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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22 32.사도 : 비운의 세자
posted by 해이든 2019. 1. 22. 16:26

영화 사도

 

영화 사도를 보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1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준익 감독은 역사적 사건 말고 가족사에 집중하여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을 조명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냥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진 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은 광기를 넘어섰다는 느낌이었다.

영조의 정통성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인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난 연잉군이었다.

숙종은 우리가 잘 알듯이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왕이다. 그의 업적은 몰라도 장희빈을 떠올리면 따라오는 존재이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앉히지만, 인현왕후가 퇴출 된지 6년만에 다시 중전으로 복귀하자 중전이었던 장옥정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중전의 자리를 내놓게 된 장희빈의 간악함은 극에 달하고 인현왕후는 궁으로 입궁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게 된다. 영조의 어머니였던 최씨의 고변으로 희빈 장씨의 악행이 드러나 사약을 받게 된다. 그 후 숙종은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법으로 금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몸이 허약했던 경종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에 다음 왕위에 오른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천민 신분의 후궁 소생이라는 출신으로 인해 콤플렉스가 심했던 왕이었다. 그 콤플렉스가 자신을 평생 괴롭혀왔고,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리게 했다.

영조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거친 왕으로 다소 날카롭고 변덕이 심했다. 자신의 콤플렉스로 인해 학문과 예법에 완벽을 추구할 만큼 집착했던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한 것이었다. 사도는 두살이 되기 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어렸을 때는 매우 영특하여 영조의 지지속에 자라다가 크면서 무술이나 그림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영조는 급격히 실망으로 바뀌게 된다.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갈등

어쩌면 그의 과도한 기대가 사도세자에게는 숨막히는 일이었다.

세자의 교육에 숨 막힐 정도의 집착은 두 사람의 서로 어긋나는 갈등을 초래했고, 아들에 대한 집착과 과욕이 결국 사도세자를 점점 궁지로 몰아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못 마땅히 여기면서도 대리청정을 시키며 신하들 앞에서 다그치고 면박을 주는가 하면, 사도세자에게 양위 의사도 없으면서 양위 의사를 밝히며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하는가 하면 세자를 석고대죄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진짜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속이 다 보이는 유치함이고, 이거야 말로 권력의 갑질이다.

대리청정과 양위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사도의 불안 증세는 가중된다.

심심찮게 변덕을 부리고 자신에게 왕위를 뺏길까 두려운 것인지, 신하는 물론 자식마저 자식에게 충성하기를 바라는 영조의 본심 같았다.

자식을 위해 권력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한테까지 뺏기고 싶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예법이니 왕권강화니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야.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

그럼 아비는요? 하고 묻고 싶었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불신도 너무 강했고, 아들에 대한 미움도 너무 강했다. 그래서 뭘 해도 꼴 보기 싫은 걸 넘어서 내 쫒고 싶었을 것이다. 노론의 하수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자,영조는 세자가 미웠는데 옳다구나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 같다. 자식에게 사약을 내리면 세손에게 그 영향이 미칠까하여 자결을 명하나, 세자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노론의 하수인의 말만 듣고 대질심문도 없이 세자의 죄를 묻자,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석고대죄 하여도 이미 이성이 없는 영조는 뒤주 안에 세자를 가두어 8일 만에 숨지게 한다.

그 왕이 무엇이길래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단 말인가.

비운의 사도세자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1762년 임오년 왕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갇어 죽인 왕으로 기억된다. 자신의 형제도 아니요, 자기 자식을 그리 만든 왕은 52년간을 왕위에 재임했다. 권력으로 자식을 죽인 왕이 그 아무리 좋은 업적을 남기었다 해도 우리는 그의 업적 따위 아는 게 없다. 그저 후대에 알려진 사도세자를 비운의 세자로 만든 무자비한 왕일뿐이다.

자식 하나 제대로 품지 못한 왕이 어찌 백성을 제대로 품었다 보는가?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그렇다. 사도세자의 말처럼 영조는 그를 세자로도 자식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비극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미워해도 자식을 죽게 하지는 않는다.

혜경궁 홍씨와 아들 정조

 

이 이야기가 비극적인 데에는 가족의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가 없었다.

특히 혈연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것으로 안다. 아비가 자식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드는 데에도 어미인 영빈도, 사도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신하들도 그를 따뜻하게 옹호해 주지 않았다. 사도 혼자 안고 가기에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한 미움이 너무 컸고, 매일같이 다그치기만 하는 왕에 대한 두려움도 너무 컸다.

사도세자는 자신에게 인사하러 온 아들 내외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부부란 서로의 단점을 가려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외로웠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아내인 혜경궁마저 영조의 눈치를 보느라 그의 편에 있어주지 못했다.

힘없는 어미나 영조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여인들의 몸부림이 사도를 더 사지로 몰고 간 것이라 생각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고 불편했다. 한 두 사람만 세자를 품어주었더라면,

영조, 사도, 정조 3대에 걸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가족관계가 아닌 권력관계로 숨 막히는 신경전만 있었다.

아들의 의견에 매사 못마땅한 영조는 세자를 자식도 아니고,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적을 대하는 표정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기회만을 잡으려는 여성들만이 눈에 보였다.

모성애도 부성애도 없는 곳에서 사도세자가 겪었을 고통!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

  세손 정조의 말 :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나는 영조의 인간적인 고뇌를 못 보았다. 자식을 죽게 만든 아비의 아픔도 못 느꼈다. 왕의 자리가 아무리 중차대한 자리라 해도, 역사에 자식을 죽인 왕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린 세손에게 배우셔야 했다. 아비는 자식은 이래야 한다고 말이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단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저는 그날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자식이 아비의 마음을 보듯, 아비또한 자식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못한 것일까?

저 어린 아이의 눈에도 왕의 자리나 권력보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 보이는데 저 광기어린 영조의 마음에 자신의 자식에게 따뜻한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못해 자식들 저리 외롭고 괴롭게 했던 것일까? 못해도 격려해주고 끌어줄 것이지, 질책하고 비난하는 아비 밑에서 어찌 세자가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겠는가,

  나는 자식을 죽인 임금으로 기록 될 것이다.

 

사도가 바란 것은 아비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다.

이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부모라면 응당 가질 수 밖에 없는 사랑 아닌가?

그런 사랑도 갖지 못한 자가 콤플렉스로 인해 자식을 믿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해서 아들을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로도 모자라서 자식을 고통스럽게 죽게 했다.

나는 자식을 죽인 임금으로 기록 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그래 내가 보기엔 광인이다. 왕도 아버지도 아닌 그저 권력에 미친 자!

 아버지와 대한 분노와 절망, 두려움,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자식으로서 아비로서 나누지 못했던 한탄 등을 유아인의 연기력에 녹아 사도의 감정변화에 스며들었다.

 송강호와 유아인은 정말 훌륭한 배우이다. 정말 몰입해서 영조가 너무 미웠고 세자가 너무 안쓰러웠다.

부모 자식 간의 견해와 세대 간의 갈등을 어느 누구나 겪는 문제이다.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서 영조는 너무 독선적이고 무매했다.그것도 자식을 상대해서 말이다.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사탕도 물리면서 끌어 안아야 하는 것임을 그러지 못함이 결국 28살에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져오고, 어린 세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