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8. 10. 28. 14:04

 

 

이 영화를 근친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장면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근친을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두 남매는 순탄하게 자라지 않은 것 같다.
두 남매가 어릴 적 어떻게 살아왔는지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인지 , 왜 그렇게 둘은 서로를 보듬지 않는지, 왜 그렇게 서로가 상처가 많은 것인지 감독은 보여주지 않는다.

 

shame은 수치심을 의미한다.
포르노로 가득한 그의 컴퓨터가 바이러스를 먹은 것처럼 그의 인생도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사람이다.

깨어나 잠 들때까지 섹스에 중독된 브랜든은 성도착증 환자다.
성도착증은 비정상적인 성적 상상이나 욕구로 강력한 성적 충동과 함께
정상적인 성적 행동에서 벗어난 자극으로만 성적흥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맘이 가는 회사 여동료에게 정상적인 관계에서 그의 성적기능은 불능이었다.
연애하고, 데이트하고, 결혼하는 그 흔한 교류가 그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결핍은 물론이고,
감정이 개입된 정상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내 놓을 줄 모른다.

관계에 대한 결핍으로 자신을 제어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에게 집이란 결핍을 해소하는 곳이고, 자신의 수치심이 담긴 곳이다.
포르노를 보고, 화상채팅을 하고, 콜걸을 불러 섹스를 나누고, 야한 잡지 등으로 온통 너저분한 공간에 여동생 씨씨가 침범한다. 동생에게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다 들킨 그는 폭발한다

수치심을 자극시킨 것이다. 또 동생의 등장은 관계에 결핍된 그의 생활을 건들인다.

오고 갈 곳이 없는 동생은  "오빠니까 가족이니까 서로 돌봐줘야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는 동생에게  "넌 내가 끌어안은 부담이야. 넌 날 가라앉게 해."
결혼으로 인한 관계도, 가족으로 다가오는 여동생도 자신이 떠안아야 되는 부담이라 말하는 거로 봐서
그는 가족과 사람들의 관계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오빤 아무도 없지! 나와 변태 같은 상사뿐이지"
씨씨는 클럽 가수이다. 관계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다.
오고 갈때 없는 자신을 오빠라는 사람이 돌봐줘야 하는 거라고 말하고, 맘이 떠난 애인에게 전화로 매달리는 거로 봐서 씨씨의 삶은 의존형이다.

씨씨의 팔에 자해 흔적들은 그녀가 얼마나 상처와 마주했고 그때마다 오빠에게 전화메세지를 보내지만 오빠는 외면한다.

그 두남매는 지독히도 외로운 삶을 지독히도 비정상적인 해소를 하며 살아온 것 같다.

지독한 외로움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듯했다. 외면만 했던 동생의 외로움은 자신의 내면과도 닮아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의 손목에 수없이 그어진 자해 흔적은 자신의 성적 장애와도  닮아 있다.
사람들 속에서 왜 자신들은 정상적으로 관계를 이루며 살 수 없는 걸까?

지나치게 성에 의존하는 브랜든과 지나치게 관계에 의존한 씨씨의 결핍현대사회의 자화상같은 걸 그리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실로 인간관계가 상실된 현대인들은 외로움에 노출되어 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저마다 자신만의 동굴을 판다.
상처가 많은 두 남매의 관계결핍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아프게 그려 냈다.

현대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분리와 소외되는 외로운 삶들이 자신의 삶에 침투한 결핍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였다.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단지 상처가 많을 뿐인 거야."
씨씨의 대사처럼, 우리는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위로받으며 살아야 되는 존재들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터질 것 같은 감정은 숨이 멎은 듯이 나를 흡수했다.  그의 오열이, 그의 절규가 아프다.

남자의 수치심을 가슴 먹먹하게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의 표정 하나 하나가 다 살아있어서 좋았다.

스티븐 맥퀸 영화에는 항상 마이클 패스벤더가 등장한다. [헝거]에서도 [노예 12년]에서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포스터가 영화를 더 잘 표현해 낸 것 같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8. 9. 23. 18:53

                              

영화 나 없는 내인생

23살에 내려진 암선고,

여기서 멈추었다.
겨우 2달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나 있는 삶을 준비한다.

 

17살에 만난 남자와 첫사랑을 하고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빠로 관계를 맺었다. 
능력 없는 남편으로 경제적인 터전을 만들고 못하고 친정 엄마 마당에 트레일러안에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앤(사라 폴리)은 23살에 자신에게 닥친 이 절망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야간 청소부로 일하고 6살, 4살 두 딸의 엄마이기도 한 자신의 자리....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낳고 가정의 경제까지 짊어지고 산 삶에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후회하고 아퍼할 시간도 원망하고 미워할 시간도, 흔들릴 시간도 그녀에게는 없다. 
 
가족들이 같이 흔들리고 좌절하는 걸 지켜보는 것 또한 그녀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더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조용히 삶을 정리하려고 죽기전에 하고 싶은 10가지 리스트를 작성한다. 삶에 미련을 가지고 흔들릴 시간이 없었기에 운명처럼 받아 들인다,
나 없어도 이들은 살아갈 것이다.

 

나 없어도 이들은 금방 적응할 것이고, 나 없어도 이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없는 내일이 이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나만 지금 끄덕거리고 있고 나만 지금 휘청거리고 있고 나에게만 내일이 미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는 과거로 남겨질 것이다. 

그래서 내게 부여된 2달을  날 위해 적어보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나름 행복했다. 자신의 몸에 자란 암세포를 끌어안고 울지 않는다. 무심하게 두달이지만 자신을 향한 여행보따리를 싸듯 엄마의 죽음으로 아내의 죽음으로 이어진 그들의 삶과 자신을 삶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10가지 리스트 내용을 보면 그녀가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자와 남겨놓고 가야 하는 자의 입장으로 연결고리를 이어놓은 것 같았다. 

 

비록 삶과 죽음으로 나뉘지만 그건 왠지 다른 건물에 들어가 있을뿐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진 것 같이 말이다.

 

그녀의 리스트는 남편에게 착한 신부감 구해주기, 애들의 18살이 될 때까지  생일 축하 메세지 녹음하기, 담배와 술을 맘껏 즐겨보기, 딸들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보기, 감옥에 계신 아빠 만나기, 머리 모양 바꾸기, 날 몸 바쳐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들기...등  
사는 모습이다. 누군가 사는 사람의 계획을 보는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의 리스트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통해서 또는 그들을 통해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들의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에서 그녀는 그들의 시작에 자신을 올려놓은 것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8. 9. 23. 12:50

 

미국에서 발생한 실제 에어 프랑스 도난 사건, 루프트한자 도난 사건을 근간으로  3명의 갱스터 토미 데비토 ,지미 콘웨이,헨리 힐  30여년의  삶을 그린 영화, <좋은 친구들>이다.

 

 

청소년이었던 헨리 힐(레이 리오타)의 눈에 대통령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갱스터!

그는 항상 갱스터가 되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고, 그 세상에 속하고 싶었다. 헨리는 폴리의 심부름을 해주며 그 세상에 들어갔고 그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자신들이 원하면 가지면 되는 세상,아무도 그들을 건들 수 없다 생각했다.  자신을 달리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린 헨리는 그들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여겼다.

어느 날 그 바닥에서 알려진 지미 콘웨이(로버트 드니 로)를 알게 된다. 그의 주 특기는 트럭을 훔치는 것이었다. 트럭을 훔쳐 그 물건들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  지미의 소개로 토미 데비토(조 페시)를 알게 된 후 세 사람은  항상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돈이 필요하면 공항 화물을 훔쳤고 원하면 남의 것을 가지면서 말이다.

 

 

21살의 헨리는 카렌(로레인 브라코)이란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결혼 후 알게 된 카렌은 그에게 매료되어 그를 떠날 수 조차 없었다. 항상 갱스터의 군중속에서 함께 했고 점차 그의 삶에 익숙해졌다.

그는 빌의 심부름을 하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돈으로 경찰, 변호사, 판사를 매수했던 그들은 감옥안에서도 다른 생활을 했다. 매수된 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몫을 챙기고 갱들의 온갖 나쁜 짓을 덮어주었다. 그런 자들이  존재했기에 그들의 무법천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헨리는 감옥에서 나와 지미, 토미, 그리고 다른 조직원들과 루프트 한자 공항 화물을 거액의 금액을 털게 된다. 하지만 강도 사건 후 몇 달이 지나 조직원들은 하나둘 시체로 발견되었다. 훔친 돈을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지미는 돈 대신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그들을 차례차례 제거했다. 그리고 헨리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혹시나 헨리가 밀고할까 지미는 불안했고 헨리는 지미가 자신을 죽일까 불안했다.

 

 

토미는 마피아 조직의 빌리 배츠를 죽인 대가로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헨리는 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폴리는 헨리에게 마약을 팔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고 화를 낸다. 폴리는 주머니에서 현금뭉치를 꺼내 헨리에게 건네며 우리 관계는 끝났다고 말한다. 평생 봉사한 것에 대한 보상치고는 관값도 되지 않음에 크게 실망한 헨리. 마약을 판매하는 헨리로 인해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고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좋은 친구라 칭했던 그들로부터 외면받고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향해 살인의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친구라 믿었던....

 

 

그는 죽지 않기 위해서는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미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눈치 챈 이상, 살기 위해 그들을 쳐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바친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갱들의 세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세상이었다. 헨리는 경찰서에 찾아가 증인보호프로그램에 신청하고 폴리와 지미의 범죄를 다 증언한다. 헨리는 증인보호시설에서 폴과 지미는 감옥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과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좋은 친구들>이 갖는 진짜 의미는 나쁜 친구들을 말함인가.

 

 

 

 

posted by 해이든 2018. 9. 16. 15:36

밀양, 빛이 빽빽하게 모인 이 곳에서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허락지 않은 용서를 한 하느님을 향해 보란 듯 자신의 고통을 널어놓는다.

보이는 것도 안믿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했던 건 아들을 잃고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고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고통에서  그나마 목구멍을 통해   눈물이란 걸 토해내게 해 주어서다. 원수도 용서하라는 그 뜻에 따라 아들을 빼앗아 간 살인범을 용서하려 했다. 아니 죽을 힘을 다해 용서해보려 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믿고자 했고, 그 뜻을 전하고자 했고 힘겹게 용서란 걸 하려고 했다. 그런데 산산히 부서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을 눈물로 덜어내주고 살아짐에 살아진다고 믿고 당신에게 기대려했는데 내 안에 당신을 끌여들였는데 아들을 지키지 못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 용서받고 싶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100% 진심으로 끌어올린 건 아니지만 용서란 걸 허하여  죄를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는데  하느님, 당신이 그 죄많은 사람을 먼저 용서하였다 한다. 난 이렇게 가슴이 짓이기듯 아픈데 아직도 찢어지는 고통에 매일이 힘든데  내가 그 살인범을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었는데  하느님이 그를 너무 쉽게 용서해 버림에  억장이 무너진다. 범인이 죄를 용서받고 평안하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다고 믿었던 하느님의 뜻이 거짓말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 삶에 빛을 허하실 생각이 없던 거였고, 당신은 애초에 나의 아픔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죄 많은 그가 저리 쉽게 용서받고 교도소 안에서 너무 건강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니,축복은 그 쪽에만 행복도 그곳에만 비추어지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죄 지은 사람에게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주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이제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지,죄라는 걸 열심히 펼쳐 볼테니 보라고, 당신이 볼 수 있는 곳에 햇빛 비치는 밝은 곳에서 보여줄테니 보라고....

 

슬퍼할 자격도 없는 엄마라서 스스로 가두어버렸는데 햇볕 한 줌에도 다 뜻이 있다 하여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해준다 믿었는데 죄를 지은 범인에게 한 용서로 인해 신애의 고통에 소금을 뿌렸다.

어떤 사람은 슬프면 소리지르고 기절하고 내보낼 수 있는 눈물로 목구멍으로 토해내듯 쏟아낸다. 그런 사람을 보면 그래 다 쏟아라.  바닥까지 빡빡 긁어내 다 비우면 뭔가 다시 채워질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슬퍼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몸의 구멍은 다 닫혀버린 듯 쏟아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걱정이 된다. 어찌 되는 거 아닌가, 저러다 미쳐버리는 건 아닌가, 아슬아슬하고 위험해보인다. 고여 썩지 않을까, 곪지는 않을까, 부패하지 않을까, 그러다 끝내 삶을 놓아버리지는 않을까.

 

신애가 그래보였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무엇에 빗대어 말해야 통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가. 죽은 남편의 고향에서 자신을 아는 이 하나 없는 밀양에서 인생을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세팅하고 싶었는데  새롭게 출발하고자 연고지 하나 없는 이곳 밀양까지 왔는데 아들마저 하늘은 빼앗아 가버렸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모든 것을 잃고 그녀는 삶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신애는 밀양에 피아노 학원을 열었다. 그는 얼마 있지도 않은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좋은 땅을 소개해달라며 말하고 다닌다. 남편 죽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과부를 보며 사람들은 측은해 한다. 그녀는 그런 눈빛이 싫었다.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속으로는 어찌됐든 겉으로나마 씩씩해보이고 싶었고  땅 살만큼 돈이 있다는 걸 과시하려했던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말라는 신애 나름의 발악이었다. 서울 여자가 시골로 그것도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와 살려고 했던 건 그녀는 도시에서 아이와 살 경제적 여력도 되지 않았고 남편의 배신도 남편의 죽음으로 젊은 나이에 혼자도 된 자신을 향한 동정의 눈빛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아는 이 하나 없는 남편의 고향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말들이 많다. 생각해준답시고 위로해준답시고 건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무시하는 사람들보다 무관심한 사람들보다 더 아프게 다가와 꽂힌다. 위로의 말도 불쌍하게 보는 것도 다 싫다. 남에게 초라하게 보여지는 자신을 감당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밀양으로 내려와버렸다. 집을 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들 준과 함께 무작정 밀양을 향해 내려왔다.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곳으로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곳으로 죽은 남편의 고향이라는 연줄 하나 가지고 남편에게 사랑받았던 여자로 남편을 못 잊고 사랑하는 여자로 여겨지게 자신을 쉽게 보지 않게 새로운 삶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도 없이 돈도 없이 아들 데리고 사는 과부로 보이기 싫었다. 돈이라도 있어 초라하지 않다고 가려보려 거짓말을 했다. 땅에 투자할 만큼 돈을 가지고 있는 여자처럼 있는 척 했던 것이다. 땅을 보러 다니는 자신의 행동이 아들의 삶을 앗아가버렸다.

돈을 노린 유괴범이 아들을 유괴한 것이다. 아들을 유괴한 남자에게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고를 다 찾아 넘겨주었다. 유괴범은 얼마되지 않은 돈 때문에 신애에게 전화로 화를 내고 있다.

가진 게 그게 다라고, 있는 척 하려고 거짓말 한 거다. 남편 연금으로 빚 갚고 여기 집 구하고 남은 게 그거뿐이다. 자신을 결국 다 드러내고 동정을 구했다. 동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도로 동정을 구한다. 아들을 돌려달라고..

아들 준은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시체가 발견된 날도 햇볕 좋은 날이었다. 하늘은 너무 맑고 밝은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 자신을 현실 밖으로 보내버린 것인지 아들의 시체 앞에서도 아들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못했다. 못한 것이었다. 아들의 죽음도, 자신도 스스로 박제시켜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가두어버렸다.

이제 정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다 잃은 마당에 살아가고 싶을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아들 흉내를 내며 아들의 음성 테이프를 들으며.

 

난 아들 잃은 엄마 신애만 보였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신애 역시 종찬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 그녀에게 빛 한줌이 들어서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어떻게든 어울려 보내지만 그녀는 누군가 받쳐주지 않으며 금방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종찬(송강호)은 그런 그녀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유괴범과 마주할 때도,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러 간 날도, 길에서 짓누르는 고통으로 가슴을 움켜잡을  때도,교회에서 처음으로 목구멍 밖으로 소리내어 통곡할 때도, 그녀가 종교에 의지해 교회를 다닐때도, 교도소에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찾아갈 때도,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그녀 옆에 항상 있었다. 신애가 신경쓰든 말든.

고통스러워도 살아진다고 하는 삶, 아들과 살아보려는 밀양에서 아들이 죽었다. 모든 걸 잃은 여자, 그녀의 삶에 앞으로 무얼 담을 수 있을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하늘을 노려보며 화내는 신애 온전하다 말할 수 없었다. 종교에 기대어 안보이는 것에 기대어 숨으려 헸는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러 교도소로 살해범을 면회간 날, 그녀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만다. 빛이 그곳에만 비추듯 범인은 너무 평안해 보였다. 정작 고통속에 살아야 할 자가 하느님이 용서해주어 평온을 찾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무슨 권리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느냐고.

어떻게 해야 신애가 살수 있을까, 사람을 살게 하거나 고통으로부터 버티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중에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그 중에 미워하는 마음도 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했다면 지금 신애는 하느님을 미워하며 버티고 있다. 모든 것을 빼앗가 가는 것도 모잘라 살인자를 용서하고 그가 사는 세상을 지옥이 아닌 천국을 만들어 놓았다.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하느님이 죄인의 삶에 빛을 비추어주었다. 그래서 하느님이 보란듯이 죄를 짓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했다. 죄 짓고도 저리 쉽게 용서받고 행복해지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그래 발악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혹독한 걸음이다.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이상, 하늘을 마주해야 한다.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있음에도 삶은 계속된다. 아침은 어김없이 오고 밤 역시 어김없이 온다. 사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또한 죽는 것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다 똑같다는 종찬의 말처럼 사람 사는 곳이라면 사람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가 있고, 빛과 그림자가 있다.

솔직히 힘들어하는 신애만 보여 종찬의 서툰 표현방식이 탐탁치는 않았다. 신애와 종찬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안다. 그림자처럼 옆에 있어주는 사랑이 흔하지 않다는 걸, 저런 사랑이 요즘 같은 세상에 많지 않다는 걸....

밀양이라는 도시, 연기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웃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2007년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한국 배우 최초로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종찬이 신애를 뒤에서 묵묵히 있어줬듯이 송강호가 전도연이 빛나게 해준 면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