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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28 63.동주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2. 28. 12:57

동 주


 감독 이준익

영화 동주역 강하늘

 

진정한 지식인이자 운동가였던 그들이 영화 '동주'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인이 천명이라고 여겼던 청년, 동주(강하늘)
그러나 그가 살아야 했던 조국은 그의 꿈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슬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살아서 시인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언어가 허락되지 않았고, 이름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 강점기였다. 
이 영화를 통해서 한 청년을 알았다. 송몽규!(박정민)
동주와 한 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란 고종사촌 몽규는 동주의 벗이자 라이벌같은 존재였다.
암흑의 시대에 태어나 쭉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 그들은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윤동주와 송몽규

 

아버지는 의학을 공부하길 바랬지만, 동주는 문과반에 진학하여 시인을 꿈꾸는 문학소년이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 민족의식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여러 편의 시를 엮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 유고집을 출판하려고 하나 일본의 검열에 걸린다는 교사의 만류에 의해 출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언어로 시인으로 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대에 살아가야 했던 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창씨개명으로 세상이 어지러웠던 시대 그에게 일본유학을 권하면서 정지용 선생이  했던 말이다. 
"창씨개명에 반대하지 못하고, 아무 말 못하고, 술만 마시는 내가 부끄럽다, 유학가라고 권하는 내가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들겠니,부끄러운 걸 알면 부끄러운 게 아냐.부끄러운 걸 모르는게 부끄러운 것이지."
그는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을 한 후 그때의 괴로움을 참회록에 이렇게 적는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괴로움은, 또 부끄러움은 그의 시로 꾹꾹 눌러 고통스럽게 배여있다.
영화 동주의 서시

 

윤동주의 '서시'를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리고 다르지 않았다.

조국의 운명앞에 자신의 한계에 고뇌하고, 참회하고, 신념을 향해 극복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혼란한 시대에 자신의 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고 해나가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방황만 한다고 현실에 그저 나를 내맡기고 방치해버린다면 내게는 위안도 사랑도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으리라고 본다. 그저 문학로서의 자신의 꿈을 좇아가야 한다. 자신의 언어를 담아내고 자신들을 말살하려는 그들에게 반하여 구원하여야 한다. 확고하지 않으면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널려 있는 세상이었다. 억압하려는 것만 있는 일제 강점기다 끝도 없이 위축되고 억압되어서는 자신의 이름은 계속 흙으로 덮어지고 그곳에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이다. 끝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그는 나아간다. 누구보다 찬찬히.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역 박정민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행동파였고, 내성적인 문학 청년이었던 동주는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에 아파했다. 
하지만  절망적인 땅에서 실천으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몽규에 반해  동주는 소극적으로 그 땅에서 살아간다고 여기며 갈등를 겪는다.

 

송몽규는 동주에게 말한다.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든다."
하지만 동주는 그런 몽규에게 "왜 나를 자꾸 도망치게 만드냐."고 말이다. 하지만 몽규는 몽규답게, 동주는 동주답게 나라를 사랑했다. 똑같은 봄을 원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살아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동주와 몽규의 목표가 다르다 생각하지 않는다. 표현방식이 다르다 생각할 뿐. 
송몽규도 안다.그들의 마음이  같다는 걸. 단지 손에 들린 도구가 달랐을뿐이다. 그는 동주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래서 동주의 방식을 존중했으나 동주는 나약함이 자꾸 벗인 몽규로 인해 초라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밉다가도 가엾다가도 그리고 그 마음을 또 알 것 같기도 하다. 

 

형무소에서의 윤동주

 윤동주의 <쉽게 쓰인 시 中에서>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의 동무들을 하나, 둘 죄다 잃고, 시인이 천명인 줄 알면서도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그는 쉽게 쓰이는 시마저 부끄러워한다.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 어쩔 수 없음에도 그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했다.

칼을 들어야만 애국인가
검열에 일제강점기의 검열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문학으로 비판하는 것은 어쩜 칼로 한명의 목숨을 베는 것보다 작다 할 수 없다. 
문학이 문학으로서의 가치만을 내세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글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 기록이라는 것으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끊어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그  원동력으로 조상에서부터 현재까지 그 혼을 이어가고 있다. 
동주와 몽규가 있던 그 암울했던  시대, 창씨개명과 우리말을 말살하려는 그들에게 저항하여 그들이 꽃피우고 가지 못한 청춘앞에 우리가 애달퍼 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서 그렇게 쉽게 씌여진 시마저 부끄러워 했음에도 시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사후에 세상에 나온 윤동주 시인으로서 삶이 아프다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더 간절하고 애틋하기 때문이다.
 
강하늘

 

1943년 윤동주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다 도쿄대학에 재학중이던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일본형사에게 검거되어 구금되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고, 서신은 매일 일어로 쓴 엽서 한장만 허용되었다.
윤동주가 유학기간에 썼던 상당한 분량의 시작품과 일기를 압수했으며 송몽규의 말에 따르면 일제의 소금물 혹은 세균 생체 실험으로 알려진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전보를 받고 가족들은 비통한 심정이었다. 1945년 27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지 23일만에 옥사하였다.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투쟁하고 시인을 천명이라 여겼지만 제대로 그 시대를 시인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고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죽어갔던 것이다.
조국을 잃은 땅의 청년은 일제 말 암흑같은 일본 감옥에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살아서 한 권의 시도 세상에 내어놓지 못하고 지고 말았다. 사후에 윤동주의 시어들은 시인 정지용의 발문을 딛고 1948년 세상에 나왔다. 쓸쓸히 꽃피워 보지 못한 청춘이 섦어 눈물이 난다.
순수한 문학에 대한 열정과 그 시대의 암울함과 민족의 한이 담긴 고뇌가, 그가 표현해 낸 성찰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우리의 가슴에 100년 넘게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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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