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2. 25. 19:44

셀마 (SELMA)


감독 에바 두버네이

영화 셀마
자유를 위한 여정

차별은 폭력이다. 인종차별은 범죄보다 더 위에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 위에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세상이라는 평행 선위에 놓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부색으로 차별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의 수준이 바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수많은 영화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만행을 보아왔다.

그들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얀 피부색 하나밖에 없는 미개한 사람들, 백인 우월주의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데이빗 오예로워)는 미국의 흑인 인종차별에 저항한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가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도하여  1964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처음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한 것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때였다. 

1955년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에서 백인 남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당시 '흑백 인종 분리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 목사는 흑인들의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로자 파크스는 헌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여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 판결을 이끌어 낸다.

버스 이용 인구의 약 75%는 흑인들이고, 버스가 다 차기 전에는 앉을 수 있으나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하고, 버스가 만원이 되면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이런 불평등은 버스뿐만이 아니었다. 공공장소도 흑인을 구분 지었고,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이에 마틴은 본격적으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비폭력적인 인권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셀마교회에서 흑인 아이 넷이 참살당한 것을 계기로 셀마를 도화선으로 삼아 거리행진을 진행하려고 한다.

투표권을 요구하는 흑인여성
법원앞 투표권을 달라는 시위중 폭력을 당하는 흑인들

셀마 인구의 50%가 흑인임에도 차별과 협박으로 말미암아 셀마 인구 절반이 투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흑인이 투표자 등록하기 위해선  등록된 투표권자에게 보증을 받아야 하고, 법원까지 가서 인두세를 내야 하고, 이름과 주소를 신문에 내야 한다. 그리고 그걸 본 백인들의 손에 죽게 되어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법을 금지시켜야만 했다.  

흑인들에게 법적으로 투표권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 투표권자들의 투표자 등록을 막으려고 조직적인 협박과 공포감을 조장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연방법 입법으로 흑인 시민들에 대한 자유로운 투표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지만 가난 구제정책이 더 시급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들이 헌법에 보장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 자신들의 불평등한 삶을 끝낼 수 없다. 그들에게 투표권은 생존권과도 같았다. 법원앞에서 투표권을 보장해 달라고  흑인 지지자들과 마틴은 비폭력 주장을 하지만 그들은 해산을 요구하며 폭력을 휘두르고 감옥에 가둔다.

 

 FBI는 마틴을 위험인물로 규정하여 그를 감시하고 도청한다. 매일같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가족들에게 협박 전화과 위협을 가하고. 아내는 하루하루가 짙은 안개와 같은 삶을 산다. 계속된 협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아내와 자신을 지치게 한다.

 그리고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비폭력운동 방식이 비난받고,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백주대낮에 맨 앞에 나서는 사람들과 또 그들을 따라 일어서는 그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좌절하기도 한다.

 

 

한 경관에 의해 인권 시위도중에 어머니를 보호하려던 지미 리 잭슨이 사망하게 된다. 

그는 82살된 할아버지가 살아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어머니와 할아버지와 거리행진을 나온 흑인 젊은이이다. 

마틴은 말한다. "백인 정치인들, 편견과 혐오를 먹고 사는 자들, 침묵하는 자들, 흑인이 모욕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죽어가는 데도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관망하는 흑인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 바칠 수 없다면 충실히 산 것이 아니다."

정부는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베트남 해방을 구실로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국내에 있는 국민의 목숨도 지키지 못하는 도덕적 의지와 용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수상자로 카메라가 그를 따라다닌다. 사실상 주의회에 보이기를 바랐다. 그는 행진을 통해 백악관 수장과 언론의 관심을 끌어 흑인 인권문제를 공론화하려고 계획한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

 

그래서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거리 평화행진을 진행하려고 한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의 아멜리아 보인튼 로빈슨과 그녀의 남편이 시작한 투표권 쟁취운동으로 마틴 루서 킹 주니어, 짐 베벨, 호시아 윌리엄스를 비롯한 많은 저명한 미국 인권 운동가를 셀마로 집결하게 된다.

첫날 짐 베벨이 이끈 600명의 인권 행진에 참여한 흑인들은  몽고메리로 가기 위해서는 에그몬드 피터스 다리를 건너야 했다. 비폭력을 지향한 무력시위였으나 백인 경찰은 무장한 채 곤봉과 몽둥이와 최루가스로 폭력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흑인들을 공격했다. 흑인들이 폭력을 당해 다치고, 도망가는 장면이 언론과 TV를 통해 보도된다. 주지사 조지 윌리스는 강력하게 그들을 탄압하고 공격한다.

이를 본 많은 미국인들이 시위에 동조하여 참가하려 셀마로 모이게 된다. 

두 번째는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하여  2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한다. 물론 이번에는 많은 백인들이 가담했다. 그런데 첫날과 달리 다리에서 경찰들이 순순히 자리를 비켜 준다. 예상하지 못한 마틴은 백인 경찰들이 물러나고 몽고메리까지 행진만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킹 목사는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후퇴한다. 이를 두고 많은 흑인들이 비난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그는 당장을 생각하지 않고 계속 이 많은 인원을 데리고 행진했을 때 겪을 물과 식량의 부족 문제와 잘 곳을 걱정했다고 한다. 좋은 취지가 자신들 안의 문제로 무너지고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염려한 것 같다. 

그리고  백인 제임스 리브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공격받고 죽게 되는 사건이 터진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나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 공동체로서의 삶,국가로서의 삶까지 무너지게 하고 있다.

가족들의 신변의 위협을 받으면서 폭력 시민 운동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두려움과 싸워 결국 세 번째 무려 2만 명이 넘는 지지자들과 함께 셀마에서 몽고매리까지 행진할 수 있었다.

마침내 미국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고 나서야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 문제가 흑인의 문제도 남부의 문제도 아닌 미국의 문제라고 말하며 투표권 제한을 철폐하게 된다. 그리고 윌리스 주지사는 그들의 투표로 다시는 주지사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에 서명하여 공공장소에서의 인종분리나 차별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인종차별의 철폐와 인종간의 공존이라는  민권법이 제정됨으로써 인권운동가로서의 마틴의 입지는 탄력을 받게 된다.

 

비폭력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그들이 목숨을 내놓고 갖고자 하는 투표권, 그건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이고 그들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그가 감옥에서 회의감이 들어 "흑인이 설사 식당에 들어간다고 해도 버거 하나 살 돈이 없고, 못 배워 메뉴판마저 읽지 못한다면 그게 평등인가 "하고 말이다. 그때 그런 그에게 같은 동지가 해 준 말은 " 벽돌을 쌓는 거지 우린 최대한 길을 닦는 거야 돌멩이 하나씩..."

아직도 차별받는 이들이 벽돌을 쌓고 있다. 평등을 위해서 말이다.

그의 유명한 연설문처럼 모두가 꿈을 위해서 벽돌을 쌓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그는 13년간 차별에 저항하며 벽돌을 쌓다 1968년 39살의 나이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의해 암살당한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2. 16. 10:59

The Post

스티븐스필버그 감독과 배우 메릴스트립과 톰 행크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크게 흥행을 거두지 못했다.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조합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미국 정부가30년간 감추어온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부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는 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68년 5월까지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로 다니엘 엘스버그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 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주요 부분만을 제공하여 언론에 누출시킨다.

뉴욕타임스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하였고 미국 전역에 보도된다.

1972년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던 닉슨행정부는 국가의 최고 기밀서류가 폭로되고 계속 연재되자 곤경에 빠지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둘러싸고 그 정당성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닉슨은 다니엘 엘스버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미국의 안보이익에 치명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언론 보도금지 가처분  소송을 하는 초유의 사태로 번지게 된다.

이에 경쟁언론사인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인 벤(톰행크스)'펜타곤페이퍼'의 입수에 사활을 건다.

'뉴욕타임스'는 '워상턴 포스트'지와 연합하여 법원의 금지명령에 대항해 15일동안 법정투쟁을 벌였고 그 기간중 연재기사는 중단되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메릴스트립)은 남편의 죽음으로 언론사를 상속받은 최초의 여성발행인으로서 정권의 위협에 맞서 이 엄청난 정부기밀을 밝힐 것인지, 덮을 것인지 자신의 회사인생을 걸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닉슨대통령은 권력을 총동원하여 그녀를 위협하고 4,000여장에 달하는 기밀문서를 손에 넣은 벤은 미정부가 개입하여 베트남전쟁을 조작한 사건을 세상에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바꿀 언론인으로의 사명감과 경영인으로 회사를 살려야 하는 책임감 또한 그녀의 어깨에 달려 있다.  캐서린의 결정을 기다리는 순간들, 모두를 초조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언론사가 언론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그들도 권력과 자본앞에서 살아내야 하는 기업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언론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런데 그 펜을 잡는 것은 사람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지도 기업이다. 언론사라는 기업. 그래서 여사장인 캐서린의 갈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과 진실앞에서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역을 해 낼 수 있는 메릴 스트립의 힘은 국가의 권력과 싸워야 한다.

압박하고 협박하고 위협하고 들어오는 권력앞에서 하나의 기업은 어쩌면 너무 나약한 토끼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론인이 아닌 기업인으로서  살아내려고 하면 진실을 덮어야 하고, 언론인으로 사명감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우리도 겪어왔다. 국가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려는 추악한 얼굴을, 국가권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진실을 묻어가기 시작한다면 민주주의는 어둠속에서 잠자고 만다.

언론이 정의를 위해 연대를 한다면 권력이나 자본에 침식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권력과 자본의 꼭두각시 노릇으로 전락해 버리면 우리의 삶은 어두운 터널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랜 세월 군부독재하 권력에 눌려 감추어진 진실이 이제야 세상밖으로 나오고 있다.

 권력의 약빨이 떨어진 것이겠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언론인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6대 3의 판결로 양 신문사에게 문제의 보고서를 다시 게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고 이 보고서의 공표를 제한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대법원으로부터 나란히 승소판결을 받고 법정을 나설 때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진실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언론사들이 가짜뉴스가 아닌 권력의 힘이 아닌 펜의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

"언론은 보도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그걸 포기하는 건 언론이 아니다."

캐서린(메릴스트립)은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택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공식표어처럼 '민주주의는 어둠속에서 죽는다'라는 마음으로 진실을 덮지 않기를 바란다.

기자들의 폭로가 쌓여 언론들이 진실에 대한 연대만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는 너무 미국의 시선 안에 가두었다.

픽션이었다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내주었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룸에 있어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시선이 아닌 베트남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장면도 집어넣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개인적으로 있다. 

미국 언론과 국가권력의 싸움으로만 비추어져서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