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2. 22. 15:36
물랑루즈
감독 바즈 루어만 
 

 

영화 물랑루즈

 

역시 명품이다. '빛이 바래도 좋다.' 하고 봤는데 빛이 바래지 않는 명작이다. 오래되었다는이다.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는다. 

1899년 파리, 보헤미안 혁명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는 몽마르트르를 배경으로 한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에 있는 화려한 뮤지컬 세트장을 배경으로 익숙한 대중가요와 춤과 화려한 의상으로 눈을 사로잡는 뮤지컬 영화 <물랑 루즈>는 2001년도 개봉한 영화로 말이 필요없는 영화이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의 표정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니콜 키드먼이 입은 화려한 의상과 다양한 볼거리로 눈을 뗄 수 없는 공연과 풍차가 있는 카바레 세트장까지 환상적이다. 

물랑루즈 세트장

물랑 루즈라는 카바레의 간판 가수이자 고급창녀인 샤틴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찬란한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는 환락가에서 유명한 세속적인 가수이다.
그녀는 가난이 더 비참한 것이고 매춘부에게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돈을 얻는 게 더 확실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이다. 재력있는 투자자를 만들어 진정한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보헤미안혁명의 물결에 합류해 몽마르트로 온 영국인 시인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앙은 사랑이 없는 것이 가장 비참하다고 말하는 순수한 남자이다. 그리고 사틴에게 한 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마는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은 그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해럴드는 카바레 주인으로 공작의 투자가 필요하고 사틴의 아름다움에 반한 공작에게 투자를 받기 위해 공작과 사틴을 위한 둘만의 장소를 마련한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을 공작으로 오해한 샤틴은 그와 그 방에 같이 있게 되고,잠시 후 나타난 진짜 공작으로 인해  그를 내보내려고 하는데 공작이 둘만 있는 상황을 오해하게 되자 재치있는 순발력으로 새로운 시나리오 리허설 중이었다고 말하고 크리스티앙을 작가라고 소개한다.
니콜 키드먼

헤럴드와 사틴과 보헤미안배우들의 도움을 받아 즉석에서 새로운 공연 '스펙타큘러' 공연의 주제가 만들어지고, 공작의 투자를 얻어낸다.

하지만 공작은 두가지 조건으로  사틴의 독점권과 물랑루즈의  지분을 갖길 원하고 헤럴드는 공작의 계약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투자로 크리스티앙의 시나리오로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 연습을 한다. 사랑은 흔한 거라 믿지 않던 사틴은 점점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해럴드와 공작의 눈을 피해 사랑을 이어간다.
공작이 사틴에게 개인적으로의 시간을 가지려 할 때마다 리허설을 핑계로 빠져 나간다. 점점 곤란해진 해럴드는 사틴과 크리스티앙의 관계를 알아버리고, 공작은 투자를 빌미로 사틴을 취하려한다. 
크리스티앙과 밤에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공작에게 가지 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럼 투자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매춘부 샤틴과 작가 크리스티앙의 만남

그러나 사틴이 쓰러진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의사의 말을 헤럴드는 듣게 된다. 그러나 헤럴드는 샤틴에게 그 사실을 숨기게 되고, 공작에게 대충 샤틴이 공작을 사랑하는 것처럼 둘러 댄다.

크리스티앙은 샤틴이 공작과 시간을 보낸 줄 알고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공작은 계속 리허설로 그녀가 바쁘다고 빠져나가자 어느 날 샤틴과 크리스티앙의 관계를 눈치채게 된다.

질투로 눈이 먼 공작은 공연을 코 앞에 놔두고 공연의 결말을 다시 쓰라고 한다. 사틴을 둘러싸고 두 남자의 사랑과 질투로 갈등이 생기고 충돌하게 된다.

작가인 크리스티안은 화를 내고, 사틴은 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작에게 간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을 사랑했던 사틴은 차마 공작과의 관계를 가질 수 없어 도망쳐 나오고, 질투심에 힘들어하던 크리스티안은 그렇게 자신에게 돌아온 사틴과 도망가기로 한다. 사랑만 있으면 되는 두사람이었다.
사랑의 행복을 알게 된 샤틴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와 떠나기로 결심한다.
공연모습
샤틴은 짐을 챙겨 그와 함께 떠나려는데  헤럴드는 "너는 죽어가고 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작이 크리스티앙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크리스티앙을 살리고 싶으면 그를 떠나게 하라는 것이다. 
넌 연기를 하는 사람이니 연기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 상처를 줘서 그를 여기를 떠나게 하라는 것이다. 사랑이 준 행복이 너무 컸다. 그동안 몰랐던 감정으로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감정으로 충만했는데 죽어가고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는다.
결국 그녀는 그를 살리기 위해 크리스티앙에게 자신에게 다 해 줄 수 있는 공작에게 가겠다고 말한다. 상처받은 크리스티앙은 카바레에서 쫓겨나고 좌절한다.
 

샤틴은 약을 먹으며 공연을 이어간다. 그리고 무대뒤에서는 마지막으로 샤틴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크리스티앙이 카바레 공연장에 몰래 숨어둔다.

크리스티앙을 죽이려 하는 공작의 부하를 발견한 샤틴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 몸으로 막아내는 상황이 이루어지는 순간 무대 커튼이 쳐지고 관객들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을 헤럴드는 즉흥적으로 무대를 끌고 간다.

무대 위에 서게 된 크리스티앙은 매춘부에게 화대를 지불한다고 돈을 던지고 무대를 내려간다. 이 부분이 아펐다. 사랑이었는데.... 샤틴도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린다. 각본 없는 즉석 연기가 이어지고 관객은 숨을 죽이며 몰입하고 있다.

샤틴은 무대를 빠져나가는 크리스티앙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그와 불렀던 자신들의 노래 'Come What May'를 부른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거야." 크리스티앙은 발길을 돌려 그녀의 사랑에 답하듯 그녀의 진심에 눈물지으며 무대에 그녀와 같이 오른다.

사틴은 헤럴드의 말처럼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 'The Show Must Go On'. 화려하게 공연도 마무리되고, 사랑도 확인되었는데 무대가 끝나자 그녀는 쓰러진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크리스티앙은 절망하고 샤틴은 자신 없는 삶을 그가 작가로서 멋지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 사랑은 정말 위대하다. 서로를 원하는 간절함은 그 어떤 것으로 메울 수 없는 감정이다.

물랑루즈 마지막 명장면

영화속 영화가 있고, 영화 속 뮤지컬 한 편이 있고, 영화 속 대중가요가 있고, 영화 속 또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느낌이다.  <물랑 루즈>는 감독이 수많은 대중가요를 영화에 사용하기 위해 저작권 동의를 얻는 데에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화려한 무대장치와 두 배우의 표정과 노래 실력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영화 The Sound of Music 의 타이틀 곡인 The Lonely Goatherd, 그리고 1991년에 너바나가 부른 노래 'Smells Like Teen Spirit', 1984년에 마돈나가 부른 노래, 'Like a Virgin, 마돈나가 1985년에 부른 노래 'Material Girl',처음 샤틴의 방에서 크리스티앙의 시로 불렸던 노래는 1970년에 엘튼 존이 부른 'Your Song'으로 샤틴이 크리스티앙에게 반하는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데이빗 보위의 1974년 노래 'Diamond Dogs'와 퀸의 노래 1991년 'The Show Must Go On' 등 수많은 대중가요를 영화에 사용 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니콜 키드먼이 불렀던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는  마릴린 먼로가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 불렀던 노래이다.
이완 맥그리거와 니콜 키드먼이 같이 부른 'Come What May'는 <물랑루즈>의 마지막 명장면을 있게 해 준 곡이다.
"Come What May" 
가사를 음미해본다.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이다. 사랑하면 온통 내 마음이 그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노래가사를 찾아서 음미하는 것도 너무 좋다. 사랑하면 그 사람 생각으로 머리속이 도배되고 심장은 그 사람으로 가득 차고 갑자기 세상이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밤이다.

영화 <물랑루즈>는 주크박스 같은 로맨틱 뮤지컬 영화이다. 수많은 사운드 트랙과 OST와 화려한 무대와 연기로 무대보다 더 화려하고 의상보다 더 화려했던 니콜의 미모는 숨이 멈추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이 영화로 인해 나는 빨간 풍차가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고 싶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1. 4. 14:16

걸작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이탈리아 영화 천재 로베르토 베니니의 작품으로 199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음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유럽 영화상 작품상을, 크리틱스 초이스 영화상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하여  깐느가 그랑프리를 헌사한 영화이다.

작품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홀로코스트 영화이다.

홀로코스트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에 의해 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외신 기자들을 통해 유럽 유대인 학살사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토스카나주를 배경으로 이탈리아계 유태인 귀도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들을 구하는 부성애를 다룬 영화이다.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영화는 정말 참담하다.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저럴 수 있냐'를 놓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비 인륜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을 넘어서 말을 잇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우울증을 앓아야 하는 나다. 

그런데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 영화임에도 학살에 초점을 두지 않고 아들에게 이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재치 있는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버지 '귀도'역을 맡은 배우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코미디 배우인 로베르토 베니니다. 그는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아 영화사에 빛나는 걸작을 만들어 냈다.

유대인 청년 귀도는 로마에 상경한 시골총각으로 유머와 재치스러운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숙부 밑에서 웨이터로 일하게 된 귀도는 초등학교 여교사인 도라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도라는 순수하고 긍정적인 귀도의 구애와 사랑에 끌리게 되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조슈아가 태어나고 그들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

귀도와 조수아와 도라
조슈아와 귀도와 도라 한가족

아들 조수아가 5살이 되던 생일날,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로 인해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실리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도라는 유태인이 아니지만 가족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은 유태인들로 꽉 들어찼고, 아들에게 이 처참한 현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귀도는 평상시 성격처럼 긍정적으로 게임이라고 한다. 우리는 선택된 것이라고!

식당 앞에 '유대인과 개는 금지'라고 적힌 글을 보고 조수아가 물었을 때도 그는 재치 있게 대답했던 아버지였다.

이번에도 그는 아들이 이 현실을 모르도록 해야 했다. 5살인 아들의 눈높이로 말이다.

아들이 겁먹지 않게, 놀라지 않게 자신의 아들을 지켜내야 하는 아버지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고, 노동력이 없는 아이들은 가스실로 보내지는 상황에서 아들을 숨겨야 했다. 

독일군이 들어와 규칙을 말하겠다고, 독일어 할 수 있는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할 때에도 그는 손들고 나간다.

아들에게 게임이라고 어떻게든 믿게 하고 싶었다.

독일어를 할 줄 아냐고 옆에 유태인이 묻자 그는 '모른다.'고 하면서 나간다. 

그는 독일군이 독일어로 말하는 걸 마치 알고 해석하는 것처럼 조수아를 향해 말을 한다.

지금부터 게임규칙을 잘 지켜 1,000점을 먼저 얻는 1등에게는 진짜 탱크를 선물로 준다는 말과 꼴찌에게는 등에 멍청이라는 딱지를 붙인다고 말이다. 그는 독일어를 모른다.

그저 아들을 향한 소리였다. '널 살리겠다는 나의 의지다.'

그 비극적인 상황속에서도 귀도는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아들을 숨겨야 했고, 아버지를 믿는 어린 조수아만이 웃음을 짓고 있다.

진짜 탱크를 준다는 말에 기쁜 조수아는 잘 숨어 있어야 하고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귀도는 아들과 계속 게임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숨기며 수용소 생활을 버티어 간다.

그 두 사람을 제외한 주위의 사람들은 웃을 기운도, 귀도의 행동을 신경 쓸 여력도, 의지도 없이 어둡게 짓눌리고 있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다른 세상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착각이 든다.

그러던 중 독일군들이 수용소에서 철수하려는 상황을 눈치 챈 귀도는 조수아에게 마지막 게임이라고 말한다.

940점을 받았으니 이제 60점만 받으면 일등을 한다고, 오늘 밤만 들키지 않으면 네가 일등이고 사람들이 널 찾고 있으니  내일 아침까지 숨어서 나오면 안 된다는 말한다.

주위가 완전히 조용해지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숨어 있어야 진짜 탱크를 받는다고 아들 조수아를 숨겨놓는다.

자기는 사람들을 딴 곳으로 유인하겠다고 말하고 여자처럼 변장한 채 아내 도라를 찾아다닌다.  

아내만 찾으면 단란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자 수용소 안은 텅 비어있고 그는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독일군에게 끌려가던 귀도는 아들이 숨어 있는 쓰레기통을 지나치게 되자 아들을 향해 웃어 보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아들 조수아도 아빠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그리고 귀도는 씩씩하게 병정 걸음을 흉내내며 앞으로 걸어간다.

귀도의 등 뒤에는 총을 겨눈 독일군인이 따라간다. 잠시 후 한 방의 총소리가 들린다. 이 영화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아름다워 명장면 아들에게 윙크하는 귀도
아들 조슈아를 향해 윙크하는 아버지 귀도

 

아들을 위해 병정걸음으로 걷어가는 아버지 귀도
아들에게 병정놀이처럼 보이게 하려는 귀도
아빠에게 윙크하는 아들 조슈아
아버지 귀도의 윙크에 답하는 조슈아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어두워진 상황에서도 그는 아들에게 게임을 하는 아빠로 웃어주며  윙크하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웃는다.

네가 사는 세상은 널 향해 웃어주지 않지만 내가 주는 세상은 널 위해 웃게 해 주겠다는 그의 희생 앞에 먹먹했던 가슴이 문을 열었다.

누군가는 그런다. 홀로코스트 영화를 너무 장난스럽게 그려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그럼 묻고 싶다. 당신이라면 5살밖에 안된 아들에게 저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느냐고?

어른인 나도 유대인에게 가한 학살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용납이 되지 않는데, 과연 저 어린아이에게 무어라 설명할 것이며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는지를 말이다.

날이 밝았다. 독일군이 떠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조수아는 쓰레기통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진짜 미군 탱크가 조수아앞에서 멈추어 선다. 아빠의 말처럼 그는 1등인 것이다. 조수아를 살리고 싶은 귀도의 의지가 이루어졌다.

미군은 조수아를 탱크에 태워준다.

그리고 유대인 행렬속에서 엄마를 발견한 조수아는 엄마에게 아빠와 자기가 게임에서 이겼다고 말한다. 아빠가 웃겨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아빠의 유머가 익살스러운 모습이 아들을 저 암담한 환경속에서 절망을 모른 채 게임으로 알게 한 그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아이의 동심에 히틀러라는 악마를 느끼지 않게 해 주었다.

아들을 살리기위한 코미디는 우리에게는 슬픈 희생이었다. 그 희생은 조수아에게 아름다운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암울하고 비참하고 잔인함 속에서 게임으로 아들의 삶을 희망으로 인도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면 귀도의 익살스러움에 우리는 배꼽이 빠지게 웃을 수 없다.

어린 조수아가 배꼽 빠질 정도로 느끼게 해 준 귀도의 사랑은 뜨겁고 또 뜨거운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들과 아내를 향한 그 숭고한 사랑과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그의 의지가 아들을 살려 밝은 세상으로 돌려보냈다.

아빠의 말을 끝까지 들은 아들 조수아가 날이 밝아 정적만이 감도는 수용소 광장에 홀로 서 있고, 탱크 한대가 조수아를 향해 다가온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하였다.

귀도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서, 그의 의지가 또 이루어냈다는 믿음을 주어서 조수아의 내일이 아름다울 수 있게 빛을 주어서...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감독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긍정적이고 사랑으로 가득 찬 귀도의 희생이 아무리 힘들고 비참하더라도 의지만 있다면 웃음을 잃지 않고 좌절만 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느냐, 아니면 어두워지느냐는 내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의지가 없어 안 보이는 것뿐이라고. 

상황이 어떻든 너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세상이라는 걸 말하는 듯 하다. 이 영화는 내게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처럼 끔찍한 장면을 보여 주지도, 지옥같은 비참함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묵직한 소재를 무게 있게 다루지도 않았고 가볍게 장난스럽게 다루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도 존중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내 자식에게는 좋은 세상만 알게 하겠다', 그리고 '이 어두운 현실에서 아들을 지켜낼 것이다', '이 어두운 현실을 아들은 느끼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부성애만 비추어 주었다.  

끝까지 슬픈데도 울게 하지 않는다. 슬픈데 절대 울면 안될 것 같은 의지를 심어 놓는다. 그래서 더욱더 먹먹하였다.

잿빛 수용소안에서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지는 도라의 모습도, 아들을 향해 게임을 하는 아버지도 , 그저 우리가 눈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그려내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건들어주어서 이 영화는 우리가 공감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영화라기보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이 영화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본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고, 사랑 받음으로 또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을 코미디화 시킨 게 아니고 아들에 대한 부성애가 5살 아이의 눈으로 맞추어 주느라 따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끌고갈 의지만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 의지를 믿고 싶어 지는 영화였다.

내게 이 영화는 영화이상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