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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30 [세가지 색 : 레드] 이렌느 야곱이 매력적인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4. 30. 19:17

세가지 색 : 레드

개인적으로 세 가지 색 시리즈 중 레드가 가장 좋았다. 여주인공 이렌느 야곱이 가지고 있는 멋스러운 색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패션모델로서의 표정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고, 판사와의 교감적인 부분도 삶의 정수 같았다.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생이자 패션모델로 활동하던 발렌틴은 운전 중에 개를 치는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개의 목에 달린 인식표의 주소지로 찾아가 개 주인에게 개가 다쳤는데 병원에 데리고 갈까요? 묻자 마음대로 하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왠지 삶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노인 같았다.

발렌틴은 개를 치료하러 간 병원에서 개가 임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치료 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발렌틴은 개를 산책시키던 중 사라져 버린 개를 여기저기 찾다가 개 주인을 찾아가게 된다.

다행히도 개가 그곳에 있는 걸 확인한다.

그리고 우연히 개 주인이 이웃집들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은퇴한 판사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라게 된다. 도청을 하던 노판사(장 루이 트린티냥)는 이렇게 말한다.

"법정에 있을 때보다 세상 일이 더 잘 보여. 적어도 여기엔 진실이 있지."

누구에게나 사생활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남의 삶을 도난할 자격이 그에게는 없다.

선과 악을 판단하며 심판하던 사람이 그것도 이웃의 삶을 법정이 아닌 곳에서 무슨 권리로 침해할 수 있단 말인가?

발렌틴은 모든 사실을 이웃에게 알리겠다고 하자 노판사는 도청하는 이웃집을 가르쳐주며 가서 도청당하는 사실을 알리라고 한다.

발렌틴은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편의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이웃집에 찾아갔지만 딸아이가 아빠 전화를 몰래 엿듣고 있는 걸 본 발렌틴은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말하고 되돌아 나온다.

15살 때 자기 아버지가 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신의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행복해지기 위해 몰라도 되는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노판사는 도청을 알리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가정이 깨질까 봐, 부인이 모든 걸 알게 되거나 딸마저 아는 날엔 지옥이 찾아오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발렌틴은 딸이 알고 있다고 노인에게 전해준다.

삶은 혼돈 속에 있다. 법정이 아닌 곳에서 진실이나 거짓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아는 순간 아름다운 빛이 사라진다. 묻어야 하는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때 누군가의 삶은 지옥이 될 것이다. 도청이 죄가 아니라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판사를 그녀는 가엾이 여기며 역겹다고 말하고 나와버린다. 거짓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진실이 더 더럽고 가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문제이고 선택이다.

그 어떤 형태로든 삶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가치와 본질의 문제로 두어야 한다.

그게 어떤 대가를 치루든 그거 역시 그 사람의 몫이다. 남의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법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신문에 은퇴한 판사가 이웃을 도청했다는 기사가 난다.

그녀는 노판사를 찾아가 자신이 신고한 것이 아니라 부정하자 노판사는 자신이 했다고 한다. 이웃과 경찰에 편지를 써서 알렸고, 신문을 보고 발렌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고 말한다.

자신을 역겹다고 불쌍하다고 울면서 나가는 발렌틴으로 인해 심경의 변화가 온 것 같다.

도청 사실을 알게 된 이웃들은 그의 집으로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졌다. 도청에 분노한 이웃들의 행동이었다.

 

35년 전 그는 한 선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오판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유죄였다.

노판사는 독자적으로 그를 수사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간 노판사는 그가 결혼해서 세 자녀와 손자 하나와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실수가 그의 일생을 구한 것을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이 오만한 행위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면 똑같았을 거야. 입장이 같다면 내가 재판했던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지. 그들 입장이었다면 속이고 살인하고 그랬을 거야. 나는 다만 그들 입장이 아니었던 것일 뿐"

죄의식 없이 죄를 짓기도 하지만 상황에 밀려 죄를 범하기도 한다. 내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것일 뿐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선과 악중에 어느 쪽일까? 묻는다.

그는 법적 도덕성에 대해 심한 회의를 느껴 1년 전에 조기 은퇴한 법관이었다.

발렌틴은 점점 노판사를 이해하게 된다.

노판사는 선한 발렌틴으로 인해 점차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게 되고 발렌틴이 따뜻한 손길을 보듬는다.

 

법대생인 오귀스트라는 발렌틴의 이웃이었지만 서로를 알지 못한다.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귀스트라는 노판사가 도청하는 이웃집 중 날씨정보 제공 서비스를 해주는 여인의 애인이었다.

이웃을 도청한 일로 법정에 갔을 때 노판사는 그 여인이 딴 남자가 생긴 걸 보게 된다.

어쩌면 사랑도 진실도 옮겨 다닌다. 고정화된 감정은 없다. 흐르게 되어있다. 삶처럼

멈춰있다고 생각이 들뿐 다 흐르고 있다.

진실이란 것도 선과 악이 누구의 기준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오귀스트라는 길을 걷다 들고 있던 책을 떨어 트리고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의 내용을 읽게 됐는데 그게 시험에 그대로 나오게 되고 합격을 한다.

우연인 것 같지만 운명인 줄도 모른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자 오귀스트는 벽을 타고 그녀의 방안을 보고 슬픔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 모욕감과 함께 그의 상처는 너무 컸다.

 

오귀스트라는 그녀가 새로운 남자와 같이 카페에 있는 유리창을 두들기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여자 친구가 뛰쳐나오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는 소중한 개를 도로에 버리고 떠난다. 페리호를 탄다.

 

한편 발렌틴은 판사에게 패션쇼 초대장을 보낸다.

노판사에게는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잊지 못하지만 2년 연상이었고 다리 사이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위고 험블링이라는 그 남자와 바람을 피웠고, 둘은 떠났다. 그때 받은 모멸감은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사고로 그녀가 죽은 후 사랑을 잊고 살았다. 그 이후 여자를 믿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의 장난인지 위고 험블링이 돌아와 자신에게 재판이 맡겨졌다. 안 맡으려고 했다.

생각 같아서 사형에 처하고 싶었다. 그는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은 공정했다.

그 일로 그는 조기 퇴직했다.

재판은 공정했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던 것 같다. 다 허무한 일이다.

어쩌면 노판사와 오귀스트라가 같은 인물처럼 느껴질 만큼 상황이 닮았다.

믿음과 사랑을 상실한 노판사와 오귀스트라는 선한 발렌틴으로 인해 남은 인생에 사랑과 믿음을 새로 적어 내려갈 수 있는 밝은 에너지를 얻은 것 같다.

 

영국에 있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떠나려는 발렌틴에게 노판사는 페리호를 타고 갈 것을 권한다. 그러나 예상 밖의 폭풍우로 페리호는 전복되고

1,435명의 승선자 중 7명만이 극적으로 구조되는데 tv화면에 마지막으로 두 명의 스위스인 생존자로 오귀스트라의 보호를 받으며 구조되는 발렌틴의 모습이 보인다.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표정이 가득 담긴 노판사의 얼굴이 화면이 담긴다.

이웃으로 살 때는 서로를 알지 못했는데 페리호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2명의 스위스인이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우연한 만남들이 얼마나 의미가 큰 필연적 만남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감독은 우연적인 것들을 그저 우연으로 스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심연에 흐르는 공통적인 것을 노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지막 구조 장면에서 영화의 총집합이라는 느낌이 난다.

구조된 7명의 얼굴과 명단이 화면으로 보이는데 세 가지 색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다 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