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3. 25. 22:45

행복 목욕탕


감독 나카노 료타

 

잔잔하면서 강하다. 따뜻하면서 슬프다. 기대이상으로 감동적이다. 
이 영화를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호출을 받고 학교로 간 엄마는 딸아이의 모습에 망연자실한다. 
딸 아즈미(스기사키 하나)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  
이유없이 당하고도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는 아즈미의 고통 앞에서 엄마 후타바(미야자와 리에)는 그동안 딸아이가 '머리아프다, 배 아프다' 말한 것이 투정이 아닌 왕따로 인한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두려움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저 힘든 시간을 견뎠을 아즈미에게 엄마는 감정을 안으로 감추고 유니폼으로 갈아 입히고 학교를 빠져 나온다.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과 모욕으로 가슴이 멍 들었을 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어떤 위로의 말도 어떤 동요도 하지 않고 자전거에 태운다.
 
아즈미는 체육시간에 교복을 잃어 버렸다.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아즈미를 향해 엄마는 학교에 가라고 떠민다. 
"엄마 나는 맞설 용기가 없어. 너무 하찮은 인간이라, 엄마는 절대 몰라 내 마음!"
"도망치면 안돼! 맞서야지. 네 힘으로 이겨내야 해."
아즈미가 용기내어 맞서주기를 바란다. 물러서지 않고 언젠가는 맞서서 그 이유없는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  자신도 없는 세상에서 강하게 스스로 이 난관을 버티고 이겨내어 세상에  나갈 수 있게 아즈미가 선택해야 한다. 
계속 이유도 없는 희생양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님 강하게 부딪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용기내어 이 말도 안되는 장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선생님과 엄마는 지켜줄 수 없다. 스스로 성장해가고 이겨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당당해지지 않으면 이겨낼 수 없고, 맞서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아즈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즈미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맞섰다. 한번이 어렵지 막상 용기를 내고 나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찾은 교복을 입고 엄마 앞에 당당히 선다.
 
엄마 후타바는 말기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암선고를 받는다. 
남편 가즈히로(오다기리 죠)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집나간지 1년이다. 남편을 찾아 헤매느라 목욕탕은 문 닫은지 오래 되었고, 지금은 남아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자신없는 삶을 살아 갈 딸을 위해 준비를 해야한다.
 
사립탐정을 통해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 찾아간다.  어떤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파칭코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던 사람이다.
철없는 남편이 좋아서 찾은 것은 아닌데 사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다.
남편은 여자아이 아유코(이토 아오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고작 집나가서 산다는 것이.남편은  항상 방관자처럼 무책임했다.
"나 이제 얼마 살지 못해 그러니까 돌아와" 그렇게 네 가족이 되었다. 사라졌던 아빠와 낯선 여자꼬마 동생 아유코까지 모여 살게 된다.
남편이 집 나가는 바람에 열지 못했던 목욕탕을 열고, 가족 모두가 역할을 분담하여 목욕탕을 청소하고 카운터를 지키고 각자 제 몫을 해 나간다.

 "이제 목욕탕을 열거니까 밥 값을 해야 해. 다같이 열심히 일하는 거다."

가족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

 
후타바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아즈미와 아유코를 데리고  잠시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 여행은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매년 4월 25일이면 아즈미네 집에 커다란 게 한상자가 배달되어 온다.
엄마는 아즈미에게 키다리 게를 보내 준 먼 친척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쓰라고 했었다.

여행 중에 엄마는

어느 게식당에 들어가 키다리게를 주문하고 ,오랜 세월 감추어둔 비밀 하나를 꺼내 놓는다. 그건 아즈미가 자신이 낳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즈미 아까 만났던 그녀가 바로 네 엄마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너는 강해져야해. 그리고 네엄마를 받아들여야 해."
 
아즈미의 친엄마는 청각장애인이었고 키다리게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청각 장애인인 친엄마가 어떻게 수화를 할 줄 아냐는 질문에 아즈미는 수화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언젠간 반드시 필요한 날이 올 테니 배워두라고 했어요."

이유도 모른 채 수화를 배웠던 아즈미, 언젠가 꼭 필요할 때가 이 날이었던 것이다.
청각장애자였던 엄마는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엄마가 아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먼 친척인 것처럼 매년 키다리게를 보내온 것은 친엄마였던 것이다.
 
이러고 보니 저 남편 가즈히로가  더 형편없어 보인다. 결국 아즈미는 후타바의 친딸도 아닌데, 아즈미와 후타바를 버리고 누구의 딸인지도 모를 여자애를 키우고 있었던 것  아닌가?
무능하다 못해 무책임한 남편을 대신해 억척스럽게 산 후타바에게 연민의 정이 눈물처럼 솟는다.

최선을 다해 산 것도 죄이던가?  기다리는 건 죽음밖에 없는 그녀가 너무 안쓰러워 미치겠다.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지금 그녀는 철없는 남편으로 인해 아즈미를 키우느라 억척스럽게 산 세월을 원망하기도 바쁠텐데,
청각장애인 엄마를 위해 딸에게 수화를 배우게 하고, 딸이 그리웠을 청각장애인 엄마에게 딸을 보여주고,아즈미에게 엄마를 만나게 해주고,무능한 남편과 그 남편이 데리고 온 아유코까지 원없이 끌어 안고 있다.

후타바는 기준 이상의 몫을 해내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다. 

후타바가 가족에게 보여준 만큼 두 아이와 남편도 그녀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니 눈물을 참아내려 한다. 
어떤 사정이었건 아즈미와 후야코의 친모는 자신을 버렸다. 그런 자신들을 후타바는 누구보다 뜨겁게 끌어 안아준 유일한 엄마였다. 삶의 용기를 내어주고 따듯한 품을 내어주고 강한 정신력의 유전자를 주었다.

그런 후타바에게도 아픈 비밀이 있다. 후타바 역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  자신을 버린 엄마이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한번 안겨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탐정의 도움으로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엄마는 삶과 죽음을 통틀어 가혹하고 잔인했다. 자신을 거부했다. 딸이 없노라고 거부했다. 

엄마가 되어 자식에게 한 없이 주면서 자신을 낳아준 엄마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안아주고 싶지 않을까,  그게 엄마이지 않을까 찾아나선 그녀의 발걸음이 참 아프다.

 

한 번쯤 강인한 엄마에서 물러나 한없이 안기고 싶은 연약한 자식이고픈 후타바의 바램은 너무나 아프게 무너진다. 
원망도 없이 다 내려놓고 그저 그리움 하나로 안아보고 싶었을 뿐이었을텐데, 진정한 가족이 된다는 건 꼭 내가 낳은 피붙이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엄마의 부정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슬프고 화났다. 
처음으로 그녀가 분노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가족들 속에서 웃음짓는 엄마를 향해서 말이다.
 
"조금 더 살겠다고 삶의 의미를 잃고 싶지는 않아"
엄마의 강인함과 포용력으로 이 붕괴된 가족을  행복목욕탕으로 집결시키고 그녀는 떠난다.
가족들은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힘을 합쳐 가업인 목욕탕을 이어간다.

가족이라는 공간을 쥐어주고 간 후타바,

무능하고 철없는 남편이  지탱하게 가족의 각자 자신의 밥값을 하게 몫을 놓고 간 후타바,

청각장애인 엄마까지 자식을 못 보고 사는 슬픔을 더는 갖지 않게 그 모든 것을 해주고 그녀는 떠났다.

행복목욕탕은 후타바의 품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5. 22:39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우린 "영화 어땠어?"라고 물어볼 때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슬픈 영화야, 재밌어. 완전 웃겨, 통쾌해..라고 감정에 호소해서 표현한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의 특유의 감성으로 대부분 슬픔이 절제되어 표현된 영화였다.

 

'아이를 통해 아버지가 성장하는 영화'다.
영화가 슬프다가 아니라 정말 진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눈물보다 가슴울림을 통해 정말 진하게 전달되어진다.
슬픈 걸 담백하게 담아도 이렇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 아낌없이 극찬하고 싶은 영화이다.
보통 딸들이 엄마의 삶을 더 이해하듯이 아들과 아버지사이에 동질감 또한 그럴 것이다. 
뭔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른 듯 닮아있는 것들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닮아가거나 동일선상에 세워놓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더러 본다. 

'아버지처럼은 살기 싫어'라 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 가려고 하지만 의외로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
아버지란 존재는 아들에게 거울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동경으로, 때로는 거부적인 반응으로 삶에 잔류한다.
 
권위적이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역시 아들에게 사회적 성공을 우선시하여 아들과 놀아주지 못하는 권위적인 아버지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이 그대로 아들에게 답습된다.

 

자신이 6년동안 키운 아들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가 병원에서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으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이 자신보다 못한 환경에서 자라는 걸 보고 서로의 아들을 바꾸어 친아들 류세이(황 쇼겐)를 데리고 와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료타는 류세이에게 이 집의 규칙에 대해 설명해준다.
하지만 류세이는 6년동안 료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 집안에서 규칙이라니 '왜?'라고 묻는다. 
당황한 료타는 "그냥 그런거야." 대답한다. 왜? 라는 질문에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케이타와는 달리 순종적이지 않은 것이다.
자신조차 왜? 라는 대답에 답해주지 못한 료타는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봤을 것이다.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케이타가 자신의 방식에  통제 당하느라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밖으로 내놓지 못해 자신이 만든 환경에서 순종적일수 밖에 없었다면 말이다. 
정반대의 아버지인 유다이(릴리 프랭키)가 료타에게 아들과도 시간을 좀 보내라고 이야기하자 료타는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유다이가 아버지라는 것도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 책임감에 갇혀 희생한다는 생각만으로 부모가 되지는 않는다.
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가족은 정작 소외되고 있었다. 아이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은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정체되어 있다. 
정작 아이들이 커가는 삶 속에 같이 존재하지 않고 삶의 가치만 주입시키고 강요하고  통제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아들의 시간은 자신없는 인생이 만들어지고, 자신없는 일상이 진행되어 흘러간다.
가족에게 이방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놓는다고 가족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바뀌고 자신의 친아들과 시간을 가지면서 그들의 관계속에도 시간이나 대화가 부여되지 않으면,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유대감없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료타는 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처음으로 아버지로서 노력이라는 것을 해 보았을 것이다.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태도이다.
자신의 성장기에 겪은 것을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중심가의 최고급 아파트에 살며 아름다운 아내와 순탄한 삶을 살고 있고, 아들과의 시간을 매일 뒤로 미루는 아버지로  자리했던 자신이었다.

 

료타는 자신의 어린시절 모습과 비교하여 케이타가 성에 차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실수로 뒤바뀐 아이였다는 것을 알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친아들인 유세이와 생활하면서 아들과 친해지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란 존재로서 말이다.

자식이 바뀐  또다른 유다이 가족은 너무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다. 
전파상을 하고 있는 유다이는 료타보다 풍족한 환경은 아니지만 삶이 여유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중요시하는 순박한 아버지였다. 
서로의 다른 환경에서 키워진 아들을 바꾸어 키워가는 과정에서 료타는 진정한 아버지로 성장하게 만든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얼마나 강요하고, 부족했는지를 류세이와 유다이를 통해 가족이란 굴레와 가족의 진정함을 깨달아가게 된다.
 
 
6년간 부족함에서 키워낸 케이타에게 미안함을 느낀 료타는 아이를 찾아가지만 케이타는 료타를 보자마자 도망가 버린다. 
이런 케이타를 따라가면서 아들에게 미안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우린 정말 아버지가 된 료타를 안아주게 된다.
 
부족한 아버지가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전하는 장면은 잔잔하게 진한 슬픔을 자극한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진정 가슴으로 아버지로서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

 

'아버지는 다  같은 아버지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좋은 아버지가 되는 과정은 그저 한 공간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과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시선을 같이 해주는 것이다.

 

내 시선속에 아이들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가치속에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연습된 학습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와 같이 나도 아버지로서 살아가면서 성장하기 위해 익혀야 하는 것이다. 

"아빠는 아빠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케이타에게 료타는 "많이 부족하긴 했어도 아빠였잖니!"자신의 부족함을 내어놓는다.
빌어야 할 잘못은 산더미 같다.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걸 다 털어놓고 케이타를 안아주는 료타는 진정 아버지로서 성장했다.
료타는 그동안 아이들의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성장하는 시간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제대로 그 시간을  부여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시간이라고'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 풍족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장난감을 같이 가지고 놀 아빠와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아빠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이 날 본보기로 성장해가고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날 닮은 자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삶에 멘토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2. 21. 14:35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감독 :츠키카와 쇼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꼭 제목이 호러물이나 좀비스럽지 아니한가? 아마 제목 때문에 그리 당기지 않았다고 하면 웃으려나?

그런데 사실이다. 너무 유치하거나 기괴스러울 것 같았다. 또 편견이었음을 인정한다.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들의 만남이 시작점이 되어야 하겠다.

병원에서 주운 공병문고

병원에서 우연히 주운 [공병문고], 그 안에 담긴 비밀, 췌장에 이상이 생겨 곧 죽는다는 내용을 보아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비밀을 적은 [공병문고]의 주인이 하필이면 같은 반 여학생인 사쿠라(하마베 미나미)였다.

사쿠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 치고 지나치게 활발하고 인기도 많은 여학생이고, 하루키(키타무라 타쿠미)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엮이지 않는 자신 자체의 삶을 사는 아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 때문에 슬픔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다. 주변인들이 슬퍼하고 애쓰는 모습으로 남은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는 게 두려워 주변인이나 친한 친구에게까지 말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도 무덤덤한 하루키에게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하루키는 의도와는 다르게 사쿠라의 버킷리스트에 얹히게 된다.

사쿠라가 도서관에 도서위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임을 아는데, 그런 사쿠라를 이해할 수 없는 하루키는 그녀에게 묻는다.

"짧은 여생을 이런 일에 써도 돼? 많이 있잖아? "

나도 하루키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지금 도서위원으로 들어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뭔가 못해 본 일을 하려고들 하니까 말이다. 오히려 주변정리를 해 나가는 이들도 있고, 여행을 간다거나 나름의 버킷리스트를 적어가지 않는가!

"너야말로 하고 싶은 일 안해도 돼? 내일 갑자기 네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잖아,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요즘 묻지 마 폭행도 많고 말이야.시한부인 나도, 너도 하루의 가치는 똑같아!"

도서위원이 된 사쿠라

그런 하루키에게 던진 사쿠라의 말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내 인생에서의  하루는?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면 오늘의 가치는?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일부분인 하루인 '오늘', 하루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인생의 가치를 운운하며 내일은 내게 당연히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퍽하면 오늘 할 일도 '내일 하지'로 미루었던 것들이 하나 둘 뿐이겠는가 말이다.

시한부로 사는 사쿠라도 그저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사는 내 하루와 똑같다. 그러나 그 가치는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이 벚꽃의 대사로 작은 반성을 하게 된다.

이왕 옆길에 샌 김에 한 마디를 더 보태자면, 일본 영화는 우리의 정서와는 참 다르게 전개해 나간다. 담백하고 덤덤하게 사랑, 죽음,이별을 다룬다. 한국영화는 울려야, 아니 꼭 울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시한부 인생을 다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영화는 죽음에 대해 이별보다는 긴 여행을 떠난 슬픔 정도로 다가오게 한다. 그리곤 문득문득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솔직히 이 영화 '가볍게 영화 한 편 때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영화인데, 내게 너무 큰 울림을 주었다.

"난 남과 관계를 안 맺는 걸로 내 영역을 지켜 왔거든."

이 말은 하루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모든 관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변에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다. 그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 그럴 수도 있겠다. "에이~ 왕따네" 그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쿠라의 눈에도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만큼 강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쿠라,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소유자로서 밝고, 긍정적이고, 사교성이 좋은 편이다. 시한부 인생인 자신보다 사랑하는 주변인들의 마음을 더 헤아리는 심성 착한 아이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인데, 벚꽃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같이 보내게 되는 '친한 사이 소년'으로 그녀의 하루하루에 본의 아니게 올라타게 된다. 자신의 영역이 조금씩 벚꽃으로 인해 무너지고, 그녀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리스트에 동행하게 된다.

그러다 조그마한 마찰이 생기고 하루키는 사쿠라에게 소중한 시간을 더 잘 사용하라는 의미로 말을 건넨다.

"그 날 우연히 너랑 마주쳐서 그냥 흘러온 것뿐이야. 나 같은 놈보다는 정말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우연이 아니야. 흘러온 것도 아냐. 우린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해 온 선택과 내가 해 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거야.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만난 거야."

아! 진짜.... 또 파동이 인다. 틈만 나면 운명 탓으로 빠져나가는 나의 비겁함에 소나기 같은 시원함이었다.  그래! 선택과 선택이 맞물려 인연이 만들어지는 거지. 결국 사쿠라가 비밀을 털어놓은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고, 여행을 떠난 것도 그녀와 그의 선택이었다. 서로의 선택이 쌓이고 손 잡으면서 시간을 공유하며 오늘의 가치에 그들을 공존하게 했다. 운명이나 우연 따위로 비껴가지 말자. 스스로의 의지에 마음을 내주며 선택해 간 시간들이었다. 우연이니 운명으로 치부했던 것들이 결국 사람들의 선택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는 느낌에 확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성인이 된 오구리 슌

영화 초반, 12년이 지나 성인이 된 하루키(오구리 슌)는 자신의 모교의 선생님이 되어 있다. 선생님이 된 지금의 모습은 아직도 관계를 맺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사직서 봉투가 들어있고, 수업시간에도 학생과 선생님은 한 공간에 두 세상으로 나누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도서정리를 억지로 떠맡게 된 그가 벚꽃과의 추억이 쌓인 도서관에 들어서면서 과거로의 회상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키는 "너에게 있어 산다는 건 어떤 거야?" 벚꽃에게 묻는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일까? 누군가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손을 잡고, 서로 껴안고, 스쳐 엇갈리고, 그게 산다는 거야. 혼자 있으면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없어. 그런 거야. 좋아하면서도 밉고 , 즐거우면서 우울하고,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과 남과의 관계들이 내가 살아있단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사쿠라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감정을 나누며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친한 친구 쿄코와 하루키를 친구로 엮어주고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고, 쿄코가 하루키를 오해하는데 해명하려면 자신의 병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이고, 자신이 죽고 나서도 그들이 친한 친구로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마베 미나미

겉으론 밝고 긍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리고 상처 받기 쉬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애써 강한 척 밝은 척하며 살아온 그녀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가던 하루키도 실은 사쿠라의 삶을 동경하고 있었고, 사쿠라 역시 하루키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는 강해. ....고백을 하자면 나는 네가 되고 싶어. 남을 사랑할 수 있고,남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누군가와 더 많이 마음을 나누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나는 그런 네가 될 수 있을까?....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처음 내가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 비웃었다. 기괴스럽다고. 그러나 그 뜻은 영화를 다 본 입장에서 미안하기 그지없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속뜻은 이런 거였다.

'누군가의 신체를 먹으면 영혼이 그 사람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표현이 더디고 잘 내비치지 않는 하루키가 사쿠라에 대한 마음을 문자로 다 드러낸 것은 왠지 덤덤하게 끌고가던 길을 이탈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야 하루키가 되고 싶어.하루키 안에서 계속 살고 싶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과거에서 관계를 맺지 않던 하루키에게 사쿠라의 존재가 현재 그의 몸안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본 영화가 내게 큰 울림이 되어 마음에 들어 앉았다. 일본영화는 날 소리내어 울게 하지는 않는다.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