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배경 영화'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9.03.21 107. 피아노 :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21. 16:50

피아노


감독 제인 캠피온

 

 

이 영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참어려웠다. 영화를 통해서 머리는 이해되는데 가슴에서는 쳐내는 경우가 있고, 가슴으로 이해되지만 머리속에서 부정하는 경우가 있다.
또 영화의 캐릭터에 몰입하여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응원하게 되거나 경멸하기도 한다. 
어느 방향이든 선과 악으로 나뉘거나 거짓과 진실로 다가와 속삭이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타협점을 찾아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제대로 무엇인가를 줄 수도 내놓을 수도 없이 혼란스럽다. 

물론 이 영화를 벌써 3번째 보고 있다. 
처음 이 영화가 개봉 되었을 때 부산 남포동에 자리한 극장에서 봤다. 
난 그때 부산으로 휴가를 갔고 이 영화포스터에 끌려 선택하게 되어 본 영화이다. 

 

수많은 시간이 나와 함께 흘러갔다. 그래도 이 영화는 강인하게 남아 있다. 

스토리적인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 놓인 피아노, 바닷가에서 퍼지는 피아노 선율, 뉴질랜드의 풍경, 그리고 그녀가 피아노 앞에서 하얀 건반을 홀린 듯이 치는 모습과 그녀의 잘룩한 허리와 목선, 말 못 하는 여주인공과 그의 딸 등 그렇게 장면 장면 박힌 기억들이 생생하다. 

감정에 몰입되어 감동을 받았다거나 스토리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날 물들이지는 못했다. 
 
그 때는 난 그 여자의 사랑에 동요된 건 같지는 않다. 단지 피아노를 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엄마가 성장하지 않고 딸아이의 시간과 같이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이 영화를 두 세번 더 보면서 나름 몰입하려고 해 봤다.
시대적 배경이나 여성감독의 메시지에 관점을 두고 보기도 했지만 역시 보고나면 개운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여주인공 에이다 맥그레스(홀리 헌터)는 
'이상하게도 난 내가 침묵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피아노 때문이다.'

그녀는 벙어리가 아니다. 말을 안하는 것이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여섯 살 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어만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가 말을 안 한다고 해서 답답하지 않았다.

피아노로, 글로, 손가락으로, 그리고 딸 플로라로 자신의 생각과 언어들을 세상에 다 내보내고 있었다. 

20대의 미혼모였던 에이다에게는 아홉살 난 사생아 딸 '플로라'가 있다. 

거의 모든 시간을 피아노와 플로라와 함께 했다. 

 

19세기 말, 여성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은 억압된 것이었다. 남자들의 지배속에 권위적인 아버지와 남편들의 종속적인 존재였다. 
감독역시 이 영화에 페미니즘을 담고 있다. 

그녀가 입은 검은색옷과 검은 모자는 왠지 자기 색을 낼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여성으로서 삶의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가 소리 낸들 전해지기나 하겠냐 말이지, 그래서 에이다를 침묵시키는 것으로 설정해서 감독은 억압된 여성의 삶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결혼 역시 에이다의 의사는 하나도 없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시집보내려한다. 그래서 나는 딸과 함깨 남편의 나라로 떠나야 한다.'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넘어간 소유권처럼 편지 한 장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넘어간 것이다.
남편이 될 사람은 에이다가 말을 못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 또한 그저 순종하기를 바라는 것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만 알아들음 되지'남성위주의 소통방식이라는 것으로 들린다.

모녀를 데려가기 위해 해변가에 도착한 남편 스튜어트(샘 닐)는 짐을 나를 원주민을 데리고 왔지만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아노를 해변에 두고 간다.

그녀는 피아노를 가져가야 한다고 글을 써서 스튜어트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딸 플로라(안나 파킨)에게 수화로 의사를 전달하지만 무시된다.

원주민 땅을 지나쳐 가는 길은  미개척지로 가는 길로 험난했다. 

에이다는 해변가에 놓인 자신의 피아노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녀에게 피아노가 어떤 의미인지 남편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남편이 피아노를 가지고 가 주었더라면,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했더라면 달라졌을 것이다. 

결혼식도 없이 달랑 사진 한 장 찍고 그들은 형식적인 부부가 되었지만 에이다는 딸과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남편 역시 그녀가 여기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겼다. 
스튜어트가 땅문제로 집을 며칠 떠나게 되자 에이다는 원주민 베인스를 찾아가 피아노가 있는 해변가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안된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딸과 무작정 집 앞에서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피아노 있는 해변가에 데려다 주자 에이다는 너무 행복한 미소를 자아내며 피아노를 연주했다.

플로라는 피아노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그 에이다의 모습에 반해 버리고 마는 베인스,
에이다는 딸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들을 가치가 없다'라 말했다. 

에이다에게 피아노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주는 유일한 소통의 도구였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인 셈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그녀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짓게 한다. 

 
침묵하게 만드는 현실로부터 유일하게 자신을 채워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피아노의 선율이야말로 자신을 살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힘인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슬픔, 아픔, 외로움, 욕망, 그 모든 내적 자아를 피아노를 통해 내뿜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피아노 선율은 그녀의 감정인 것이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의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한 모습뿐이다.
유일하게 딸과 침대에서 장난치고 잠들 때 빼고는 사람들과 있을 때의 표정은 완전히 석고상처럼 물기를 다 뺐다.
그녀에게 있어 손은 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그녀의 딸과 소통하는 도구이고, 피아노를 연주해 자신의 내적 자아와 소통하고 교류한다. 

 

남편 스튜어트는 베인스가 피아노와 땅을 교환하자는 말에 피아노 주인인 에이다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넘겨 버린다.

그리고 베인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라고 한다. 분노하며 펄쩍 뛰는 에이다를 향해 버럭 화를 낸다.

희생을 강요한다. 어짜피 에이다도 피아노도 그에게는 재산목록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저 얻은 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게 그의 실수였다. 한 번쯤은 피아노가 아내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했다. 일방적인 언어말고 쌍방향적인 소통이 가져올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베인스는 어떨까?

베인스는 해변가에서 피아노 선율에 반한 게 아니다. 피아노치는 그녀의 모습에 반한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피아노를 원하는 내면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피아노를 가져오고,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조율하고, 그리고 피아노 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레슨을 핑계로 피아노와 땅을 교환한 것이다. 
베인스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로 인해 잠도 못자고, 못 먹는 열병 같은 사랑으로 그녀가 마음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게 사랑일 때가 있다. 참을 수 없는 게 사랑이라 했던가, 그녀가 피아노 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점점 자신을 추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걸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에이다 역시 베인스가 그녀에게 느끼는 갈증만큼이나 피아노에 대한 갈증이 그러했다. 치맛단을 걷어올리면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넘기겠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피아노에 대한 갈망을 베인스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걸 스튜어트가 모르는 걸 베인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걸 주겠다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간다. 그리고 그 수위는 더 높아지고 피아노를 빨리 소유하겠다는 그녀의 열망도 더 높아져 그가 원하는 것에 동참한다. 

하지만 먹지도 못할 사과를 눈으로 보고 만지기만 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베인스는 피아노를 그녀에게 넘겨준다. 스튜어트는 피아노를 넘기는 베인스에게 땅값을 지불할 돈이 없다고 피아노를 못 받겠다고 한다. 땅값 필요없으니 그냥 당신 아내에게 그냥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열망했던 피아노가 자신의 집에 놓였는데, 그녀는 피아노를 칠 수가 없다. 그녀는 혼란스럽다.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가에 강하게 끌리고 베인스를 찾아간다. 

베인스는 힘들다고 한다. 맘이 아프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자를 안는 건 아니라며 자신에게 맘이 있는 게 아니라면 가라고 매몰차게 내몰려한다. 

에이다는 그런 그를 사정없이 때리며 주저 앉고, 그녀 역시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베인스를 향한 사랑임을 알게 되고,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스튜어트가 이 장면을 문틈으로 목격하게 된다. 스튜어트는 그녀를 방 안에서 못 나가게 가두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무의식적으로 남편의 몸을 손으로 연주하듯 어루만진다. 하지만 남편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피아노로 내적 자아를 표출하던 그녀가 베인스로 인해 욕망과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감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남편의 몸을 무의식적으로 만지며 자신 안에 있는 베인스에 대한 사랑과 갈망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이미 스튜어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튜어트는 그녀가 자신에게 맘을 열어주기를 기다렸고, 그녀를 믿고 가두었던 창문도 뜯어내고 일하러 간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소중히 여기던 피아노 건반하나를 뜯어내 베인스에게 '내 마음은 당신 꺼'이라는 글을 적어 딸 플로라를 시켜 베인스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플로라는 그 건반을 베인스가 아닌 스튜어트에게 갖다주고,스튜어트는 믿음을 무참히 깨버린 에이다에게 분노한 나머지 날개를 꺾어버리겠다고 에이다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플로라에게 시켜 베인스에게 갖다 주라고 한다.
 
열이 펄펄 나던 에이다의 옆을 지키던 스튜어트는 분명 아내를 사랑하기는 한다. 하지만 에이다가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원하는 사랑을 갖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베인스를 찾아간 스튜어트는 에이다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느냐를 묻는다.

없다고 말하자, 베인스에게 자신은 에이다가 말하는 것을 머리로 들었다고 말한다. 

"내 의지가 두려워요. 베인스와 떠나게 해줘요" 이렇게 말이 아닌 머리로 들렸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에이다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진정 마음으로, 그리고 에이다가 원하는  베인스에게 에이다를 데리고 떠나라고 한다. 

 

베인스는 작은 배에 어떻게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피아노를 싣고 가려고 한다. 원주민들은 피아노를 버리고 가야 된다고 하지만 베인스는 안된다고 싣고 출발한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바다에 버리라고 한다. 
처음 이 해변가에 버려진 피아노를 그렇게 가져가기를 열망했던 에이다가 이젠 사랑하는 사람과 이 해변가를 떠나며 피아노를 버리고 가자는 것이다.
피아노는 바다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베인스와 사랑을 하고 입으로 소리내는 법을 익히고 있다. 소통이라는 것은 상대가 들어주었을 때 진정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