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20. 7. 4. 12:42


자비에 둘란 감독의 영화 [마미]는
사랑과 구원은 별개라는 주제로 아들을 향한 엄마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엄마가 아들을 덜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 시간이 갈수록 너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거야. 넌 갈수록 엄마를 덜 사랑하겠지만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니 적응해야 돼. 그게 세상 섭리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부모자식간에 끝은 없다. 설사 죽는다한들 부모 자식의 관계가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끝나지 않는 관계, 자식이 잘 살든 못 살든 그들의 희로애락, 굽이굽이 지켜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인생이다.

마흔여섯 살의 디안, ADHD증후군과 애착장애를 가진 통제되지 않는 16살의 아들 스티브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엄마이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러 삶의 주름이 펴지지 않아 제대로 쉴 수도  없지만 아들과 평범한 삶을 사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현재가 고단하고 힘들지만 훗날 이 또한 추억이라 기억할 만큼 다 지나가리라는 희망,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리란 희망, 무거운 어깨가 조금씩 가벼워지리란 희망 말이다.



아들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은 앞집 카일라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준 건 다름 아닌 상처 투성이 디안과 스티브다. 스티브는 카일라에게 마음을 열고 카일라는 디안과 스티브에게 마음을 연다.
카일라는 다시 세상 밖으로 질주하고, 시설에서 나와 엄마와 살게 된 스티브는 자유에 입 맞추고, 아들과 함께라서 따분할 틈이 없는 디안은 작은 희망에 부푼다.

모두가 세상에 맞설 용기와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고 산다. 또 누구나 극복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작은 위안이, 작은 관심이 큰 물살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고통이 즐비하게 늘어져도 헤쳐나갈 원동력은 가족이고 사랑이다.

이제 세상 밖으로 질주하면 되는데 현실의 벽은 자주 앞을 가로 막아선다.
아들을 다시 시설로 돌려보내는 선택을 하고 만 디안, 그로 인해 멀어진 카일라, 자유를 억압당한 스티브.
다시 좁고 어두워진 세상.
디안은  태연한 척 겉을 포장했지만 속은  깊은 상실의 아픔과 죄책감과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신을 누구보다 자책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무거운 현실의 껍질에 둘러싸여  나만 그 속에서 초라한가, 나만 아픈가. 남의 시선에 아들을 시설에 버린 무정한 엄마로 비쳐지려나, 아무리 겉을 단단하게 무장해도 여린 속까지 커버되는 건 아닌 디안, 엄마니까 강해지려 애쓰는 중이다.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을 구원할 수 있는 건 나뿐이지, 자식을 사랑할 사람도 나뿐이지'라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자식이니까 조금씩 삐걱거리고 부딪히면서도 사랑으로 품고 나아간다.
하지만 사랑과 구원이 별개라는 말에 경험으로 공감하게 된다. 사랑 하나면 다 될 것 같은 마음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 벽에 막혀 다시 아들을 시설로 돌려보내는 선택을 하고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희망을 잡고 꿈을 꾼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포커 같다. 그녀는 애초에 패할 패로 인생에 뛰어든 것일까? 형편없는 패로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만 삶, 혼자 치면 낭패는 없을텐데.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부모로 살면서 몇 번을 되뇌고 살았을까?
스티브 없이 혼자였다면 그녀는 잘 살았을까?
내가 부모임에, 엄마로 살아감에 카일라의 상실도 디안의 현실도 다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그대로 내보내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옳든 아니든 자신에게 맞는 최선책을 찾으며 나름대로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낸다.

디안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 디안의 감정에 어떻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아프게 만든 어미의 심장을 어떤 고통에 빗대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고통을 경험한 카일라가 하는 말이라 솔직히 잔인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인 사람이 아들을 시설에 보내야 했던 엄마인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 그녀의 쥐어짜는 고통의 연기가 오롯이 전해져 왔다. 어느 누구도 당사자의 아픔만큼 클 수는 없다. 오로지 그녀의 몫이다. 아픔도, 절망도, 희망도.


슬픔을 타인에게 내보이지 않으려 디안은 애써 밝은 척했다. 겉으로 속을 속단하는 카일라, 그냥 안아주며 토닥토닥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자신은 맞서지 않고 숨으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디안도 자신처럼 슬픔에 잠겨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디안은 그렇게 지낼 수 없다.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고단한 삶이라, 힘을 내지 않으면 아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기에.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
가족의 인정, 이웃의 인정, 세상의 인정.
'나는 그런 인정 따윈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자체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다. 잘하고 싶은 욕구 자체가 그렇다. 보이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