말처럼 자신을 부정하는데 추억할 장소마저 자신에게 빼앗은 걸 전혀 인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잠시 머물 뿐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제자 파비앵과 나탈리

나탈리의 애제자 파비앙이 자신의 사상에 맞설 만큼 성장해 혁명을 주장하며 나탈리에 사상에 반박하고 부정한다.

"응 나는 변했어. 급진성을 이야기하기엔 난 너무 늙었어. 게다가 다 해 본 것들이기도 하고."

그녀도 젊었을 때는 파비앙처럼 생동감 있게 급진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의적이 되었다.

어쩌면 모든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 서서히 인생 속에서 변모해가는 것이리라.

젊음에만 의존할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보다 타협하면서 그게 더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삶이라 수용하는 것이리라.

나도 그렇다. 내 아이들과 젊은 애들에게 말한다.

젊지 않다. 너처럼 나도 한때는 뜨거웠었다. 넌 뜨거운 그때를 혁신적으로 사는 것이고, 난 뜨겁지 않은 지금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중년이 아니었듯이 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성장하고 성숙해온 것이다.

자식들 역시 내가 거친 과정들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엄마가 거친 과정을 통과하고 있듯이 말이다.

 

출판사에서는 젊은 독자의 구미에 맞게 나탈리의 책 표지를 바꾸려 한다.

이제 구시대로 밀려나고 있다.

신세대와 구세대가 마찰 없이 사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조율해나가는 것만 남는다.

그녀는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변화를 서서히 수용하고 있다. 어찌 씁쓸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남편의 불륜으로 남은 삶을 흔들었지만 떠나보내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한 장면 - 친정엄마와 나탈리

나탈리는 늙고 외로운 엄마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엄마도 예전엔 나와 같은 젊음이 있었다.

지금은 저리 힘없이 누워있지만 혼자 있는 게 외로워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부르지만 다가오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거울 앞에 서있는 두 모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시선을 잡아당긴다.

 

죽은 어머니가 남긴 검은 고양이

나탈리는 털 알레르기가 있다.

나이가 많아 남에게 주지도 못하는 고양이를 어쩔 수 없이 여행길에 데리고 간다.

늙어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고양이는 여자로서 매력 없는 중년의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하고 무기력하던 엄마이기도 하다.

어느 날 늙어 밖에 나가 쥐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오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활력을 찾는다. 순리대로 나아가면 된다.

젊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할 것도 없다.

친정엄마가 남기고 간 고양이와 함께 : 영화 <다가오는 것들>한 장면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독립했고, 남편도, 엄마도 떠났지,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이건 낙원이잖아."

 

그녀가 철학교사로서의 균형 잡힌 삶을 살아낸 것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테라스에서 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지적이고 성숙하고 의연하고 여유롭게 보였다.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 그거면 족해. 행복해'

이제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면 된다.

균열이 간 삶에 얽매이지 않고 인연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일상의 중심잡기를 해나간다.

죽음으로서 끝나기 전까지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사는 게 어떤 건지를 의연한 나탈리로 인해 배웠던 영화였다.

참 많이 흔들리며 살았다. 조금의 균열에도 잠식당하고 슬픔으로 침몰했었다.

나 없는 삶을 살았다. 나 없는 자유로 구속했었다.

의연하지 못했던 내게 이 영화는 잔잔하지 않게 다가왔고 또 앞으로는 밖으로 뛰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 뛸 수 있게 해 준 영화였다.

앞으로 잘 살아갈게요.

 

posted by 해이든 2019. 6. 15. 23:52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조디 포스터의 콘택트

1997년에 제작된 영화이다.

그럼에도 영상그래픽이 전혀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웜홀을 통과해서 조디 포스터가 본 행성들을 그래픽으로 만들었을 터인데 정말 시인이 와서 표현해야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에로 웨이는 8살 때 밤하늘을 보며 반짝이는 별이 금성이라는 행성임을 알게 되고 우주 속에는 4천억 개의 별과 지적인 존재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 테드(데이빗 모스)는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지만 9살때 심근경색으로 에로웨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엘리 에로 웨이 박사는 우주의 외계 지적의 존재를 찾아내는 걸 목표로 계속 연구해 온 과학자이다.

그녀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외계인과의 만남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부의 지원을 받고 계속 관측했으나 정부를 비롯한 데이빗 드럼린(톰 스커릿)은 그녀의 목표가 망상에 지나지 않는 시간낭비, 인생낭비라며 지원을 중단한다.

그녀의 목표가 너무 멀리 있고 실현 불가능한 공상과학이라고 외면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리고 반박하고 나선다.

"조금만 넓게 봐라.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가능 하리라 믿었냐, 달나라 여행이 가능 하리라 믿었냐?"

역사에 역사를 통틀어서 이루어 낸 업적 앞에서 증거는 충분하지 않은가.

팔머 조스와 에로웨이의 첫 만남 

그녀는 기업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결국 S.R 해든(존 허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계속 관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태양계 밖의 지적인 존재. 즉 외계인이 보낸 것으로 여길만한 펄스 신호가 네 개의 안테나에 잡혔다.

그건 베가성에서 온 히틀러의 영상과 6만 장이 넘는 디지털 신호로 된 방대한 데이터였다.

디지털 신호로 된 데이터를 해독한 결과 그건 우주로 갈 수 있는 운송수단이었다. 마치 전철처럼.

이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고 과학계는 물론 종교계까지 들썩거린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에 회의적으로 굴었던 드럼린이 그녀의 공을 다 가로채 간다. 세계의 주목은 그걸 발견한 에로 웨이 박사에게 쏟아지는 게 아니고 드럼린과 미국 정부에게 쏠리고 그녀는 그들로 인해 이용 당한 채 배제 되는 듯했다.

미국은 여러 나라의 협력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우주의 도움으로 만든 최초의 시스템을 건설한다.

그리고 우주에 갈 지원자를 각 나라별로 몇 명을 선발하기로 하고 거기에 에로 웨이와 드럼린도 지원을 하여 면접을 보게 된다.

엘로 웨이는 면접에서 신을 믿는 종교인이자 신의 외교관이라 불리는 팔머 조스(매튜 맥커너히)와 마주한다.

조디 포스터와 매튜 맥커너히 

미국의 영적 세계를 연구하는 그와 과학자인 에로 웨이의 입장차가 크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면접에서 "신을 믿나요?" 라는 질문을 그녀에게 던진다.

그녀는 과학적 증거만을 믿는 과학자다. 신을 믿지 않는다. 과학자 입장에서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다고 했던 그녀다.  그녀는 신을 믿는다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팔머 조스는 인간의 진리보다 과학을 추구하고 진리를 맹신하는 자들을 거부하는 신의 외교관이다.

그의 양심상 신을 믿지 않는 에로 웨이를 뽑을 수는 없었다. 95%의 인구가 망상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뽑을 수 없었다. 모두를 대변하는 자를 선발해야 했기에 그녀를 탈락시키고 팔머 조스가 원하는 답을 준 드럼린을 선발대로 뽑는다.

결국 그녀는 베가성으로 가는 시스템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그녀는 뒤에서 쓸쓸히 지켜봐야 했고, 선발대에 뽑힌 드럼린은 시스템을 선두지휘하며 출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과학을 응징하겠다는 의지로 종교인이 우주선에 폭탄을 들고 잠입하고, 그 어마어마한 우주 시스템이 폭파하여 공중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신을 믿는 자들은 과학이 신을 죽였다며 그녀가 발견한 베가성(직녀성)의 시스템은 지구의 종말을 암시 한다고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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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스템에 오른 에로웨이 박사(죄디 포스터)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홋카이도 섬에 또 하나의 지원시스템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비용이 들거라면 비밀에 부치고 두 개를 건설한 것이다. 미국인이 관리하는 조건하에 일본 하청업자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그녀 혼자 그 우주 시스템에 탈 기회가 제공된 것이다.

그리고 팔머 조스이 찾아와 전에 당신을 못 가게 한 건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면접에서 떨어지게 한 것이라고 에로 웨이에게 말한다.


그녀는 혼자 우주선에 오르고 출발과 함께  웜홀을 통과해 우주의 여러 행성을 만났다. 그 장면이 환상적이었다. 마치 시공 구조를 지나 터널을 통과하여 베가성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우주 공간에서 환상적인 감동을 누리는 동안 모든 통신은 끊어지고 그녀가 지구로 돌아왔을 때 모두가 실패라고 했다. 지구에서 그 우주선은 그대로 떨어져 출발조차하지 않았다 한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고, 그녀 혼자 과대 망상증으로 우주를 다녀왔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아 부었는데 에로 웨이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건 세계의 웃음거리와 비난을 모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무려 조 달러의 돈이 투입된 일이다.

그녀는 재판에 세워졌고 이 모든 것이 엘로 웨이를 지원한 해든이 조정한 것이고, 에로 웨이(조디 포스터)는 그에게 조정된 자라고 말한다.

해든은 실험적인 기술을 남의 돈으로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거나, 아니면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 하는 자신의 마지막 이타적인 시도였거나, 어쨌든 해든의 마지막 쇼에 주연으로 에로 웨이가 초청된 것이고. 역사상 가장 크고 정교하며 값 비싼 사기극에서 에로 웨이 박사를 비롯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놀아 났다고 말한다.

에로 웨이 박사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 경험했습니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걸 압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얼마나 귀중한지를, 우린 우주에 속해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또한 결코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했습니다. 전 그 경험을 나누고 싶어요.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제 희망입니다.

시스템 가동 전 에로웨이 박사(조디 ㅍ스터)의 모습 

웜홀을 열었고 우주에 다녀왔다.

그런데 지구에선 모든 과학적인 증거로 볼 때 한 순간이고, 아무런 증거나 기록이 없는 이상 그녀가 경험한 걸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상엔 과학적 증거로 증명해 보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다고 깨닫게 된다.

지구의 한 순간이었지만 그녀가 윔홀을 통과하며 녹음된 잡신호가 18시간 동안 녹음 됐다는 것은 미스터리 한 일이다.

이 영화를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충돌하는 것 같지만 결국 지구 상에 서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 여긴다.

이 영화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문제도 아니고, 과학자와 종교적인 것도 아니라고 본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들의 의견도 존중한다.

솔직히 증거와 믿음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영화에서 팔머 조스의 외침이 자꾸 답을 주는 것 같다.

과학과 기술로 인류는 보다 좋아지고 행복한가의 문제, 인터넷으로 쇼핑하고, 문화를 자신의 방에서 쉽게 접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공허해지는 것,

더 외롭고 더 서로 동떨어져 있게 되고, 빠른 속도로 사회는 통합되어 가지만 우린 그 허무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정신없이 일하고는 미친 듯이 휴가를 가고, 과잉 소비를 통해서 삶의 공허함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향감각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재판에서 나오는 에로웨이와 팔머 조스

"당신은 뭘 믿습니까?" 기자들이 팔머 조스에게 묻자 그가 대답한 바가 이 영화의 본질은 아닐까 조심히 꺼내 든다.

신앙인으로 입장이 좀 다르지만 진리에 대한 추구하는 바는 같습니다. 전 그녀를 믿습니다.

결국 신앙이든 과학이든 그 바탕에는 인간이 행복할 가치를 추구함에 있다는 것이다.

'이 큰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엄청난 공간 낭비가 아니겠는가' 하는 에로 웨이의 박사 말에 공감되는 바도 크다.

이 영화는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을 원작으로 하는 SF물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6. 12. 15:08

감독 나딘 라바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부모를 고소한 12살의 남자아이, 자인

부모에게 자신을 태어나게 한 죄를 묻는다. 

의사가 유치 정도로 열두 살 열세 살 정도라고 추정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부모가 출생신고서도 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이다.

 

자인 알 라피아

 

가난보다 힘든 건 부모들이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삶이 지옥 같다는 것이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의 주도하에 어린 자인은 가짜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돌며 트라마돌을 구입해 마약을 만들어 불법 판매하고,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매일 거리로 나가 주스를 팔고 온갖 잔일들을 한다.

이런 삶 속에서도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자인, 특히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 잠)에게 늙은 슈퍼마켓 남자가 딴마음이 있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 많다.

부모들은 아직 10살밖에 안된 사하르를 나이 많은 슈퍼마켓 남자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한다.

어찌 10살에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팔려가는 것이다. 여동생을 데리고 가려는 아사드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지만 더 큰 문제는 부모가 자식을 그런 삶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자인이 그토록이나 지켜주고 싶었던 여동생 '사하르'

조혼으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게 부모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겁다.

자인이 사하르의 피 묻은 팬티를 빨고 생리하는 것을 그토록 부모에게 들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이런 걸 예상한 거구나  이해됐고도 남았다.

자인은 사하르가 조혼으로 팔려가는 걸 안간힘 쓰며 막아내려고 악을 썼지만 부모와 슈퍼마켓 남자의 힘을 당하지 못했고, 부모에게 경멸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집을 떠난다.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 놀이동산에서 일하던 외국인 여성 노동자 라힐(요르다 노스 시프로우)를 만나 그녀의 아이 요나스를 봐주며 생활한다. 불법체류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일하던 집의 남편의 아이를 가졌고 경찰한테 애를 뺏기고 추방될까 봐 아이를 숨겨서 키우고 있었다.

자인에게 아이를 맡겨놓고 일하러 나간 라힐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찾아다닌다. 그녀는 불법체류자로 경찰에 잡히고 만 것이다. 이를 모르는 자인은 자신의 엄마보다 더 나쁜 엄마라 욕하게 된다. 낳아놓고 제대로 돌보지 않는 자신의 엄마나 자식을 버리는 엄마에게 12살의 아이는 경멸을 느낀다.

거리에 나앉은 라힐의 아들 '요나스'와 막막한 '자인'

자인은 라힐의 아들 요나스를 돌보기 위해 그동안 엄마 밑에서 배운 게 마약인지라 마약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자신의 몸 하나 고단할 나이이건만 요나스를 책임지는 모습에서 참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했다.

라힐이 사라지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 무일푼이 된 자인은 너무 막막하다.

결국 좋은 집으로 입양 보내주겠다던 아스프로에게 요나스를 보낸다.

아스프로는 자인도 스웨덴으로 보내주겠다고 신분이 확인될 만한 서류를 가져오라고 한다.

출생 서류를 가지러 집에 돌아갔다 결혼한 사하르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자인은 격분해 칼을 들고 사하르를 데려간 남편(?) 아사드를 찾아가 찌르고 경찰에 잡혀 5년형을 선고받고 소년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자신의 부모를 고소해 법정에 나와 있는 '자인'

법정에서 판사에게 어떤 개새끼를 찔렀다고 말하는 당돌한 아이, 자인

여동생을 죽인 아사드, 그리고 자신의 손에 칼을 들게 만든 부모들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표정

판사가 남편 아사드에게 열한 살이 결혼할 나이인가를 묻자 "꽃이 피었으니까"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자인이 열 받아 뱉은 말은 "사하르가 감자냐, 아님 토마톤가, 꽃이 피게?"

사하르는 10살이다. 생리를 했다고 여자가 아니다. 아직 어린 여자 아이다. 그 어린아이가 결혼 후 2~3개월 만에 임신하였고, 하혈이 심해 병원문턱까지 갔지만 출생 서류가 없어 진료받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서류가 없었으니까

돈을 벌기위해 거리로 나온 자인과 어린 동생들

자식을 낳고도 출생신고도 안 한 부모, 서류도 없는 삶을 살다 병원문턱도 못 들어가고 죽어간 불쌍한 사하르

이제 10살의 아이에게 임신을 시키는 짐승 사하드, 자식을 팔아넘긴 부모 모두로 인해 정말 꽃이 피지 못한 것임을 왜 모르는 것인가. 이건 가난이 문제가 아니다.

자인이 말한 것처럼 정말 사는 게 개똥 같고, 지옥 같다. 자신의 낡고 해진 신발보다 더 더러웠다고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음에 좌절한다. 애들을 낳아놓고 제대로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하다는데 부모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또 아이를 갖는다.

교도소로 자인을 면회 온 엄마 수아드(카우사르 알 하다드)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다.

 

여동생 사하르가 죽고, 자신은 그 사하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주는구

나'라고 아이를 가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딸이면 좋겠다고 태어나는 아이의 이름을 '사하르'라 부른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말로 하기 힘들다. 자인의 표정이 압도적으로 가슴을 짓누르게 박히는 장면이었다.

"엄마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 다신 여기 오지 마세요. 엄만 감정이 없나 봐요."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도 키우지도 못하고 어린 딸을 팔아 죽음에 이르게 해 놓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감옥에 들어왔는데 또 아이를 가졌다는 엄마가 끔찍하다. 아니 자기와 같은 아이가 또 태어난다고 생각하니, 또 다른 사하르가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했던 것이다.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역사적 지명을 말하는 것 같다.

폐허나 지옥 같은 자인의 세상.... 자인의 삶이 지옥이고, 자인의 마음이 폐허 같음을 말하듯

교도소에서 아동학대에 관한 프로그램을 본 자인은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라고 전화를 걸게 된다.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자인,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은데 희망이 없어 보인다.

 

 

판사 : 부모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자인 : 엄마가 애를 그만 낳게 해 주세요. 뱃속의 아기도 나처럼 될 거예요.
자인 :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엄마: 죽을힘을 다 해 사는데 왜 이렇게 비난하죠? 저 외엔 누구도 날 비난할 수 없어요
아빠 셀림(파디 유세프) : 저도 이렇게 나서 자랐을 뿐, 부모 잘 만났으면 이리 안 살았어요. 자식이 있으면 든든하다 했는데 등골만 휘었어요. 가정을 꾸린 게 후회가 돼요. 제 인생을 망쳤어요.

 

실제 인물들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자인 알 라피아'는 유엔 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에 정착했고 14살에 처음으로 학교를 다니게 됐다.

요나스를 연기한 트레저와 가족들은 불법체류 중이던 레바논을 떠나 케냐로 돌아갔다.

이 영화가 실제 인물로 실제 상황을 다루었다는 게 더 아프다.

 

 

posted by 해이든 2019. 6. 11. 00:17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 영화 <어느 가족>

 

이들은 보통 가족이 아니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선택했거나 주워왔다.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어서 서로 기대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말한다. 그 속에 책임도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들이 자신들을 떳떳하게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데에는 훔치는 것에 있다.  그들끼리는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을 일 없어도 남의 물건을 훔치면서 남에게 상처주고 있으며 또 자신들을 단순히 범죄자로 만들어 상처받게 하고 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우선 던져볼까 한다. 핏줄로 이어졌다고 해서 그 모두가 행복했다면 여기 선택에 의해 가족이 된 그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어떻게 버려졌는지 모를 아이를 길에서 주웠고, 부모의 방치로 집앞에서 홀로 있는 아이를 데려왔다.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는데 그 아이의 부모는 이 아이를 원치 않는다. 아이가 사라져도 신고조차 하지 않는 부모라는 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보호받아야 할 부모나 가족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흐르게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할머니 하츠에,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항상 겉돌아야 했던 아키,부모의 학대와 방치속에 있던 유리를 오사무와 노부요는 자신들의 기준으로 자신들의 능력만큼만 끌어안았다. 그들도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신들과 같은 상처받은 이들을 이해하고 안을 수는 있었다. 가진 것 없고 줄 것은 없지만 서로를 할퀴지 않으며 웃으며 소소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범죄까지 미화시키지는 말자. 아이들에게 물건을 훔치게 하고 할머니의 연금을 계속 받기 위해 하츠에를 장례도 없이 집안에 파묻었다.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야 계속 그 연금을 받을 수 있고 그 집에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트 진열대의 생필품들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인을 주고받으며 훔치고 있다.

쇼타는 학교를 다녀야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낮에는 거리를 배회하고 다니고 아버지 노부요와  물건을 훔친다. 물론 이들은 핏줄로 이어진 부자 사이는 아니다.

물건을 훔치고 돌아오다 건물 앞에서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들이 말하는 집은 죽은 남편으로 인해 나오는 연금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하츠에 (키키 키린)의 좁디좁은 집이다.

훔쳐온 생필품으로 살아가거나 할머니 하츠에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가족(?)이다.

저녁만 먹여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러갔던 노부요 시바타 (안도 사쿠라)는 아이의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듣게 되고 여자아이의 부모들이 여자애를 학대하고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여자아이를 데리고 돌아온다.

여자아이는 노부요와 똑같이 부모의 학대로 생긴 다리미에 덴 흉터자국이 있다.

노부요는 여자아이에게 연민이 생기고 유리란 이름을 지어주며 같이 동거하게 된다. 엄연히 유괴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가 사라진 며칠이 지나도 신고를 하지 않는다.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유리가 유괴당했다는 뉴스가 나오게 된다. 그것도 유치원 선생님에 의해  이루어진 신고였다.

<마츠오카 마유>와 <키키 키린>

 

유리(사사키 미유)는 쇼타(죠 카이리)에게 착 붙어 다녔고, 유리 역시 쇼타와 같이 물건을 훔친다. 훔치는 것은 오사무가 가르쳐 준 것으로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어느 날 가게에서 유리와 물건을 훔치고 나오는데 문방구 할아버지가 쇼타를 불러 세운다. 사탕과 과자를 손에 쥐어주며 "이거 가져가고 여동생한테는 도둑질 시키지마."

그동안 할아버지는 쇼타가 훔치는 것을 알고도 눈감아 준 것이었다. 아마 쇼타 마음에 이때부터 훔치는 것에 대한 선악의 혼란이 온 것 같다.

조금씩 흔들렸고 노부요에게 묻게 된다.

그때 노부요가 '훔치는 건 나쁜 거야.'라고 말해주길 바랬지만 그녀는 망해서 가게 문을 닫지 않을 정도면 훔치는 게 크게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 같이 조금씩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유리 역 '사사키 미유', 쇼타 역 '죠 카이리'

그 이후 쇼타가 문방구를 갔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어린 쇼타는 상중의 의미를 모르고 망해서 문을 닫은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쇼타는 다른 가게에서 유리를 밖에 세워두고 혼자만 물건을 훔치러 들어간다.

그런데 유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있자 쇼타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위해 직원이 보란 듯이 물건을 훔쳐 도망친다.

유리가 잡히게 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다. 쇼타는 일부러 잡힌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쇼타는 크게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쇼타를 제외한 가족은 쇼타로 인해 자신들의 범행이 들통날까 도망가려다 경찰에 모두 붙잡히게 된다. 이로 인해 이 가짜 가족이 세상에 드러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할머니 하츠에가 죽자 그들은 하츠에를 마당에 묻었으니 시체 유기죄가 성립할 것이고, 여자아이를 부모에게 말도 하지 않고 데리고 있었으니 유괴죄가 성립할 것이다. 노부요와 오사무는 경찰조사를 받게 된다.

왜 아이를 유괴했냐는 경찰의 질문에 노부요가 한 대답은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

여형사가 대답한다.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여기서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다는 말에 반박을 하고 싶다. 낳는다고 엄마의 도리를 하지 않는 사람을 다 엄마라고 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꼭 핏줄로 연결되어야만 아이를 사랑하고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랄 환경은 핏줄이든 핏줄이 아니든 어른으로서 만들어 주어야 할 조금의 의지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유리나 쇼타가 그들과 있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리같은 경우는 오히려 부모의 품보다 그들과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성장하는 아이에게 단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건을 아무 죄의식 없이 훔치듯 아이도 주워왔다는 노부요의 세상과 현실의 세상이 좀 다른 것이 사실이다. 노부요는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오사무 대신 혼자 죄를 다 짊어진다.

노부요 역 '안도 사쿠라'

상처가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한 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서로 기대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며 하루 하루를 훔치며 사는 것으로 하루살이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가족이란 것이 그저 모여 상처주지 않는 것으로만 살아가지는 않는다. 가족이기에  기대하고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를, 자식이 올바르게 커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공시키기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으며 달려간다. 그러니 자식에게 거는 기대감도 크고 부모에게 바라는 것도 많은 것이 자식과 부모의 관계이다.

 오사무에게 경찰은 질문한다. "아이게 게 도둑질시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냐?"고.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진짜 부모였다면 쇼타가 다리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자신들만 생각하고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무리 못 배운 부모도 그정도의 선과 악을 구분해서 가르친다.

부모가 되기로 했다면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고려했어야 했다. 결국 오사무와 노부요는 할머니의 연금을 훔치고 쇼타와 유리의 미래를 훔친 셈이다. 물론 그들의 방식으로 그 아이들을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황금종려상 수상작품 <어느 가족>

노부요는 자신들이 쇼타랑 유리를 길러주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라고 것을 느끼며 쇼타가 제대로 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게 놓아주라고 오사무(릴리 프랭키)에게 말한다.

그들이 가진 능력이 그들에게 좋은 환경을 줄 수는 없었지만 노부요와 오사무는 유리와 쇼타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책임져줄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한 것을 깨달은 것뿐이다. 오사무는 아빠에서 이제 아저씨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이 한 집안에 살며 행복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그 가족의 조합을 행복하게 다루지 않는다.  쇼타와 유리는 그래도 그 안에서 따뜻했다. 아빠라고 부르라고 해도 부르지 않던 쇼타가 그 앞에서는 쑥스러워 말 못하고 헤어지고 버스 안에서 가만히 아빠라고 부른다. 비록 배운 것 많지 않은 그들이지만 쇼타에게 아버지처럼 따듯했던 사람이었다. 사회적 눈높이로 보이는 가족이 아닐 뿐 그들끼리는 서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가짜 가족을 통해 진짜 가족안의 나를 들여다보고, 진짜 가족안에서의 나의 행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그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담아내는 가족 영화들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다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등을 많이 봐왔다

그는 이번에도 가족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감독은 가족 내 폭력과 아동학대, 외로운 노인문제, 형제자매간의 불평등한 차별로 인해 상처 받는 모든 문제 되는 것들을 이들이 선택한 가족 안에 담아냈다. 가족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이 온다면 진짜 가족의 어두운 면이 사라질까? 진짜 건강한 가족의 형태는 무얼까?

 

posted by 해이든 2019. 6. 5. 15:51

감독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위대한 유산

플로리다의 작은 해안 마을

고아인 핀(에단 호크)은 누나랑 누나 애인 죠(크리스 쿠퍼) 밑에서 자랐다.

매기 누나는 핀을 방임하다시피 했고 죠는 매형과 같은 존재였다.

정부의 어업제한 조치로 수입이 없어진 죠는 남의 집일을 하며 생활을 꾸렸지만 가난했다.

화가가 꿈인 핀은 그 흔한 색연필 하나 없었다. 연필로 작은 노트에 스케치를 한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섬에 갔다가 탈옥수 러스티그(로버트 드 니로)를 만난다.

그는 폭력조직의 대부를 죽인 살인죄로 복역하다 탈옥한 것이다.

발목에 찬 족쇄를 끊을 절단기랑 음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죽인다는 협박에 핀은 새벽에 그에게 절단기와 음식을 갖다 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이었다. 얼마 후 그가 4일간의 도주 끝에 잡혔다는 뉴스를 보게 된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나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가 도망가게 도움을 준 것이다.

남자에게 버려진 노란 딘스무어 멍든 가슴

며칠 후 멕시코만 최고의 갑부인 노라 딘스무어의 저택 실낙원에 초대되어간다.

그 저택은 사람 손이 닿지도 않은 듯, 정원이나 저택은 돌보지 않아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음산한 분위기였다.

소문에 의하면 여갑부는 30년 전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미쳤다고 했다.

노라 딘스무어(앤 밴크로프트)는 그녀의 조카딸이랑 놀아달라고 핀을 저택으로 부른 것이다.

매기 누나는 돈을 받고 가는 일이라 핀을 그곳으로 보냈고, 핀은 그곳에서 그녀의 조카딸 에스텔라를 만나게 되는 설렘을 가졌다.

저택으로 들어간 핀 앞에 나타난 노라 딘스 무어는 마녀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차단시켰다.

노라 딘스무어는 핀의 손을 그녀의 가슴에 갖다 대고 무엇이냐 묻는다. 가슴이라 대답하는 핀에게 그녀는 멍든 가슴이라고 말한다.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멍든 가슴이 그녀를 이 안에 정지시켜놓은 듯했다.

어린 에스텔라는 도도하고, 예뻤고, 핀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핀은 에스텔라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노라는 핀에게 에스텔라를 사랑하면 너만 상처 받을 거야라고 경고해준다.

그날 이후 시작됐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하기 시작한 것이 ᆢ에스텔라로 인해

부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이다.

어린 핀과 에스텔라의 분수대 키스

핀이 분수대에서 물을 마실 때 에스텔라의 도발적인 키스가 행해진다. 어린 여자아이 치고는 꽤 도발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강하고 아름답고 인상적인 한 장면이었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ᆢ

핀은 그 느낌을 기억했다가 집에 와서 그림으로 그려놓는다.

누나는 그때 핀을 버리고 떠났다. 그 이후 죠가 핀을 키웠다.

핀은 토요일마다 실낙원을 찾았고, 그렇게 세 사람은 실낙원에서 춤을 추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노라가 말한 대로라면 이 셋은 고통의 사슬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아닌 굴레로 하나가 된 것이다.

어느새 어린 핀과 에스텔라는 사라지고 성장한 '핀'역에 '에단 호크'와 '에스텔라'역에 '기네스 팰트로우'로 화면 전환이 이루어졌다.

아직도 핀에게는 에스 털라가 가깝지 않은, 허락되지 않는 상류사회의 존재이고, 핀은 하류사회의 존재로 경계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것 같다.

그들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에스텔라의 내면은 겉면에 드러난 도도함에 가려져 헤아려볼 길이 없다.

에스텔라는 핀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홀연히 유학을 떠나 버린다.

성인이 되어 만난 핀과 에스텔라의 분수대 키스

핀은 이후 그곳을 찾지도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부에 대한 동경도 자신을 거부했던 그녀에 대한 갈망도 접었다.

그렇게 8년이 지나 핀에게 뉴욕 맨해튼에서 변호사 '래그노'가 찾아와 자신의 의뢰인을 대신해 핀의 꿈을 이루어 주러 왔다고 말한다.

 

뉴욕 비행기표와 돈을 내밀며 뉴욕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핀은 자신의 인생에 손을 대려 하는 그 익명의 후원자가 노라 딘스 무어라 짐작하고 그녀를 8년 만에 찾아가고, 에스텔라가 뉴욕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기회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죠의 응원을 들으며 핀은 뉴욕으로 간다.

그는 그동안 멈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공원에 갔다. 분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핀의 입술 위로 에스텔라(귀네스 팰트로)의 입술이 다가온다. 어릴 적 그녀처럼 말이다.

그녀에게는 월터라는 남자가 있다. 물론 상류층 남자다. 핀이 어릴 때처럼 에스텔라의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하자 그녀는 다음날 핀이 묵고 있는 숙소로 들어와 잠도 덜 깬 핀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그녀는 옷을 벗는다. 여전히 도발적으로 그의 혼을 빼놓는다.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어 내리고 누드로 그의 앞에 모델로서 포즈를 취한다.

핀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의 모습을 열심히 화폭에 담아낸다. 그녀는 갑자기 감정 없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갑자기 약속이 있다고 홀연히 숙소를 빠져나가 버린다.

 

월터가 갑자기 핀의 숙소로 찾아온다. 에스텔라가 모델을 했다 하여 궁금해서 왔다고 하면서 방안의 에스텔라의 누드그림을 살펴본다.

그는 에스텔라가 자신이 미적거리고 있으니까 이 그림과 당신을 통해서 애교스러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 말한다..

결혼에 대해 미적거리고 그를 자극하기 위해 핀을 이용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에스테라가 핀을 찾아와 월터가 청혼했다고 말한다.

상처 받은 핀은 왜 자기에게 그런 말 하냐고 하자 그녀는 "혹시 네가 할 말이 있을까 해서"라고 말하지만

핀은 자신이 상처 받고 미쳐가는 걸 보고 싶어 그러는 것 같아 "둘이 행복하길 바라"말하고는 뒤돌아선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누군가 개구리를 왕자로 바꾸려고 하고 있고, 그 후원자가 노라 딘스 무어이고, 핀은 노라가 에스텔라에게 맞는 상대가 되란 뜻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월터에게 청혼받은 걸 자신을 찾아와 말한 건 그녀를 잡아달라는 뜻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핀은 그녀에게 가 그녀를 끌고 나와 자신의 숙소에서 뜨거운 관계를 갖는다.

핀의 전시회를 찾은 죠

드디어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죠가 나타난다.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죠였지만 핀은 그의 출현이 반갑지가 않다. 마약상으로 죽었다고 거짓말했는데,

점점 분위기는 이상해지고 핀은 죠에게 화를 내고 죠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래도 핀에게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죠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며 멀어지는데 마음이 아펐다.

핀은 성공을 위해 죠와의 과거들 그리고 가난을 , 많은 것들을 지우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핀의 전시회 그림이 다 팔리면서 대성공을 거둔다.

드디어 그녀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이젠 부자가 되었고, 그 모든 것이 에스텔라를 위해서였다.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잔인하게 과거를 지우며 뉴욕의 손을 잡았다. 핀은 그녀를 찾아갔다.

그러나 에스텔라는 월터와 결혼 준비로 떠났고 그곳에는 노라 딘스무어만 있었다.

노라는 월터가 머뭇거릴 때 핀이 때맞춰 나타나 줘서 결혼할 수 있었다 말하고 있다.

 

"넌 애초부터 에스텔라 학습도구였어. 뱀 앞에 쥐를 던져놓고 먹는 법을 가르쳤지.

넌 별 저항도 안 하고 걸려들었어. 난 경고했어. 넌 그 말을 무시했어"

상처 받은 핀은 노라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댄다. 예전 그녀가 했던 것처럼

"이게 뭔지 아세요?" 제 가슴이에요. 멍든 가슴! 느껴져요!"

그때서야 노라는 미안하다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울부짖는다.

노라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그 충격으로 시간을 정지시킨 채 남자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갖고 살았다.

에스텔라와 자신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에스텔라에게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걸 가르쳐주고, 감정 없는 사랑으로 인위적 교육을 시키며 길러낸 것이다. 사내들 가슴을 도려내고 찢어지게 만드는 걸 가르친 것이다.

돈, 명예, 복수, 이 모두가 여갑부의 병적인 집착에서 나온 것이다.

화가된 핀 앞에 나타난 탈옥수 러스티그

상처 받은 핀 앞에 어린 시절 구해준 러스티그가 나타난다. 그는 다시 탈옥해서 지금까지 외국에서 살고 있었다며 자신의 앞에 나타나 그가 화가로 성공한 걸 축하해준다.

"넌 그럴 자격 있어. 나한테 잘해준 유일한 인간이었어."

러스티그는 핀 앞에서 옛날 동료 조직에게 칼에 찔리고 핀의 품에서 변호사 래그노를 시켜 핀을 후원한 의뢰인이 자신임을 말한다. 전시회 그림을 전부 사들인 것도 자신이라고 말이다. 익명의 후원인이 노라가 아닌 러스티그였던 것이다.

평생 나쁜 짓만 했는데 잘한 짓이라면 그건 자신을 유일한 인간으로 대해준 핀에게 자신이 가진 돈 모두를 준 것이라며 핀이 그렸던 어릴 적 그림책을 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인간애로 그를 돌본 것이 그가 핀을 후원했고 그는 핀에게 선과 악을 동시에 보여줬다.

 

핀은 파리로 진출해 원하던 모든 걸 얻었다.

실낙원 저택이 곧 헐릴 거라 갔던 그곳에서 핀은 에스텔라와 그녀의 딸을 만난다. 이혼한 그녀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이곳을 보여주러 온 것이다.

다시 처음 만난 그곳에서 용서해달라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 같은 것들로 증오로 복수로 평생 삶을 물기 하나 없이 살다 간 노라,

조카 에스텔라에게 감정 없는 사랑을 가르치며 인간으로서의 따뜻함을 물려주지 못한 그녀!

아무리 갑부이고, 상류층의 부를 지니고도 삶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물질적 풍요보다 마음속 빈곤으로 삶이 배고프기만 하지 않았는가

평생 나쁜 짓만 하던 러스티그,

한 번도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그가 10살의 어린 남자아이에게 받은 호의를 가슴에 따뜻하게 안은채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 일,

혈육도 아닌 핀을 인간애로 길러준 죠의 사랑 같은 것이야말로 위대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부나 명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가장 풍요로운 것은 인간애라는 것이다.

물려주어야 물질적 유산보다 멍들게 할 가슴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넉넉하고 풍요로운 죠의 따뜻한 인간애라는 걸 알려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인생의 모든 순간, 따뜻한 내면에 흐르는 인간애를 잊지 말자.

 

 

posted by 해이든 2019. 6. 1. 14:10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어린시절을 뜻하는 영화  '보이후드'는 2시간 45분이란 긴 상영시간이 참 지루하게 느껴졌다.


영화평론가들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버드맨보다 이 영화가 상을 받지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 이유를 처음엔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사건없다.

감동없다.

그런데 삶은 보였다.

감독의 의도도 보였다.

12년간의 성장기를 담았다면 2시간 45분은 긴시간이 아니였다.

그저 삶은 죽지않으면 어떤 환경에서든 흐르게 되어있다는 걸 영화를 보는내내 드는 생각이었다.

그저 평범한 삶, 

그냥 최선을 다해 살뿐

생각만큼 인간은 특별하지않다.

다들 소리내고 살고있다.다들 부딪히고 헤매면서 꿈을 늘리고 줄여가며 꿈과 현실의 갭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메이슨은 엄마도 삶의 단계를 밟아가며  사랑하고, 실패하면서 자신만큼 헤매고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아빠는 혼자 떠돌면서 살다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어른도 자신들처럼 헤매고, 어긋나고, 깨지면서 성숙해간다.



텍사스에 살고 있는 올리비아는 아이둘을 데리고 사는 싱글맘이다. 

아이들의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직업도 없이, 경제적도움도 없이 음악적 예술을 담는다는 이유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떠돌아다닌다. 

그는 그저 주말에 한번씩 아이들과 야구장에 가고, 캠핑을 가고,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고 놀아주는 게 다였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경제적 문제에서는 무능하다.

싱글맘으로 자식을 키우기위해서 올리비아는 공부를 더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자 이사를 간다.


어린나이에 피임실패로 아이가 생겼지만 인생엔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올리비아에게  아이들은  더불어 살아 가야할 존재로  삶을 책임지려고 애쓰지만  아빠는 그렇지 못했다.



어린 6살 메이슨주니어(엘라  콜트레인)와 누나 사만다는 엄마의 인생에 인해  낯선 도시로 이사를 계속 다녀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메이슨은 잦은 이사로 인해 친구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소심한 성격으로 성장하게 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많이 못하고 사는 느낌,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느라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성이 부족해 보였다.


이영화는 메이슨의  6살에서 대학생이 되기까지 성장기를 그려낸 것과  가족 전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엄마는 두 번의 알코올 중독자와 만나고, 재혼하고,헤어진다.

그리고 자식들이 성장하여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가 되어 떠나보내게 되자  집을 좁혀 작은 곳으로 이사한다.

젊은 날은 늘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줄이는 게 인생인가보다.

메이슨을 끝으로 

''이제 할일 다했어.이제 하고 싶은거 다 해볼거야.

내둥지에서 내보내는거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진짜인생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짐을 싸 떠나는 메이슨을 보며 인생 참 공허함에 눈물을 흘린다..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결혼하고 애낳고,이혼하고,석사학위타고,교수가 되고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순간에 신이나서 가는 아들을 보며 울분이 솟구치는 것이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떠날줄은 알았지만

결국 내인생은 이렇게 끝나는거야.

이제 뭐가 남았어?

난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무슨 맘인지 알 것 같다. 아니 느껴진다.

누군가를 위해 살다 그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것에서 오는 허무함, 서운함, 누군가의 퍼레이드에 발 맞추어 산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은 무감각해지고 공허가 자리잡는다. 그건 또다른 서러움으로 고개를 든다.

인생은 도착과 출발의 연속이다.

또 인생은 평범함의 굴레속에서 굴러간다.


대학에 들어간 그 첫날 트레킹을 간 그곳에서 친구와 메이슨이 주고 받은 말처럼 순간에 나를 내맡기고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순간을 잡으라고,

나는 그 말을 거꾸로 해야할것 같아.

이 순간이 우릴 붙잡는거지''


''시간은 영원한거지. 순간이라는 건 늘 바로 지금을 말하는거잖아''

어쨌든 인생은 계속된다.



이 감독은 독특하다

아니면 모험이나 실험정신이 강한 사람일 것이다.

실제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무려 12년동안 1년에 한번씩 15분가량의 분량을 촬영 했다는 사실이다.

영화속 주인공들이 한번도 바뀌지않고 계속 성장해가면서, 어른들도 성숙해가면서 인생 그 자체를 그대로 담아낸 다큐멘터리같은 것이다.

영화속에서 그 변화의 흐름을 다 담아낸 것이다. 유행의 변화도 음악적 흐름, 문화적 흐름과 함께 아이도 성장하고 어른도 나이들어가는 것이다.

이 영화촬영방식이 이 영화를 특별하고 대단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감독은 비포시리즈를 제작한 그 감독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5. 31. 15:56

감독 마틴 스콜세지

1976년 작품 '택시 드라이버'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였던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베트남에서 돌아와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는 영화에서 주로 군 점퍼를 입고 등장한다. 그는 아직도 현실로 복귀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더 이상 희생되는 것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켰고, 미군이 철수 후에 미군이 지원하던 남베트남이 패하게 된다. 미국은 결과적으로 패배한 베트남전으로 인해 이미지가 실추되고, 정부가 정치적 무기로 이용하던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싸늘하기까지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장병들은 미국이 패배한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우울한 사회분위기로 미국 내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설 자리가 없었다.

참전 장병들은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정부차원의 지원이나 치료 또한 아주 미비한 수준에 그쳤다.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기도 했지만 패배한 전쟁이 빨리 잊혀지기 바라던 속사정이 더 컸던 것이 아니었을까.

참전용사들은 심각한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정신질환을 겪었고, 일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정부가 이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한참의 세월이 흘러서였다.

택시운전사 '트래비스'

영화 속 주인공 트래비스 역시 베트남 참전용사로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베트남전쟁의 희생양이었다.

트래비스는 심각한 불면증으로 인해 야간택시운전을 시작한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포르노극장이나 자신의 방안에서 보내고 쓰레기 같은 세상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고민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는 택시라는 공간에 갇혀 뉴욕의 밤거리를 떠돈다.

그가 본 뉴욕의 밤거리는 한마디리로 쓸어버려야 할 악의 쓰레기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는데 거리는 온통 마약거래, 성매매, 무차별 폭력과 인종차별로 난무하고, 저런 쓰레기로 득실거리는 것에 대한 불만은 그를 세상과 점점 동떨어지게 만드는 듯하게 보인다.

택시 드라이버 '베티' 역 <시빌 셰퍼드>

어느 날 트래비스는 한 여인에게 반해 다가가 데이트 신청을 한다. 드디어 그가 사회로의 복귀를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상원의원 팔레 타인의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금발 미녀 베티였다.

그러나 그녀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그가 데리고 간 곳은 포르노극장!

자신이 아는 유일한 그곳, 욕망의 찌꺼기들로 가득한 포르노 영화관에 너무나 당연하듯이 데리고 들어간 트래비스로 인해 베티는 적잖이 당황스러워 그의 연락을 피하게 된다.

그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절망에 빠져버린다.

평범함에 녹아들지 못하는 삶, 평범함을 이해 못하는 트래비스는 무기력의 끝에 다다르고 만다.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그에게는 없어 보였다.

참전용사인 자신을 받아줄 깨끗한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도발적인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베티가 일하는 팔레 타인을 죽이고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하겠다고 마치 정의의 수호신처럼 영웅심리에 도취되어간다.

택시 드라이버 '트래비스' 역 <로버트 드 니로>

사회 부적응자는 스스로 위축되거나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쓸데없이 강하고, 사회성이 결여되어 타인과 공동체 참여를 거부하고, 혼자만 현실에서 이방인처럼 행동하는 등 활동력이 점점 둔해지면서 무기력해진다.

현실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정작 자신이 사회 부적응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피해망상과 영웅심리로 무장되어 자신의 불행과 외로움을 사회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비난하게 이른다.

트래비스는 권총을 구입하여 상원의원 팔레 타인을 죽여 그녀의 영웅이 되려고 머리까지 밀고 저격하러 나서지만 그는 현장에서 계획에 실패하고 허둥지둥 도망친 후 목표를 바꿔 어린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구하겠다고 사창가로 향한다.

택시 운전할 때 손님으로 탔던 12살 난 창녀 아이리스를 강제로 끌고 갔던 포주를 살해하는 등 총격전을 벌인다.

언론은 트래비스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며 그를 영웅대접을 해준다.

포주를 죽이고 성매매 현장에서 미성년 자을 구한 영웅이 되는 장면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에게 싸늘한 반응을 보였던 여론과 다르게 그를 미성년자를 고용한 포주를 죽인 영웅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질환자를 영웅으로 포장하는 걸 보면서 감독은 어쩌면 미국 정부를 비판하고 싶은 줄도 모르겠다.

정치인을 저격하려는 택시드라이버 '트래비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을 희생양으로 사지에 몰아놓고 그들이 겪는 정신적 심각한 부상을 외면만 하고 있는 미국정부를 향한 비판 말이다.

베트남전의 실패는 정부의 무능이고, 악용이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 정부를 향한 칼날!

참전용사들이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끝내 자살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안 정부가 무엇을 해주었던가,

사회 부적응자를 베트남전에 대한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치료를 해야 할 피해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영웅으로 말끔하게 포장시키고 있다.

감독은 트래비스를 통해 정부가 그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고립되는 것을 방치했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싸늘하게 버려진 그들의 고통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걸 적나라하게 꼬집는 건 아닐까.

베트남전 참전용사를 바라보는 언론과 정부, 그 모두를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였다.

택시드라이버 -사창가에서의 총격전 '트래비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 로버트 드니로와 어린 조디 포스터의 왠지 낯설다.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와의 관계는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의 모습처럼 끈끈한 관계인 것 같다.

 

posted by 해이든 2019. 5. 31. 12:05

감독 토드 헤인즈

벨벳 골드마인

<벨벳 골드마인>은 '데이빗 보위'의 노래 중 하나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벨벳 골드마인>은 1970년대 영국의 글램 록을 배경으로 록가수 '데이빗 보위'와 '이기 팝'을 각색하여 그려내고 있다.

1970년 초반 영국 런던을 비롯하여 유럽지역에서는 '매혹적인 록'을 의미하는 <글램 록>이 각광받던 시대였다.

글램 록은 음악계뿐 아니라 그들의 패션과 동성애적인 것까지 따라하는 젊은이들로 인해 유행을 불러오면서 영화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게 된다.

변신의 아이콘이었던 영국 런던 출신 뮤지션 '데이빗 보위'와 '이기 팝' 등은 글램 록 아이콘으로 1970년 중후반까지 젊은 세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 인기를 이어갔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멋쟁이들이 가득한 영국 런던에서 이 모든게 시작됐다.

글램 록 뮤지션이었던 '브라이언 슬레이드'(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아름다운 록스타로

제리 디바인과 계약을 하고, 진한 화장, 파격적인 의상, 노골적이고 동성애적인 느낌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며 새로운 문화 트렌트를 이끌어낸 천재적 아티스트이다.

그는 우아했고 허구의 세계에서 어울릴 법한 스타로 자신의 음악이 소외된 자들에게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왜 화장을 하는거죠?'' 기자의 질문에

''락 앤 록은 매춘이기 때문이죠. 야하게 공연해야 됩니다.

음악은 가면이고 전 야한 옷을 입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죠.''

동성애적 느낌을 뿜어내는 그의 이미지, 예술적 감각의 뮤직비디오, 환상적인 연출, 라이브 공연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국 스타일이 이긴다는 그의 말이 맞았다.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으며 그는 슈퍼스타로서 유명세를 등에 업는다.

나는 '브라이언 슬레이드'를 연기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만 눈에 들어왔다.

참 남자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는데 진짜 예뻤다.

기성세대들은 그가 동성애 밝힘증이나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지만 젊은이들은 열광하며 춤추는 분위기였고 새로운 변화와 함께 글램 록 스타가 탄생되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났다

그의 음악과 아름다움이 매혹적인 록 역사를 새로 쓴 것이다.

예술가는 자기 삶으로도 미를 창조한다. 이에 대중들은 환호한다. 그는 가수이면서 예술가였다.

커트 와일드 역 '이완 맥그리거'

커트 와일드는 어릴 적 동성애적인 문제로 전기쇼크 치료를 받았다.

그는 전자기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상해진다. 그의 라이브 공연은 너무 노골적이고 적나라해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완 맥그리거'가 '이기 팝'이라는 가수를 연기한 것인데, 이 공연장면은 연기가 아닌 광기처럼 느껴졌다. 다들 미쳤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커트 와일드(이완 맥그리거)의 이 공연을 보고 예리한 전율을 느끼며 그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두 아티스트의 결합은 브라이언의 음악적 교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커트 와일드와 결합하여 서로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연을 한다.

그러다 점점 마약과 스캔들로 인해 타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끝내는 마찰을 빚으며 결별에 이르게 된다.

브라이언의 아내 맨디(토니 콜렛) 또한 그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처만 입은 채 떠난다.

브라이언 슬레이드 역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월트투어 콘서트에서 가수 브라이언 슬래이드가 무대에서 피격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피격은 속임수였다.

암살되는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너무 크게 벌려서 악의적인 쇼라 비난받는다.

그로 인해 월드 투어와 시상식이 취소되고 인기도 추락하게 된다.

거짓 속에서 헤매다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혔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서 스튜어트 역 '크리스찬 베일'

그리고 10년이 흐른 후, 뉴욕 헤럴드지의 아서 스튜어트(크리스천 베일)는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암살 자작극 10주년을 맞이하여 브라이언의 근황을 취재하라는 특집기사를 맡게 된다.

아서는 10년 전 글램 록 열성팬으로 우상이었던 그의 자작극 공연 현장에 있었다.

시간에 묻혀 우상이었던 브라이언 슬레이드를 잊고 있었는데 취재로 인해 과거에 자신을 열광시키던 감정과 그에게 이끌려 들어갔다.

아서는 사라진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만나며 무대 위 록가수가 아닌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해 두려움 속에서 살다 사라졌다. 그의 매니저도, 전처도, 친구도 그와 연이 끊어졌다.

대중들은 한때 미친 듯이 열광한 것과는 다르게 거품 빠지듯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무대 위에 오른 스타의 인기는 한때 유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스타가 탄생하기까지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이름까지 바꾸고 종적을 감춘 브라이언이 다른 이름의 가수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서는 알게 된다.

그는 화려한 조명을 떠나 살 수 없는 운명처럼 다시 인기에 매달려 노래하고, 또 대중은 자신들의 열광할 수 이미지를 쫒아 그가 예전의 브라이언 슬레이드인지 모르고 새롭게 만들어진 이미지에 환호하고 지지하고 있다.

어쩌면 대중들은 그저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타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스타란 개인적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지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이미지는 계속 변화해야 되고, 그저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가수, 예술인들은 그들의 욕구를 채워줘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지쳐간다.

대중문화라는 것이 그저 유행만을 좇는 것으로 비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뼈가 있어 보이는 이유다.

그 열망이 식으면 유행도 사그라지고 자연히 멀어지고 잊힌다.

 

어쩌면 자작극을 벌여서라도 브라이언을 죽이고 새로운 이미지를 재탄생시켜 인기를 얻으려는 그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음악은 가면이고 이미지만 답인 양 유행만 좇는 대중들을 향해 쏘아 올린 비난은 아니었을까.

 

'생각보다는 이미지가 좋고,

주제보다는 상황이,

긴 것보다는 짧은 비행이,

전형보다는 예외가'

어쩌면 이 말속에 대중이 요구가 있는 것 같고, 그 유행을 만들어내야 하는 소속사나 매체들은 인간보다 스타를 계속 찍어내야 공장이고, 한 개인은 스타가 되는 꿈을 꾸는 순간 꿈은 사라지고 인기만을 쫒게 되는 축 쳐진 세계에 갇히게 된다.

아서는 우연히 커트 와일드를 만나게 된다.

"우린 세상을 바꾸려 했어. 그런데 우리 자신만 바뀌어버렸어."

어쩌면 화려함을 입는 순간, 인기에 얽매이는 순간, 그들이 꾸는 꿈에서 멀어지고, 대중이 원하는 것만 내주며 무대 위에 올라야 했을 것이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들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결국 세상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살아가는 게 스타의 운명인 것 같다.

자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또 꿈을 꾸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보다는 생각이나 가치를 담아내야 하고, 인기나 유행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대중들은 그저 유행에 따라 모방하고 열광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