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9.04.28 세가지 색 : 블루 - 자유가 테마인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4. 28. 11:22

영화 세가지 색 : 블루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의 세 가지 색은 3부작으로 프랑스 국기를 구성하는 블루, 화이트, 레드를 모티브로 블루는 자유를, 화이트는 평등을, 레드는 박애를 상징한다.

세 가지 색 : 블루는 거시적인 국가적 이념보다 개인적 삶의 자유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세 가지 색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의견이 만들어지고, 오묘한 색채적 감각과 신비한 감정들을 끄집어내는 매력이 있다.

자신의 아픔의 크기만큼 자신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영화를 흡수할 수 있는 것 같다.

꼭 자유라는 프레임에 묶이지 않고 그저 여주인공의 시선과 슬픔에 다가가면 블루는 그저 차거운 색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치유의 색이라 여긴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혼자만 살게 된 줄리(줄리엣 비노쉬)의 상실감은 세상과 자신을 차단시키기 시작한다.

5살난 딸과 남편을 잃은 그녀는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아니 흘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만 살아남은 건 행운이 아니라 고통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상실감으로 모든 감정이 갇혀버린 것이다.

 

남편과 아이의 흔적이 있는 곳에서 혼자 살아남아 살아낼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줄리는 그 집을 처분하라고 내어놓고 딸아이가 좋아하던 블루 상제리아만을 챙겨 그 집을 나온다.

그 집을 나오며 주먹을 움켜쥔 채 돌담장에 주먹을 그어가며 나오는 장면과 다 쏟아부은 가방에서 사탕 하나를 발견하고 울음 대신 사탕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모습은 딸아이를 잃은 슬픔보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더 분노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아펐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고통이 이러한 것인가를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느낌이었다.

"저만 살아남았어요. 추억도 소유도 원치 않아요. 친구도 사랑도 모든 게 덫일 뿐이에요."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군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애써 가려진 그녀의 표정 아래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심리적 아픔으로부터 그렇게나마 벗어나 보려고 몸짓이 가슴을 친다.

아이들이 살지 않는 자그마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상젤리아만 걸어놓고 어떤 가구도 들이지 않는다.

몸은 살아있지만 그녀의 삶은 차사고가 난 날 이미 남편과 딸의 죽음과 같이 멈추어 섰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구원의 손길을 원하는 사람도 외면하고, 창녀 루실을 아파트에서 내몰자고 사인해 달라는 이웃에게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한다.

하지만 루실은 줄리가 사인을 해주지 않아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게 되었다고 감사의 꽃을 전하고, 고양이를 풀어 쥐새끼를 죽게 만든 죄책감으로 우는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이 그 쥐를 치워주겠다고 위로해준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감정과 철학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흐른다. 살아있는 한 내가 멈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살아있기에 천천히 또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상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외면하고 정지시킨 순간에도 삶은 흐른다. 결국은 사람들로 인해 치유될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한 말이다.

 

어느 날, 창고에서 쥐가 새끼를 낳아놓은 것을 발견한다. 치우지 못하고 어미쥐가 밤새 내는 소리에 그녀는 괴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줄리는 아랫집에서 고양이를 빌려와 창고 안에 넣어놓고 울면서 집을 빠져나간다.

새끼 잃은 엄마 쥐를 자신과 같이 여겼을까 고통스럽게 수영장 물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음악소리와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은 오로지 고요한 물속이다.

물 밖으로 나오니 남편의 연주곡이 들리자 그녀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귀를 막고 있는다. 그녀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영장 물속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가 비에 젖지 않는 것처럼 투명한 눈물로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상실감은 우리가 보이는 시선에 젖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 울 자격마저 앗아가 버린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거리의 악사는 남편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이 쌓는 담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차단하려고 해도 거리의 악사로 인해, 가는 병원으로 인해, TV 화면으로 자신의 삶이 자꾸 세상 밖으로 빠져나간다.

사고를 잊으려고 하는데 불현듯 찾아와 사고 현장에서 주운 십자 목걸이를 돌려주려고 온 청년도, 남편의 미완성작을 올리비에(베누아 레전드)가 완성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남편의 미완성 작품도 영원히 미완성으로 쓰레기차에 구겨 넣어버렸다.

하지만 복사본을 해놓은 문서보관소 직원과 올리비에는 그걸 자신을 위해 세상에 내어놓으려고 한다.

남편에게 자신 말고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줄리는 남편의 애인을 만나러 가게 되고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은 아이가 생긴 것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낳아서 키우고 싶다고 말하고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어쩌면 줄리는 남편의 외도 사실로 죄책감을 덜어낸 것 같다.

남편의 집을 팔지 않고 그녀가 원하다면 그 집에서 살라고 하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이 또한 그녀의 뱃속의 아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남편과 아이에게 가는 송곳같은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내지 않았을까.

 삶과 죽음은 이어져있는 것 같다.

줄리는 남편을 위해 작곡하던 협주곡을 완성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하고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고 올리비에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줄리는 눈물을 흘린다. 수영장을 찾지 않아도 슬픔은 슬픔대로 그 슬픔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는 과정과 음악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줄리는 삶 속에서 감정을 정화시키고 치유해 갈 것이다. 

보통 영화에서 사용되는 페이드 아웃은 시간적 흐름의 변화를 위해 천천히 밝아지거나 천천히 어둡게 하는 하는 것으로 화면 전환을 위해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시 정지되었다 다시 작동한다는 것이다. 줄리의 내면에 초점을 두고 일단정지된 상태로 다시 그 시점을 비추어주는 암전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심리에 초점을 두고 감독은 암전과 함께 즈비그니에프 프라이즈너이 웅장한 음악이 압도적으로 검은 화면을 잠그는 대신 귀를 열게 한다.

감독은 줄리의 심리를 화면과 음악으로 상실감을 표현하고 암전 기법을 사용하여 그녀의 감정의 흐름을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영화 중간에 줄리가 찾아간 남편의 애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법원이었다. 남편의 애인은 변호사였고, 그녀가 사건을 담당한 여인 도미니끄와 남편 카롤이 잠시 모습을 보였다. 화이트에서 이어질 두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