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6. 11. 00:17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 영화 <어느 가족>

 

이들은 보통 가족이 아니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선택했거나 주워왔다.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어서 서로 기대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말한다. 그 속에 책임도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들이 자신들을 떳떳하게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데에는 훔치는 것에 있다.  그들끼리는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을 일 없어도 남의 물건을 훔치면서 남에게 상처주고 있으며 또 자신들을 단순히 범죄자로 만들어 상처받게 하고 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우선 던져볼까 한다. 핏줄로 이어졌다고 해서 그 모두가 행복했다면 여기 선택에 의해 가족이 된 그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어떻게 버려졌는지 모를 아이를 길에서 주웠고, 부모의 방치로 집앞에서 홀로 있는 아이를 데려왔다.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는데 그 아이의 부모는 이 아이를 원치 않는다. 아이가 사라져도 신고조차 하지 않는 부모라는 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보호받아야 할 부모나 가족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흐르게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할머니 하츠에,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항상 겉돌아야 했던 아키,부모의 학대와 방치속에 있던 유리를 오사무와 노부요는 자신들의 기준으로 자신들의 능력만큼만 끌어안았다. 그들도 상처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신들과 같은 상처받은 이들을 이해하고 안을 수는 있었다. 가진 것 없고 줄 것은 없지만 서로를 할퀴지 않으며 웃으며 소소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범죄까지 미화시키지는 말자. 아이들에게 물건을 훔치게 하고 할머니의 연금을 계속 받기 위해 하츠에를 장례도 없이 집안에 파묻었다.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야 계속 그 연금을 받을 수 있고 그 집에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트 진열대의 생필품들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인을 주고받으며 훔치고 있다.

쇼타는 학교를 다녀야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낮에는 거리를 배회하고 다니고 아버지 노부요와  물건을 훔친다. 물론 이들은 핏줄로 이어진 부자 사이는 아니다.

물건을 훔치고 돌아오다 건물 앞에서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들이 말하는 집은 죽은 남편으로 인해 나오는 연금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하츠에 (키키 키린)의 좁디좁은 집이다.

훔쳐온 생필품으로 살아가거나 할머니 하츠에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가족(?)이다.

저녁만 먹여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러갔던 노부요 시바타 (안도 사쿠라)는 아이의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듣게 되고 여자아이의 부모들이 여자애를 학대하고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여자아이를 데리고 돌아온다.

여자아이는 노부요와 똑같이 부모의 학대로 생긴 다리미에 덴 흉터자국이 있다.

노부요는 여자아이에게 연민이 생기고 유리란 이름을 지어주며 같이 동거하게 된다. 엄연히 유괴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가 사라진 며칠이 지나도 신고를 하지 않는다.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유리가 유괴당했다는 뉴스가 나오게 된다. 그것도 유치원 선생님에 의해  이루어진 신고였다.

<마츠오카 마유>와 <키키 키린>

 

유리(사사키 미유)는 쇼타(죠 카이리)에게 착 붙어 다녔고, 유리 역시 쇼타와 같이 물건을 훔친다. 훔치는 것은 오사무가 가르쳐 준 것으로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어느 날 가게에서 유리와 물건을 훔치고 나오는데 문방구 할아버지가 쇼타를 불러 세운다. 사탕과 과자를 손에 쥐어주며 "이거 가져가고 여동생한테는 도둑질 시키지마."

그동안 할아버지는 쇼타가 훔치는 것을 알고도 눈감아 준 것이었다. 아마 쇼타 마음에 이때부터 훔치는 것에 대한 선악의 혼란이 온 것 같다.

조금씩 흔들렸고 노부요에게 묻게 된다.

그때 노부요가 '훔치는 건 나쁜 거야.'라고 말해주길 바랬지만 그녀는 망해서 가게 문을 닫지 않을 정도면 훔치는 게 크게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 같이 조금씩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유리 역 '사사키 미유', 쇼타 역 '죠 카이리'

그 이후 쇼타가 문방구를 갔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어린 쇼타는 상중의 의미를 모르고 망해서 문을 닫은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쇼타는 다른 가게에서 유리를 밖에 세워두고 혼자만 물건을 훔치러 들어간다.

그런데 유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훔치고 있자 쇼타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위해 직원이 보란 듯이 물건을 훔쳐 도망친다.

유리가 잡히게 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다. 쇼타는 일부러 잡힌 것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쇼타는 크게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쇼타를 제외한 가족은 쇼타로 인해 자신들의 범행이 들통날까 도망가려다 경찰에 모두 붙잡히게 된다. 이로 인해 이 가짜 가족이 세상에 드러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할머니 하츠에가 죽자 그들은 하츠에를 마당에 묻었으니 시체 유기죄가 성립할 것이고, 여자아이를 부모에게 말도 하지 않고 데리고 있었으니 유괴죄가 성립할 것이다. 노부요와 오사무는 경찰조사를 받게 된다.

왜 아이를 유괴했냐는 경찰의 질문에 노부요가 한 대답은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

여형사가 대답한다.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여기서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다는 말에 반박을 하고 싶다. 낳는다고 엄마의 도리를 하지 않는 사람을 다 엄마라고 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꼭 핏줄로 연결되어야만 아이를 사랑하고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랄 환경은 핏줄이든 핏줄이 아니든 어른으로서 만들어 주어야 할 조금의 의지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유리나 쇼타가 그들과 있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리같은 경우는 오히려 부모의 품보다 그들과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성장하는 아이에게 단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건을 아무 죄의식 없이 훔치듯 아이도 주워왔다는 노부요의 세상과 현실의 세상이 좀 다른 것이 사실이다. 노부요는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오사무 대신 혼자 죄를 다 짊어진다.

노부요 역 '안도 사쿠라'

상처가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한 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서로 기대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며 하루 하루를 훔치며 사는 것으로 하루살이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가족이란 것이 그저 모여 상처주지 않는 것으로만 살아가지는 않는다. 가족이기에  기대하고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를, 자식이 올바르게 커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공시키기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으며 달려간다. 그러니 자식에게 거는 기대감도 크고 부모에게 바라는 것도 많은 것이 자식과 부모의 관계이다.

 오사무에게 경찰은 질문한다. "아이게 게 도둑질시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냐?"고.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진짜 부모였다면 쇼타가 다리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자신들만 생각하고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무리 못 배운 부모도 그정도의 선과 악을 구분해서 가르친다.

부모가 되기로 했다면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고려했어야 했다. 결국 오사무와 노부요는 할머니의 연금을 훔치고 쇼타와 유리의 미래를 훔친 셈이다. 물론 그들의 방식으로 그 아이들을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황금종려상 수상작품 <어느 가족>

노부요는 자신들이 쇼타랑 유리를 길러주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라고 것을 느끼며 쇼타가 제대로 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게 놓아주라고 오사무(릴리 프랭키)에게 말한다.

그들이 가진 능력이 그들에게 좋은 환경을 줄 수는 없었지만 노부요와 오사무는 유리와 쇼타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책임져줄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한 것을 깨달은 것뿐이다. 오사무는 아빠에서 이제 아저씨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이 한 집안에 살며 행복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그 가족의 조합을 행복하게 다루지 않는다.  쇼타와 유리는 그래도 그 안에서 따뜻했다. 아빠라고 부르라고 해도 부르지 않던 쇼타가 그 앞에서는 쑥스러워 말 못하고 헤어지고 버스 안에서 가만히 아빠라고 부른다. 비록 배운 것 많지 않은 그들이지만 쇼타에게 아버지처럼 따듯했던 사람이었다. 사회적 눈높이로 보이는 가족이 아닐 뿐 그들끼리는 서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가짜 가족을 통해 진짜 가족안의 나를 들여다보고, 진짜 가족안에서의 나의 행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그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담아내는 가족 영화들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다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등을 많이 봐왔다

그는 이번에도 가족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감독은 가족 내 폭력과 아동학대, 외로운 노인문제, 형제자매간의 불평등한 차별로 인해 상처 받는 모든 문제 되는 것들을 이들이 선택한 가족 안에 담아냈다. 가족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상이 온다면 진짜 가족의 어두운 면이 사라질까? 진짜 건강한 가족의 형태는 무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