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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12 어둠속의 댄서 (2000년) : 2019년 재개봉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1. 12. 14:29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어둠속의 댄서>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뮤지컬 드라마이다.

영화의 배경은 1964년 미국 워싱턴 주의 작은 마을, 노래와 춤이 유일한 즐거움인 셀마는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의 수술을 위해 체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다.

수술비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셀마 역시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고된 노동과 앞이 점점 안보인다는 절망같은 건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상황도 환상속의 무대를 만들며 춤과 노래로 현실을 상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뮤지컬 속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시력이 한층 더 어두워진 것을 깨달은 그녀는 사실을 감추고 일을 하지만 결국 셀마는 공장에서 해고되고 쓸쓸히 공장을 나온다. 그녀에게 미국이란 아들의 수술과 자신의 꿈인 뮤지컬을 꿈꿀 수 있는 꿈의 나라이다.

그녀의 이웃에는 셀마모자에게 자신들의 트레일러를 빌려준 빌 부부가 살고 있다.

이주해온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였겠지만 고된 노동으로 그녀는 아들의 수술비마련으로 넉넉한삶을 누릴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앞도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집에 돌아온 셀마는 일하고 받아온 보수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돈 통에 넣으려고 통을 열었다.

하지만 돈 통은 텅 비어있다.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그녀가 눈이 안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의 짓이었다.

그녀에게 집을 세주는 빌이 아내 린다의 사치를 감당하기 힘들어 셀마의 돈을 훔쳐간 것이었다.

셀마에게는 아들의 수술비였기에 꼭 있어야 하는 돈이었다.

셀마는 빌의 집에 가서 돈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빌에게 총구를 겨누고 빌을 쏘고 만다.

셀마는 그길로 재빨리 병원에 가서 선불로 돈을 내고 아들의 눈 수술을 약속받는다.

한번 돈을 잃은 셀마는 무엇보다 아들의 눈을 수술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셀마는 빌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 결국 경찰에게 붙잡힌다.

아들이 바라 볼 세상을 꿈꾸고, 힘든 노동도 자신의 즐거움인 뮤지컬로 승화시켰던 셀마에게 미국은 아들의 수술비를 훔쳐가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다.

영화에 대한 평은 각각의 견해차이로 다양하게 나뉘지만, 영화의 내용은 그저 그럴싸한 스토리라고 말하지만 그 내용의 맛은 다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인간이라면 자식이고, 부모이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살아있는 감정 중에 가장 강한 사랑의 무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슬픈 스토리로 그냥 관객들을 울려 보겠다라는 의도였다면 나도 이 영화에 점수를 못 주었을 것이다.

나는 울리겠다고 작정한  영화를 극장에 가서 보지 않는다.

슬픔을 드러내는 영화도, 슬픔을 너무 희극화시키는 것도, 너무 억지스러운 것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물을 자극할 수 있는 뻔한 설정이 드러난다.

첫째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셀마가 자신을 닮아 아들마저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  엄마로서의 사랑과 희생은 너무 진부하다.

모성애로 항상 울리려는 작전을 들이민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해온 이민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환경은 참 고단하다라는 느낌으로 다가오고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라면 난 이 영화를 굳이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이보다 더 슬픈 영화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셀마와 캐서린

이 영화는  뮤지컬이 그 중심이 된다.

셀마가 나오는 장면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뮤지컬이 작동되고, 공장안의 소음도  리듬이 되어 뮤지컬 무대가 된다.

뮤지컬이 들어감으로써 이 영화는 슬픔이 아니고, 희망을 부르는 셀마로 인해 더 값어치가 오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절망보다는 희망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리는 하나의 소통이 된다.

그녀에게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모든 것에 리듬을 부여하고, 내면의 언어인 뮤지컬로 암울한 현실에 주저앉지 않게 한다. 

어떤 현실이든 그걸 끌고 가는 사람의 의지가 희망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의지가 절망으로 끌고 간다면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끔 나는  현실도피용으로 상상을 동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도피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는 않는 눈을 원망하기보다 들리는 귀에 더 감사하고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뮤지컬 드라마

또 이 영화는 찬반양론으로 격돌했던 작품이다.  

1960년대 미국은 장애인의 아들을 둔 눈물겨운 모정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이민자 여성을 너그럽게 끌어 안아주지 않고 재판과정에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방인에게 냉혹한 미국, 검사측 증인으로 나선 공장 감독, 자신의 아내의 사치를 감당못해 눈이 먼 셀마의 돈을 빼앗간 빌의 모습으로 드러냈다.

자신들을 꼬집은 듯한 모습에 좋은 평을 줄 수 없었던 저들의 속내일 수도 있다.

꿈의 나라였던 미국은 그 꿈을 무대가 아닌 사형대에 올려버린 무정하고 냉혹한 나라에 대한 비판을 다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미국에게 셀마는 분노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꿈인 뮤지컬이 그녀의 내면의 빛이 되고 언어가 되어 표현한다.

셀마를 연기하는 비요크의 목소리로 영화는 멋지게 통속적인 스토리를 벗어 났다고 본다.

체코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온 시력을 잃어가는 이민자가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는 슬픈 이야기를 뮤지컬로 안았다.

감옥에 갇힌 그녀가 누명을 쓰고 갇힌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소리도 없는 감옥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너무 조용하다'그 대사에 그녀의 고통이 표현되었다고 본다.

셀마는 소음이 없는 조용한 감옥생활을 답답해한다. 환풍기에서 들리는 찬송가를 들으면서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감옥에서 환풍구를 통해 소리를 듣는 셀마
감옥 환풍기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에 행복해하는 셀마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먼저일 수도 있으련만, 그녀가 환풍기에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은 기억을 파고 든다.

신의 우상인 뮤지컬 스타 '올드리치 노비'를 아버지라 하는 것과 법정에서 만나는 장면은 마치 그녀의 꿈이 이루어진 듯 했다.

위증이라는 죄가 더 가미되어 불리해지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아들 진의 수술과 항소라는 두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캐시의 말처럼 아들의 눈을 낫게 하고 엄마가 없는 것보다 그 돈으로 항소하고 살아있는 엄마가 되어 주는 것 말이다.

셀마는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이 밝혀졌는데도 자신 때문에 아들마저 눈이 멀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을 수술시키고 자신이 풀려날 수 있는 유예 신청을 철회하게 된다.

결국 선택에서 그녀는 수술을 위해 항소를 포기한다.

아들은 아직 보지 못한 세상이 너무 많고, 어두운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는 엄마의 선택은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의  빛을 선택했다.

결국 그녀는 일급 살인죄를 적용받아 사형을 선고받는다.

여간수가 그녀를 위해 사형대로 걸어들어가는 발걸음을 리듬으로 바꾸어주는 장면에서 나는 무방비상태로 슬픔에 노출되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욕망의 나라였다.이방인의 돈을 뺏고 이방인의 꿈을 뺏고 이방인의 빛을 차단시켰다.

주인공을 극단적인 벼랑까지 몰고 갔지만 그녀의 선택은 우리를 아프게 했다.

한 아이의 엄마라기보다 순수했고, 눈이 멀어가고 있음에도 해맑았고, 고통속에서도 그녀의 밝음은 너무 아름다웠다.

현실은 셀마의 시선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슬펐는데 셀마가 슬프게 끌고 가지 않았을 뿐이다.

이민자를 떠나 시력을 잃어가는 힘없는 장애여성을 사형시키는 과정에서 미국이란 나라에 불쾌함을 드러낸 것이 그들이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 것이라면 그들은 이 영화를 볼 자격이 없다.

셀마의 내부의 빛이 외부의 어둠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