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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09 84.디센던트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
  2. 2019.01.19 29. 안녕, 헤이즐
posted by 해이든 2019. 3. 9. 20:04

디센던트(descendant)


감독 알렉산더 페인  

영화 디센던트

 

사람들은 가족으로 인해 행복하다. 하지만 가족이 행복만 주는 존재들일까? 가족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이라면 그저 남이라면 무시하고 상처받을 가슴도 내 주지 않겠지만 가족이라면 다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그들만의 방식과 그들만의 언어가 숨쉬기 때문이다. 
사는 건 비슷비슷하다.  부자건 가난하건, 남자거나 여자거나,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그런 관계로 엮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같은 삶으로 풀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협하고, 배제하고, 갈등하며, 증오하고, 사랑하고 수많은 문장들이 휘어져 파도처럼 일렁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고,또  햇살아래 놓인 평화로운 오후이기도 되어주기도 한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슬픔이 클수록 놓았던 손을 더 움켜잡는 게 가족이기도 하다.
남들이  덤벼들수록 가족이란 손은 더 서로를 위해 안아주고 잡아주기도 한다.
외부공격이 더 거세질수록 분해된 힘을 합쳐 더 강하게 만드는 게  가족이기때문이다. 
내 가족의 허물이기에 용서하려고 한다. 더 강하게 잡아주지 못한 자신의 허물이기도 하니깐.
미안함이 커지니까. 혼자 외롭게 내 버려둔 자신의 무관심이 더 큰 죄라고 여기니깐.
그런 마음으로 이 영화를 느꼈다.
남이 주는 상처는 어느 정도 외면할 수 있는데 가족이 주는 상처는 참 오래 간다.
 하지만 더 큰 맘으로 안아주면 눈녹듯 녹는 것이다.
상처주는 그 이면에 더 큰 사랑이 있다는 걸 보았기때문에 그래서 상처는  봄날의 소나기처럼 지나갔다
맷과 두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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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인 맷(조지 클루니)의 아내가 보트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게 된다.

일만 하다가 아내와 두 딸에게 제대로 신경도 못 써 주는 사이에 아내는 병원에 누워 의식이 없고, 부쩍 커버린 두 딸은 어색하고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나름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다. 하지만 가정에는 소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각자 외로운 섬처럼  다 분리되어 살고 있다. 서로로부터 점차 멀어진 거리만큼 소통도 힘이 든다. 보이는 거라고 부자라는 것뿐이다.

뭐, 이정도야 어느 가정이나 뻔하고 뻔한 현실적인 가정을 보여준다. 애들을 보살피는 건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 딸들을 챙겨야 하는 아빠는 너무 서툴고 버겁다.
그저 나중에 유산으로 내려오는 땅을 팔아 아내가 바라는 대로 보트를 사서 멋진 삶을 살려고 준비하기만 했지...현재 아내와 아이들의 삶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저 돈만 벌어다 주는 가장의 자리에만 있었지, 아내와 딸이 바라보는 시선에 머물러 주지 못한 것이다.

아내의 사고로 사회의 일원이 아닌 가족의 생활로 들어온 맷은 엄마와 사이가 안 좋아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큰딸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엄마의 사고소식과 함께 가망이 없는 엄마의 호흡기를 떼고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큰 딸 알렉산드라(쉐일린 우들리)는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말을 맷에게 전한다.  맷과 이혼까지 생각하고 브라이언이라는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맷은 배신감에 어찌 할 줄을 모른다.
맷과 두딸, 그리고 큰딸의 남자친구
딸의 남자친구가 딸을 만지는 걸 못 만지게 하자 "아저씨가 아줌마를 안만져주니까 외도하잖아요." 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도 유쾌하게 말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네 잘못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내가 많이 외로워했다고 들었고, 그 외로움에 브라이언에 채우고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맷은 큰딸과 함께 브라이언을 만나보자고 한다. 어쩌면 아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아내가 가는 길에 작별인사 정도는 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맷은 질투나 나고 여러 가지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후회하면서도 아내에 대한 배신감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내가 사랑한 남자에 대한 호기심과 그도 아내를 사랑한 것인지 무언가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용서를 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용서해야 보내줄 수 있을 것이고, 자신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맷의 마음에 큰 딸도 기꺼이 동행해준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사랑했던 브라이언이 유부남이고, 자신이 팔려고 했던 땅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부동산 관련업자였다. 
자신의 아내는 그를 사랑해 자신과 이혼하려고까지 했지만 그는 그런 맘이 없었다. 화가 났지만 맷은 아내의 상태를 말해주고 마지막 인사를 해 주러 오라고 말하고 나온다.
 
결국 그는 병원에 오지 않았고, 그녀의 아내가 와서 맷의 아내를 용서한다고 말한다. 어짜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삶은 수시로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찾아오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속에 계속 침체되어 어둡고 비극적으로 살 수 없다.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용서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비워내야 한다. 

아마 맷이 아내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고 죽음을 무겁게 끌어 안았다면 그 무게에 자신은 물론이고, 두 딸도 같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지금 현재 가족들 곁에서 외로워할 아내와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 소중히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내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 맷 자신과 엄마를 미워했을 딸의 상처도, 외로웠을 아내도, 서로가 힘겨웠을 순간을 같이 나누어주지 못한 미안함을 담았고, 아버지로서 딸들의 성장과정에 동행해 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안함도 다 담겼다. 

아내를 마지막으로 보내주기 위한 여정속에서 모두 상처 받았을 자기들만의 위로와 용서를 건네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 치유되고, 조금 더 성숙한 열매를 맺는다.

가족은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따뜻하고 행복함을 주는 존재들이다. 너무 오래 떨어져 사는 만큼 벌어진 그들 사이도 이번 여정으로 메워져 서로의 슬픔도 아픔도 감싸 안는다. 

같이 있는 모습만으로 이제 제법 아버지와 자식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제대로 된 아빠노릇을 하게 된것이다.
맷이 마지막 인사로 아내를 떠나 보낸다. 

 " Good bye my love, my friend, my pain, my joy... Good bye, Good bye, Good bye..."

posted by 해이든 2019. 1. 19. 20:56

 

영화 <안녕, 헤이즐>을  단순히 로맨스 영화라 짐작하지 말자. 이 영화를 암에 걸린 두 남녀가 죽어가는 슬픈 영화라고 짐작하지 말자. '대충 이런 내용 아니야?'라고 짐작하지 말자.  스토리나 줄거리에 치중하지 말자.

삶 속에서 안고 가야 할 고통이나 비극이나 슬픔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감동을 선사하고, 둘의 사랑이 부럽다기보다 응원해 주고 싶었다. 너무 많은 공감으로 어른인 내가 너무 많은 걸 배웠다. 

내가 얼마나 얕은 사랑을 하고, 내가 얼마나 얕은 생각을 하고, 내가 얼마나 얕은 삶을 살고 있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삶은 유한하지만 그들의 깊이있는 사랑은 무한했다. 이 영화는 암으로 죽어가는 두 주인공이 죽음이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죽음 뒤의 삶을 남아있는 이들에게 선사해 주고 가는 시작을 선사한다.

죽으면 끝나는 게 삶이 아니다. 죽음 뒤에 그들의 삶은 계속 가족들에게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삶과 죽음의 관계, 죽음이 주는 삶, 남겨진 자들의 삶, 죽음을 준비하는 그들의 시간을 통해 가슴 한편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영화&gt;안녕, 헤이즐

 

다른 사람의 긴 시간보다 짧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깊은 사랑을 보여준 <안녕, 헤이즐>이란 영화는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소설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2012년 아마존닷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2014년 YA소설 부문 미국 전체 판매량 1위를 기록할 만큼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책이다. 그리고 1979년생의 감독은 원작의 느낌을 살려서  스토리보다 각 캐릭터의 삶에 대한 무한한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고 본다.

'안셀 엘고트'가 연기한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뻔뻔한 듯 로맨틱하고, 위트 있고, 너무 멋졌다. 매 대사마다 순간순간의 표정과 능청스럽게 또는 저돌적인 고백도 다 뇌리에 남을 정도다.

그리고 '쉐일린 우들리'가 연기한 '헤이즐 그레이스 랭커스터'는 자신의 죽음이 고통스럽기보다는 그 죽음으로 인한 남아있는 가족들의 삶을 더 염려하는 아주 깊이 있는 역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얼마 전 <미드나잇 선> 영화를 감상하고 후기를 적었었다. <미드나잇 선>이 태양이라면 <안녕 헤이즐>은 하늘 같았다.

자신의 딸이 밥도 잘 안 먹고, 밖에도 안 나가고, 방 안에만 있다고  엄마는 암의 부작용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치료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암환자들의 모임에 헤이즐을 보낸다. 좀 친구들도 사귀고, 외부활동도 하면서 십 대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엄마들 마음은 다 그래)

하지만 헤이즐은 그 모임이 내키지 않는다. 우울증은 암의 부작용이 아니고, 죽음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소통을 캐리어처럼 끌고 다니는 헤이즐은 17살, 갑상선암이 폐로 전이되었고, 임상실험에 반응한 탓에 아직도 살아있다. 그 모임에서 자기를 계속 쳐다보는 어거스터스의 시선이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의 주인공이 싫지 않다. 어거스터스는 골육종으로 다리 한쪽을 절단한 상태였다.

첫 날부터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보자는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고, 서로의 병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헤이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터 반 호텐'이 쓴  책을 추천한다. (소설에서는 [장엄한 고뇌]라고 나오며, 헤이즐에게는 성경 같은 책으로 묘사된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그녀에 앉아있는 헤이즐과 거스

헤이즐의 추천한 책을 읽고 공감한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더욱 친밀해졌다.헤이즐은 소설의 다음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 책 속의 주인공이 죽고 나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 말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메일로는 유출이 예상되어 소설 뒷이야기를  말해줄 수 없다는 것, 시간이 되면 암스테르담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생애 처음으로 하는 여행과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간다.  의사들은 헤이즐이 암스테르담에 가는 걸 반대한다. 의사들과 부모님과 헤이즐이 다같이 모여 그녀의 상태를 설명할 때 엄마와 아빠가 초조해하며 꼭 웅켜 잡은 손이 헤이즐의 시선에 마음에 들어온다.  

거스와 통화하는 헤이즐

헤이즐은 어거스트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 골칫덩어리뿐이고 수류탄같은 자신의 존재가 그 모두의 삶을 폭발시킬 것 같은 두려움에  무거워진다. 너무 유별나게 사는 자신의 삶이 슬프고, 하늘만 봐도 슬퍼지고, 어릴적 아버지가 만들어 준 그네만 봐도 슬퍼진다. 그런 헤이즐에게 어거스터스는 "니가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밀려나지 않을 거야. 내 마음이 아프건 말건 그건 내 자유야."라고 말한다.

어쩌면 삶은 고통과 같이 운행된다. 그렇다면 그 비극을 누구와 동행할지, 누구에게 상처 받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아프건 말건 자신의 자유이고 그의 몫인 것이다. 물론 헤이즐도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란다. 어거스터스가 너무   멋지다.  헤이즐을 바라보며 씩 웃는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다.

지금 내가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내 앞에 있고, 그걸 밀어낼 용기로 밀어낼 힘으로 헤이즐에게 힘껏 끌어 안으라는 선택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거스터스의 소원으로  엄마와 어거스터스와 동행하여 암스테르담을 향해 비행기를 탄다. 불을 붙일 수 없는 담배 한 개비를 상징처럼  물고 처음 떠나는 여행에 어거스터스도 흥분하고 헤이즐도 기대에 차 있다. 하루를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것보다 하루를 가슴뛰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준 엄마의 배려가 좋았다.

레스토랑에서 예쁜 옷을 입고, 정장을 입은 두 아이가 어찌나 멋지고 이쁘던지, 눈물이 날 정도로

암스테르담에서

둘은 여행의 목적처럼 네덜란드 작가 피터 반 호텐을 찾아간다. 그런데 느낌이 쎄하다. 알코올 중독자에 말은 또 얼마나 못되게 하는지 나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엎어 버리고 나오고 싶을 만큼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 더 힘든 그녀에게 피터 반 호텐 작가의 뒷 이야기가 희망적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바람으로 좋아했던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정말 헤이즐의 듣고 싶은 이야기 같은 건 없다고 두 사람에게 폭력 같은 언어들로 상처를 준다.

그들은 안네 프랑크가 숨어지내던 건물을 보러 간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가파른 계단만이 있다. 산소통을 끌고 다녀야 하는 그녀에게 버거운 길이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오르고 안네 가족이 숨어 지내야 했던 꼭대기까지 오른다. 그곳에서 안네 프랑크의 음성이 울린다.

"그 순간에 저는 비극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어요. 아름다움만이 남았죠. 당신안에 있는 행복을 되찾으세요.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행복해지세요"안네는 그런 상황에서도 비극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말한다. 헤이즐도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주변의 아름다운 것을 생각했을까?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에게 키스를 한다.

그리고 헤이즐의 안의 행복은 어거스터스를 사랑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밀어버리고 숨긴 마음을 내 놓은 것이다. 어거스터스의 선택의 자유처럼 헤이즐도 어거스터스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지금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 그렇게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 펼쳐놓는다. 작가를 만나는 일로 시작된 여행은 결국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받으며 행복을 그리게 된 셈이다.

헤이즐과의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어거스터스는 자신의 온 몸에 암이 퍼진 것을  헤이즐에게 털어놓는다. 죽는 것보다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어거스터스, 그래서 죽어서라도 자신이 모두에게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공장이었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을 정리정돈하듯 받아들이며 준비한다.

안셀 엘고트과 쉐일린 우들리

어거스터스는 자신의 친구 이삭과 헤이즐에게 자신의 추도사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삶과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에게 제대로 삶의 마무리 지으려 한다. 마치 새로운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마치 여행을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녀의 추도사에는 "너를 만나 내 삶은 무한대가 되었어. 넌 내게 한정된 나날 속에 영원함을 줬어"라며 어거스터스를 향한 사랑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며칠 후 어거스터스는 죽는다.

응급차에 실릴때마다 지금의 통증이나 아픔이 얼마인지를 1~10중에 말해 보라고 한다. 가장 죽음의 고통을 느꼈을 때도 그녀는 10이 아닌 손가락 9개를 펴 보인다.  10은 남겨놓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은 10이다.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읽으려 쪽지를 편 헤이즐은 그의 슬퍼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신의 준비한 추도사를 접어둔다. 그리고 그의 집에 부모님이 걸어둔 격려의 말로 시작한다. 장례식은 죽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자식보다 암으로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고통이 더 크고, 죽은 어거스터스보다 죽은 자식으로 인한 부모님의 슬픔이 더 크다는 걸 안다.

'누가 날 엄마라고 불러줘'라고 울던 엄마의 절규를 가슴에 품었던 13살의 헤이즐은 그냥 포기해 주었으면 하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부모로 인해 깨어나는 게 두려웠다.

효과가 없는데도 필사적인 부모로 인해  그저 시간을 조금 더 벌면서 살아 가게 할뿐인데, 자신의 죽음이  부모의 삶의 종착점이 될까 봐.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의 엄마가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삶의 의욕도 없이 삶을 닦아내지 않고 뿌연 채로 살까 봐서 엄마. 아빠의 삶이 주저앉을까 두려웠다.

자식을 위해 그 고통을 끌어안은 건 엄마의 선택이다. 그 선택을 버리는 것보다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행복하고 더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자식을 감성적으로 받아 들일 부모는 없다.

죽어가는 딸을 향해 자신의 사랑으로 힘껏 행복해질 선택을 끌어안은 것이고, 버릴 수 있는 선택보다 품는 행복이 더 컸기 때문에 끌어안은 선택이다. 그런 헤이즐의 맘을 안 엄마는 헤이즐에게 딸이 죽고 나서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사회복지사를 준비 중이라 했다. 

헤이즐은 자신에게 '최고의 뉴스'라고 엄마에게 안기며 기뻐한다. 어쩌면 작가에게 듣고 싶었던 뒷 이야기의 희망을 엄마에게 듣게 된다. 이제 그녀의 두려움을 보내버린다.

삶은 삶속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삶을 덮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삶은 삶으로서 시작하고 삶으로서 마무리 짓는 어거스터스를 보며 행복도 고통과 같이 다니는 따라다니는 건데 나는 고통을 피하려고만 했던 삶이었다. 고통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며 행복을 기다려야 되는 것임을, 그래서 더 큰 행복을 안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이즐, 어거스터스 OK! 그들이 말하는 OK는 무한대의 '언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