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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14 93.바그다드 카페 : 디렉터스컷 : 당신도 행복해 질 수 있다.
  2. 2019.03.13 92.브로크백 마운틴: 두 카우보이의 20년간의 로맨스
  3. 2019.03.13 91.콜드 마운틴: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러브스토리
  4. 2019.03.12 90.아직 끝나지 않았다: 엄마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
  5. 2019.03.12 89.비포 선라이즈 : 하루 동안의 사랑 모음집 같은 영화
  6. 2019.03.11 88.클로저: 거짓말은 통하고, 진실은 통하지 않는 사랑
  7. 2019.03.11 87.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서로에게 타인이 되지 맙시다.
  8. 2019.03.10 86. 미 비포 유 : 삶을 위한 마지막 선택
  9. 2019.03.10 85. 양지의 그녀 : 기억은 다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
  10. 2019.03.09 84.디센던트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
  11. 2019.03.09 83.사관과 신사 : 추억의 명화
  12. 2019.03.09 82. 플루토에서 아침을 : 엄마를 찾아 나섰는데 아빠를 발견했어요.
  13. 2019.03.08 블랙 스완 1인2역 '백조의 호수'
  14. 2019.03.08 80.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악마같은 상사를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
  15. 2019.03.07 79. 내 책상위의 천사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교과서같은 영화
  16. 2019.03.06 78. 여인의 향기 : 최고의 명장면, 명대사으로 꼽는 이유
  17. 2019.03.06 77. 쇼생크 탈출 : 두려움은 희망을 가둔다.
  18. 2019.03.06 76.어 퓨 굿 맨 : 넌 진실을 감당 못해
  19. 2019.03.05 75.뷰티풀 마인드 : 비운의 천재 수학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위대한 업적과 사랑의 방정식
  20. 2019.03.05 74.이자벨 위페르의 [피아니스트] :사랑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21. 2019.03.04 73. [장고 : 분노의 추적자] : 인종차별이 부른 분노의 끝은 복수
  22. 2019.03.03 72.당신이 말해줄 수 있다면 :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23. 2019.03.03 71.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외로운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24. 2019.03.02 70. 피아니스트 : 전쟁속에서 피어난 쇼팽의 아름다운 선율
  25. 2019.03.02 69.허스토리 : 기회를 줄게, 인간이 돼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
  26. 2019.03.02 68. 밀정 :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27. 2019.03.01 67. 사랑에 대한 모든 것
  28. 2019.03.01 66.레인 오버 미 : 9.11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한 남자의 상처와 흉터
  29. 2019.03.01 65. 비긴 어게인 :음악으로 치유되다.
  30. 2019.02.28 64.사랑의 순간 : 여자에게는 과거보다 현재의 사랑이 중요하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4. 18:20
바그다드 카페 : 디렉터스컷
감독 퍼시 애들론
영화 바그다드 카페

 

 
두 여성을 통해 삶의 결을 바꾸어 놓은 영화이다.
중년이 되면 삶이 사막 같을 때가 있다.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삶에 자신의 삶은 빛이 차단되어 암흑같을 때가 있다. 
속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 채워지지 않는 적막함, 마음을 가늠할 수 없는 소외감, 양적. 질적으로 텅 빈 막막함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불어온다.
힘에 부칠 정도로 삶이 지치고 늘어진다. 의욕도, 희망도 바닥이다.
 
황량한 사막에 물기조차 없는 브렌다(CCH 파운더)는 이런 모든 것이 짜증으로 들어차 있다. 
중년의 여자의 황폐한 삶을 사막 한가운데 갖다놓고 표현하고 있다.
먼지 가득 앉은 카페, 고장난 커피머신, 기대고 싶은 남편은 무능하고 게으르고, 엄마로서 위로받고 싶은 아이들은 제각각 자신을 더 숨막히게 한다.
 
미국의 황량한 사막에 자리잡은 바그다드 카페
커피머신은 고장난지 오래이고, 먼지 투성이인 카페는 여주인 브렌다의 삶처럼 방치되어 있는 것 같다. 
활기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작고 초라한 가게이다.
카페의 손님이라곤 장거리 트럭 운전수들이 잠깐 들러가는 것이 고작이고, 주구장창 피아노만 치는 아들, 밖으로만 나도는 딸,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에,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는 종업원인 원주민 카후엔가까지 의지라고는 다 말라버린 것 같다. 
 
그녀는 하루종일 짜증으로 모든 것이 불평.불만투성이다. 아들의 치는 피아노연주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찌들려있다. 
가게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의욕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캠핑카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는 무명화가 콕스도, 지나가는 손님에게 타투를 해주는  데비도 다들 행복에서 멀찌감치 멀어진 사람들처럼 삶이 바짝 메말라 있다.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을 쫓아낸 브렌다는 가게 앞의 의자에 앉아 사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흐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뚱뚱한 여인이 트렁크를 끌고 땀을 닦으며 다가온다. 독일여성 야스민(마리안느 세이지브레트)
미국여행길에서 남편과의 마찰로 싸우고  사막에 그녀만 홀로 남겨두고 가버렸다. 자신의 짐 트렁크 하나 들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정처없이 사막을 걷다  바그다드 카페를 발견한다. 
그녀에겐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을 것이다.
 
카페 주인 브렌다앞에  뚱뚱한 야스민이 찾아 들게 된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 만난 두 여자. 
하지만 브렌다는 이 낯선 손님을 경계한다. 그리고 수상하게 생각하여 경찰에 신고까지 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행객이었다. 
야스민은 브렌다가 없는 사이 지저분한 사무실을 말끔히 청소해 놓는다. 하지만 브렌다는 제멋대로 손댄 것에 분개하고 화를 낸다. 
 
브렌다는 하루정일  골난 사람처럼 짜증내고,공격적이고, 말투가 너무 단호하여 위압적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는 야스민을 대놓고 싫어한다. 
그러나 야스민은 비록 뚱뚱하고 엉뚱하지만 여성적이고, 긍정적이고, 활동적이고, 활기차다. 그녀의 섬세함과 마음 씀씀이는 더 없이 아름답고 따뜻했다.
남편과 헤어지고 사막에 놓여진 상황이지만 그녀는  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카페에 오는 손님들과 이웃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힘든 일을 도우면서 마술까지 하는 야스민으로 인해 아이들은 물론 이웃들로 활기찬 카페로 변모해간다.
가게도 깨끗하게 재단장되고 손님들의 입소문을 타고 카페는 손님들로 부쩍이게 된다.
 
이 두 여자에게 남편들은 이방인보다 더 멀게 느껴지고 방관자처럼 굴었다. 
그래서 브렌다의 삶은 점점 더 마음의 문을 걸어잠그고 소외된 사막같았다. 
그러나 야스민은 그녀와는 다르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마음을 더 활짝열고 사람들과 유대감을 만들어간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서로 더불어 의지하고 기대어 살지 않으면 행복은 영원히 찾아와 주지 않는 손님과 다름없다. 
 
다들 외로운 사람들이다.
외로움은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겠다. 
야스민의 등장으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바그다드 카페가 따스한 사람들의 웃음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닫혀있던 브렌다의 얼굴에도 웃음이 들어온다. 
야스민의 꾸밈없는 미소로, 불어넣은 마법같은 활력이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켜 놓는다. 
 
다들 삶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듯한  소외된 사람들, 
무기력하고 불완전해 보이기만 했던 바그다드 까페에 불어온 마법같은 기적,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상처들은 누군가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로 누군가 쉬어가는 공간이 되어 삶에 오아시스가 되어준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서로 맞지 않는 두사람 같지만 결핍된 감정을 채우는 데에는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관심받고 싶은 것이고, 관심 가져주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풍부해질 수 있다. 
따뜻한 마음만이 차가운 삶을 녹일 수 있다.
바그다드 카페도 이제 사람사는 행복으로 북적인다.
 
제베타 스틸이 부른 주제가 ' Calling You'는 이 영화를 더욱 풍미롭게 만들어 준다.
힐링 그 자체인 영화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3. 23:15

 브로크백 마운틴


 

감독 이안

 

 

동성애는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해왔다. 단지 사회가 만든 편견에 갇혀 그들을 비정상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동성애 관계도 심리학적으로는 이성애 관계와 동등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별을 거두고 그저 사랑에 집중하면 이영화는 너무 가슴 아프고 감동적인 로맨스이다. 
<노트북>과 같은 맥락으로  서로를 향한 끝없는 마음의 질주를 현실이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안 감독이 E. 애니 프루이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로 제작했다. 20년에 걸쳐 잭(제이크 질렌할)과 에니스(히스 레저)사이의 사랑을 다루었다. 
 
1963년 와이오밍 주 브로크백 마운틴 양떼 방목장에서 여름 동안 일하게 된 두 청년은  브로크백 산에 있는 방목장 근처에선 산림청이 야영을 금지하고 있어서  해가 지면 멀리 떨어진 산림청 지정 캠프로 철수했다가 밤이 되면 몰래 방목장으로 숨어 들어가 양을 지켜야 된다. 
 
자신의 목장을 가지고 싶은 로데오 선수인 카우보이 잭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목장 일꾼으로 떠돌아 다니던 에니스( 히스레저)는 약혼녀와 결혼할 집을 장만하기 위해 여기까지 일하러 왔다. 
 
여름이지만 밤엔 너무 추운데 불을 피울 수가 없다. 그리고 방목장까지 왕복하는데 4시간이나 걸린다. 아침먹고 양몰고, 밤에는 재워주고, 저녁먹고 가서 밤샘하고, 코요테하고 씨름까지 해야한다. 
 
에니스는  말이 별로 없고, 잭은 하모니카를 불고 노랠 부르는 서로 반대적인 성격이지만 둘만 산에 있다보니 서로 많은 것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가 된다. 
너무 추웠던 어느 밤, 텐트안에서 같이 자게 된 그들은 친구이상의 감정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관계를 하게 된다. 
그 일로 어색해진 에니스는 잭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난 게이가 아냐 "라고 말한다. 
잭 역시 "나도 아냐"
일단은 서로 낯선 감정으로 혼란스러워 부정을 하지만 곧 서로를 잡아당기는 감정에 자신들을 맡긴다. 목장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그들은 산을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기약도 없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누린다.
에니스는 리버튼에서 약혼녀 엘마(미셸 윌리엄스)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고 가장으로서 목장의 일꾼으로 일하고, 잭은 로데오 대회에 나갔다가 부잣집 딸 로린(앤 해서웨이)을 만나  텍사스에서 한 명의 아이를 낳아 살아가고 있다. 장인은 잭을 아주 대놓고 싫어한다. 
 
 
4년이 지난 후 에니스는 잭이 보낸 엽서한장을 받는다.  " 24일에 들러도 돼?"
에니스는 바로 답장을 보낸다."꼭 들러."
에니스와 잭은 서로 만나자마자 서로를 안고 강렬하게 키스를 주고 받는다.
문을 열고 나오려던 엘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여자가 아닌 남자와 격렬하게 키스하는 남편의 모습은 너무 감당하기 버거웠고 애써 모른 척 외면한다.
 
잭과 에니스는 그날 밤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엽서받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잭, 모든게 브로크백 덕분에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4년만에 만난 그들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이틀 낚시를 다녀온다고 집에 말하고 브로크백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잭은 아내와 이혼하고 위자료 받아 둘이 작은 목장을 사서 소나 키우며 행복하게 살자고 한다. 하지만 에니스는 딸린 식구들도 있고, 무엇보다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우린 끝장이야'이라고 말한다. 에니스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동성애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절대 세상에 내어놓지 말아야 할 둘만의 비밀로 숨겨야 한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가능한 오래 숨겨야 하는, 드러내서는 안되는 사랑이다. 일 년에 한 두번씩 브로크백에서 만나 함께 지내기로 한다. 
 
엘마는 혼자 그 사실을 담아두고 에니스를 대하지만 서로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양육권은 엘마가 가져가고, 양육비를 아이들이 18세 될때까지 지급해야 한다. 돈 걱정없이 사는 잭에 비하면 에니스는 매일 빠듯한 생활로 일을 해야한다.
 
에니스의 이혼소식을 듣고 잭은 바로 달려오지만 주말엔 애들과 지내야 한다고 잭을 돌려보낸다. 
그리고 엘마는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고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간 곳에서 엘마는 잭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말하며 "잭이란 인간 역겨워"라고 말하자 에니스는 흥분하며 엘마와 크게 다투게 된다.
 
잭역시 아내는 점점 돈벌레가  되어가고, 장인은 아직도 자신을 무시하고 싫어한다.
에니스는 엘마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 쳐다보는 것 같다고 잭에게 말한다.
잭은 에니스에게 텍사스로 오라고 하자, 에니스는 계속 일때문에 다음에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동안 참고 있던 잭이 터지고 만다. 
 
"내가 널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데, 네게 난 가끔 만나는 친구일뿐이지만 난 너를 20년이나 그리워했어.넌 내가 원하는 걸 주지도 않았어. 일년에 한 두번 널 바라보는 건 너무 힘들어.차라리 끝내고 싶어."
에니스도 울며 
"그럼 끝내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모든게 엉망이 됐어.더는 못 견디겠어."
그렇게 둘은 현실에 밀려 사랑을 숨기느라 서로를 너무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게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에니스는 '수취인 사망'이란 엽서를 받는다.
잭이 사고로 죽었다.
 
브로크백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그의 유언을 전해듣고 에니스는 잭의 고향집으로 간다. 그리고 잭의 방에서 잭의 셔츠안에 자신의 셔츠가 걸려있는 걸 보게 된다. 
잭은 이곳에서 에니스와 목장을 가꾸며 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에니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사랑하는 잭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고 결국 그를 잃었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끝없이 배려하느라 자신의 행복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던 잭, 
에니스는 너무 마음이 아펐다. 세상눈치보느라, 잭을 보내고 말았다. 자신의 셔츠위에 걸린 잭의 셔츠는 잭이 자신을 항상 품고 있었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셔츠를 가지고 온 에니스는 자신의 셔츠 안에 잭의 셔츠를 걸어놓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 브로크백 마운틴에 그의 소원대로 그곳에 묻어준다. 
그리고 브로크백마운틴 사진한장과 셔츠가 걸린 옷장앞에서 가슴먹먹하게 에니스가 내 놓은 한마디는 
"잭  너에게 맹세할게 " 라며 영화는 끝이 났다.
사랑하지만 맘껏 제대로 사랑하지도 해주지도 못했다. 서로를 너무 간절히 원하지만 원없이 세상의 시선에 숨기기 바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3. 17:08

콜드 마운틴


 

감독 앤서니 밍겔라

영화 콜드 마운틴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여자만을 생각하며 탈영한 한 남자의 험난한 여정과 전쟁에 나가 생사를 알 수 없는 한 남자만을 끝없이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한 여자의 사랑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삶이다. 그러나 그 상황속에서도 꽃이 피듯 사랑이 자리한다. 이 영화는 전쟁과 사랑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인간의  따뜻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안소니 밍겔라가 각본 및 감독을 맡은 작품으로  찰스 프라지에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주드 로, 니콜 키드먼, 나탈리 포트만, 필립 시모어 호프먼, 르네 젤위거 등 화려한 배우들의 출연만으로 볼거리는 충분하다. 

 

목사인 아버지와 함께 찰스턴을 떠나 콜드 마운틴으로 온 딸 에이다 먼로(니콜 키드먼)는 마을의 조용한 청년 인만(주드 로)에게 끌린다. 인만도 그녀를 맘에 두게 되고 그녀의 농장 밭을 갈아준다.
의사의 권유로 경치좋은 곳으로 온 아버지는 노예와 일꾼들을 사서 농장을 경영하고, 에이다는 아버지의 교회일을 도와 피아노를 연주하고, 조력자로서 역할을 해 나간다.

 

남북전쟁으로 마을의 젊은 남자들은 전부 남군에 지원하여 전쟁에 참여한다. 인만 역시 당연히 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그녀와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인만은 음악악보에 자신의 사진을 한장 넣어 에이다에게 주고, 에이다 역시 여행책속에 자신의 사진한장을넣어 건네고 첫키스와 함께  이별을 맞이한다. 
에이다는 인만에게 "기다리고 있을게요"라는 말을 전한채 전쟁터로 가는 그의 뒤를 바라본다.
 
인만을 보내고 에이다는 아버지에게 인만을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그와의 대화를 글자수로 세어 보았는데. 얼마 안됐어요. 그런데도 그리워요"
"난 네 엄마를 결혼 22개월에 잃었지만 그 정도면 평생 벼텨지더구나."
인만이 전쟁터로 간 후 얼마 안되어 목사인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아버지는 죽기전에 그녀를  동반자로 키우지 말고 여자로 키우지 못한 걸 후회했다. 
목회일을 돕느라 여자로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에이다는 아버지를 잃고,
노예도 다 풀어주고, 일할 사람도, 먹을 것을 살 돈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끔찍한 전쟁으로 인해 가지고 있는 돈의 가치는 무용지물이 되고, 일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에이다의 농장은 엉망진창이고, 하물며 수탉에게도 쫓겨다닐 정도다.

홀로 궁핍함과 싸우고,매일같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답장한 장 없는 인만을 향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젖고, 그 젖은 마음으로 편지를 보낸다.
마을은 전쟁터로 나간 이들의 죽음의 소식이 날라들고 집집마다 슬픔으로 가득하다.
전투중 인만은 심각한 부상으로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지난 겨울에 부친 에이다의 편지를 읽게 된다. 
"내게 남은 한 가닥 빛은 당신에 대한 믿음과 당신을 볼 수 있다는 희망뿐이다.
당신에게 분명하게 말하겠어요. 전투중이라면 전투를 멈추세요.행군 중이라면 행군을 멈추세요. 내게 돌아와요.제발 내곁으로 돌아와줘요."
사랑은 믿음이 강할수록 그리워지는 것인가.
 
언제나 전쟁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만 강요한다. 깃발이나 거짓에 속아서 전쟁터로 보내진 그들에게 전쟁은 영웅도 충성도 아닌 살기 위해 싸워야 하는 고통이었다. 
어짜피 진 전쟁이다. 인만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 개죽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콜드마운틴에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에이다가 있다. 인만은 병원에서 탈출한다.

 

전쟁중에도 생사로 사경을 헤매는 중에도 그녀를 향한 그리움으로 버텨내고 견디어냈다. 깃발과 거짓에 속아서 전쟁터에 나간 전쟁이었다. 인만의 목표은 에이다였다. 
인만은 오직 에이다에게 돌아가기 위해 굶주림과 탈영병 사냥꾼에게 쫓기며 그 멀고 험난한 행보를 포기하지 않는다.
 
 
1864년 주지사는 탈영병을 반역죄로 다스려  개처럼 쫓겨 다니게 될 뿐 아니라 탈영병을 돕는자 또한 반역자로 처벌한다고 발표한다.

티그를 주동자로 하여 의용군은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하고 ,북군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를 내고 다녔다.

의용군을 가장해 마을의 재산과 농장을 탈취하고 갈취했으며, 탈영병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학살하는 등 마을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전쟁은 사람을 바꾸어 놓았다.  태그는 목사가 가진  농장땅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다는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인만이 오지 않을 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녀는 돈도 없고, 전쟁때문에 갈 곳도 없고, 콜트 마운틴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이웃인 샐리는 음식도 나눠주며 도와준다.

 

어느 날, 루비 트위스(르네 젤위거)란 여자가 에이다의 농장에 찾아온다. 돈엔 관심도 없으니 재워주고 한 식탁에서 먹여주면 된다고 말이다. 그녀는 노예가 아니라 농장을 위해 같이 일을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일할 동안 그 쪽이 노는 건 못 본다 이거지" 아주 터프하고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다. 남자보다는 더 낫다는 것이다.

어차피 마을은 전쟁으로 늙은 남자들과 연약한 여자들뿐이다.  그녀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수탉의 모가지를 비틀 정도로 강인한 소유자였다.

루비는 겨울 대비 식량을 심고, 밭을 갈아 업고, 지붕을 덧대고, 울타리를 만들고, 허수아비를 만드는 등 농장을 꾸려가기 시작한다.

사는데 필요한 일은 하나도 못배운 에이다는 루비를 만나 울타리를 치면서 처음으로 살면서 쓸모있는 것들을 배워나간다. 

 

남자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목숨을 놓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여자들은 삶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샐리가 탈영한 아들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의용군들은 그녀의 남편을 잔인하게 죽여 매달고, 아들 둘을 무참하게 총으로 쏴 죽이고,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묶여있는 채 지켜봤던 샐리의 모습은 참담했다.

남북전쟁인데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학살이 더 잔인한 건 무엇일까?

지켜주어야 할 목숨과 재산을 적보다 더 핍박하고 강탈해가는 모습은 정말 싫었다. 
 
호시탐탐 에이다의 농장과 에이다를 노리고 있는  티그는 점점 탈영병을 잡는데 혈안이 되어 날뛰고, 마을사람들의 마음은 꽁꽁 얼어 붙었다.그들의 감시속에 루비는 탈영해 온 아버지를 농장에서 재워줄 수 없었다. 

 

그러나 루비 몰래 창고에서 자고 간 루비의 아버지와 그 일행은 눈밭에 낸 발자국으로 인해 그들의 위치가 발각되고만다.

결국 의용군에 의해 총살을 당한다. 소식을 들은 루비와 에이다는 산으로 아비의 시신을 찾으려 간다. 

다행이 아버지는 숨이 끊어지지 않아 숲속 오두막에 옮겨 치료한다.

먹을 것을 사냥하러 간 에이다는 멀리서 걸어오는 인 만과 만난다. 

수없이 죽을고비를 넘기고 오직 에이다를 향해 온 인만과 혼자 모든 역경을 버티며 인만을 기다린 두사람이 이제야 만나 뜨거운 관계를 맺는다.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에이다를 향해 걸어온 길, 100통이 넘는 편지를 쓰며 답장한 통 없음에도 믿음으로 기다린 에이다의 사랑은 이 피폐한 환경속에서도 너무 너무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것도 잠시 의용군에게 발각되어 인만은 허망하게 죽고 만다. 

 

에이다는 그 하룻밤으로 인해 인만의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루비와 함께 농장을 키우고 살아가게 된다.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땅도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과거를 통해 배워나갈 뿐

인만의 말이 귓전에 울린다.
"어떻게 이름 하나가 실제가 아닌 이름 하나가 이렇게 가슴을 아프게 할까요"
 
이영화는 인만과 에이다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탈영병으로서 에이다에게 오기까지의 여정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차거움과 따뜻함을 담고 있으며, 전쟁보다 더 참혹한 것은 마을에서 행해지는 의용군들의 잔인성을 통해 보게 되는 인간의 밑바닥이 더 암담했다. 그런 전쟁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은 통찰해볼 만하다.
 
영화속에 카메오처럼 등장했지만 유난히 빛났던 사라역의 나탈리 포트만,

그녀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픈 갓난아기를 홀로 키우면서도 탈영병 인만에게 먹을 것을 주는 따뜻한 여자였다.

외로움에 인 만과 같은 침대에 누워 달라는 부탁은 정말 안쓰러웠다. 

배고픔에 사라의 집을 급습한 북군중의 한 명이었던 킬리언 머피,

그는 어린 갓난아기를 이불보도 덮어주지 않고. 그 춥고 차가운 얼음바닥에 두는 적군 중의 한 명이었다.

비록 적이지만 어린아이에게 이불보를 덮어주는 착한 본성이 표정에 담겨 있었다.

제발 아이를 덮어달라, 아이가 아프다는 엄마의 애원에 흔들리고, 어린아이가 안쓰러워 일행에게 애가 얼어 죽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행은 '내 알바 아니다'로 일관한다. 

전쟁은 인간의 착한 본성을 죽인다. 오직 죽고 죽이는 일로 인성을 도배해버린다. 
그래서 전쟁이 주는 두려움은 총이나 폭탄이 아닌 인간의 잔인함에 있는 것 같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2. 21:36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장은 아내와 아이들의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으로의 폭력을 막아져야 할 보호막이 그 보호막안의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가족에게 당하는 폭력은 그들이 숨을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암시한다. 
세상밖으로 폭력이 표면화되지 않은 이상, 이들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법은 가정폭력을 가정내 불화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정 내 폭력이 공포 그자체이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사람과 닫힌 공간에 있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버지라는 자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사랑으로 덮어 가하는 폭력은  그들을 매일같이 차디찬 삶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가 영화보다 더 무섭고 치 떨리는 건 법이 들어올 수 없는 사각지대에 있고, 위장해서 담겨있기 때문이고, 죽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때문이다.
 
이 영화가 다른 가정폭력과는 달리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아이의 시선에 몰려있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진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11살의 줄리앙의 행동과 표정으로 아버지에 대한 폭력의 깊이를 가늠하느라 내내 긴장했다. 저 아이가 저렇게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폭력이 언제 노출되나,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아버지란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부모 연락망에 아버지란 사람의 존재는 없으며, 엄마의 휴대폰번호를 끝까지 감추려고 하는지, 엄마와 살고 있는 집을 저 작은 몸집으로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것인지 극도의 긴장감으로 몰입해 갔다.
우리는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을 때리는 가장을 향해 인간보다는 짐승같다고 욕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인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에 더 무섭다. 짐승같은 폭력의 증거물이 될만한 걸 내 놓지 않는다. 단지 아이의 시선에 우리는 계속 긴장하며 아빠를 주시하게 만든다. 
어떻길래, 어느 정도길래, 줄리앙이 저렇게 필사적인 거야.
하물며 줄리앙과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차안에 있으면 앙투앙의 얼굴로 화면이 꽉 찬다. 무언가 터질 것 같은 불안함에 손에 힘이 들어간다.
줄리앙이 거짓말하고 있고, 그걸 아는 아빠 앙투앙도 아들을 몰아부치고 않고  무지 침착하게 아들 스스로 불게 기다리고 억누르는 모습이 역력하다.
줄리앙의 엄마 미리암(레아 드루케)과 아빠 앙투안(드니 메노셰)은 법정에서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의 양육권을 두고 다툼중인 첫화면을 내민다. 
큰딸 조세핀은 성인으로 면접권으로 자유로운데 초등학생인 아들 줄리앙은 그렇지 못하다.
조세핀(마틸드 오느뵈)과 줄리앙은 아빠에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앙투안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앞세워 엄마가 아이들과 자신을 왕따 시킨다고 말하고, 엄마 미리암은 자신을 스토킹하고 협박에 폭력까지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법원은 결국 미리암과 앙투앙에게 줄리앙의 양육권을 분배한다.
줄리앙으로 하여금 정해진 날마다 앙투앙과 시간을 보내게 한다. 역시 법은 아이의 의견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줄리앙은 아빠랑 살기 싫다고 말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볼모로 앙투앙은 아내에게 집착하며 접근을 시도한다. 
왜 줄리앙이  그토록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하기 싫었는지, 이혼했음에도 양육권을 가장하여 아내에게 집착하는 앙투앙은 아무래도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앙투안이 심각하다는 건 영화가 끝에 가서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 초반과 중반은 11살 줄리앙이 엄마를 아빠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에 눈물이 날 정도다.
가정폭력을 그저 가정사불화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공포인지를 표면화시켰다.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않은 그사람과 매주 봐야 하는 줄리앙의 시선으로 들어가보자.
앙투앙에게 줄리앙은 아내 미리암을 붙잡기 위한 수단이다. 그의 진짜 목적이다. 줄리앙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아들을 이용해 전처가 살고 있는 집, 전화번호, 그리고 접근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엄마 미리암과 줄리앙은 할머니집에서 사는 것으로 위장한다. 아빠를 만나는 날은 할머니집에서 사는 것처럼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의 차에 탄다.
그사람에게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표정으로 차에 올라 시선을 마주치지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어린 줄리앙의 표정은 엄마를 아빠에게 노출시키지 않기위해  계속 거짓말을 한다. 

둘이 차 안에 타고 있으면 왠지 공포감과 긴장감이 더 증폭된다. 아들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것도, 고함을 치지도 않는데 줄리앙이 시선이 아빠와 마주하지 않고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굳어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엄마의 연락처를 묻지만 "엄마는 휴대폰이 없어요."라 답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들의 노트에서 엄마의 연락처를 봤다. 아들은 예전번호라고 둘러 대지만 아빠는 아들의 노트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엄마가 받는다.
앙투앙은 할머니집에 줄리앙을 태우러 갈때마다  엄마를 보고 간다고 불러달라고 한다. 엄마가 집에 없다고 하면 어디갔냐고 꼬치꼬치 묻는다.
이쯤에서 11살 줄리앙이 엄마를 아빠로 부터 지키기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앙투앙은 그들이 할머니집이 아니라 다른곳에서 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아들의 가방에서 열쇠를 빼앗고 주소를 불라고 압박을 가해 온다.
줄리앙은 아빠의 다그침에 "죽어버려"란 말을 내뱉는다.  이 정도면 폭력이 나올만한데 그는 아무 말없이 운전을 한다.

 

엄마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줄리앙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엄마가 사는 아파트를 안내하며 운전해가는 동안 줄리앙은 두려움에 눈물을 계속 꾹꾹 누른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아파트로 들어서지만 "인식할수 없습니다" 이란 기계음과 함께 줄리앙은 도망쳐 달아난다. 하지만 앙투앙은 아들을 쫒지 않고 돌아간다. 계속 도망치지 않고 돌아와 아빠의 차에 다시 탈 수 밖에 없는 줄리앙은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앙투안은 물러설 생각이 없다. 결국 아빠와 같이 엄마랑 살고 있는 9층 아파트로 같이 동행한다. 
그리고 줄리앙의 한마디"엄마 때리지 마세요"로 아빠 앙투앙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엄마임을 알 수 있다.

 

줄리앙이 그토록 보호하고자 했던 엄마를 지키지 못하고, 적대감과 두려움으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엄마가 애인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엄마의 아파트에 들어가 집안을  다 뒤지고 다닌다. 엄마는 그를 경계하고, 아들 줄리앙은 엄마옆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굉장한 집착과 의처증이 이 가정을 파괴했던 것이다. 집착이 자식과 아내로부터 외면당하고 이혼까지 했음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사람을 피해 전화번호를 바꾸고, 사는 곳을 숨기고, 피해다니는 가족을 집요하게 공포로 몰아 넣고 있다.
그를 낳아준 부모마저 그런 아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앙투앙만 빠지면 너무 행복한 가정이다. 괴물을 가장으로  폭탄처럼 끌어안고 산 것이었다.
 조세핀의 생일선물을 주기 위해 왔다는 문자에 조세핀과 엄마는 긴장한다. 엄마가 빠져나간 곳을 바라보며 조세핀은 노래를 하면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즐기지 못한다. 다행히도 이모가 등장해 앙투안을 내쫓으며 일단락 된다.
 
가정폭력은 밖으로 폭탄처럼 터지지 않으면 계속 그 안의 있는 가족들은 평생  폭력에 멍들게 된다. 아들 줄리앙이 "죽어버려"라고 외친 한마디가 비극적이게도 그 폭력으로서의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위협하는 가장, 
우리는 가정폭력에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가 끝내는 남편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법정에 앉아야만 했던 가해자를 언론을 통해서 보게 된다. 
그들을 가해자라고 불러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아펐다. 그들이 살인을 저지를 때까지 주위의 시선은 그저 가정내의 일이라고, 그걸 범죄로 인정해 주지 않았고, 법은 그들을 지키기에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에 앙투앙이 아파트 벨을 누르는 자체로 엄마와 줄리앙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문을 두들기고 발로 찾고 급기야 총까지 쏘는 것으로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몸서리친 공포에 대해 실감했다.  
내내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고, 그저 아이의 표정속에서 읽었던 공포가 현실로 나타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극대화되고, 문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것으로 범죄로 비추어진 것이다. 
그래야 이웃이 경찰에 신고를 해주고, 경찰들이 출동하여 그를 잡아갈 수 있게 된다. 그는 경찰들에게 제압되면서도 "내 아내다"라고 말한다.
아내에게 누가 그래도 된다고 했는가?
도대체 가정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을 왜 법은 이렇게 가볍게 다루고 있는 것인가?
사랑안으로 폭력을 포장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폭력을 행하는 가장에게 부모로서의 양육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두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살인범보다 그 죄를 물음에 있어서 가장 엄중한 처벌을 행해야 한다.

 

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하는가?
앙투안은 곧 풀려나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할 것이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말한다. 죽지 않은 이상 끝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얼마전 사회적으로 이슈를 몰고 왔던 전처 살인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폭력적인 남편과 아버지를 피해 가족은 숨어 살았다. 결국 남편은 그들의 주거지를 알아냈고 전처를 살해했다. 그리고 엄마를 잃은 딸들은  아버지를 제발 사형시켜달라고 언론을 통해 말했다.
제발 이 비극이 끝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법원은 폭력의 증거가 없다고 짐승에게 아이를 보냈다. 누구하나 죽어나가야 들여다보겠다고 하는 것 같아 정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공포스럽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압도적으로 몰입했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주제의 무거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2. 17:38

비포 선라이즈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영화 비포 선라이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으로 1995년에 선보인 로맨스 드라마 영화이다.
프랑스인 셀린느(줄리 델피)는 부다페스트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기차안에서 옆자리의 독일인 부부가 말다툼하자 옆으로 자리를 이동한다.
그 모습을 보던 미국인 제시(에단 호크)가 셀린느에게 말을 건다.
"왜 저러는 걸까요?"
"오래된 부부일수록 말이 안통한다죠. 남편은 아내의 바가지에, 아내는 남편의 침묵에 서로 무뎌지죠."
그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기차 식당칸으로 옮겨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개강을 맞아 프랑스로 돌아가는 셀린느와 비엔나에 내려야 하는 남자 제시는 서로 대화를 끊임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가 한참 재미 있어진다. 
줄리 델피
비엔나에 도착했다. 제시는 이번에 내려야 한다. 서로에게 호기심이 생겼는데  비엔나에 내리는 상황이 맥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제시가 용기를 낸다.여기서 이렇게 헤어지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그녀에게 같이 내리자고 설득하기 시작한다.
"계속 얘기하고 싶어. 우리는 뭔가 통하는 것 같아. 같이 내려서 돌아다니는 거야. 호텔비도 없고 그냥 돌아다니는 거야."
설득당한 셀린느는 가방을 챙겨 둘은 비엔나에 같이 내린다.  이렇게 두 사람만의 비엔나 여정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레코드가게안에서

 

비엔나 골목어디에서

 두 사람은 버스와 클럽, 레스토랑, 어느 오래된 무덤, 비엔나 거리를 걷고 구경하며 비엔나의 풍경을 배경 삼아 하루의 시간 안에 자신의 이념, 꿈, 사랑, 가족에 대한 이야기, 사랑과 성적 충동 등 수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끊없는 대사로 서로를 느끼고, 동요하고, 판 튀듯이 논쟁도 하고, 사랑도 느끼며 자신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뿜어낸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철학, 생각을 계속 질문하고 답하며 거리를 거닐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속에서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할머니이야기, 사랑에 대한 생각, 꿈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로 밤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 아침이 오도록  주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채웠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와 함께 비엔나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풍경, 문화, 거리표정들로 영화는 더 따스하고 평온했다. 
너무 자극적인 것도, 너무 이질적인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누군가와 밤새도록 아침이 오도록 저렇게 대화를 하며 걸어본 적이 내 인생에도 있었다. 
처음 만난 낯선 여자와 남자가 우연이 인연이 되어 보낸 하루가 너무 좋았다. 비엔나가 가진 매력까지 말이다.
길거리에서 탄생춤을 추는 여인, 단어를 하나 던져주면 시를 지어줄테니 시가 마음에 들면 사례를 해달라는 낭만적인 거지, 회전바퀴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비엔나 다뉴느강, 그리고  두 사람의 첫키스, 레코드가게에서 두 사람이 LP판을 틀어놓고 서로 눈도 못 마주치며 듣던 음악도,공원 잔디밭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는 두 사람의 표정도, 유람선에서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는 그들의 애뜻한 표정, 어느 건물에서 흘려나온 연주 음악에 춤을 추다 그 모습을 눈에 사진으로 담는 모습까지.
모든 대사와 모든 풍경과 모든 거리와 음악이 너무 너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젊음이 찬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까?그 젊음에 부여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제시는 마드리에 있는 여자친구와 여름을 보내려고 봄내내 돈을 모아 파리에 왔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자신과 단둘이 되는 걸 계속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녀와 이별하고 이 기차를 탔다.
추억할 만한게 전혀 없다는 것이 최악의 이별이 그녀와의 이별인 셈이다. 그런 제시에게 또다른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시는 좀 부정적이고 반항아같은 꼬마같다. 
" 내 인생은 추억의 모음같아. 연극리허설을 하는 것 같아. 어른이 되는"
제시는 부모의 실수로  원치 않았던  탄생이었고, 자식때문에 참고 살다가 끝내 부모는 이혼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고 살고 있다고 말하는 청년이다. 
그에 반해 셀린느는 "난 항상 독립적인 여자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 내 인생을 남자한테 맡기고 싶진 않아."
그녀가 유독 할머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셀린느는 인생을 가장행렬같다고 한다. 그 이유를 할머니에 비유하자면
 할머니는 평생 남편밖에 모르고 사시는 분 같았는데 ,할머니의 고백에 의하면 평생 맘 속으로 딴 남자를 품고 그리워했다.  운명에 순응하며 산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공원 잔디밭에서
셀린느의 모습을 눈에 사진으로 담는 모습

제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혼자되기 두려운 두 사람의 도피같아. 사랑은 이기적이야"
"가끔 훌륭한 가장이 되는 꿈을 꾸지. 가능할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짓이 내인생을 망칠 것 같아.관계유지에 정력을 낭비하느니 다른데 몰두하다 죽는게 더 날것같아."
 
이에 셀린느는 일에만 매달려 사랑을 준 적도 없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말해준다. 
"만일 신이 있다면 우리 안엔 없을거야"
"너나 내 안엔, 우리 사이의 공간에 존재할거야.마법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을거야.해답은 노력속에 있어"
어쩌면 제시는 원치않은 탄생으로 또는 이혼한 부모로 인해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셀린느는 자신의 삶과 사랑에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다. 

 

서로의 친구에게 전화하는 척 연극하는 모습
그들은 서로의 친구에게 전화하는 척 연극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기차에서 만난 남자와 비엔나에서 내렸어. 얘기가 잘 통하고 넘 귀여웠어. 날 몰래 바라보는 느낌이 좋아. 그가 점점 좋아져. "
이제 제시가 친구가 전화를 거는 척 연극하며 맘을 전한다.
"이건 운명적인 만남같아. 모든 것에 긍정적이지.진짜 똑똑해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워.난 자신이 없어.내가 하는 말은 다 바보같아."
밤에 비엔나 건물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그들은 말한다.
"마치 꿈속에 있는 기분이야. 이 시간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 같아. 이 시간이 계획적이 아닌 것이야."
비엔나 건물위에서

그들은 전화번호 주고 서로 한 두 번 연락하다 시들해지는 걸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6개월 후에 다시 비엔나에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이별을 한다.

서정시같은 영화다. 찬찬히 그들의 대사에 집중할 수 있어야 이 영화가 아름다워질 것이다. 
비엔나 거지의 말처럼 이들의 인연은 삶에 빛이 된다. 

헤어지는 기차앞에서

모든 게 끝이 있다. 그래서 시간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다. 이 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환상적이지 않다. 복잡한 것이다. 이들은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 거리만큼 제약이 주어질 것이고, 그걸 인정안할 수가 없다. 어쩌면 처음에 제시가 셀린느를 기차에서 내리게 하려고 설득했던 말에서 먼 미래의 추억으로 인연을 담아야 할 수도 있다. 
젊음의 과거속 기차안에서 만난 남자와 보낸 하루가 여우비처럼  삶에 한번씩 나와 가슴을 적셔주는 추억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현재의 권태와 불행속에서 잠시 추억으로 탈출할 수 있게 선물이 되어줄 하루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11. 20:29
클로저

 감독 마이크 니콜스

우선 이 영화는 4명 배우만으로 관심을 끈다. 나탈리 포트만, 줄리아 로버츠, 주드로, 클라이브 오웬

부고기사를 쓰고 있는 댄(주드로)은 출근길에 스트립 댄서인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인 댄은 앨리스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써서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책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보자 댄은 그녀에게 강렬하게 끌리고 만다. 

둘은 서로를 끌어당기듯 키스를 하게 된다. 안나는 그가 어린 애인과 동거하는 걸 알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제하지 못함에 뒷걸음쳐 물러나자 댄은 앨리스는 귀엽고 어리다고 말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그녀를 이용한 나쁜 남자로 느껴졌다. 

그리고 댄은 앨리스와 사진작업실에 같이 들어와서도 안나를 향한 갈증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잠시 앨리스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댄은 더 적극적으로 대시한다.
사랑을 하면서도 또 다른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다.
 
화장실에서 둘의 얘기를 다 들은 앨리스는 슬퍼 눈물이 흘러나온다.
안나는 이혼하고 혼자 작업실에서 지낸다. 
 
그리고 안나의 사진전에서 재회하게 된다. 댄의 옆에는 여전히 앨리스가 있고, 안나옆에는 래리(클라이브 오웬)가 있다.
실은 안나와 래리는 댄의 장난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을 맺어준 건 댄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4명의 인연은 운명일까?
나탈리포트만,줄리아 로버츠, 주드로, 클라이브 오웬

사진전에서 만난 댄과 안나는 앨리스와 래리를 속이며 관계를 지속했다.

그리고 댄은 앨리스 앞에서 사랑하기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진실을 말한다. 안나를 계속 만나왔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은 지금 앨리스도 사랑하니까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면서 안나도 사랑한다고 한다. 
정말 웃기는 소리지만 그게 댄이 말하는 사랑이고 진실이라면 나는 듣고 싶지 않다.
차라리 사랑이 옮겨간다고 했다면, 차라리 사랑이 식었다고 했으면 그럴수 있다고 댄을 미워하지 않았을텐데,...

앨리스는 말한다.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다,사랑은 순간의 선택이야. 거부할 수도 있는 거라고, 자기한테도 분명 선택의 순간이 있었어."

그렇다. 아무리 운명으로 포장하려고 해도, 아무리 진실로 포장하려고 해도 그 선택의 의지는 자신이 하는 것이다. 
앨리스는 댄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옮겨간 것이 아프지만 그 선택이 아프지만 앨리스는 떠나준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그나마 앨리스가 가장 진실에 가까운 사랑을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안나와 래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출장에 돌아온 래리는 안나의 표정에서 왠지 이별을 감지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래리는 가운이 아닌 옷을 갖추어 입고 이층에서 내려온다.
"가운을 입은 채로 버림받으면 너무 초라하잖아."
그리고 출장가서 딴 여자와 잤다고 말한다. 왜 그걸 얘기하냐니깐 사랑하니깐 진실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넘의 진실은 사랑하면 딴 여자와 안자는게 진실이지, 자고 말하는 게 진실이냐구?

안나는 괜찮다고 한다.

댄은 왜 딴 여자와 잔 게 괜찮냐고 따진다. 그럼 딴 여자랑 잤으니까 이혼해 이렇게 말하는 걸 원했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쓴 진실로 여자에게 확인하고 싶은 걸까, 달콤한 거짓말로 덮어야 할 때도 있는데,

안나는 댄과의 관계를 말하며 헤어지자고 한다.
여기서 래리는 진실을 알고 싶다면서 그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어디서 했냐, 좋았냐, 자세는 어땠냐, 오르가즘은 몇 번 느꼈냐, 
댄을 사랑해서 이별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그가 진짜 알고 싶은게 이런 성적인 걸까?
안나를 계속 몰아치며 래리는 그녀를 천박한 여자를 만들고서야 만족해 했다. 

자신이 이 여자를 못 채워준 게 아니라, 그 넘이 나보다 더 섹스를 잘하는 게 아니라, 이 여자가 그걸 밝혀 천박해서 그렇게라도 몰고 가서 자기 위안을 찾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마음이 떠난 여자를 잡는 건 너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테니까, 진실을 알고 싶다고, 그래야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무너지는 자존심을 건지려는 것이다. 
클로저- 거짓말과 진실사이

 래리는 클럽에서 일하는 앨리스를 만난다. 댄에게 상처 받은  앨리스와 안나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은 자신을 위해 위로라도 받으려고 하지만 그녀는 손님과 고객으로서의 선을 냉정하게 지킨다. 댄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인가? 한때 댄이 좋아했던 여자인 앨리스를 상대로.

그렇게 댄과 안나는 서로 같이 있게 되고, 안나는 남편 래리에게 이혼도장에 서명해 줄 것을 요구하며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래리는 호텔방에서 한 번만 자주면 깔끔히 서명해 주고 더이상 괴롭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호텔에서 관계를 가지고 나서 댄에게 자신과 잤다고 진실되게 말하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어쩜 래리의 비열한 복수다. 
남자는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여자를 너그러이 용서하지 못한다는 걸 안 것이다. 그게 그 남자를 계속 괴롭힐 것이며 여자를 볼때마다 상기시키며 마음에 지옥을 만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댄은 래리와 안나가 잔 것을 눈치채고 흥분한다. 결국 안나는 다시 래리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래리를 찾아와 안나를 돌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다.

 

래리는 댄에게 "넌 사랑을 알려면 멀었어. 타협이 뭔지 모르거든."
어찌 말하든 래리는 비열하다. 사랑을 타협이라고 한다는 것이 여자인 나로서는 전혀 수긍할 수 없는 논리다.
그리고 그는 처방전이라면서 앨리스가 일하는 주소를 적어준다. 앨리스에게 돌아가라고 말이다.
떠나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다들 지네 마음대로네...이 영화 보면서 너무 흥분하는 제가 보이십니까?
래리는 앨리스와 잤다고 한 방 먹인다. 이 싸움은 내가 승자야 하는 폼으로 말이다.
래리와 댄이 하는 것이 사랑인가? 집착인가? 타협인가? 
위선이다. 진실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진실로 알고 싶은 것은 딴 남자와 잔 것만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댄과 앨리스는 또 다시 사랑을 한다.
앨리스는 자신이 아직 댄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에게 돌아온 것만으로 댄을 다시 처음처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댄은 래리와 잤냐고 진실을 요구하며 묻는다.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진실을 알고 싶다고 재차 물어온다. 
"거짓말은 하기 싫고, 진실은 통하지 않을 것 같고, 아무도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진 못할거야. 왜 사랑만으론 충분하지 못한거지?
사랑이 어디 있어. 볼수도 만질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마디 말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말들은 공허할 뿐이야. 뭐라고 말하든 이제 늦었어."
앨리스는 이제 댄을 더이상 사랑해 주지 못한다. 사랑의 본질이 퇴색되었다.
여자에겐 사랑이 다인데, 남자에게는 섹스가 다인 것 같은 느낌이다. 
 
"진실에 중독되었어.사랑하기에 상처주기 싫은거야."라고 말하는 댄의 말이 너무 위선적이다. 
그래서 자신은 얼마나 진실했던 걸까?
 
앨리스가 왜 댄에게는 본명을 말해주지 않고, 래리에게는 본명을 말해주었을까?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거짓이라도 믿어주면 그게 진실이다.
하지만 댄은 한번도 그게 본명이 아닐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진실을 말해주어도 그게 거짓이라고 믿는 래리에게는 본명임에도 계속 의심하고 묻는다. 제발 본명을 말해달라고 말이다. 진실은 믿는 자의 몫이다. 말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믿는 만큼 진실을 담게 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11. 17:16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감독 팀 블레이크 넬슨  

영화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이 영화는 한마디로 진정한 멘토를 만난 느낌이다. 그리고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 영화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하나도 답을 못했다. 
 
어느새 철학이 학문으로서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새 철학이 구시대적인 고물인 된 세상을 살고있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떤 것의 의미를 발견한다거나 진리를 탐구한다는 건 그저 가장 맛없는 음식을 먹는것과 같고, 가장 재미없는 책을 펼쳐 놓고 딴 상상으로 뇌를 달군다.
 
철학교수 월터(샘 워터스톤)는 30년 넘게 유명한 사상가들의 철학을 가르쳐 왔다. 이제 은퇴하여 존경의 대상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의믜를 찾고자 한다.
월터의 마지막 강의는 뼈있는 질문이었고, 우리가 완전히 빼먹은 삶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켜 세웠다.
산업화로 인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병들어 있다.
소외와 방황과 두려움, 불안,혼란 속에서 눈을 감고 살고 있다.
"우리는 결국 멋지게, 그러나 가슴 아프게, 혼자입니다."
월터 교수 마지막 강의
마약중독으로 세상에 고립된 조, 그를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주려는 친구인 변호사, 세상은 누구에게나 기대고 싶은 심리가 있고, 이해받으려는 심리가 있다.
자신의 마약으로 망가져버린 삶이지만 그래도 내가 믿고 의지할 곳은 '너 밖에 없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조에게는 변호사이다. 하지만 잘나가는 변호사는 조가 그토록 연락을 기다릴 때 섹스로 친구에게 전화한다는 약속을 못 지켰고, 또 재판중이라 연락을 못받는다.
그 사이 조는 감금되어있던 병원에서 나와 마약의 유혹을 못 견디고 버스안에서 남의 가방을 훔치고 마약에 손댄다. 그리고 자신에게 먹을 것을 사준 교수를 구해주다 죽는다.
칼에 찔리는 순간 그는  자신의 절제와 의지의 손을 넘어버렸다. 삶이 썩어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파괴하며 도시에 갇혀있었다. 혼자 병원에 소외되어 있었고, 간절히 기다리던 손길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초면에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교수를 구하는 길에 그가 망설임없이 달려준 건 타인이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온 친절함때문일 것이다.

 

철학을 공부 중인 소피(크리스틴 스튜어트),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다가왔던 인물이다. 너무 아퍼서 한동안 고대기만 봐도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철학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월터에게 말하는 그녀는 타인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왕따다.
자신이 속한 부류에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하며 외면당하는 소피는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인간들과 맞선다.
자신의 속한 부류에서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이 없는 자신을 못 견뎌한다.  그녀는 고대기로 자신의 살을 지진다. 자해를 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그녀역시 마약처럼 고대기로 자해하는 순간만큼은 온갖 잡념으로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조가 마약으로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듯이, 자해로 자신의 외로움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는 온 몸으로 이야기한다.
"정말 외로워 죽겠어요. 세상은 왜 그렇게 비열하죠, 왜 그렇게 무심할까요, 왜 그렇게 이기적일까요, 나는 왜 이럴까요."
형편없는 세상에, 너무나 악의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녀는 몸서리치며 얘기한다.
그들과 섞이고 싶다고 ...그들과 소통하고 싶어한다. 그런 그녀를 위해 월터는 한 발에 한 걸음씩 세상에 나올 수 있게 자해를 멈출 수 있게 고대기를 달라고 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아내에게 중국 출장 간다고 나간 샘(코리 스톨)은 외도 중이다. 

그는 아내 사라(그레첸 몰)가 임신했을 때  얼어붙었다고 한다. "이제 다 끝났구나.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당연한 수순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서로의 인생에 대해서 상의도 안 해보고 그렇게 결정 난 것이다.

함께 본 영화가 어떻고 저쩌구는 말하면서 함께 할 미래는 서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아내가 아닌 외도하는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점점 클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적대적이 되어가고, 아내는 알콜중독이다. 
샘을 보면서 화가 났다. 왜 이런 얘기를 아내와 하지 않는 걸까? 왜 이런 얘기를 외도녀와 하고 있는 걸까?
외도녀가 말한다.
"당신이 그러니까 아내가 술을 마시지."
아내도 똑같다. 당연한 수순처럼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수순에서 아내와 소통하고 그 안에서 서로 헤쳐나가야 할 문제이다.  아내와 대화하고 소통하지 않음으로 이런 불행이 초래된 것이다. 
변화를 주고 싶어 뉴저지로 이사왔다는 엄마에게 큰 딸은 말한다.
"아빠는 늘 집을 비우고 엄마는 밤마다 취하는거야. 엄마가 행복해 하는 것 같지 않아."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로 현재의 삶을 망가뜨리고 두 딸의 삶마저 어둡게 만드는 샘과 사라
너무 쉽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그들은 너무 편한 것만을 찾는다. 현실을 부정하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약과 대마초로 환상과 환각에 빠지고, 소통하지 않고, 상대의 아픔이나 외로움에 무관심하다. 
삶은 점점 공허해지고 소통하지 않는 가족은 서로에게 짐처럼 무겁고 어두워져 간다.
 
"마음의 빗장을 여세요. 서로에게 타인이 되지 맙시다.서로에게 배운 것들을 모른 척 하지도 맙시다."
이게 월터교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철학이다.
과학이나 의학 같은 것에 영혼을 맡기지 말고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라고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우리를 덮쳐온다. 그는 매일같이 단호하게 신중을 기하며 살았다.
무언가 자신만의 의미를 위해 살려고 은퇴를 준비했는데 죽음이 삼켰다.
하지만 그는 죽어갈 때 이렇게 아내에게 전하라 한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말은 몽테뉴의 말로
'양배추를 심고 있을때 죽음이 날 찾아오길 바란다. 죽음에 무심한 채, 아직 할일이 남아 있을때'
그가 원하는 삶이었고 죽음이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posted by 해이든 2019. 3. 10. 19:42

미 비포 유


 

감독 테아 샤록

영화 미 비포 유

젊은 사업가였던 윌(샘 클라플린)은 사고를 당한 후 마음의 문을 닫았다.
임시 간병인 루이자가 그의 저택에 왔다.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옷차림, 표정에 다 드러나는 감정들, 뇌가 순수하다 못해 어딘가 바보스러운 그녀.
 
6년동안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자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했던 루이자(에밀리아 클라크), 
그녀가 새로 얻은 일자리는 전신마비 환자 윌의 임시 간병인, 
까칠한 윌을 6개월동안 간호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루이자는 윌의 시선에서 그의 고통과 삶을 마주한다.
루이자는 윌을 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간다. 

누굴 미워해본 적도, 싫어해 본 적도 없는 엉뚱 발랄한 루이자와  죽음에 가까운 남자 윌이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모차르트 오보에 콘체르토에 가기 위해 빨간 드레스를 꺼내 입은 루이자의 모습에 윌은 특별한 감정이 개입된다.

마치 진흙같은 어둠 속에서 빛이 걸어오는 것 같다.

밝은 그녀로 인해 잠시 행복해지는 순간들이 자신의 아픔을 밀어낸다. 

"빨간 드레스 아가씨와 데이트한 남자로 있고 싶어요" 너무나도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 그녀로 인해 그는 이 특별한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

그동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끽했던 윌은 상상 속에서 자신이 두 다리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서핑을 했던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추억이라기보다는 고통스럽다.

전신마비인 윌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더 연장하는 것은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다.  

빨간 드레스 아가씨와 데이트한 남자
 
하지만 자신의 앞에 나타난 루이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꿈을 꾸지 못하면서도 원망 한마디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활기찬 그녀의 모습에 차츰 닫아버린 마음의 빗장을 연다.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미워하고, 좌절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할애되어 있지 않다. 최소한 자신을 웃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루이자의 밝음으로 지금의 순간을 느낀다.

사고 나기 전

윌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 후 윌의 약혼자였던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청첩장을 보낸다. 배신에 좌절하고 분노했던 윌은 이제 그녀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려고 루이자와 같이 결혼식장에 간다. 

신랑. 신부보다 더 빛났고 돋보였던 윌과 루이자였다. 
결혼식장에 초대되어 간 두 사람

윌과 루이자는 해변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

서로의 인생에 찾아온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서로로 인해 변화된 그들, 그러나 그는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다.
"난 정말 내 삶을 사랑했어요."
이렇게 사는 건 나의 삶이 아니다. 자신이 꿈꾸던 삶이 아닌 걸 억지로 이어가는 건 당신과 나를 위한 게 아니다. 난 나를 사랑한다. 누구보다 나의 삶을 멋지게 아름답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윌은 이렇게 사는 건 너무 불행하다. 행복해 지기 위해 존엄사를 선택한다고 했다.

루이자는 윌을 옆에서 간호하고 살겠다고 하지만 윌은 그저 절망감에 내린 결정이 아니다. 그녀의 삶을 그녀의 꿈을 자신이 저당잡으며 사는 건 루이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날개를 꺽인건 자신으로 충분하다. 윌은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루이자와의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가지고 행복하기 위해 이별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작동되지 않는 육체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 사랑하는 루이자에게 고통이 되고, 또 그 고통은 고스란히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해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한 시간을 살아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게 인간이다.

전신마비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은 자신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는 가끔 고통없이 잠자듯이 죽는 게 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윌은 매일같이 고통스럽다.
열로 사경을 헤매고 끊어질 것 같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삶이  하루빨리 끝날 수 있기를 빌 것이다.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걸 그는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춤추는 루이자와 윌
행복을 위해 마지막을 준비하고, 루이자는 그의 삶의 시작을 위해 생을 준비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 더 행복하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날개를 펼 수 있게 도와주고 떠난다.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어 그녀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게 해준다.
행복해지기 위해 존엄사를 택한 그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행복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윌을 끝내 루이자도 존중하며 마지막 작별을 한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지는 그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걸 그 사람의 몫으로 놔두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은 본인이다. 
윌이 그나마 부자라서 주위사람들의 고통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경제적 바탕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건 윌만의 불행이 아니다. 가족 전체의 삶을 병들게 한다.
존엄사의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하나 존엄사는 그 사람의 판단과 가족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편지는 나를 뜨겁고 슬프게 했다.  마지막에 찾아온 루이자로 인해 그가 얼마나 행복해 했을지, 또 매일아침 얼마나 눈뜨고 싶었을지...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마음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이 영화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조조 모예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10. 01:28

 양지의 그녀


 

감독 미키 타카히로 

 

 

 

*스포 주의

따뜻한 햇살 가득 내리쬐는 양지에 그녀가 세상 행복한 모습으로 눈감고 있다. 누군가의 품을 연신 파고드는 예쁘고 귀여운 고양이같다.
사랑스러운 그녀를 연신 쓰담쓰담 해주는 손길은 왜 그리 따뜻한지, 
이 영화는 봄 햇살 가득 머금은 비눗방울같다. 
 
사랑은 유치하다. 그건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고, 사랑을 하는 당사자들은 달콤하다. 이 영화가 그렇다. 따뜻하다. 사랑하기에 따뜻하고, 사랑하기에 바보스럽고, 사랑하기에 직진한다. 
 
초등학교 3학년때쯤 코스케(마츠모토 준)는 바위사이에 있는 아기고양이를 구해준다. 고양이는 자신을 구해주려는 줄도 모르고 코스케의 손등을 할퀴었다. 아기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첫눈에 반한다. 데리고 온 아기고양이에게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걸어준다. 하지만 아기고양이는 보란듯이 도망 가버렸다. 
 
중학생이 된 코스케 반에 새로운 여학생이 전학을 온다. 그녀는 느닷없이 코스케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름이 '와타라이 마오'라고 말한다.
마오(우에노 주리)는 반아이에게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는가 하면 시험을 빵점 맞으면서도 싱글싱글 웃고 있는 해맑은 아이였다. 
 
코스케는 어느 날 당하고만 있는 그녀를 도와주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오와 같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코스케는 그녀의 공부를 봐주고 그녀와 놀아주고 그녀에게 키스도 하게 된다. 

코스케는 도코에 있는 대학교를 간다고 떠났다. 그러나 실은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간 것이다. 
그녀는 코스케가 전학가고 나서도 계속 공부했다. 대학교에 가면 코스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양지의 그녀 키타무라 타쿠미, 아오이 와카나
그리고 10년이 흘러 레일광고에 다니는 코스케는  광고계약건으로 한 속옷회사에 간다. 거기서 중학교 동창인 마오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오에게서 빛이 났다. 
서로 일적으로 만나 그들은 점점 가까워진다. 코스케는 마오로 인해 점점 웃고 다닌다.
코스케는 "우연이라도 만나서 다행이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마오는 "우연같은 건 없어." 라며 그에게 키스한다. 
 
 
그들은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에노시마를 찾아 가게 된다. 거기서 코스케는 고양이할머니가 있는 집을 보여준다.  
 마오는 자신의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가자고 한다. 갑자기 그녀의 집에 가게 되고 마오의 부모님과 한 자리에 있게 된다.

마오는 코스케와 결혼하겠다고 부모님 앞에서 깜짝 발언을 한다. 코스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그녀의 아버지와 단둘이 있게 된 코스케는 아버지로부터 마오의 과거에 대해 듣게 된다.
13년전에 처음 길에서 발견하여 수양딸로 삼은 것인데, 그녀가 13살까지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마오는 코스케에게 함께 하지 못했던 만큼 10년을 같이 있어달라고 한다. 마오와 코스케는 혼인신고를 하고  둘만의 보금자리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마오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자 마오의 아버지는 마오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한다.
 
그들의 신혼집에는 금붕어가 담긴 어항도 있다. 그녀는 금붕어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부른다. 결혼하고 그들은 햇살 가득 들어오는 거실에 누워 오후의 평화로움을 즐긴다. 마냥 행복했다.
양지의 그녀 마츠모토 준과 우에노 주리


어느 날 어항 안에 브라이언이라는 금붕어가 없어졌다.

그리고 방안에 떨어진 그녀의 결혼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는데 손가락 살이 너무 빠져 반지가 헐렁할 정도이다. 결국 그냥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어준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건 그녀의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진다는 것이다.

너무 걱정이 된 코스케는 마오를 데리고 병원에 가 CT촬영을 한다.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혹시 기억이 없는 사이에 생긴 마음의 상처가 영향을 미친다거나 잠재적으로 남아있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해 준다.

코스케는 마오걱정으로 마오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이름도 나이도 의사의 추측을 참고로 아빠가 지은 것이고, 마오가 한밤중에 전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마오가 마지막 효도라며 여행을 간 사진을 보여주며  갑자기 사라져버릴까 하는 불안하다고 했다.
 
마오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눈이 부시고, 현기증으로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마오가 찾아간 고양이 할머니를 통해 마오가 어릴 때 코스케가 구해준 고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25살인 마오는 코스케 옆에서 더 살고 싶다. 하지만 한계가 왔다. 마오는 올해를 넘길 수 없다.
마오는 어릴 적 코스케에게 구해진 그 순간부터 인간이 되어 코스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줄곧 인간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가르쳐 주려고 마오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마오가 고양이일 때 코스케한테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간 것이다. 그리고 코스케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인간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고양이었던 기억이 없는 것이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온 집안으로 마오가 아침준비로 분주하다. 그에게 아침식사를 차려주고 모닝키스를 해주고 신문을 가지고 온다던 마오는 그길로 사라졌다.

마오를 찾아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미오에 대한 존재도 기억도 사라졌다. 마오가 다니던 회사도 마오의 존재조차 모른다. 

미오가 사라지면 그녀에 대한 존재도 기억도, 마오와 한번이라도 엮인 사람이라면 그 기억과 존재는 다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오직 코스케에게 가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삶이고, 사랑이었다. 사라져도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바램하나로 그녀가 선택한 사랑이었다.
 
그녀의 물건이라고 전해받은 자신의 이름표를 보고 그녀가 고양이라는 걸 알게 된 코스케는 고양이 할머니를 찾아간다.
"해가 지면 네 기억도 사라질거야. 마오도 목숨이 끝나지. 그 녀석이 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야."
 
코스케는 처음 고양이를 만났던 바닷가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있는 마오를 만나게 된다. 
"브라이언 네가 먹었지?"라고 묻는다. 그녀가 고양이 였으니 금붕어를 먹었고, 아이가 추락할때 아이를 안고 떨어진 그녀가 안 다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코스케는 자전거를 타자고 한다.
"추억은 다 사라질거야!" 좀 있으면 모든 기억이 사라질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놀이터로 돌아와 키스를 하고 마지막 작별을 한다.
"내기억은 마오로 가득 차 있어."
"다시 태어나도 코스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8번이나 남았잖아.그때까지 둘 다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가자. 또 언젠가 새로운 고리를 만들자."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일상으로 돌아온 코스케는 그녀가 즐겨듣던 'Woudn't it be nioe' 노래가 나오자 눈에서 눈물이 난다. 기억과 추억은 다 사라졌는데 사랑은 마음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우연히 코스케가 마오의 부모님과 부딪혔을때 부모님이 들고양이때문에 물건을 많이 산 것으로 보아 그녀가 환생하여 다시 그 정 많은 집으로 들어간 것이라는 걸 암시해 준다.
 
고양이는 아홉개의 목숨이 있다. 다시 환생할 8번의 기회가 있다는 그녀의 말이 생각난다. 
참 독특하면서도 이질감없이 동요됐다. 유독 마오에게 비추어진 햇살과 그 햇살아래서 평온하게 잠든 그녀의 모습이 고양이같은 커다란 눈망울이 잊혀지지 않을만큼 매력적이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9. 20:04

디센던트(descendant)


감독 알렉산더 페인  

영화 디센던트

 

사람들은 가족으로 인해 행복하다. 하지만 가족이 행복만 주는 존재들일까? 가족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이라면 그저 남이라면 무시하고 상처받을 가슴도 내 주지 않겠지만 가족이라면 다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그들만의 방식과 그들만의 언어가 숨쉬기 때문이다. 
사는 건 비슷비슷하다.  부자건 가난하건, 남자거나 여자거나,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그런 관계로 엮여 서로 다른 생각을 같은 삶으로 풀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협하고, 배제하고, 갈등하며, 증오하고, 사랑하고 수많은 문장들이 휘어져 파도처럼 일렁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고,또  햇살아래 놓인 평화로운 오후이기도 되어주기도 한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슬픔이 클수록 놓았던 손을 더 움켜잡는 게 가족이기도 하다.
남들이  덤벼들수록 가족이란 손은 더 서로를 위해 안아주고 잡아주기도 한다.
외부공격이 더 거세질수록 분해된 힘을 합쳐 더 강하게 만드는 게  가족이기때문이다. 
내 가족의 허물이기에 용서하려고 한다. 더 강하게 잡아주지 못한 자신의 허물이기도 하니깐.
미안함이 커지니까. 혼자 외롭게 내 버려둔 자신의 무관심이 더 큰 죄라고 여기니깐.
그런 마음으로 이 영화를 느꼈다.
남이 주는 상처는 어느 정도 외면할 수 있는데 가족이 주는 상처는 참 오래 간다.
 하지만 더 큰 맘으로 안아주면 눈녹듯 녹는 것이다.
상처주는 그 이면에 더 큰 사랑이 있다는 걸 보았기때문에 그래서 상처는  봄날의 소나기처럼 지나갔다
맷과 두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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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인 맷(조지 클루니)의 아내가 보트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게 된다.

일만 하다가 아내와 두 딸에게 제대로 신경도 못 써 주는 사이에 아내는 병원에 누워 의식이 없고, 부쩍 커버린 두 딸은 어색하고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나름 검소하고 성실한 남자다. 하지만 가정에는 소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각자 외로운 섬처럼  다 분리되어 살고 있다. 서로로부터 점차 멀어진 거리만큼 소통도 힘이 든다. 보이는 거라고 부자라는 것뿐이다.

뭐, 이정도야 어느 가정이나 뻔하고 뻔한 현실적인 가정을 보여준다. 애들을 보살피는 건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 딸들을 챙겨야 하는 아빠는 너무 서툴고 버겁다.
그저 나중에 유산으로 내려오는 땅을 팔아 아내가 바라는 대로 보트를 사서 멋진 삶을 살려고 준비하기만 했지...현재 아내와 아이들의 삶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저 돈만 벌어다 주는 가장의 자리에만 있었지, 아내와 딸이 바라보는 시선에 머물러 주지 못한 것이다.

아내의 사고로 사회의 일원이 아닌 가족의 생활로 들어온 맷은 엄마와 사이가 안 좋아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큰딸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엄마의 사고소식과 함께 가망이 없는 엄마의 호흡기를 떼고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큰 딸 알렉산드라(쉐일린 우들리)는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말을 맷에게 전한다.  맷과 이혼까지 생각하고 브라이언이라는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맷은 배신감에 어찌 할 줄을 모른다.
맷과 두딸, 그리고 큰딸의 남자친구
딸의 남자친구가 딸을 만지는 걸 못 만지게 하자 "아저씨가 아줌마를 안만져주니까 외도하잖아요." 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도 유쾌하게 말하지만 어쩌면 그에게 네 잘못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내가 많이 외로워했다고 들었고, 그 외로움에 브라이언에 채우고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맷은 큰딸과 함께 브라이언을 만나보자고 한다. 어쩌면 아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아내가 가는 길에 작별인사 정도는 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맷은 질투나 나고 여러 가지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후회하면서도 아내에 대한 배신감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내가 사랑한 남자에 대한 호기심과 그도 아내를 사랑한 것인지 무언가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용서를 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용서해야 보내줄 수 있을 것이고, 자신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맷의 마음에 큰 딸도 기꺼이 동행해준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사랑했던 브라이언이 유부남이고, 자신이 팔려고 했던 땅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부동산 관련업자였다. 
자신의 아내는 그를 사랑해 자신과 이혼하려고까지 했지만 그는 그런 맘이 없었다. 화가 났지만 맷은 아내의 상태를 말해주고 마지막 인사를 해 주러 오라고 말하고 나온다.
 
결국 그는 병원에 오지 않았고, 그녀의 아내가 와서 맷의 아내를 용서한다고 말한다. 어짜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삶은 수시로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찾아오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속에 계속 침체되어 어둡고 비극적으로 살 수 없다.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용서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비워내야 한다. 

아마 맷이 아내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고 죽음을 무겁게 끌어 안았다면 그 무게에 자신은 물론이고, 두 딸도 같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지금 현재 가족들 곁에서 외로워할 아내와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 소중히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내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 맷 자신과 엄마를 미워했을 딸의 상처도, 외로웠을 아내도, 서로가 힘겨웠을 순간을 같이 나누어주지 못한 미안함을 담았고, 아버지로서 딸들의 성장과정에 동행해 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안함도 다 담겼다. 

아내를 마지막으로 보내주기 위한 여정속에서 모두 상처 받았을 자기들만의 위로와 용서를 건네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 치유되고, 조금 더 성숙한 열매를 맺는다.

가족은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따뜻하고 행복함을 주는 존재들이다. 너무 오래 떨어져 사는 만큼 벌어진 그들 사이도 이번 여정으로 메워져 서로의 슬픔도 아픔도 감싸 안는다. 

같이 있는 모습만으로 이제 제법 아버지와 자식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제대로 된 아빠노릇을 하게 된것이다.
맷이 마지막 인사로 아내를 떠나 보낸다. 

 " Good bye my love, my friend, my pain, my joy... Good bye, Good bye, Good bye..."

posted by 해이든 2019. 3. 9. 17:53

사관과 신사


 

감독 테일러 핵포드

 

영화 사관과 신사

 
사람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환경의 지배하에서 자랐는지가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평등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 생명은 똑같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다르다. 
따뜻한 가족의 품이 있었다면 그의 심장이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분노도 없었을 것이다.
환경이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으로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철판으로 덮힌 심장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뜨거워질 수 있다. 
인간은 환경에 순응하며 적응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길들여지고 변화하는 존재이다.
 
잭 마요(리차드 기어)는 해군이었던 아버지와 창녀인 엄마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고, 창녀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남자였다.
아버지없이 엄마의 손에서 자라지만 그녀는 자살을 해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가 감당해야 할 환경이었다.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은 없고 아비로서의 자격도 책임을 못 느끼는 사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자랐다. 가족에 대한 연민도, 사랑도, 책임도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해군이 된다.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한다.
불우하게 자란 잭은 항공모함의 전투기 조정사가 되기 위해 해군 양성학교에 입학한다. 
사람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는 잭은 해군 후보생으로 아주 엄격하고 혹독한 교관을 만난다. 교관은 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맘에 안들어 그저 괴롭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밖에 모르는 잭의 이기적인 태도가 맘에 안들었다.
잭을 호되게 훈련시키는데도 끈질지게 버텨낸다. 강제로  퇴소라도 시켜볼 작정으로 지독하게도 굴어본다
하지만 그는 "난 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외친다. 그 모습이 너무 절실했다.
아마 교관도 그런 그의 표정에서 느껴서였을까, 숙소로 돌아가라고 말하게 된다.
그 후 잭은 서서히 변해간다. 이기적이었던 그도 따듯한 동료들로 인해 서로 돕고 마음을 나누는 것에 대한 행복을 배우게 된다. 
 
잭은 공장에서 일하는 폴라(데보라 윙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잭은 자신의 자라온 환경에 의해 깊이 박힌 불신을 드러낸다. 사랑도 없이 방탕했던 아버지, 자살해 버린 어머니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는 그에게 고스란히 담겨 폴라를 멀리하게 된다. 
폴라 역시 폴라의 어머니와 후보생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공장에서 일하며 자신의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해군 장교와의 결혼으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폴라,
그러나 잭은 자신을 멀리하고 임신한 자신을 외면한다.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저 폴라를 즐기는 상대로 생각했을 뿐이고, 아이가 생겨도 유산시키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부담스럽다.  자신의 부모같은 삶을 살까 두려웠는 지도 모른다.
가정의 따뜻함을 모르고 컸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서로 같은 아픔을 가진 두 사람,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 잭은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공장으로 들어가 그녀를 안고 나온다.  상처받아 닫힌 가슴이 따뜻한 우정과 사랑으로 서서히 열리며 서로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된다.

사관과 신사 OST 'Up Where We Belong' 이 더 좋았던 영화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9. 14:46

플루토에서 아침을 


감독 닐 조던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패트릭 키튼(킬리언 머피)은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구니에 담겨 성당 앞에 버려졌다.

사제 관저에서 일하는 여인의 가정에 입양되어 키워진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자 옷을 입고, 루즈를 바르고, 여자 구두를 신고 그러면서 노는 아이였다. 
체육 시간대신  봉제 수업을 듣고, 학교에서 고민을 적으라는 쪽지에 성 전환수술 잘하는 곳을 알려 달라고 적은 것으로 인해 학교와 집에서는 난리가 나고 키튼은 집을 나오게 된다. 

그는  패트릭보다는 키튼으로 불리기 좋아한다.

집을 나와 우연히 모호크 밴드를 만나 노래를 하게 되고, 빌리 해칫을 사랑하게 된다.

키튼은 그냥 여자로 살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시선만큼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는다.

밴드 멤버들은 물론이고 관객들도 불편해한다. 편견으로 인해 또 세상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빌리는 그 시선을 의식하고 밴드를 잃을 수 없어서,  키튼에게 엄마가 물려 받은 콘테이너에서 살게 해준다.

언덕 위 홀로 외딴곳이지만 집이 생겨 좋은 키튼.

하지만 그곳은 아일랜드 공화당 일원들의 총을 보관하는 비밀장소였던 것이다. 

시내에서 폭탄이 터지고 로렌스 형제가 죽는 걸 본 키튼은 비밀창고에 있는 총을 전부 다 꺼내 던져 버린다. 

빌리는 도를 넘었다고 키튼을 두고 멀리 행방을 감추어 버린다. 

키튼은 떠나가는 빌리를 향해 "당신의 장미와 캔디는 다 거짓이었지만 행복했어요."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가 사랑해 봤냐는 물음에 한 번이라고 대답한 건 빌리 해칫을 두고 한 말 같다.

키튼은 엄마를 찾아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를 믿는다. 

엄마가 너무 이뻐서 런던이 삼켜 버렸다는 말을 믿는 키튼은 순수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담고, 순수하게 표현한다.

키튼은 엄마를 유령신부라고 부른다. 엄마도, 현실도 유령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유령 숙녀 '아일리 버긴', 오직 이름만 알고 런던으로 떠난 여정은 참 험난했다. 상처 주는 악당들의 소굴 같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엄마는 런던이 삼켜 버려서 찾을 수가 없다.

악의 유혹은 키튼을 더러운 소굴로 끌고 갔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당하면서도 항상 경계를 하지 않는 키튼은 그들이 다 진심일 거라고 믿는다. 

키튼의 생각에 앉아 있으면 영화는 동화 속 같다. 악당들에게 당해도 항상 긍정적으로 노래하는 새 같다.

마술사도 경찰도 다 거짓투성이뿐이다. 그를 이용하려고만 한다. 

고향 친구 찰리가 키튼을 도시로부터 구해주러 온다. 

찰리는 어윈의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어윈은 자꾸 멀어져 간다. 비밀이 많아지고 맘은 딴 곳에 가 있다.

그는 공화당 비밀요원이다. 너무 많이 변한 어윈으로 인해 낙태를 하러 가지만 맘이 변해 나오고 만다. 

진실은 항상 맨 앞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맨 앞에 있는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정면 돌파만이 답인 것도 있다.

키튼은 소수성 애자나 게이나 그런 것들로 부르는 것보다 키튼으로 불리고 싶은 여자다.

여자와 남자사이에서 갈등하지도 않는다. 자신은 여자라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  갈등할 이유가 없다.

 

 
네모 난 상자의 단면만을 보는 것과 같다. 인생은 복잡하다. 그러나 답은 또 간단한 곳에 있을 수 있다. 

사물의 이면을 볼 생각들이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봐 줄 생각들이 없다. 설사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남의 인생을 비난할 생각은 넘치나 보다.

 

클럽에서 폭탄이 터지고 11명이 죽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키튼이 여장을 했다는 선입견으로 범인으로 확신하고 심문한다. 경찰서에 잡혀 와 책상에 놓인 신문을 보고 키튼은 웃는다.
 '여장을 한 킬러의 미소'라고  적힌 신문 헤드라인에 거시기에  X를 한 자신의 사진을 보고,

키튼은 "거시기에 X를 하다니 정말 웃긴다." 

X라,  여자나 남자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부정일까? 사회의 인식은 그들을 어떤 부류에도 넣고 있지 않는 걸까?
무늬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뭘까? 그 사람의 내면도 마음도 여정도 알수 있는 건 없다.
X라고 하는 세상에 키튼이 진술할 게  있을까? 정말 소통 x 다. 

 

'폭탄 심은 거 자기가 아니면 왜  아니다라고 말을 안하지' 

키튼은 알고 있다. 말해도 안 믿을 것이라는 걸

이미 거짓으로 도배된 상자에 진실 한 방울 말로 떨어뜨린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될까? 아니라는 걸 아는 것 같다. 

비틀어진 선 위에 혼자 바로 선다고 그 선은 평행일까? 거시기에 X를 하고 무늬가 다르다고 속지까지 X로 자신을 이 세상에서 몰아 내려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진실이란 없다. 자신들의 그 시선만이 정답인 것이다.

 

키튼은 항상 진실했다. 거시기는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진실이,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진실은 그저 거짓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여정이야.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 위에 놓이는 것들을 봐야 된다.

그는 유치장이 거리의 시선보다 따뜻한 곳이라 느낀다.

"사람들은 여길 춥다고 하지만 플루토에서 아침을 먹는 만큼 따뜻하다."

 

플루토는 명왕성이다. 키튼이 만난 국경의 기사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수많은 별을 유람한 후 플루토에서 아침을 먹으리'란 말이 키튼에게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들렸던 것 같다. 꿈꾸는 세상처럼 말이다.

 

 

유치장에서 나가라고 할 때 키튼은 여기 있고 싶다고 사정한다.
"여긴 맘이 편해요. 밖으로 나가는 순간 온 우주를 혼자 떠돌게 되는 것 같아요. 난 소속되고 싶어요."

 

그녀는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지 않는 세상속에 그냥 같은 인간으로, 동료로서 소속되고 싶은데 그들은 키튼을 자신들과는 다른 종인 것처럼 소외하고 비난하고 불편해 했다. 자신들은 깨끗하고 키튼은 더럽다는 시선을 깔고 본다.
 
길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키튼에게 경찰은 평범한 일을 해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키튼은 "전 자격미달인 걸요." 세상은 그에게 평범한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그 평범한 것까지 자격미달이라고 말할 만큼이나 세상이 정말 못되어 처먹었구나. 

그렇게 평범한 일을 해보라는 경찰이 안전하고 합법적이라고 데리고 간 곳이 또 코인 유흥업소(이런데를 뭐라고 하지 코인 성놀이방이라 해야 하나)라는 것이 정말 화가 났다. 

단지 거리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지 뭐가 다른 건지.

 

키튼은 찰리에게 '이제야 주소가 생겼어'라고 편지를 보낸다.

거리로 거리로 떠돌던 삶보다 나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주소가 생긴 게 이름이 생긴 것만큼 그에게는 안전감을 준 것인지 이제야 주소가 생겼다는 말이 참 슬프게 내 가슴 언저리를 비빈다.

 

주소가 생기고, 자기 집이 있고, 엄마가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기를 그가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 수 있다. 

어딘가 소속된 존재로 있고 싶은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을  성노리개로 가지고 놀고, 엄마는 자신을 버렸고, 아빠는 누군지도 모르고 삶이 뭐 이래.

 
잘 웃던 키튼은 이제 꼭두각시 인형처럼 표정도 없이 거울 안에 담겨 코인을 넣고 자신을 가지고 놀 남자 손님들을 맞이한다. 
"너 같은 남자 앨 알아"

"손님 전 여자입니다."

"옛날에 부모를 모르는 한 소년이 있었어.  항상 웃고 있었어"
" 눈물을 감추려고 웃은 건 아닐까요."
"웃지 않으면 힘들었겠지 자기 처지를 감당하기가 ."
"그를 꽤 잘 이해하시는 것 같네요."키튼은 점점 이야기에 끌려 거울 앞으로 다가가지만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다.
" 난 그 애 아빠를 알아. 그 아빠는 아일 몹시 사랑했지만 얼마나 사랑하는 지 표현할 수 없었어. 그 방법을 몰랐어."
" 세상에 그렇게 쉬운 말을"
" 때론 쉬운 말이지만 어떤 사람에겐 불가능한 말이야 그 아이 엄마도 사랑했지만 그 또한 불가능했어."
키튼은 지금 손님이 키튼의 이야기를 한다고 확신했다. 거울을 얼굴을 갖다대지만  바깥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영국으로 떠났지. 혹시 엄마 찾으려고 간 걸 아닐까 ?"
"엄마 이름이"

"아일리 버긴" 자신의 엄마 이름이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빠인 것이다. 그는 키튼에게 엄마가 가정이 있기 때문에 꺼려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주소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그는 리암 신부였다.

그의 생부는 교구를 책임진 리암 신부(리암 니슨)로 사제 관저에서 일하던 아일리 버긴과의 사이에서 키튼을 낳게 된다.

신부로서 그는 키튼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과 해줬어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고,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것도, 너무 힘들어했다는 것도 너무 늦게 알았다. 

어쩌면 그또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아버지로서 살아주지 못했고,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로 살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보다 더 여자같은 키튼 . 그가 입는 옷들은 스타일도 끝내준다. 어쩜 저렇게 착착 감길까.

걸음걸이며, 표정이며, 맵씨까지 킬리언 머피가 이런 모습이란 걸 상상도 못 했는데 엄마를 보러 갈 때 차려입은 그녀의 스타일은 아름다운 여성 그 자체였다.

 

 

지적이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 키튼.... 엄마를 찾아간 키튼은 차마 자식이라고 말을 못 하고 전화국 설문조사원이라고 말한다. 엄마를 보자마자 쓰러지고 만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인데, 엄마는 알아봤을까? 못 알아본 것 같다. 여자인 키튼을 몰라본 것 같다. 키튼이 성당 앞에 버리고 간 아들이라고는 생각 못한 것이겠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 왔다. 본 것만으로 이제는 유령 숙녀가 아닌 엄마로 기억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찰리에게서 자신이 주소를 신부님에게 가르쳐 줬다는 소식을 듣고 키튼은 아일랜드로 돌아간다.

리암 신부를 보고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하자 리암 신부는 "아버지"라고 말한다.

네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다는 아버지를 만났다. 

"인생은 묘해요. 엄마를 찾아 나섰는데 아빠를 발견했어요."
인생은 예기치 않는 것들과 마주치기도 하고, 내가 아는 만큼 아름답지도 내가 당한만큼 추한 것도 아니다.

 세상은 거짓투성이이지만 진주 같은 진심도 있다. 

 
킬리언 머피가 이렇게 여성스러울 수가,

이 영화로 킬리언 머피를 정말 다시 보게 되었다.

<플루토에서 아침을>이란 영화는 패트릭 맥케이브가 쓴 동명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닐 조단에 의해 제작되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8. 16:24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인간은 완벽한 조형물이 아니다.

완벽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파괴하는 발레리나를 통해 이 영화는 자신을 통제하지 말고 흘러가게 두라고 말을 한다.

주인공인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뉴욕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이다. 그녀는 순수하고 연약한 백조 로는 완벽할 만큼 최고이다.

발레단의 감독 토마스는 '백조의 호수'공연을 앞두고 기존의 베스를 제끼고 니나를 주연으로 발탁한다.

이번 새롭게 각색된 '백조의 호수'는 1인 2역으로 백조와 흑조의 연기를 펼쳐야 한다. 그러기에 니나는 완벽한 백조 연기와는 달리 도발적인 흑조 연기는 부족함이 많았다. 토마스 단장은 말한다.

"너는 아름답고 순수한데 하얀 백조 밖에 생각이 안나,하얀 백조는 완벽해. 하지만 검은 백조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완벽해지고 싶은 니나는 점점 압박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릴리(밀라 쿠니스)로 인해 점점 자신의 역할을 빼앗길 것 같은 초조함으로 힘들어한다.

릴리는 자신처럼 테크닉은 부족하지만 흑조에 어울리는 존재로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관능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니나는 등에 붉은 상처가 생기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부담감에 자면서 긁는 것이다.

토마스는 니나에게 말한다 "넌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만 하지. 너 자신을 내맡기지 않아. 놓을 줄도 알아야 해"

그녀에게 성적 발언을 하고 키스를 하고, 자위를 해보라고 숙제도 낸다. 아마도 토마스는 그녀 안에 들어있는 금지된 욕망을 끄집어 내려는 듯 싶다. 흑조는 백조의 순결이나 순수함과는 다른 쾌락, 욕망, 탐닉 등을 표현해 내야 하는 연기다. 그러기엔 니나는 성적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는 어린애와 같았다.

 

 

이 영화에서 백조와 흑조라는 서로 다른 두 백조를 한 사람이 연기를 해야 한다.

니나 곁에는 조력자이며 통제자, 또는 매개체 역할을 해주는 두 사람이 있다.

백조이기만을 바라는 엄마와 흑조를 만들어 주려는 토마스가 있다.

니나의 어머니는 28살에 임신을 하고, 니나를 낳는 바람에 발레를 포기하고, 자신의 딸 니나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있는 존재이다. 자신의 통제와 억압 속에 니나를 순수하고 완벽한 백조로 만들기 위해 희생하고 지지하며 때 묻지 않는 순결함의 결정체로 만드는데 공을 들인 사람이다.

반면 토마스는 그런 엄마와는 달리 쾌락과 욕망, 탐욕 등 그녀의 내면 안에 엄마로 인해 깨어 나오지 못하는 어두운 면을 자극하며 밖으로 표출되게 하려고 한다.

"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야. 이제 보내야 할 때야. 너를 편안하게 해줘 봐."

백조인 니나는 점점 흑조 같은 릴리를 경계하면서도 그녀를 꿈꾼다.

자신을 통제하려는 엄마를 막기 위해 방문을 잠그고, 소녀같이 꾸며진 방의 인형들을 집어던지고, 릴리와 술을 마시고, 그녀가 주는 약을 먹고, 그녀와 관계를 가지는 점점 깊은 환각에 빠진다.

공연이 시작되고 니나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릴리를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와 관객 모두를 감동시켰다.

 

 

공연을 마친 그녀는 쓰러진다. 그녀가 릴리를 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릴리가 아닌 자신을 찌른 것이었다.

그녀가 만든 자신의 내면의 흑조였고, 그토록 완벽해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그녀를 옭아맸던 것이다.

그녀의 등에 난 상처는 완벽한 흑조로 무대에 서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난 완벽했어요."라고 말한다.

완벽해지려는 불안감이 환상과 환각으로 백조의 호수를 피로 물들이게 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릴리를 죽이고 백조로 완벽해지려고 날아오른 니나는 결국 자신의 꿈꾸던 무대에서 피흘리며 쓰러졌다.

니나는 현실과 환상 속에서 혼돈하며 보이는 자신과 보이지 않는 자신을 치열하게 비교하고 대립시키며 고통스러워했다.

"너가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네 자신뿐이다."

니나가 두려워할 사람은 릴리가 아니었다.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싸워야 했다. 그 부담감이 너무 커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만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갈라져 있다.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통스럽게 자신을 학대하지 않아도 된다. 이 길이 아니면 또 다른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블랙 스완>은 각각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영화 같다. 물론 반전이 있는 영화이고, 스릴러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데 스릴러라고 한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8. 13:07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감독 데이빗 프랭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미란다(메릴 스트립)는 세계적인 유명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이다. 앤드리아(앤 해서웨이)는 기자가 꿈인데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었지만 원하는 곳은 오지 않고 이곳만  연락이 와서 결국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편집장 미란다는  세계적인 패션지에서 살아남을 완벽한 비서를 원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앤드리아의 촌스러운 스타일,
앤드리아를 처음 봤을때 마린다의 표정은 완전 개무시, 한마디로  "나가"
런웨이에 취직할 생각을 했다면 최소한의 패션 센스는 기본중의 기본인데 기본매너 갖추지 않은 사람이 비서를 하겠다고, 그런데  저 근거없는 당당함에,일단은 비서로 채용하고 본다. 어짜피 준비된 자들도 못 버티니까..

 

악마같은 편집장 미란다와 비서 앤드리아

 

사회초년생인 앤드리아의 지옥 같은 직장생활이 시작된다. 커피 심부름, 샘플의 재빠른 픽업, 단 한 번의 지시만 내리기 때문에 한번 말할 때 정확히 받아 적을 것 

그녀의 업무 뿐 아니라 애들과 가족일까지 해내야 하고, 거기다 애완견도 포함된다. 하여간 모든 잡일을 다 처리해야 한다. 
질문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단 한번의 지시만 내리기 때문에 한 번 말할때 정확히 받아 적어야 한다. 완벽한 로봇을 원하는 것 같다.
그녀가 시키는 모든 일은 반드시 완료해야 한다. 정도를 넘어 '런웨이'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최소한 밤 10시 폭풍우 속에서도 날 수 있는 비행기 한 대 섭외하는 것쯤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많아 적을 수가 없다. 이러니 다 못 버티고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꿈을 꾸기도 전에 악마 상사에게  질려서 숨이 끊어질 정도다.
사회초년생 앤드리아가 첫 직장에 너무 지독하고 냉혹한 악마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곳은 '런웨이'다. 어찌되었든 미란다의 요구에 맞추려면 스타일도 갖추고 지적이고 똑똑한 완벽한 비서여야 한다. 
패션계를 배경으로 사회 초년생이 악마같은 상사를 만나 불합리한 요구와 출퇴근도 없는 시간을 감내하며 연애도 엉망도 개인적 삶도 엉망이라면  앤드리아 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미란다같은 상사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상사를 보조하며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 간다.

 

런웨이 수석 아트디렉터인 나이젤의 도움을 받아 앤드리아도 점점 세련된 스타일로 변해간다. 그녀가 커피심부름을 하거나 바쁘게 이동하거나 출근하거나 할때 옷이 화려하게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패션을 속물들의 사치나 허영이라고 여기던 앤드리아도 점점 이곳에 물들어가고 있다. 앤드리아의 활약으로 파리에서의 패션쇼도 마무리된다. 

 

영화 극중 미란다와 나이젤

 

미란다는 회사 경영진으로부터 사퇴압박을 받는다. 미란다는 잡지사 사장에게 자신의 팀원 모두를 데리고 잡지사를 떠나 잡지를 폐간하도록 만들겠다고 협박성 딜을 한다. 자신의 자리에 앉히려는 숙적 재클린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직원인 나이젤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자리에 대신 앉히며 위기를 모면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나이젤을 희생시킨 것이다. 이를 안 앤드리아는 나이젤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난한다. 
앤드리아는 행사장에 도착해서 차량에서 내린 뒤 미란다의 속물적인 태도와 이기적인 태도에 실망하며 그녀의 곁을 떠난다. 미란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휴대폰을 분수대로 던져버린다. 
 
 
남자친구와 친구들을 실망시키면서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이 미란다의 실망스런 태도를 보면서 자신의 속물스러움이 아차 싶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에밀리에게 미란다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안그럴지도 모른다.
그 이후 그녀는 기자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러간다.  면접관을 통해 미란다가 보내온 추천서 내용을 알게 된다. "내게 가장 큰 실망을 안겨준 비서다. 하지만 그녀를 채용하지 않으면 당신은 멍청이다"라고 추천해준 것이다. 앤드리아는 거리에서 미란다와 잠시 눈이 마주치고 미란다는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웃음을 보여주고 떠난다.
미란다는 그녀에게 내 젊은 시절과 똑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맘에 들어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친구와의 믿음을 져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친구를 선택하는 앤드리아를 보면서 또 자신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파리 패션쇼에 간 미란다와 비서 앤드리아

앤드리아는 첨부터 정말 빡센 상사 만나서 제대로 단련되어 아마 그 어떤 상황도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란다가 안쓰럽기도 했다. '여자가 성공하려면 저만큼 독해져야 하는구나, 여자가 성공하려면 저만큼 악마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 역시 성공을 위해 정말 많은 것을 내려놓고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재혼한 남편과 쌍둥이 딸, 또 한번 이혼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여자에게 성공이란 남자보다 더 어려운 길이다.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내려놔야 할 것들이 더 많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미란다라고 자유로울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안다. 그게 부끄러운 길이고 바른 길이 아니라는 알면서도 이익을 위해 성공을 위해 그길을 가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돈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믿음보다는 성공을 선택한다. 그게 냉혹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앤드리아는 성공을 위해 자신에게 온 기회를 포기했다. 꿈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게 현실이고, 이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남을 짓밟아서라도 가라고 말하는 미란다의 냉혹함이 싫다.
순진한 양은 잡아먹힌다. 늑대가 되어 살거나 양이 되어 살거나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너처럼 했어,. 상사가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었어. 그게 사회이고 회사야"고 말하던 그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보인다. 
'당하면서 일어서는 곳이 이 곳이야. 당하면서  내 자리를 만드는 거야 '하고 말이다. 
같은 길을 간다고 생각했고, 자신처럼 가야 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도 그렇게 해서 여기 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것을 명예훈장처럼 들먹거린다. 권력은 썩은 집이다. 오래 갈 수 없다. 언제든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사장은 또 그녀를 압박하고 언젠가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협박을 받은 사람은  협박받아도 끄덕 없는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그녀에게 또 칼끝을 겨눌 것이다.나이젤같은 친구가 자신이 자꾸 그녀의 성공에 이용된다는 걸 알면 결코 그녀를 따라 잡지사를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허망한 권력에 집을 짓지 말고 사람에 대한 믿음에 집을 지어야 한다고 말이다. 
 
앤드리아는 파리에 가진 못해 실망해 있는 에밀리에게 자신이 입었던 명품들을 전부 선물한다. 에밀리 또한 자신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것도 실력이야. 능력이고, 희생이 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 잡아 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세상에 혼자 순수한 척 사는 것도 위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안다. 그게 바른 길이 아니었다는 걸,  또 자신은 느낀다. 내가 기뻐하는 순간에 그 사람은 슬플 거라는 것을 말이다. 동정은 집어치우고 최소한의 배려는 남겨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어짜피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아닌가?
'남는 건 사람뿐이다'라고 인생을 길게 산 할머니의 조언이 더 크게 다가왔던 그 날처럼  나도 그리 말할 수 있게 살아야 겠다고 말이다. 
 
미란다는 역을 한 메릴 스트립은 소름끼치게 냉혹한 편집장으로, 진짜 악마같은 상사로 짧고 강렬했던 영화,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아마 메릴 스트립을 떠올리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작품을 떠올릴 정도로 강렬했고. 패션 편집장답게 패션에도 많은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레이첼 맥아담스가 이 역을 거절해 대신 앤 해서웨이가 앤드리아 역을 맡게 된다.  그녀는 이 역으로 패션에 마법을 부린 듯 여자들의 환상을 채워주었다. 스타일과 패션으로 화제를 만들어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로젠 와이즈버거의 소설이다. 프라다는 편집장 미란다가 애용한 브랜드의 이름이다. 
로젠 와이즈버거는 미국 '보그'지의 유명한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비서로 일한 뒤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썼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7. 14:19
내 책상위의 천사

감독 제인 캠피온 

영화 내 책상위의 천사
<내 책상위의 천사>는 뉴질랜드 영화로 노벨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된 뉴질랜드 작가 지넷 프레임의 일생을 그녀가 쓴 세권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뉴질랜드 여성감독 제인 챔피온이 제작한 영화이다. 
뉴질랜드 풍경이 담겨 있고, 자넷의 성장과정을 압축적이면서도 디테일하게 끄집어 냈다. 
영화의 줄거리나 사건이 아닌 오로지 자넷 프레임이란 한 인물에 완전히 초점을 맞추어 그녀가 가진 내면을 향해 카메라를 갖다대는 느낌,그 주변인물이 아닌 오직 자넷 프레임만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좀 답답할 수도 있다.
딱 한 캐릭터를 두 시간넘게 보고 있자니 그녀의 삶에서 오는 감정들로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아닌 나로 살고 있지 않은지, 세상에 보여지는 나말고, 내가 알고 내가 있는 내가 맞는지, 나를 집중있게 고려해보게 된다. 누군가의 삶을 통해서 말이다. 
자넷이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찾았고, 이 영화에서 말하는 책상위의 천사란  글을 쓰며 자신의 삶과 행복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낡은 타자기이다. 나의 천사는 어디에 놓여 있는 것일까?
 
 
자넷 프레임(케리 폭스, 알렉시아 케오그)은 다섯자녀중 세째로 태어났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곱슬머리, 뚱뚱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주위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
특이한 외모와 소심한 성격, 가난한 시골소녀인 그녀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친구들에게 껌을 나누어주자 그 껌을 얻어먹으려고 몰려드는 친구로 인해 그녀는 잠시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먹을 것으로 환심을 사고 싶어하고 먹을 것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관심을 받는 사람말이다.

 

잠시나마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는 순간이 좋았다.하지만 그들은 그가 내미는 껌에 관심을 둘 뿐이다. 그걸 알고도 사람들속의 무리이고 싶은 갈망에 따스하게 안아주고 배려하는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그저 도둑질한 행위로 찬물을 끼얹고 더 소외시켜버린다. 그들이 내미는 먹이만 먹고 빠져나가는 약아빠진 원숭이처럼 말이다.

 

자넷은 감수성이 많은 아이이다. 예민하다보니 사람들의 시선에 쉽게 상처받고 극소심해져 버린다.
자신을 주관적으로 잘 드러내지 못하는 자넷은 누가 다가와 손내밀어주기 전에는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아이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특별나게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다.  가족들은 그런 그녀의 문학적 열정에 배려하고 지원해준다. 아버지가 어린 자넷에게 시를 적으라고 노트를 사다 줄때가 그렇다. 

 

그녀는 다른 여자아이처럼 외모나 이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다보니 자신을 드러내기 싫었을 것이다. 
오직 시를 사랑하는 그녀는 글을 쓰는 것이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유일한 소통이었다. 
그녀의 어린시절은 가난했고, 소외되었고, 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차기도 했다. 자신없는 외모와 불운한 가정환경으로 그녀는 점점 더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고, 오래토록 대인기피증으로 자신의 삶을 고립시켰다. 

 

그래도 사범대학교를 다녔고,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 생활하던 중, 학교에 장학관이 참관하는 수업에서 그녀는 소심한 성격으로 한마디도 못하고 교실을 나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심함으로 교사생활을 그만 둔 그녀의 상태는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심각했고, 주위에서는 자넷이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기다 또 다른 자매의 익사사고로 더 깊은 좌절로 이어지게 된다. 

내성적인 성격이 안으로 안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동굴을 파고 아예 들어가 앉아 나오지 않았다. 내성발톱처럼

대학교를 다녔던 그녀는 심한 신경증을 앓고 있었고,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해준 교수는 그녀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여겨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게 된다. 이 병원에서는 자넷이 정신분열증을 가진 것으로 오진하는 바람에 200회나 넘는 전기충격요법을 받으며 8년을 고통속에서 보내게 된다.
병원은 정신분열증 치료를 위해 뇌절제술을 시도할 예정이었는데 그녀의 책이 출판되고, 소설로 문학상을 수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 두뇌절제수술을 모면하게 된다.
 
자넷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 본  뉴질랜드 작가 프랭크 사지슨은 그녀에게 오클랜드 타카푸나에 있는 집필실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자넷은 그곳에서 첫번째 소설을 완성한다. 

프랭크는  그녀가 좋은 글을 쓰기를 격려하며 여행을 해 볼 것을 권유한다. 그녀는 정부 문예기금으로 7년간 외국 여행을 하며 글을 써 조금씩 내성적인 성격을 치유해 나간다. 그나마 프랭크라는 작가를 만나 그녀의 내면을 종이 위에 맘껏 쓰게 권해주고 여행으로 그녀를 방향을 잡아 주어 그녀는 작가로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여행에 돌아와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정신병원에 다녀온 것이 취업에 발목을 잡고 또 우울증이나 조울증으로 힘들어 제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아 숨어드는 사람처럼.

그러나 너무나 다행이게도 그 의사는 그녀에게 정신분열증이 오진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녀는 아주 정상적인 사람이고, 연금을 타 먹을 수 있게 조치할테니 그동안 정신병원에서 겪었던 일을 글로 쓰라고 독려한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한번 자신을 세상밖으로 밀어주는 의사로 인해 작가로서 자리잡게 된다.
가난했고,  오빠는 간질을 앓았고, 두 자매의 죽음, 소심한 성격, 못 생긴 외모의 모든 것을 담아 자서전을 완성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뉴질랜드로 돌아온다. 글쓰는 것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기에 작가로서의 삶에 매진한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면서 그녀가 주목받게 되지만 여전히 그녀는 대중앞에 잘 나서지 않는다. 글쓰기가 자신의 삶을 구원해 주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아무리 외모가 대수롭지 않다고 하지만 여자에게 외모는 자신감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세상이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 할수록 말이다. 그리고 성격 또한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일 것이다.
자신을 적극적. 외향적으로 표현하느냐, 소극적, 내성적으로 표현하느냐의 차이는 그 사람의 성격이다. 하지만 성격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중요한 소통의 도구임은 분명하다.
자넷에게는 적극적인 표현의 도구가 글이었고, 소극적인 표현의 도구가 외모이고 성격이었던 것이다. 자신없는 것은 고개숙이고 소극적이었던 반면 자신있는 글로 세상을 향해 누구보다 열심히 외쳤고, 크게 울러 퍼졌다. 

 

소심하다 못해 극소심했던 그녀가  대인기피증까지 겪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멀어지게 되고 사회속에서  소리내지 못하고 결국 안으로만 방향을 잡은게 글쓰기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 가장 행복한 소통,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 회피하다보니 주위의 시선에 의해 정신병원까지 간 것이 아닌가? 정신 분열이 아닌 반사회적 장애, 회피성 성격장애정도인 것을 그녀를 비정상적인 정신병으로 다루었다는 것이,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에게 전기충격요법이라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외적요인에 의해 휘둘렸던 인생이었다. 

 

어릴 적 시를 적어오라는 숙제에 그녀가 처음 보인 열정, 첨으로 언니가 그건 아냐 고쳐 적으라고 할때 처음으로 자신의 느낌을 믿고 적어 내렸다. 그런 결단력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엇다. 삶은 어짜피 자신을 주제로 주관적이어야 한다. 그 주관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며 사회적 주관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객관적이 된다고 본다. 
사람들은 전부 제각각 자신만의 틀이 있다. 자신만의 천사가 있다. 
그 천사를 빨리 안아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스스로를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가둬버린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숟가락에 밥을 올려주는 대로 끌려 8년을 고통스럽게 갇혀 있었다. 어쩌면 정신병원이 아닌 스스로 그곳에 갇혀있는 것을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돈을 벌어야 된다는 강박관념도 없고, 무얼 해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스스로 억압에서 내려놓고 싶어 그녀는 그곳에서 단, 한 번도 발악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천사를 찾기 전에는 말이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다. 남의 의해 갇히기도 했지만 프랭크나 오진이라고 말해 주던 의사로 인해 그녀의 천사를 찾도록 도움을 받았으니 말이다. 
삶은 흘렀고, 시간이 멈추지 않아 여러 곳을 여행을 다니며 작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찾았기에 그녀의 여정에 우리는 감동받는 것이다. 그녀가 그대로 멈추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정신분열증을 앓는 환자로 마감했을 터였다.
이 영화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천사를 찾아 세상에 나오라고 응원해주고 있다. 나도 이렇게 세상에 나와 있으니 당신들도 알을 뚫고 나오라고 말이다.
그녀의 통로는글쓰는 것이었다. 그게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법이라는 걸 알기에 너무 멀리 돌아서 왔다. 
이 영화를 보고 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각자의 캐릭터일뿐이다. 외향적이든 내성적이든, 사교적이든 비사교적이든...각자의 스타일...자신에 맞게 옷을 입고 각자의 색을 칠하면 되는 것이라고 본다.
누구에게나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여받는 건 동등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누가 끄집어내 주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자신안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posted by 해이든 2019. 3. 6. 20:36

여인의 향기


감독 마틴 브레스트 

1974년에 개봉한 디노 리시의 이탈리아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아주 괴팍하고 말도 못되게 하는 퇴임장교 프랭크 역을 맡았던 알파치노가 굉장히 독보적인 캐릭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로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될 만큼 뛰어난 연기력으로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또는 아련함까지 가지게 한다.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된 그는 여인에게서 나는 향기로 여성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알아 맞춘다. 어둠뿐인 세상에서 그를 지탱해 준 것이 여자의 팔에 안겨 있는 자신을 꿈꾸면서 버티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게 맞서면서 사는 것이 자신을 대단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 여기며 어리석게 살았고, 항상 인생의 갈림길에서 바른 길을 알았지만 그 바른 길을 뿌리치며 살았다. 그길이 너무 어려워서 갈림길에서 선택도 하지 않으면 산 길이 고등학생인 아르바이트생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널)을  만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널)는 가난한 집안에 양부인 아버지와는 사이도 안 좋지만 명문 고등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만큼 그는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학생이다.
추수감사절 연휴동안 시력을 잃은 퇴역장교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처음 대면에 그는 너무 괴팍하고 감당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 거절하려고 하나 조카의 간절한 부탁에 받아들인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밤 친구인 조지 윌리스(필립 호프만)와 함께  학교 교장이 몰고 다니는 재규어 자동차에 페인트 풍선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목격자로 지목된 찰리와 조지는 교장실에 불려가고 범인이 누구인지 불라고 한다. 그러나 밝히지 않고 침묵하자 교장은 찰리에게 범인을 밝히면 하버드대 입학을 보장해 준다고 한다. 월요일에 상벌위원회를 열테니 심사숙고하라고 말이다.
조카가 집을 비우자마자 슬레이드는  미리 계획한 뉴욕여행을 준비하고 떠나려 한다. 집에서 돌보기만 할 줄 알았던 찰리는 당황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뉴욕행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그의 이번 여정은 일급 호텔에서 묵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고급 술을 마시고, 형을 만나고, 멋진 여자랑 즐기고, 그 다음 멋진 침대에 누워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 괴짜 퇴임장교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와 리무진을 타고 뉴욕시내를 이동하여 고급 식당에 자리잡고 앉는다.  슬레이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 도나(가브리엘 앤워)와 탱고를 추게 된다. 
그녀는 탱고를 잘 못 추니 두렵다고 하는데, 그는 "탱고를 추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 없소. 탱고는 인생보다는 단순하다.설사 실수를 한다해도  발이 엉켜도 그게 탱고다."라고 그녀를 식당 무대로 인도한다. 그리고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그녀를 이끌며 아주 멋진 탱고를 선사한다. 
멋진 장면이었다. 
그는 형을 찾아간다. 하지만 썩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형이 아들, 즉 형과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으로 살벌하다. 그리고 끝내 조카는 삼촌 슬레이드를  향해 비수들을 쏟아낸다. 
"삼촌은 남들을 모욕하는 걸 즐겼어." 라며 쌓인 감정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가 진급에서 두번이나 누락되고 열 받아 수류탄 핀이 실수로 빠지는 바람에 수류탄이 터지고, 그 바람에 시력을 잃었다고 했다. 
 "삼촌은 예전도 쓰레기였고, 지금은 눈먼 쓰레기이고,하느님이 보시기엔 어떤 사람은 볼 자격도 없으셨나봐."라며 악담을 퍼붓는다.
결국 폭발한 슬레이드는 조카 목을 조르며 분위기는 와장창 깨진다. 삼촌도 말을 못 되게 하는데, 조카 역시 말을 참 못되게 한다. 
 
그가 어찌 살았을지, 그리고 왜 그의 곁에 사람들이 없는 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이번 여행은 삶의 마지막 여정으로 계획한 것이었다. 
찰리의 도움으로 페라리를 운전하며 도로에서 속도감도 맛보는 등 어둠 전의 삶을  만끽하기도 한다. 
호텔로 돌아 온 슬레이드는 찰리에게 시가를 사오라 심부름을 보내고 그는 교복을 입고 권총으로 자살을 하려고 준비한다. 
그러나 뭔가 낌새가 이상하게 느낀 찰리가 방으로 돌아왔고 그를 제지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은 어둠속에 있고, 세상에 관심도, 세상으로서의 관심도 없다면 죽은 거와 진배없다고  자신이 살아야 될 이유를 하나만 대보라고 한다. 
그러자 찰리는 "두가지를 대죠. 당신처럼 탱고를 잘 추는 사람도, 페라리를 잘 모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총을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 
세상에 맞서고 산 사람이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길잡이를 할 수도 없어서 절망적이었을 것이고,불투명한 미래가 더 어둡게 느꼈을 것이다. 
군인으로서 명예도, 찰리처럼 인간으로서의 성실도 자신에게는 없다. 
그게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지만 찰리가 자신을 더 아프게 한다. 
이 어린 고등학생이 어른인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슬레이드는 총을 내려놓는다.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죽음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더 머무르고 싶은 것인 줄도 모른다. 
 
뉴욕을 돌아다니는 동안 타게 된 리무진 안에서 찰리는 슬레이드에게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았었다. 교장에게 말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이다.
슬레이드와 찰리는 리무진을 타고 뉴잉글랜드로 돌아와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에 돌아오게 된 찰리는 전교생이 모인 교장선생의 모욕사건에 대한 징계위원회에 참석한다. 슬레이드는 찰리 부모님을 대신하여 위원회에 참석한다. 
이사회에서 교장에게 증정한 재규어 자동차에 장난 친 사건을 두고 이걸 야만적인 사건이니, 학교가 병들었다고, 학교의 설립이념을 파괴하는 아주 악독한 행위로 규정지으며 찰리에게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라고 한다.
이게 과연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었을까? 
자신의 차에 학생들이 장난친 것으로  학교의 피해라고 부조리한 논리를 내세워 학생을 퇴학시키겠다는 교장이 정상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목격만 한 찰리가 침묵한다는 이유로 퇴학이라니,
가난한 약자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저런 자가 학생들과 학교를 책임지는 일에 종사한다는 자체가 썩었다.
하지만 찰리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교장은 징계 위원회에 찰리의 퇴학을 권고하겠다고 한다. 
이런 교장의 부당함에 슬레이드는 찰리를 변호하며 변론에 나선다.
"난 판사가 아니기 때문에 찰리의 침묵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른다. 하지만 찰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남을 팔지 않았다.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땐 누군 달아나고 누군 남는다. 이 아이의 영혼은 순수하고 타협을 모른다. 이 곳에서 교훈이 되는 거라곤 내 옆에 있는 이 아이뿐"이라고 말한다. 
슬레이드의 말처럼 "당신은 왜 그에게 영혼을 팔라고 하는가, 이게 이 학교의 신념인가?"
너무 멋진 말이다. 학교의 명예를 들먹이는 교장에게 일침을 가한다.
자신의 밀고로 3명의 학생이 퇴학처분받는 것을 찰리는 선택하지 않았다. 찰리의 선택에 감명받은 프랭크가 두려워 올바른 길을 걷지 못했던 자신을 일어서게 하고, 살아 나서게 믿음을 준 것이라 본다.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고 두려움을 멀리 하며 살았던 프랭크가 순수한 영혼 찰리로 인해 변모해간다.
비신사적인 어른들이 순수하고 순결하고 용기있는 아이들의 기를 꺾는다. 
슬레이드는 사고를 치고도 입다물고 있는 세명의 아이들에게도 욕을 날려 준다. 그가 찰리를 위해 한 말은 아주 대단하다. 최고의 명장면으로 곱씹어 볼만하다.
그리고 찰리와 슬레이드는 전교성의 환호속에 강당을 내려온다.
 후아~
 
posted by 해이든 2019. 3. 6. 12:15

쇼생크 탈출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영화 쇼생크 탈출
자유란? 
이 영화를 통해 단지 강력범이 수감된 감옥이라는 설정보다 그들이 범한 죄목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갈망이, 또 그 갈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 남자의 탈출은 그 자유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감옥에서 야외로 차출되어 지붕 보수 작업을 하던 죄수들에게 제공된 맥주가 다 가진 듯한 비싼 미소로 내게 다가오게 할 줄이야.
햇빛을 받으며 아주 잠시지만 그늘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동료죄수들을 바라보며 짓는 그의 미소가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옥상에서 자유만끽하는 앤디(팀 로빈스)

부잣집 도련님같이 생긴 앤디(팀 로빈스)는 잘 나가는 은행 부지점장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감옥에 온 걸까? 이곳은 강력범들이 수감된 쇼생크 교도소이다. 그러나 강력범인 죄수들은 안 보이고, 아 강간범들 빼고 다 착하고 선량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흉악한 범죄자보다 흉악한 교도관과 교도소장이 있는 곳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오히려 죄수들에게 더 인간적이고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앤디는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살해했다는 협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당연 그가 죽이지 않았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살인범으로까지 몰렸다. 아무리 아니라고 진실을 말하여도 세상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자신을 사지로 내몬다. 
 
앤디는 그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세상의 사람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는 교도소 첫날 숨소리하나 안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세상을 향해 숨소리마저 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밖으로 내 놓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생활했다. 
 
하지만 자신을 강간하려는 무리들은 그를 끝없이 괴롭혔고, 그는 끝없이 저항하며 그들과 부딪히고 깨지기도 한다.
쇼생크탈출 레드역(모건 프리먼)

그가 처음으로 다가가 말을 건 사람은 교도소내 죄수들에게 몰래 물건을 구해주는 레드(모건 프리먼)였다. 그가 구해달라는 물건은 돌깨는 망치였다. 돌을 모으는 게 취미이고, 돌을 조각하는 아주 작은 망치였다. 

어느날, 야외 공사로 12명이 차출되어 나가고 우연히 쇼생크 내 악랄한 교도관 해들리가 세금문제로 다른 교도관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걸 듣고, 앤디는 그에게 세금을 하나도 내지않게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 
대신 여기 죄수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마치 자유인처럼 햇빛 아래서 마신 맥주 한 잔이 이들이 누린 최고의 자유였던 것이다. 
 
앤디는 그 계기로 노튼 교도소장의 비자금을 관리하게 되고, 교도소장은 엘리트인 그에게 교도소 내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연말정산때에는 교도관들의 세금업무를 봐 준다. 
기관에 여기저기 편지해서 도서관에 책을 기부나 협찬을 받으며 쇼생크에서 조금씩 적응하며 죄수들과 서로 교류하고 지내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음악이었다.
음악은 아름답고 누구에게도  자유를 상징하는 것임을 처음 알았다. 음악을 들을 자유까지 뺏아긴다는 게 무엇인지를 말이다. 감옥은 그들을 육체적인 자유만 앗아간 것이 아니었구나. 
그들의 정신적 자유를 박탈한 것임을 앤디가 감옥 내에 울려 퍼지게 한 '모짜르트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다.
죄수들은 감옥에 울려퍼지는 그 음악 한 곡으로 자유를 느꼈다. 하늘 높이 아무데나 날아갈 수 있는 새처럼 말이다.
교도소내에서 음악을 느끼는 앤디

이 영화는 앤디가 탈출에 성공한 것보다 여러가지의 자유의 형태를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소중한 걸 제대로 희망하지 않는 것이 쇼생크보다 더한 감옥인 것이다. 
 
그리고 자유와는 달리 익숙함이 주는 비극도 브룩스와 레드를 통해서 알게 된다.  
50년을 감옥해서 길들여지며 살다 가석방이 되어 세상에 나간 브룩스는 결국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레드(모건 프리먼)은  40년동안 허락받아 오줌을 쌌고, 허락없이 오줌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로 말로 자신이 감옥에 완전히 길들여졌다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감옥의 벽을 원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 벽에 기대게 되고 나중에는 의지하게 된다. 그러다 삶의 일부가 되고 또는 전부가 되어버린다고 말이다. 

감옥 내에서 브룩스는 그렇게 50년을 살았다. 그에게 세상은 감옥보다 더 두려운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앤디가 희망을 좋은 것이라 얘기할 때 레드는 희망은 위험한 거라고 말한다.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고, 이 안에선 아무 쓸모도 없다고. 그래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말이다. 
 
길들여진다는 것이 희망을 내려놓고 만들어진 삶이었다. 레드역시 가석방되어 세상에 나갔고, 브룩스가 걸어간 길을 가려다 희망을 꿈꾼 앤디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희망한다.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게, 앤디를 만나 따뜻한 악수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희망은 푸르르고, 길들여진 익숙함은 회색빛 벽처럼 보인다. 
앤디가 20년이나 자유를 희망한 것처럼 인간에게 자유란 살아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소중한 것임을 이 영화로 통해 절실히 느낀 것 같다.
 
새장안에서 살 수 없었던 앤디와 새 장 안에서 살기를 바랬던 브룩스.....
posted by 해이든 2019. 3. 6. 00:33

어 퓨 굿 맨 (A Few Good Men)


영화 어 퓨 굿 맨

감독 롭 라이너 

*스포 주의*

1992년에 톰 크루즈, 데미무어, 잭 니콜슨의 출연한 법정 영화로, 쿠바 관타나모의 미군 해군기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두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는 내용이다.

 
쿠바 관타나모에 있는 해군 기지에서 산티아고라는 사병 한 명이 사망한다.이 사건은 곧바로 워싱턴에 보고 되고 미국 내부에서 법정까지 가지 않고 합의만으로 사건을 잘 해결하기로 유명한 캐피 중위에게 배정된다. 
캐피 중위(톰 크루즈)는 언제나 공식 재판 대신 사전형량조정을 선택하는 것으로 명성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이다. 

산티아고 사병은 군대 내에 있는 구타로 사명하였고, 같은 소대에서 근무하는 도슨 일병과 로든 다우니 이병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어 구속된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에 의했다고 살인죄를 전부 부인한다.

이는 정부와 싸우는 재판이다. 정부 측에서는 이 사건을 두 해병에게 사전 형량을 조정하여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그래서 캐피 중위를 사건 담당 변호사로 지정한 것도 사전 형량 조정하여 처리되길 원한 정부 측 의중이었다. 

그래서 정부측 검사가 제시하는 6개월 형량을 채우는 것을 두 사병에게 제시한다. 어짜피 정부를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판단했고, 6개월이면 꽤 좋은 협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두 병사는  명령에 따랐을 뿐 죄가 될 수 없고 신념으로 다져진 해군으로서 불명예 제대를 용인할 수 없었다.
캐피 중위의 제안을 거부하게 된다.

캐피 중위와는 달리 같이 변호 담당을 맡게 된 조안느 갤로웨이 소령(데미 무어)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재판을 강행하자고 한다. 그렇게 서로는 마찰을 빚으며 캐피를 그저 자신의 업적과 성과에만 집착하는 사건 중개인 같다는 취급을 하게 되고, 도슨 일병은 명예롭지 못한 해군이라고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도 않는다. 

캐피 중위는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유능한 아버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트라우마처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프트볼과 야구에 집착하고 야구방망이를 손에 잡아야만 생각에 집중하며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첨부터 두 사병에게 뒤집어 씌우진 누명으로 군인으로서 불명예제대를 받아들일 수 없는 두 사병은 끝까지 재판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는 동료 웨인버그 중위와 조안느 갤로웨이 소령과 한팀을 이뤄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코드 레드'는 쿠바 관타나모 해군기지에서만 시행되는 군기를 목적으로 군부대에서 행해지는 구타나 가혹행위로, 총을 떨어트리거나, 정리정돈 불량, 청소불량, 행군에 뒤처지는 병사에게 같은 부대원들이 행하는 구타같은 것이다.
사령관실에서 이런 행위를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제섭 대령은 자신의 기지내에서 행하고 있었다.

산티아고는 제섭 대령(잭 니콜슨) 눈에 차지 않는 기준 미달의  사병이었고, 모두 모인 곳에서는 산티아고를 건드리지 마라고 해 놓고  도슨을 따로 불러 산티아고 이병에게  '코드 레드'를 가하게 명령을 내렸다. 

도슨 일병은 로든 다우니 이병과 같이 산티아고를 구타하게 되고. 산티아고가 사망에 이르게 되자 도슨 일병과  로든 다우니 이병에게 살인 및 살인 모의로 희생양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캐피 중위에게 사건을 맡겨 재판까지 안가고 사전형량조정으로 무마하려 했던 것이다.
코드 레드명령이 내려지지 않았고,산티아고 사병을 건들지 말라고 명령했고, 전출명령서를 작성했다고 사건을 은폐하기 시작한다.
권력의 맨 위, 제셉 대령의  권력은 서류를 조작하고 의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군사의 입들을 열지 못하게 한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곳이다.

산티아고의 죽음에는 제섭 대령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나 모두가 두 사병에게 몰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에 부끄러움을 가진 마킨슨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캐피 중위에게 전출 명령서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러준다.

마킨슨을 증인으로 세워 유리한 고지를 잡았는데 그가 그만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증인도 사라지고, 막바지에 다다른 캐피중위와 조는  증거를 조작한 제섭대령을 마지막 증인으로 세우려 한다. 

다음날 아침 6시 비행기로 전출 가는 사람의 옷장에는 제복이 그대로 다 걸려있는 것이 이상했고, 전출 가는 사람이 단 한통의 전화도 아무에게 안 했다는 것과 산티아고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케드릭 중위가 그 명령을 했다면 왜 그를 전출시켰는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증인이 없는 상황이다.

제셉 대령은 최전선에서 국민의 목숨을 지키는 해병 대령으로서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존재이며 무엇보다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버드대를 나와  글이나 법을 논하는 캐피 중위를 업신여기는 자다. 그런 그의 성향을 자극하여  자백을 받아내 보기로 한다. 

어 퓨 굿 맨 변호인단

 

캐피 중위의 제셉 대령에게 거만하게 그를 깎아내리며 질문공세를 편다.

"병사를 구타하는 비공식 명령을 지시한 것이죠?전출명령서를 위조하고, 관제 일지도 조작하고, 의사도 위협하고, 코드 레드를 명령한 것 아니냐? 그리고 문제가 생기자 두 사병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냐"

감정이 상한 제셉대령이 걸려든 것 같다.

"우리는 무장경비와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살고 있다. 누가 그곳을 지키겠나 ?내가 있기에 당신들이 사는 거야. 내가 지켜준 자유의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에게 내 임무수행에 대해 얘기할 필요를 못 느끼네. 감사나 표하고 물러가게. 넌 진실을 감당 못해." 

그의 권위의식을 더 자극하자  캐피 중위에게 말려 명령을 했다고 자백해 버린다. 

 
하지만 위기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권력으로 강한 권력을 가진 대령이 사병을 구타와 명령으로 사지로 몰아넣고 나때문에 너희들이 자유의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저 자부심이 약자의 편에서 좀 자애로운 대령으로 아버지로서 사병들을 안아주는 사람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판결이 내려진다. 살인이나 살인 모의죄는 무죄가 나오나 군인으로서는 불명예제대를 당하게 된다. 그들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재판을 한 것인데 결과는 그들을 복귀시켜주지 않는다.
결국 도슨 일병은 결국 자신들이 산티아고같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한 죄라고 자각하게 된다. 약자를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탐크루즈와 잭 니콜슨의 마지막 법정공방은 정말 불꽃 튀는 팽팽한 긴장감을 주고 자백을 받아내는 순간 희열이 막 감돌았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5. 16:36
뷰티풀 마인드

 감독 론 하워드

영화 뷰티풀 마인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수학자 존 내쉬의 삶을 다룬 영화이다.
 
최고의 엘리트가 모인 프린스턴 대학교에 신비로운 웨스트버지니아의 출신인 천재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머리는 뛰어나지만 무뚝뚝하고,감성이 부족하고, 사람을 꺼리는 편이다.

수재들만 모이는 대학에서 나름 천재로 장학금을 받는 그였다. 그는 강의가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창의력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자만하고 수업에도 안 들어가고, 친구들의 논문을 과소평가하고 자기 오만에 빠져있었다. 

천재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굉장한 압박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도 자신을 부각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연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사람들과 친화적이지 못하지 못한 자신이 자신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굉장히 컸던 사람이었다. 

사교적이지 못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대단한 이론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연구가 되지 않았고 논문도 제출한 게 없다. 
무엇에 대한 강박관념은 정신을 무지 힘들게 한다. 그 스트레스로 인한 육체는 제대로 된 생활을 방해하고, 남들은 논문으로 하나 둘씩 성장해가는데 아직 본인은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에서 그는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교수는추천해 줄 학문적 결실이 없이 의욕만 가지고 추천서를 써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한 장면을 보며 느껴지는 게 없나라고 묻는다.
그 장면은  한 교수에게 여러 교수들이 만년필을 그의 앞에 놓아주는  장면이었다. 평생의 업적을 이룩한 교수에게 존경의 뜻으로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 만년필은 세상의 인정이었다. 교수는 그에게 자넨 집중을 게을리 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오만함과 대면하는 순간이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절망감이 총알처럼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룸메이트인 찰스 허드만(폴 베타니)은 그에게 이건 네 문제가 아냐. 그들의 문제라고 말해준다. 좌절할 때 외로울 때 항상 곁에 있어주는 룸메이트 찰스로 인해 그는 연구를 계속 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술집에서 금발 미녀를 둘러싸고 벌이는 친구들과의  논쟁끝에 내쉬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틀렸다고 논문을 발표한다. 150년이나 된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반박하게 되는 논문으로 윌러 연구소에 교수 추천을 받아내게 된다.

 

그리고 5년 후 윌러 소속 박사가 되어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국방성에서 자신에게 국가 기밀 업무라며 소련 암호 해독을 해달라고 윌리엄 파처가 찾아온다. 그는 존 내쉬가 암호 해독이 가장 뛰어나 지목한 것이고 새 간행물 속에 숨겨진 암호를 해독하라고 한다.
그의 몸에 라 비밀문서 우체통 접근 암호 키라며 라듐을 이식하게 된다. 그건 그가 1급 보안구역 출입을 허락받은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듣던 학생 알리샤(제니퍼 코넬리)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연인사이가 되고,그녀에게 청혼하게 된다. 그는 엘리샤에게 청혼하는 스타일도 남다르다.
"우리 관계가 장기간 보장될까? 난 어떤 증거나 확신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해." 달콤한 청혼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가 얼마나 커? "-엘리샤
"무한해. 자료들이 보여주지."-존
"아직 입증은 안됐잖아?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확신해?"-엘리샤
"모르지만 그냥 믿을 뿐이야."-존
"사랑도 똑같아."-엘리샤
엘리샤의 답이 더 달콤하다. 그렇게 둘은 결혼하고 엘리샤가 임신을 한다.

 

하지만 존은 두려움에 떨며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소련군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감시하기 때문이다.

존은 윌리엄 파처에게 정부의 일을 그만둔다고 하고 파커는 계속 일하지 않으면 보호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불안감으로 점점 삶이 무너지고 파괴되어 간다. 엘리샤는 결국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게 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가 정신분열증에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원 무렵부터 환각이 시작되었고 너무 오래 방치되어 온 것이고, 룸메이트 찰스 허드만도 상상속 가상인물이고, 국가비밀업무같은 건 있지도 않고, 윌리엄 파커도 그의 환상속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뭐가 현실인지 환상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그의 사무실에는 온통 잡지와 신문을 오린 종이로 벽면이 도배 되어 있었다. 환상이 만들어낸 모든 행위였다. 감시당하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이 환상이 만들어 낸 설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항상 고립되었다. 그에게 룸메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나친 자기 확신이 사회적인 고립으로 결핍을 만들고 지나친 경쟁이 정신을 다이어트하게 만들었다.
소련 스파이로부터 공격받고 자신을 미행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국가기밀이라며 모두에게 비밀에 붙인 채 말이다. 

 

어쩌면 그는 반사회적인 사람인 줄도 모르겠다. 머리는 똑똑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관계에서 겪는 결핍이 과대망상으로 옮겨 붙는 것이다. 
최소한 환상속에서는 자신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은 행복하고 욕망에 야망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또 자신이 굉장히 중요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는 자기 암시가 만들어 낸 허상이 만들어 낸 인물이다.
그는 여전히 세상을 겉돌고 있고, 인간관계의 폭이 좁은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갈증이 현실로부터 빠져나가 환상을 불러 모은 것이다. 자신이 현재 합당한 대우를 못 받고 있다는 불만이 어쩜 1급 국가기밀 업무를 맡는 존재로 부각시키고 자신을 인정하는 인물 윌리엄 파처(에드 해리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한적인 현실의 삶으로 충족되지 않는 것을 그는 무한한 환상으로 자아를 만들어 내면서 그 환상을 확신으로 현실로 가져온다. 

 

어쩌면 찰스 허드만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친구를 무의식인 자아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는 관계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룸메이트며 자신의 곁을 지키는 존재로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실에서의 외로움이나 관계결핍이 만들어 낸 환상에 맹신적으로 내어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 낸 찰스를 의지하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해 나간다. 환상으로 현실의 결핍을 감춘다. 아니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환상에 갇힌다.  그러다 현실과 환상은 경계가 사라져 간다. 차이도 사라져 간다.
현실이 고달플때 우리는 가끔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의 불행을 부인하기도 하고 덮고 싶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체념한다. 현실과 환상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의 심각성은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1년간 정신병원에서 치료받고 집으로 돌아와 약을 복용하고 지낸다. 하지만 여전히 환상속의 인물들은 계속 그의 주위에 맴돌고 약으로 인해 일도 못하고 애를 봐주지도 못하며, 아내를 만족시켜주지 못하자 약을 몰래 중단한다. 그러자 그는 또 환각과 정신분열로  환상이 온통 현실이 되어 버린고 아내와 아기를 위협에 빠트리게 된다.

그는 아내가 다시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러 하자, 자신이 해결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과 있으면 안전하지 않으니 떠나라고 한다. 

그러나 엘리샤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와 극복해가는 길을 선택한다. 엘리샤는 아내라는 의무감과 떠나고 싶은 마음사이에서 힘들어 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죄책감도 들지만 너무 힘이 드니깐, 현실이 그녀를 너무 아프게 하니깐, 
하지만 존에게 머리가 아닌 가슴을 믿고 치유해 갈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존이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고, 그를 낯익은 장소와 사람을 만나면 망상이 사라지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프린스턴 대학교에 가 친구도 만나고 도서관에서 연구도 하게 하고, 교정을 걷게 한다. 
그러나 환상은 계속 자신을 괴롭힌다.아마 영원히 따라 다닐 것이다. 존은 그들을 조금씩 무시하게 되고,환상속의 그들도 그에게 점점 포기한 채 주위를 맴돈다.
영원한 악몽같은 것이다. 누구나 사로 잡히는 과거같은 것으로 그들을 그저 받아들여 버린다. 

 

그리고 그는 노벨 경제학상 후보에 올랐다고 토마스 킹이 찾아온다. 그는 그에게 "저는 정상이 아닙니다. 환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인정을 안하려고 애 쓴다."고 말이다. 
잠시 후,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같이 재직해서 영광이라며 다른 교수들이 만년필을 하나 둘씩 놓기 시작한다.

상상조차 못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1994년 '내쉬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내쉬 균형은 국제 무역협상과 국제 노동문제 해결에는 물론 진화 생물학에도 기여했다.
그는 시상식에서 
 
"비현실세계에 빠졌다가 돌아 왔습니다.
전 소중한 것을 발견했어요. 그건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발견입니다.
어떤 논리나 이성도 풀 수 없는 사랑의 신비한 방정식 말입니다.
난 당신 덕분에 이 자리에 섰어요. 
당신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며 내 모든 존재의 이유이다." 그의 아내를 향해 믿음에 대한, 사랑에 대한 답을 해 준다.

가끔은 어떤 대단한 이론보다 어떤 대단한 논리보다 사랑이 지닌 가치가 노벨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결과는 존 내쉬이지만 그 과정에는 엘리샤의 희생적인 사랑이 뒷받침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5. 15:45
피아니스트

감독 미카엘 하네케
영화 피아니스트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드는 이 불쾌함은 뭐지?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드는 안쓰러움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세심히 생각했다. 에리카(이자벨 위페르)가 내 놓은 대사와 표정과 행동을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을 억압하는 엄마에게 생각이 머물렀을 때 참 싫었다. 
엄마가 그녀에게 가혹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 
 
엄마로 인해 그녀의 세상이 닫혀있는 것이다. 
음악교수가 자신을 좋아하는 학생에게 쏟아내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40살이 넘었음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일일히 구속하고 간섭한다.
수업시간 마치고 3시간을 어디서 무얼 했느냐? 라며 그녀의 방문을 막아서며 말할 때까지 못 들어간다고 밀쳐내는 장면이며, 그녀의 가방을 강제로 뺏어 소지품을 뒤지고, 원피스를 사 온 그녀를 나무라고, 사 온 원피스 스타일을 트집잡으며 그녀를 몰아 세운다. 그걸 가져가려는 손길을 움켜 쥐고 실랑이하다 원피스는 찢어지고 딸은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으며 분노를 드러낸다.
결국 첫 장면으로 그녀의 문제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설명하려고 운을 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리카는 유명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이다. 표정이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눈동자로 그녀의 심리를 표면화한다.
눈치를 보는 듯한 눈과 고여드는 눈물, 촛점을 잃거나 냉정함을 가지는 눈이다. 
그녀는 표정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못하는 것이다. 아니 표현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마치 아이가 말을 못 배워 자신의 의사전달을 못하는 것처럼 그녀도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는 지를 모르는 것이고, 제대로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그게 말이 돼?라고 묻겠지만 그런 환경에서 그런 틀 안에서 억압되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르지 않겠는가?

욕망은 자신의 몸을 뚫고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해소하는지 모르는 그녀는 남자들만 가는 비디오방에 가서 포르노를 보고,  휴지통에 있는 뭇 남자의 정액이 묻은 휴지를 코에 갖다대고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는 행위를 하고, 자동차 극장에 가 카섹스를 하는 연인들을 훔쳐보며 차 옆에 앉아 소변을 보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모습은 지성적인 그녀의 행동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히 충격적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눈에 안 보이는 순간까지 그녀의 스케줄과 동선을 확인하며  마치 어린 애를 대하듯 간섭하며 그녀의 삶을 빈틈없이 구속한다.
숨막히는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유일하게 엄마의 억압으로 벗어나는 시간은 피아노 수업시간이다. 
그런데 그녀는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모욕적이고 거침없는 말들로 상처를 준다. 마치 엄마에게 억압당한 숨막힘을 학생들에게 풀려고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피아니시트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완벽해야 된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딸을 예술을 시키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그녀에게 희생하며 그녀를 이 자리에 우뚝서게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자신이 희생이 만든 것으로 자신이 딸이 자신의  자존감이고, 자신의 인생이고, 자신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릴때부터 정신병원에 들어가고,혼자 된 어머니 밑에서 그녀가 어떻게 지금의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의 어머니가 부모들이 그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피아노를 치게 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녀는 희생은 학생이 하는 거라고 반박한다.  그건 곧 자신이 피아니스트가 된 것은 어머니가 희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희생으로 만들어진 예술이고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라 반박한 것이다.
음악교수인 에리카
영화 피아니스트
간혹 예술을 하는 사람들 곁에는 어머니가 항시 붙어 코치가 되어, 세상의 눈이 되어 그들을 가혹하게 만들어간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 행동을 다 차단하며 오직 꿈을 위해 자고 먹는 순간 빼고 연습 연습 연습하라고 강행군 교관처럼 하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
내가 너 하나 피아니스트 만들겠다고 내시간을 너에게 쏟아붓고 있잖아. 내가 널 위해 희생하잖아 하면서 말이다. 
넌 내꺼야 내가 만든 것이고,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돼. 내가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니 날 책임져야 돼 하는 그녀의 어머니같다. 
 
40이 넘도록 혼자의 의지로 남자를 사랑하는 법도 모르고, 자신이 원하는 옷 하나 떳떳하게 사들고 오지 못하고, 엄마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그녀의 딸이 아닌 그녀의 남자로 그녀가 채우지 못한 대리 인생을 살아주고, 그 집의 가장으로 돈을 벌어오고,누굴 만나는지 어디 가는지 일일히 알려야 하는 숨막히는 삶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자식은 부모의 장난감도, 자신의 결핍을 자식으로 채우는 대타도 아닌 것이다.
사랑한다면 그녀를 위한 희생을 가장한 자기만족이나 자기 충족이 아닌 정작 딸이 원하는 삶을 고려해주었어야 한다.
 
가정집에서 예술가들의 작은 연주회에서 에리카의 피아노치는 모습에 반한 젊은 공대생 월터(브느와 마지멜)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항상 그랬듯이 냉정하고 차갑게 무표정으로 닫고 있지만 월터가 피아노를 칠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엷게 미소짓는 모습이 나왔다.
 
월터는 공대 학업을 포기하고 에리카의 수업을 듣기위해 지원오디션을 보러오게 된다. 
우아하고 지적인 그녀가 맘에 든 월터는 피아노수업보다는 그녀를 사랑해서 곁에 있고 싶은 것이었다.
너무나 훌륭한 연주에 다른 교수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데, 에리카는 월터가 너무 기교적이라고 거부의사를 내 놓는다.
그녀의 진심이 아니다. 월터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그녀의 눈은 촉촉히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월터는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퍼붓는다. 
연주회 리허설이 있는 날, 피아노 연주하는 여학생이 초조해하자 월터는 그녀의 옆에 가 앉으며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주고 위로를 건넨다. 
그 모습을 본 에리카는 강한 질투로 교수로서의 이성적인 판단을 잃는다. 그리고 그 여학생의 코트주머니의 깨진 유리조각을 담아두게 된다. 
 
리허설이 끝나고 여학생이 손에 피를 흘리자 그녀는 피를 보는 게 두렵다고 월터에게 가보라고 하고 화장실로 급히 뛰어간다.
그 모습에 월터는 확신한다. 에리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그녀가 뛰어 들어간 화장실로 들어가 그녀에게 키스하고 안으려고 하는데 에리카는 그를 밀어내고 그의 지퍼를 내리고 월터의 성기를 손과 입으로 해준다. 자신의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하면서 말이다. 
월터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미 그녀의 손과 입으로 달아오른 욕정을 멈추지 못하는데 그녀가 사정도 하기 전에 멈추어 버린다.
그러자 자신이 스스로 사정하려고 하는 것도 못하게 멈추라고 한다. 이 무슨 ...
그리고 "사랑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한다.

 

사랑에서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면 서로가 원하는 섹스를 하고, 키스를 하고, 애무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에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편지로 적어준다고 한다. 
뭔지 불쾌하고 남자로서 상처도 받고 모욕도 당했지만 그녀를 사랑하니깐 따라가보려고 한다.
여교수로서 학생하고 그러는게 양심이나 사람들의 시선때문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편지를 자신에게 주는 에리카를 따라 그녀의 방까지 간다. 그녀의 어머니는 호시탐탐 그녀의 방에 들어오려는 시도를 하고, 에리카는 서랍장으로 방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에게 편지부터 읽어 보라고 한다.
편지의 내용은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가학적인 내용으로 가득찼다. 포르노로 성을 배운 그대로를 그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때려주고 학대해 달라는 내용에 월터는 그녀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도 모잘라 그녀는 침대밑에서 밧줄과 쇳줄을 꺼내는 모습에 월터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역겨워져 나가 버리고 만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그녀의 성적 취향은 그리고 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엄마로부터 지시받고 강요당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비툴어진 표현이었다.
그가 떠난 후 그를 사랑하고 있고, 잃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를 찾아간다. 월터는 좀 변해 있었다. 에리카는 그가 원하는 방식의 관계를 하자고 그의 물건을 입에 넣고는 그만 구토를 하고 만다.
 
이들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그녀에게 실망한 월터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자로서 당한 모욕감으로 치밀어오른 분노를 참지못하고 밤중에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를 방에 가두어 버리고 그녀에게 폭행을 가한다. 얼굴을 때려 코피가 흐른다. 
그녀는 그토록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맞고 아픔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며 그에게 때리지 말라고 사정한다.
원하는 것 아니었냐는 말에 아무 말도 못한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인정하면서도 막상 이게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았던 것이다. 자신이 포르노를 보고 익힌 성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이고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녀를 거실바닥에 눕혀놓고 월터는 그녀와 섹스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바닥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의 섹스는 둘이 공유한 적이 없다.  처음 화장실에서는 윌터가 일방적으로 에리카에게 농락당했고, 두 번째는 월터가 원하는 대로 해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구토를 했고, 지금은 월터가 일방적이다.

사랑이 잘못된 욕망으로 서로에게 상처와 모욕을 남기고 서로에게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이다.

 
다친 학생으로 인해 대신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된 에리카는 어머니와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녀의 시선은 입구쪽에 향해 있고, 어머니가 들어가고 나서도 구석에서 입구쪽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월터를 기다린다.
방법이 비뚤어지고 어긋났지만 월터를 사랑한 심장 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월터가 들어오는 걸 보고 가까이 다가가지만 그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마치 그저 학생중의 한명처럼 "존경하는 선생님 연주 빨리 듣고 싶어요." 하면서 계단을 뛰어 올라가 버린다.
그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원오디션 보는 월터
 
그녀는 월터의 뒷모습을 보며 가방에 준비해 온 칼로가슴을 찌르고 연주를 포기하고 그대로 연주회 건물을 빠져 나와 버린다.
어쩌면 40이 넘어 처음 찾아온 사랑에 그녀는 나름 잘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을 할 줄 모르는 나이 먹은 여자였지만 아직 제대로 사랑에 대한 걸음마를 배워본 적도, 떼어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어린 학생에게 사랑을 배웠고, 자신이 비뚤어진 성행위로 그에게 상처주고 모욕한 것에 사과하고 자신이 방법이 아닌 그들의 사랑을 습득하고 자신의 억압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월터에게는 이제 그저 자신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교수로 자신을 밀어버린 것이다.
이제 엄마가 만들어진 틀을 깨버리는 것으로 연주회를 나와 버린 것이고, 사랑을 느낀 자신의 가슴에 칼을 찌른 것이 아닐까?
 
참 가엾은 인생이다. 에리카가 피아노칠 때만이 그녀가 자신을 표현하는 데 가장 아름다웠다. 
인생도 사랑도 피아노치는 모습처럼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에리카 역을 한 이자벨 위페르는 이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배우이다. 많은 작품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이고,  비뚤어진 욕망과 사랑을 가진 에리카역을  아주 당혹스럽게도 잘 표현해 주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 가련한 삶속에서 뻬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쉬운 역이 아니었다. 

이 <피아니스트>란 영화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4. 17:19

 장고 : 분노의 추적자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

(스포 주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이미 폭스, 크리스토프 왈츠,사무엘 L 잭슨, 이 네 명의 연기한 캐릭터는 환상적이었다. 정말 연기 끝내주게 잘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흑인 집사 스티븐(사무엘 잭슨)은 분노 유발자로, 장고(제이미 폭스)는 로맨스 유발자로, 농장주였던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대농장주로 머리가 텅텅 빈 주제에 잘난 척 하는 자로,  정의의 사도 닥터 킹 슐츠(크리스토프 왈츠)은 현상금수배자 사냥꾼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빛을 발한 존재이다.유일하게 착한 백인이다. 유일하게 인간다운 백인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을 제작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번 영화를 보고 나서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답다'라고 말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서부액션영화를 많이 봤었다. 서부의 무법자들, 감독은 이 서부액션영화에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가미시킨다. 나치의 만행에  유대인들이 복수하듯 여기에서는 노예였던 장고가 백인 농장주들을 향해 제대로 갚아준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흑인들의 삶은 처참했다. 계란을 깼다고 나무에 묶어놓고 채찍질을 하고, 서로 싸우다 누구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경기를 하게 하고,도망가다 잡힌 노예를 개한테 물어 뜯겨 죽게 만든다. 농장주들에게 흑인노예는 그저 말하는 가축에 불과했다. 어쩜 그보다 더 했다고 본다.

감독은 여기서도 피부색으로 차별이 만들어 낸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흑인들이 당하는 고통의 밑바닥, 흑인노예들을 다루는 백인들의 사악한 그 밑바닥을 드러내 신랄하게 까고 비판하고 있다. 

 

닥터 킹 슐츠와 장고

노예였던 장고는 흑인여성 브룸 힐다와 결혼하고 도망가려다 주인에게 잡혀 아내인 브룸 힐다에게는 가혹한 채찍질을 하고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고 장고마저 헐값에 따로따로 팔아버리게 한다. 노예로 팔려가던 중 우연히 현상금 사냥꾼 닥터 킹 슐츠에게 장고는 구해지게 된다.

노예제도를 혐오하는 슐츠는 독일인으로 전직 치과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현상금수배자 사냥꾼이다. 닥터 킹 슐츠는 장고에게 말에 타게 하고 식당에 들어가 맥주도 함께 한다. 백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눈으로 그들을 경계한다.

흑인이 말을 타는 건 있을 수 없는 시대이고 식당에 들어와서도 안되는 세상이었다. 슐츠는 장고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고, 자신과 함께 현상금 사냥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내를 구하러 같이 가 준다고 한다. 흑인으로 위험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겨울을 수배자 사냥꾼으로 동행하는 동안 장고는 타고난 솜씨로 뛰어난 총잡이로 성장한다. 그리고 아내 브룸힐다가 팔려간 곳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은 농장주 캔디의 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그는 흑인들을 마치 투견처럼 흑인 노예 둘 중에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경기를 위해 흑인 노예들을 사고파는 사업을 하는 위인이었다.

장고와 닥터 킹 슐츠는 캔디로부터 브룸 힐다를 빼오기 위해서 마치 사업을 제안하는 노예상으로 위장해야 했다.

힘쓰는 남자 흑인 노예를 사는 척하면서 덤으로 브룸 힐다를 사려는 것이었다. 멍청한 캔디가 점점 넘어왔고, 이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캔디 옆에 있는 늙은 흑인 집사 스티븐(사무엘 L. 잭슨)이 장고와 브룸 힐다가 아는 사이란 걸 눈치채게 된다. 아주 눈치가 빠르고 뱀 같은 위인이다.

그는 캔디에게 사기당하고 있다고 고자질하는 바람에 일이 다 들통난다.

 

장고와 캔디
전세가 역전되어 캔디는 닥터킹을 협박해서 브룸힐다를 12,000달러에 계약을 하게 한다. 닥터 킹 슐츠는 돈을 넘겨주고 캔디는 의기양양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약서를 작성해서 그에게 넘긴다. 

 

닥터킹은 눈앞에서 도망가던 노예를 잡아다 개에게 밥으로 던져  물어뜯기는 장면을 목격했고, 지금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이 정도면 노예가 가축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서재에서 뒤마가 쓴 <삼총사>를 보고 캔디에게 말한다. 그가 개에게 던져 준 노예 이름도 달타냥이었다.
"뒤마가 이 사실을 알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이라고 말하자 캔디는 그를 감상적인 프랑스인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그가 좋아 읽고 있는 삼총사의 저자가 "뒤마는 흑인이야"라고 한 방 날린다. 그때 멍청한 캔디의 표정을 감상하는 재미를 느껴보길... 가관이었다. 캔디는 그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깝다고 슐츠가 시무룩한 줄 알고 우쭐했지만 닥터 킹 슐츠는 노예들이 당하는 처참한 현실에 침울했던 것이다.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장고와 나가려고 하는데 뜬끔없이 악수를 하자고 한다. 슐츠는 볼일 없다는 듯 거절하자  악수를 하지 않으면 브룸힐다를 집안에서 한발짝도 내보내지 말라는 캔디의 협박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슐츠는 그에게 다가가 가슴을 총으로  쏘아버린다. 그리고 그의 부하에 의해 슐츠 또한 맥없이 죽고 만다. 그를 이렇게 맥없이 보내버리다니...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와 악수하는 것은 노예를 개에게 던져주는 그런 인간과 악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낫다는 그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죽으면 죽었지 저런 악랄한 놈하고 악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에게 총을 발사한 것이라 본다.

 

스티븐과 브룸힐다
장고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스티븐이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그를 항복하라고 한다. 결국 체포되어 창고에 거꾸로 매달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악랄하고 제일 잔인한 자는 스티븐이라고 생각한다. 
흑인이면서 백인보다 더 흑인에게 악랄하게 했던 자. 자신도 껌둥이면서 "껌둥이를 안으로 들인다고요."라고 말하던 자, 
껌둥이를 가장 잔인하게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을 아주 곰곰히 생각하는 자, 겉만 껌둥이이죠. 사악하고 악마같은 노인네로 그는 농장과 저택을 총괄하고 백인 감독관들마저 옴싹달싹 못하게 하는 백인위에 군림하던 자로 장고를 처참한 죽음을 맞게 하려고 광산노예로 팔게 된다.
정말 악랄한 것은 캔디인줄 알았는데 피부색이 같은 흑인 집사 스티븐이었다. 
흑인에게 더 못되고 악랄하게 캔디를 뒤에서 조종하여 권력을 행사한 자이다.
닥터 킹 슐츠와 다니더니 장고가 많이 배웠다. 
뛰어난 언변과 술책으로 팔려가던 중 탈출하여 다시 돌아와 그 무늬만 깜둥이인 스티븐에게 통쾌하게 복수하고 통째로 그곳을 날려버리고 브룸힐다를 구해낸다. 

 

감독은 서부영화에 나올법한 복수극과 총잡이의 액션을 보여주는 것에 그쳤다면 이 영화는 이리 흥행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를 가미하여 노예였던 장고가 흑인노예와 결혼할 수 없음에도 몰래 결혼하여 도망가려다 잡히는 장면으로 흑인노예들의 로맨스를 눈물나게 그려냈다는 것과 악랄한 농장주와 그들이 노에들에게 행하는 잔인하고 처참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내 우리를 힘들게 끌고 갔다는 것과 그 악랄한 노예상들과 백인 농장주들을 통쾌하게 죽이고 복수하는 장면으로 속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그리고 마지막 저런 백인과는 다르게 닥터 킹 슐츠같은 좋은 백인이 노예제도에 반감을 느끼며 흑인인 그를 도와주는 것으로 약간의 위로를 주기도 한다. 
백인이면서 흑인 노예들을 돕는 진정 강한 자 슐츠를 통해 감독이 그동안 보여주던 가치관을 담아낸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백인보다 더 악랄하게 흑인을 괴롭히는 스티븐을 보고 분개했다. 첨에 그가 브룸힐다에게 장고랑 아는 사이 냐고 물었을때 난 그가 흑인의 브룸힐다를 도와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이 아는 사이라고 캔디에게 고자질해서 일을 다 틀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체포된 장고를 어떻게 하면 더 고통스럽게 죽일지를 고심한 끝에 탄광캐는 곳에 가서 평생 돌만 캐다 고통스럽게 죽게 그를 광산으로 팔아버리는 것을 보고 머리에서 불나는 줄 알았다. 
 
이 영화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가미시켜 스토리를 감동있게 담아 단지 복수극이나 총잡이가 등장하는 단순한 서부극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 한 번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이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네명의 캐릭터는 작품 이상의 에너지를 연출해 냈다고 본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3. 20:08
당신이 말해줄 수 있다면

 감독 니콜라스 그레이 

영화 당신이 말해줄 수 있다면
한 사람이 내게 감동했다고 해서 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이 내 능력을 인정했다해서 나의 삶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날 이해해 준다고 해서 내 세상이 쉽게 변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여배우가 꿈이었던 새디(마린 아일랜드)는 지금 자신의 꿈과는 멀게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자신의 배를 때려 누군가에게 당할 위험에 대비하여 강해지고 싶었고, 화려한 방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의 꿈을 받아줄 의사가 없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 줄 마음들이 없었다. 이 나이에 친한 친구도 아닌 사람과 룸메이트를 하면서 이런 집에 살고 있는 것도 부끄러웠다. 
유부남인 병원장하고 불륜인 자신이 또 한없이 초라하다. 아내와 이혼할 생각도 없는, 자신의 앞에서 서 있는 부부가 또 너무 잘 어울리는 것이 자신을 더 비참하고 고독하게 만든다. 
의사 아내가 병원에서 파티를 한다.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의 친구가 화가이다. 그 화가의 그림을 병원에 걸어놓고 그림에 대해서 서로 논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그림에 대해 사람들이 혹평을 내어놓는다.
그때 새디는 그들과 다른 생각을 내 놓는다. 그 그림은 마치 자신처럼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의지할 곳 없고, 자신을 봐 주는 시선 하나 없는 외로움이 자신의 모습과 닮은 것 같다고 말이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넬슨(앨빈 키스)도 이 파티에 늦게 도착했다. 그는 흑인이다.  화가에게 새디는 그의 그림이 좋다고 말한다.
 
아침에 깨어보니 낯선 곳에 누워 있다. 어제 술에 많이 취해있던 그녀는 화가와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혼자라? 커피를 사들고 들어온 넬슨, 집에 커피가 있는데 굳이 돈을 지출하며 사왔냐고 묻자 그 냄새에 깰까봐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에 먹을 빵을 사왔다고 그녀에게 내민다. 그녀는 왠지 눈물이 난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아침을 챙겨준 사람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말이다. 넬슨의 자상함에 새디는 어색함이 스르르 다 녹아내린다. 
그리고 둘은 연인이 되어간다.
 
넬슨은 화가이다. 작은 일에도 상처받는 예술가이다.매일같이 자신의 작품이 팔리길 기도하고,  친구라고는 고양이밖에 안보인다. 그의 그림에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외로움으로 묻어나는 색채뿐이다.
그런데 그가 좀 괴짜같아 보인다. 그는유독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원과 잘못된 단어를 지적하고 이를테면 '눕다'와 '눕히다'라는 혼동되는 잘못된 표현을 지적하기 시작한다. 병적으로 말이다. 목소리를 높이면서까지 흥분상태가 된다. 
그런 그에게 룸메이트가 사과하라고 두번이나 반복하며 몰아부치자 그는 사과하고 싶은 맘이 싹 달아나게 한다며 화를 내며 나가버리기까지 한다. 단어도 모르면서 함부러 말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인데도 말이다. 
그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국어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로 인해 좀 강박적으로 공부를 강요받은 것 같고 자신도 모르게 몸안에 내재되어버린 것 같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사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관심이 있는 분야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어원이나 문장 그런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타인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이 좀 어렵고, 단어에 특별나게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표현한다. 
그 외에는 표정이 별로 없다. 좀 제한적이다. 관심있는 것에만 강박적으로 빠져든다고 봐야한다. 
그런 넬슨과 어릴 때부터 알아왔던 사이인 새디의 병원동료이며 간호사는 새디가 의사와도 불륜관계인 것을 알기에 새디가 넬슨을 마음아프게 할까봐 걱정이 된다. 
 
새디는 양키스 팬으로 그녀가 환호를 지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넬슨은 행복을 화폭에 그리려고 한다. 꿈을 이루어 뉴욕의 양키스 야구에 입단한 한 선수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양키스 팬이 된 그녀이다. 
꿈을 이루려면 뉴욕에 가야 된다고 믿는 그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제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꿈을 꾸기 위해 뉴욕에 갔지만 상처만 받고 돌아왔다. 지금은 현실에 자신을 던지고 살지만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소음뿐이었다.진실한 마음이 없는 게 참을 수 없다. 눈 딱 감고 부자와 결혼하고 싶지만 사랑이 없는 행복할지 자신의 마음이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불륜관계인 의사는 자신을 장난감처럼 생각한다고 본다. 부자랑 결혼해서 애인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농담처럼 내어놓지만 어쩜 그 내면에 진심과 현실에서 타협하는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 지 모른다.
 
넬슨은 안다고 해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 세상에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도 쉽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찾아가야 하는 것이겠지. 새디 눈에는 넬슨은 자신에게 진심이고 그가 아름답게 보인다. 
 
새디는 내세울 건 없어도 자기 자신을 그대로 적는 게 바로 자신을 보이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 믿음에 현실은 상처를 주었고, 꿈도. 인생도 방향을 잃었다. 
 
의사는 새디가 별 볼 일없는 화가 넬슨과 사귀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걸까, 아님 질투일까, 새디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하자고 둘을 초대한다. 가난한 그에게 돈 가진자로 과시하고 싶어 비싼 위스키를 사고, 거지에게 돈을 주는 넬슨을 보고 유치하게 나도 줄수 있어 하고 60달러를 주는 모습을 보인다. 새디앞에서 넬슨보다 나은 걸 과시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다. 넬슨의 그림을 1,000달러에 사주고, 비산 위스키를 그의 집으로 보내주기도 한다.  
무얼까? 나보다 보잘것 없는 화가에게 애인을 뺏긴게 자신을 두고 고작 저런 남자에게 간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아니면 진짜 새디를 사랑했던 걸까?
 
의사부부와 헤어지고 넬슨집에 온 새디는 어휘를 뽑내려는 넬슨에게 화내며 대화를 하자고 한다. 그가 이란성 쌍둥이이고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오늘에야 듣는다.
넬슨은  정작  쓸데없는 짓만 하고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건 다 놓쳤다는 생각을 가지고 된다. 넬슨에게 그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물어봐 달라고 한다. 
말해달래는 넬슨의 말에 그녀는 열심히 가족에 대해 얘기를 한다. 들뜬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베개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 버린다. 사랑을 하는데, 같이 있는데 점점 더 외롭게 느끼는 만드는 남자들은 뭘까?
무언가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같이 있지만 혼자 떠드는 느낌, 외로워서 만나는데 더 외로워지는 느낌같은 것이 그 둘 사이에 흐른다.
아침에 잠이 깬 넬슨은 그녀가 없는 걸 알고 그녀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그녀는 연락을 받지않고 그녀의 집에 가니 룸메이트가 그의 집을 챙겨주며 가라고 한다.
 
항상 한 걸음이 늦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는 것은 
정말 행복과 외로움은 한 끗 차이다. 여자의 외로움은 남자의 무심함에서 더 깊어진다.
 
 
그의 아내가 집에서 파티를 하고 새디와 넬슨을 초대하지만 새디는 넬슨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넬슨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파티를 하는 의사의 집으로 가고,끝내  의사를 주먹으로 친다.
"이건 절규가 아니라 절규를 멈추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에게는 절규는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절규를 멈춘다면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넬슨은  새디를 당신처럼 소유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다고 말한다. 
의사는 "자네가 아니라 날 선택한거야." 라고 말한다. 
어떤 색이 내 맘에 드는지 알 수 없다. 새디로 인해 넬슨의 화실은 밝아졌다. 우울한 새디의 화폭에 그려진 그림은 그녀가 환호하던 모습과 행복했던 순간으로 뿜어져 오는 색채로 채워졌다. 그런데 비밀이 많은 것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새디를 외롭게 했고 떠나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모두가 알아버리고 아내마저 새디와 남편의 일을 알게 된다.  그리고 새디앞에 앉아있는 아내는 남편에게 수년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랑한다는 말을 당신에게 하고, 넬슨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더라고 전해준다. 
각자의 삶과 사랑은 자신의 방식대로 절규하고 또 상처를 만들어 낸다. 
멈추는 것도 때가 있다. 그 때를 놓치면 아무도 안아줄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새디에게 대신 말해줄 수 있을까?
둘다 새디를 사랑한다고 한다.  또 둘다 평범하지 않은 관계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라고 말해 줄 수 없다. 현실은 마음가는 대로 계속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상태가 변하는 것처럼 감정도 변한다. 처음이라는 것은 기억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 삶을 살고, 상처받으면서 사랑을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에드워드 호퍼의 말처럼 세상에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또 현실도 사랑도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는 건, 사랑을 표현하는 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도 다 주관적이다. 모든 삶이 다 주관에 의해 나의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러니 나는 새디에게 말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넬슨은 힘들다고 말한다. 혼자 고독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절규한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또 사랑하게 해 줄것이기에 이제는 표현하겠다고 한다.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밖으로 표현한 것이다. 
고양이의 행동으로 느낌으로 좋아하는 걸 아는데 정작 그녀가 주는 표정을 못 읽은 자신을 깨닫아 간 것이라고 본다.
세상은 나를 못 바꾸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3. 3. 19:10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한 여자를 1년동안이나 몰래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고 우리는 관음장애라 한다. 
그 여자가 남자들과 나누는 성적 관계, 그 여자가 속옷 차림으로 자신활보하는 모습,여자의 사생활을 매일 같이 훔쳐본다. 

처음엔 친구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연상의 독신녀 마그다(그라지나 자 폴로스 카)를 훔쳐봤다. 매일같이 남자들이랑 섹스를 하는 그녀를 훔쳐보며 흥분하고 자위도 한다. 그리고 친구가 시리아로 떠난 후 토메크(올라프 루바젠코)는 혼자 그녀를 계속 관찰하게 된다.

처음에는 훔쳐보는 것으로 남자의 성적 흥분을 채웠는데 점점 다른 것이 눈에 보인다.

각도가 바뀌고 그녀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외로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손내밀어 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이고, 점점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알람으로 설정해놓고 그녀가 불꺼진 집에 쓸쓸히 들어올 시간을 맞추어 같이 나름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새 머리속이 온통 그녀로 가득하고,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그는 같이 움직이게 된다.

녀의 벽에 걸린 시계가 멈추어 있는 게 맘에 걸려 그녀 몰래 시계태엽 열쇠를 갖다놓고, 그녀가 이틀에 한 번씩 우유가 배달되지 않는다 하여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 우유배달을 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어 아무 말 안 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무 말하지 않고 듣는 자신을 변태 자식이라고 전화를 끊고 불쾌해하는 그녀를 화나게 만든 것 같아 다시 걸어 "미안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녀가 우유와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을때 자신도 미리 준비해 놓은 빵을 그녀와 동시에  같이 입에 넣는다.  그의 입장에선 그녀와 같이 식사하는 것이다. 공간은 다르지만 그녀와 생활한다는 느낌으로 그의 생활도 맞추어 준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것처럼 그녀와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그녀를 망원경으로 담는다.

그는 그녀의 생활만 담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내면도 담고 싶은데 그녀가 우유를 테이블에 쏟고 의자에 앉아 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왜 우는 것일까? 자신은 살면서 딱 한번 울어 봤다. 혼자가 되었을 때, 그는 고아였다. 그는 한숨도 못 잔다. 그녀가 왜 우는지, 단지 그녀가 우는 게 자신이 무얼 해 줄 수 없는 것이 맘이 쓰인다.

그녀가 다른 남자랑 섹스를 나눌 때 그는 망원경을 내린다. 그가 관음증이라면 더 깊이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댈 것이다. 하지만 안그랬다. 그녀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와 공유한다는 의미였던 것이 많다. 자신 나름대로 자신의 각도하에 그녀의 외로움에 그녀의 불편함에 자신만의 표현을 외출시키지 않은 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살의 우체국 직원이다. 그녀가 보고 싶어 가짜 송금표를 만들어 그녀의 우편함에 넣는다. 그녀를 우체국에 오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우편물이 없다고 다음에 다시 또 통지서가 오면  또 오라고 말이다. 어제 울던 그녀가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보고 싶은 맘이 컸을까, 그는 또 가짜 통지서를 그녀의 우편함에 담아 놓는다.
그녀가 우체국에 방문했다. 그는 우편물이 없다고 하자 또 우편물이 없는 것에 화를 내고 국장을 불러 오라고 한다. 하지만 국장은 그녀가 내민 송금통지서가 조작됐다고 그녀를 사기꾼으로 몰아 간다.

 

이게 아닌데 단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거였는데 일이 커져 그녀가 난처해졌다. 어이없는 그녀는 우체국을 빠져나가고 그는 그녀를 따라 나간다. 실은 그 통지서를 보낸 게 자신이라고 말한다.

왜라고 묻는 그녀에게 당신이 보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린 청년을 그녀는 이상하게 취급하고 가버린다. 그러자 그는 망설이다가 "당신이 우니까" 이라고 소리친다.  뒤돌아선 그녀가 자신을 우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그는 훔쳐봤다고 말한다. 불쾌한 그녀는 그를 꺼지라고 밀어내 버린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쾌했을지 이해된다. 그녀는 그저 그를 관음병에 걸린 변태로 여겼다. 그리고 그가 지켜본다는 걸 알고 그가 보라는 듯이 야한 속옷을 입고 남자를 불러들여 일부러 관계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우체국 직원이 우리를 훔쳐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아파트 앞에 와 고함을 지르며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를 주먹으로 얼굴을 날린다.

다음날, 새벽에 그녀의 아파트앞에 우유를 놓고 가려는데 그녀가 문을 연다.
자신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키스, 섹스, 아니면 여행. 하지만 그는 원하는 게 없다고 한다.
자신을 훔쳐보는 남자라면 분명 자신에게 이런 걸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게 없다는 그의 말을 거짓이라 여긴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데이트 신청을 한다.

카페에 앉은 두 사람은 이야기를 했고, 그가 자신의 편지를 빼돌린 걸 알고 너무 집요하다 생각한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 어려 사랑을 모르는 19살의 청년에게 세상이 그리 사랑이 그리 환상적이지 않다고 깨우쳐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를 자신의 아파트에 데리고 가 그녀는 상의만 걸치고 그를 유혹한다. 

자신의 살결을 만지게 하고 허벅지를 안으로 손을 인도하자 그는 그만 사정을 하고 만다. 그녀는"이게 바로 사랑의 전부야."라고그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그는 그 길로 뛰쳐나와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자신의 손목을 면도날로 긋고 만다. 그녀는 그렇게 뛰쳐나간 그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상처를 준 게 미안하다. 이제 그녀가 망원경을 꺼내 그의 집을 본다.

그에게 상처 준 것이 맘에 걸리고 미안한 그녀는 돌아오라고 글을 적어 창문에 갖다 대지만 아무 소식이 없자 그가 놓고 간 코트를 들고 그 집으로 간다. 하지만 친구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신이 들어오는 시간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당신을 지켜봤다고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병원에 있다고만 하고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돌아오면 만나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를 찾아다닌다. 병원도 알아보고 우체국에도 찾아간다. 그리고 우체국 동료에게 그가 "사랑이 무너져 손목을 그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의 아파트에 불이 켜지기만을 망원경으로 애타게 지켜본다.

독신녀인 그녀에게 남자들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한다. 그게 섹스가 되었든, 진심이 다 빠진 소유욕으로 가지고 놀 장난감 정도로 대한다.

래서 그가 말하는 걸 사랑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처럼 현실의 때가 묻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었다. 그가 옳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 그의 행방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방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그녀는 달려간다. 그리고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잠들어 있는 그를 보게 된다. 친구의 어머니는 그녀가 그에게 상처 주는 것을 망원경으로 다 보았기에 그녀를 막아선다. 그녀는 말없이 그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망원경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본다.

불꺼진 방에 홀로 들어올 자신을 지켜봐주고, 자신이 혼자 울고 있을때 그가 같이 있어 주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을 훔쳐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사랑과 위로의 손길을 건네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처음엔 훔쳐본 것이다. 그러다 관찰하게 되고 점점 그녀를 지켜보다 그러다 사랑하게 된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감정도 흘러가 커진것이다. 그녀의 외로움이 자신의 외로움과 같았고, 그녀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처럼 동일시했다.
세상에 혼자라 생각했는데 자신을 지켜봐주며 사랑해주고 있는 토메크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내 멈춰진 시간을 흐르게 하고, 원치 않는 섹스를 할 때 가스가 샌다고 가스 직원을 보내고, 우유가 배달되지 않는 걸 알고 우유배달원이 되어주고, 그렇게 그녀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같이 있어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훔쳐보는 그저 나쁜 녀석이라 혼내주려고 했고, 세상의 남자들이 다 속셈을 가지고 여자에게 접근하고, 원하는 게 없는 사랑이라 없다고 여겼던 그녀였다.  

고아로 자란 자신의 외로움과 닮아 있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가 외롭지 않게 그녀가 들어오는 시간에 알람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그녀와 같이 식사시간을 맞추고, 그녀와 추고, 그녀와 함께 했다. 그의 관점에서 말이다.

세상에 너무 지쳐있던 그녀는 도메크의 순수한 사랑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 그의 사랑을 무너지게 한 것을 알았고, 그의 사랑이 온전히 아무것도 원하지 않은 순수한 사랑임을 그의 망원경으로 자신의 집을 훔쳐보며 알게 된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다.

나도 망원경으로 내 안을 훔쳐볼 순간을 가져본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2. 23:03
피아니스트

감독 로만 폴란스키 

영화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는 폴란드 출신의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일생을 소재로 한 전기소설을 프랑스 출신의 폴란드 영화감독인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로 구성한 작품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시 폴란드 바르샤바를 배경으로 나치에게 점령 당한 참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모습을 통해 나치의 만행과 심장이 끊어질 듯이 비참했던 삶의 현장으로 데려다 준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던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이  쇼팽의 야상곡 20번을 연주하는 도중 라디오 방송국이 폭격을 당하게 된다. 독일나치에게 점령당한다.
 
나치들은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탄압했다. 그들은 유대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의 만행을 여기에 일일히 적고 싶지않다. 기차역에서 아는 공안원의 도움으로 그는 혼자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스필만의 가족들은 죽음의 기차에 태워져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홀로 목숨을 건진 그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고 친분이 있던 도로타의 도움으로 수용소에 탈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며 삶을 이어가게 된다.

 

스필만은 처음엔 아는 공안원 덕분에 죽음의 기차에 타지 않았고, 이번에도 친분이 있던 캡친스키와 도로타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 남은 것도 어쩌면 그에게 살아남으라는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 
나치의 학살로 도망치기는 했지만  숨어지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루 하루를 어렵게 비참하게 견디고 또 견디어야 했다. 
폴란드 내 나치에 대항하는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살아가는데, 그들마저 발길이 끊어졌다.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암울함,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서 지독한 추위와 고독과 공포와 허기로 끈질지게 삶을 이어간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명장면

배가 너무 고파 먹을 것을 뒤지다가 통조림을 발견하고 그 통조림을 따려다  독일군 장교 호젠필트(토마스 크레취만)와 마주치고 만다. 독일장교는 그가 피아니스트라는 말에 연주를 하라고 명령한다. 

얼마나 추운지 입술사이로 입김이 연신 뿜어지고 옷은 다 헤어져 소매끝이 너덜너덜하고 손은 너무 앙상하여 건반위에 올려진 나뭇가지 같았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초라하게 머뭇머뭇 거리던 손은 이내 음들을 만들어가고 조금씩 건반을 옮기며  익숙하듯 선율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가 생존본능에 의해 필사적이었듯이 피아니스트였던 손가락도 음을 기억하며 운명적으로 연주했다. 스필만은 쇼팽의 발라드 1번 G장조를 연주한다. 
폐허된 건물에서 살기위해 먹을 것을 뒤지고 몰골은 너무 야위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 앙상한 손으로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선율이 마치 그가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슬픔으로 덮혔다. 
인간으로서도 피아니스트로도 마지막일 거라는 전율이 안개처럼 자욱했다.
허기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했다. 독일장교는 뒤에 의자에 앉아 그가 연주하는 선율을 묵묵히 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장교는 그가 이 춥고 어두운 폐건물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 지 궁금해 했고, 그는 후레쉬로 공간을 비추더니 돌아서 나갔다. 이 장면이 있기에 더욱 빛났던 영화였다. 
사무실에 돌아간 장교는 책상에서 결재사인을 한다. 그의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그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아버지고 남편이고 아들인 사람이었구나. 
독일군은 심장도 없는 살인마같은데 눈에 들어온 가족사진으로 나치도 유대인과 다르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에  더 아프고 슬퍼졌다. 

 

아름답고 슬픈 선율을 같이 공감하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임은 분명한데, 왜 그토록 잔인한 것인지, 왜 그토록 심장도 없는 사람들처럼 구는 것인지, 누가 날 이해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빵과 쨈과 통조림을 딸 수 있는 도구를  그에게 주고 간다. 가슴이 따뜻한  독일장교였다. 저런 사람이 저들에게도 있었다. 
스필만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가보다. 하필이면 독일장교에게 들켜 심장 쫄였는데 다행히 가슴이 따뜻한 인간미 있는 장교라 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장교가 주고 간  쨈을 손가락으로 퍼서 입에 넣는 순간 그는 눈을 감는다. 생존본능만큼 음식에 대한 미각도 삶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느낌이라는 걸 알기에  그 평범했던 소소함이 지금 순간은 극적인 황홀함감을 줄 것이고, 행복함을 줄것이고 살아있다는 순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전쟁중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순간 순간 찾아오는 행복감이 단비처럼 젖셔주기도 한다. 그 이후 독일장교는 그에게 빵을 갖다주고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그에게 입고 있던 장교 외투를 벗어주고 떠난다. 
그리고 그는 "우린 철수해. 신께 감사해라"고 말한다.
마침내 1945년 독일이 패배하고 소련군이 바르샤바로 들어오면서 폴란드는 해방이 된다. 그리고 독일장교였던 호젠펠트는 1952년 소비에크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그것도 은신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절망속에서 울려퍼지는 쇼팽의 피아노 선율과 오직 생존본능만 살아 있는 스필만
독일장교앞에서 혼을 다해 치는 연주하는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아름답거나 예술적으로 들린 게아니라 그의 생존본능에 집중된 소리였다. 

 

전쟁영화로 영웅담을 담아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아니스트의 나약함이지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그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삶을 연주했다. 
세상에 하찮은 목숨은 없으며, 생명을 어떠한 이유로도 함부러 할 가치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찮은 동물도 그렇게 죽이지 않는다.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하찮은 것이라고는 없다.
인간이 인간을 잔인하게 처단하고 뭉개고 하는 행위가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죽음앞에서 인간이면 누구나 다 두려움에 떤다. 살기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본능적으로 발버둥친다.  
전쟁은 끝나고 50만명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딱 20명, 
수백만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만행, 인간이지만 다 같은 인간이 아님을 보여준 영화이다. 전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괴물이 더 무서웠던 영화였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영화를 꽉꽉 채운 OST들이 빛났다.

그리고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장교 앞에서 피아노 치던 스필만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을 갈가리 찢어놓은 독일군에게 들려주는 사람의 소리를 연주한 것 같았다.

 
실존 인물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자신이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써서 <도시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정권의 검열에 걸려 출판하지 못했고, 50년이 지나 <피아니스트>라는 책 제목으로 1998년에 다시 출판하게 된다. 이를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로 제작하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을 연기했던 애드리언 브로디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 29세로 최연소 수상자가 된다.
요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너무 실망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나는 감독과는 별개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로 만들어간 작품이라 생각하고 오직 작품만을 감상하고 여기에 적는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이미 인정받은 작품이기에 ...
 
posted by 해이든 2019. 3. 2. 15:43

허스토리(Herstory)


감독 민규동

영화 허스토리, 위안부 할머니들의 관부재판

 

허스토리는 여자들에 의해 씌여진 역사라고 보면 된다. 
6년동안 정부의 도움없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힘겨운 법정싸움을 그린 영화이다.
1992에서 1998까지 23번의 재판을 통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부 승소를 거두고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국가적 배상을 최초로 인정받은 점에서 의미있는  재판이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끝내 할머니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재판부에 당당하게 맞선 할머니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그들의 피맺힌 삶과 한을 세상에 드러냈다.

 

부산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청구한 소송이었는데, 위안부에 대한 성적 강제는 여성차별 문제로 피해를 방치한 것은 인정하여 피해자에게 각 30만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그들은 공식사과하지 않았고, 일본정부의 항소로 히로시마 고등재판에서 패소하고, 대법원에서 항소를 기각하며 패소가 최종 확정된다.
이긴것도 진것도 아닌 관부재판에서 그들의 인생이 세상밖으로 나오게 한 것이다. 

 

법정에서 이루어진 할머니의 고통스런 증언으로 일본이 그녀들에게 행한 만행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가 그녀들을 더 지옥으로 내몰았다는 걸 알게 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제 이야기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남은 생을 다해 그들이 외친 소리를 찾아 아낌 없는 위로를 건네야 할 것 같다.

국가도 그들을 보호해주지도 않았고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어떻게 이루어냈는지 꼭 기억하기 바란다. 어쩌면 여자대통령이라면 여자들의 고통에 더 귀기울여 줄 거라고 기대했던 믿음을 아주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역사를 왜곡하는 인간들은 일본정부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정부도 그들의 아픔에 소금을 뿌렸다.

 

<허스토리>영화는 극중에서 김희애가 열연한 문정숙변호사가  왜 돈도 안되는 사건에 자비를 털어가며 변론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부끄러워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라는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을 찌르는지 한 번 제대로 이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제와서 다 지난 거로 왜 그러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들에게는 끝난 게 아니었다. 
저들이 사과하지 않는 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겠나? 세상은 안 바뀌어도 할머니들은 제대로 울어보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신들의 죄도 아닌데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삶이 얼마나 비통했을까.

문정숙은 그래서 재판에 이기고 싶어 했다. 이겨야 할머니들 분이 풀리니까,

사과를 받아야 끝낼 수 있으니까, 그래야 할머니들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웃음이 생기니까.

 

정말 명품배우들이 이런 거구나, 감탄에 감탄을 했다.

박순녀 할머니역에 '예수정', 서귀순 할머니 역에 '문숙', 이옥주 할머니 역에 '이용녀', 유소득 할머니 역에 '이용이', 그리고 배정길 할머니 역에 '김해숙'

모든 할머니들의 증언이 가슴을 내리쳤다.

극중에서 김해숙이 열연한 배정길 할머니가 재판에서 한 말은 명대사였다.
"일본을 통째로 준다고 해도 난 싫어. 잘못했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사과해. 지금 기회를 줄게 인간이 돼라..."
"사람새끼라야 사람 말을 듣지, 니들이 아무리 숨겨도 그 눈빛에 죄책감이 다 보인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사과도 안하고 인간이 되지도 않았다. 정말 답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야 상대하고 있지 그말이 정답인 것 같다.

 

최근에 위안부 문제로 문희상 국회의장이 "일왕이 위안부 사과해야 한다."는 발언에 일본의 대응하는 모습이 정말 뻔뻔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무례하다고 말하는 무식하기 그지 없는 아베 총리에게 '정말 인간이라야 말을 하지'가 딱이였다. 말을 알아 쳐먹어야 통하지,  사과하라가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우선시 되어야 할 것 같다. 

 

힘이 없는 나라가,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게 우리의 운명이었고, 그 운명으로 인해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며 성장해왔다. 나를 지켜내기 위해 나라가 존재해야 하고, 나라가 힘이 있어야 다시는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는 것을 몸서리치게 배웠다. 너희들에게.....

그렇다면 일본도 최소한 과거를 사죄하고 반성해야 한다. 정작 힘있는 나라의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치스럽게도,  부끄럽게도  덮고, 숨기고,기만하고, 가리는 것으로 짐승보다 못하다는 걸 온 세계에 드러내지 말았어야 한다. 일본은 수치스러운 나라 일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로 우뚝 설 것이고, 그런 민족성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먼 훗날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에 치를 떨며 살게 될 것이다.
과거없는 현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반성없는 내일이 어쩔 것 같은가?
역사는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기록하고 보전하여 후손들이 나아갈 토대가 되고 뿌리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란 후손의 삶에 본보기가 되어 줄 거울이다.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는 나라로 멈추어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후손들에게 그 더럽고 역겨운 역사를 훼집게 하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지나면 다 잊혀지겠지, 숨기면 되겠지, 거짓으로 왜곡하면 사람들이 믿겠지, 위안부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잠잠해지겠지...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완전히 썩었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2. 02:43

 밀  정


 

감독 김지운

 

 

밀정은 스파이나 첩자를 일컫는 말로, 일제 감정기때 일본경찰은 의열단 내부에 밀정을 심었고,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변절자가 생겼고, 일본 경찰내에도 스파이를 심었다.
적과 동지라는 그 경계에서 이념적 갈등과 생사의 갈등으로 흔들렸을 암울한 시대였다.

보이지 않는 내적 갈등으로 같은 내부에서조차 누가 적인지, 동지인지 끝없이 서로를 의심해야 한다.

일본 경찰은 의열단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지게 끝없이 교란시키며 갈등을 조장했다.

1919년 3.1운동 뒤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암살과 파괴, 폭파라는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심으로 13명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단체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겨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고, 남녀노소,외국인까지 국적을 초월하여 결성된 단체였다. 

그들은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등의 활동으로 일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그 중심에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인 이정출(송강호)이 있고,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원 김우진을 축으로 1920년대를 배경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이다.
처음 영화에 등장한 배우 박희순이 연기한 김장옥은 실제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원이었던  김상옥으로 1923년에 1월 12일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많은 일본경찰을 죽였다.

피신해 다니던 중 천여 명이 넘는 일본 경찰대와 접전하다 몸에 난 총구멍이 열한 개나 된다고 할 정도였고, 얼어버린 발가락을 잘라버리고 마지막 한 방 남은 총알로 자결한 인물이다.

국내에서 폭탄을 제조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프랑스 조계 안에 비밀아지트를 설치하고, 헝가리인을 기술자로 초치하여 의열단에 연계순(한지민)과 부부를 가장한 영국인으로 행세하여 상하이에서 폭탄을 제조한다. 
여기서 한지민이 연기한 연계순은 의열단원이었던 현계옥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리고 공유가 연기한 김우진은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국내에 들어와  전국적인 폭파과 암살을 계획하다 붙잡힌 실제 의열단원인 김시현이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철이 바로 황옥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군을 많이 체포한 공을 인정받아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 경부까지 올라간 인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을 검거하기 위해 상해에 잠입한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로 일본의 밀정이었다.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이  1923년 일제 경찰관이었던 황옥이 의열단 단원과 함께 중국에서 국내로 폭탄을 반입했다가 발각된 황옥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화이다. 

일본의 밀정으로 김우진에게 접근한 이정철은 상해에서 뜻 밖의 인물, 의열단장인 정채산을 만난다. 자신이 검거하려던 사람이 먼저 자신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병헌이 연기한 정채산은 실제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라는 인물이다. 
잡아야 하는 일본경찰과 잡히지 말아야 하는 의열단 단장이 술을 밤새 마시게 된다.
정채산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그 내면의 정체성을 흔들어 자신들의 밀정으로 만들려고 한다. 

변절자에게도, 친일파에게도 조국은 하나다.
일본경찰로서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나라를 잃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마저 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나라를 잃은 암울의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친일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한 핏줄임을 부정할 수 없고, 덮고 덮으려는 양심 그 가장 약한 곳을 흔들어 보려고 한다. 
그도 인간적인 면이 있을 것이고, 자책이나 가책같은 것이 존재할 것이기에 우진과 정채산은 위험한 선택을  감행한다. 
그리고 정채산의 한마디

"어느 역사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정채산을 만난 후 이정출은  마음이 변하고 김우진과 함께 상해에서 제조된 폭탄을 기차에 실어 국내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이정출과 김우진이 함께 경성까지 폭탄을 운반하여 들여 오기는 하나, 의열단 내부 밀정이 일본에게 밀고함으로서 거사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동지들과 함께 붙잡힌다.
이정출은 재판장에서 일본 경찰의 지시로 밀정으로서 의열단에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고 징역을 선고받는다.
아직도 황옥에 대한 의견은 충돌한다. 그를 일제를 위한 밀정이라는 사람들의 의견과 의열단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라는 의견과 이중간접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제를 위한 밀정인지, 이중 간첩인지, 의열단으로서의 독립운동가인지 말이다.
아니면 그냥 조력자로 봐야 하는 지 말이다. 
 
100주년 3.1절을 기념하여 영화<밀정>을 선택해서 봤다.  잘 만들어진 영화이고, 일제 강점기를 견뎌 온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애환과 목숨을 걸고 상해와 경성을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숨가빴고, 내부의 적으로 인해 서로 의지하고 믿고 따라야 했던 동지마저 의심하고 죽여야 하는 그 고통이 어찌 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의열단원과 일제 경찰들의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연출되어 좋았다. 그리고 캐릭터들의 내면연기로 인해  그 암울함에 가슴 한켠이 저리도록 아펐다. 
"대한독립만세" 하며 자신을 향한 총구로 자결하며 나라의 독립을 원한 김상옥투사도, 같은 동지가 밀정임을 알고 그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김시현도, 여자인 몸으로 그 모진 고문으로 고통받다 죽은 연계옥도, 황옥에게 시계를 건네며 "내 시간을 동지에게 맡기겠소." 하던 김원봉도 모두 애국의 역사에 오른 위대한 독립가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 23:47

사랑에 대한 모든 것


감독 제임스 마쉬

이 영화는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윌리엄 호킹에 관한 전기적 성격의 영화이다. 

'The Theory of Everything'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스티븐 호킹역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티븐 호킹 역을 너무 퍼펙트하게 구사했다.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그의 열연으로 그는 오스카가 남우주연상을 선사해준다. 나는 에디 레드메인의 뛰어난 연기력 하나로 그가 선택하는 모든 영화를 감상한다. 

 

우리는 스티븐 호킹이 내 놓은 그 대단한 이론은 잘 몰라도 그를 인간적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은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일대기를 보고 있노라면 정상적인 육체를 가지고도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생을 누린 것 같아 작아지기 시작한다. 

그는 21살에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것도 2년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까지 받고 좌절한다.

근육이 하나씩 위축되면서 물건을 잡는 것도 제대로 서 있는 것도 불가능한 삶이 절망스러웠으리라. 천재적인 물리학도로 촉망받으며 살 수 있는 젊은 나이에 닥친 루게릭병은 과학자로서의 꿈뿐만 아니라 남자로서의 사랑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위도 앗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음도 어눌해져 소통도 어려워지고, 지팡이 없이 한 걸음도 뗄 수 없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불행이 닥치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는 순간 그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잡아주고 사랑해 주는 제인 와일드(펠리시티 존스)가 그의 운명에 뛰어 든다. 
사랑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를 좌절에서 희망으로 돌려 놓는다. 그의 다리가 되어 그의 육체가 되어 그의 옆에서 그가 물리학자로 커갈 수 있게 자신의 인생을 아낌없이 퍼준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사랑으로만 되는 길이 아니다. 

아픈 사람을 옆에서 간호하고 보살피는 것은 정말 지치고 힘든 과정이다.
사랑을 담기 보다는 인생을 담아 냈다고 생각한다. 
2년밖에 못 산다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가 55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2018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가능이라 했다.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인다.
삶은 만들어가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그였다.
나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스티븐 호킹교수를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의 육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기계의 힘을 빌어 인생을 3/4을 살았다 할만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우리가 다 알만큼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로, 물리학자로 세계를 향해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외친다. 
"당신이 장애가 있더라도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신체적 장애가 있더라고 정신적 장애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가 몸소 보여주었기에 우리는 그의 말에 다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그는 폐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 합병증으로 인해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게 된다. 그리고 폐에 파이프를 꽂아 호흡하고 휠체어에 부착된 음성합성시스템을 이용해 소통한다. 그리고 2남 1녀를 두었다. 
2년의 세월에 절망하고 갇혀버렸다면 아마 지금까지 그가 세운 많은 업적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제인 호킹이 헌신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그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만들어 낸 의지가 그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한 그 삶이 그들을 성공을 향해 계속 인생을 움직여 온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의 마음속은 자유로웠고, 그 자유로움이 그를 살게 하고 세상을 바꾸고 기적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을 선사한 제인 호킹이 나는 누구보다 존경스럽다. 
그래서 그들의 로맨스가  더 감동적이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스티븐 호킹은 20년이나 넘게 같이한 제인 와일드 호킹과  1995년에 이혼한다. 
그의 간호사였던  일레인 메이슨과 재혼한다. 그리고 그녀와 11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으나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와도 이혼을 했다.
 
실제 스티븐 호킹과 영화 속 에디 레드메인의 모습을 비교하면 더 소름이 돋는다. 특히 휠체어에 앉아 강연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을 때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에디 레드메인이 스티븐 호킹의 작은 움직임까지 얼마나 섬세하게 연기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만들어진 표정과 동작들인지 연기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란 제목에 그래도 나름 힘을 실어주고 싶다면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과 그 곁을 지킨 제인 와일드의 사랑에 이보다 더한 스토리는 없다고 본다.
스티븐 호킹에 대한 업적보다 이들의 사랑에 더 초점을 두었기에 가능한 제목이다. 

"아무리 어려운 인생이라도 당신이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 18:26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감독 마이크 바인더  

 

 

남의 슬픔에 섣불리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영화였다. 심장이 끊어지는 고통이 어떤 건지, 아내와 딸 셋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솔직히 어떤 건지 그 아픔의 크기가 얼마만큼인지, 그 고통의 기억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

2001년에 일어난 9.11사건, 그 사건으로 정말 너무도 많은 목숨을 앗아 갔고, 또 많은 가정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그 아수라장이었던 곳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삶이 멈춰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살아 있는 것이 더 지옥인 삶을 이해한다고 해도 우린 그 사람이 아니기에 그저 타인일 수밖에 없다. 그  남자가 겪는 고통에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  위로의 손길을 쉽게 내밀지 못한다.
그는 치과의사였다. 가족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항 대기실에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참사를  TV로 보며 직감했다. 저기에 자신의 가족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게 느껴졌다고 ....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숨거나 기억해 내지 않으려고 발악한다. 
사람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망각이 있기 때문인데, 그 기억은 더 생생하게 그를 쥐어짜버린다.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다. 혼자 남은 게 역겨워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

 

그가 찰리 파인맨(아담 샌들러)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켜 혼자 가두고 만다. 
고물 스쿠터를 타고, 귀에는 세상의 소리를 막기위해 헤드셋을 쓰고, 휴대폰에 저장된 음악의 볼륨을 높이며  듣기 싫은 소리를 차단한다
그가 하는 것은 페인트를 사고, 자재를 사서 부엌을 고치는 것이다. 한달이면 몇번이나 고치고 또 고친다.
그게 아내 도린이랑 한  마지막 말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애들이 원하는 것이다. 부엌을 고치자고 했고 그걸 애들도 원했다.

 

그는 일도 안하고 아내의 부모가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는다. 

그가 하는 건 부엌을 고치는 것과 게임을 하는 것이다.

중독이 강한 무언가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이 자신을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자기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사람들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다. 나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집주인은 그런 그를 위해 그가 원치 않는 사람들의 방문을 막고, 청소나 기본적인 것만을 해결할  몇 명의 출입 말고는 그를 혼자 이겨내게 놔두는 것이다.

그러나 장모나 장인은 그런 그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들도 딸과 손녀들을 잃은 피해자인데 사위마저 자신들을 외면하니 속이 상하면서 분노가 생기는 것이다.

어느 날 대학동창인 앨런 존슨(돈 치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앨런 존슨은 치과의사로 그의 사고소식을 신문으로 보고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기억못 하는 찰리 파인맨의 달라진 모습에 당황스럽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밀어내 버린 것 같았다. 

앨런 존슨은 그를 도우려고 정신과 의사를 소개하지만 그 사건을 꺼내려고 하면 난폭해지는 찰리로 인해 난감하다.
그런데도 자꾸 그가 걱정되고 신경쓰여 외면하지 못한다.

그가 다시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정신과 의사 안젤라에게 데리고 간다. 존슨의 도움을 더는 거절하지 않고 찰리는 첫 발을 내딛으려 한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 앞에 가서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한다. 헤드폰을 끼거나 휴대폰 음악볼륨을 높이 올리며 대화를 차단한다.

 

"얘기하기 싫은 걸 얘기하게 하니깐 화가 난다."고 말한다. 
의사는 "이렇게 아무 얘기도 안할거면서 매주 병원에 오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당신은 너무나 소중한 걸 잃은거다. 진심으로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이건 그냥 연습에 불과하다.누군가에게는 꼭 해야한다."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상담실을 빠져나온 찰리 파인맨은 자신을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앨런 존슨에게 그 날의 일을 힘겹게 끄집어  말하게 된다.
 
그 후, 기억을 끄집어 낸 찰리는 너무 고통스러워 한다.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고통스러웠던 그는 결국 권총을 꺼내든다. 그러나 총알이 없다. 그는 거리로 뛰쳐나가 지나가는 차에 시비를 걸고 권총을 겨눈다. 

 

경찰이 가게에 있는 걸 알았던 찰리는 경찰과 같이 총을 겨누며 경찰이 자신을 쏘아 죽여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더 난동을 부려 그들을 자극시키려 했지만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도와주려던 앨런 존슨은 왠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밀어부쳐 이렇게 된 것 같아 미안해 한다. 이 사건으로 정신감정을 받고 재판에 서게 된다. 경찰과 후견인 장인 장모는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기를 주장한다. 

 

그는 외상후 장애와 환각증세도 있다. 그가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주장과 그의 담당의사였던 안젤라는 찰리가 본인 스스로 헤쳐가야 한다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안에서가 아니라 자기만의 틀에 맞춰야 한다고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의 후견인인 장인 장모에게 결정권이 주어진다. 장인 장모는 사위가 자신들과의 왕래를 끊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찰리의 행동이 자신들을 두 번 죽이는 거라며 흥분한다.

그리고 아내의 사진과 아이들의 사진을 재판과정에서 그에게 내보이자 찰리는 귀를 막고 울부짖는다. 결국 찰리를 퇴장시키고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 후견인을 다 불러모아 9,11유가족문제는 나라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가정사라고 말한다. 

 

지금 사위는 매우 힘든 과정을 겪고 있고, 가족이라곤 후견인 장모 장인밖에 없으니 두사람이 결정하되 따님이었다면 정신병원에 넣길 바라는지 잘 생각하라고 한다.

찰리는 그저 상처 받은 사람이다. 정신병원에 보내야 할 사람이 아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그걸 버티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려 하지만 항상 죽은 가족들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집안에 죽은 사람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길을 걷다가도 다른 사람들 얼굴 속에서도 계속 선명하게 보여 고통스러워한다.

장인 장모가 가지고 다니는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고 했다. 자나 깨나 눈에 밟히는 아내와 딸로 인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것도 혼자 말이다. 심장이 뜯겨 나갈만큼 아퍼 본 사람만이 그게 상처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정신병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감당하지 못해 숨는 상처라는 걸 아는 것이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가슴을 파고들어 그가 게임중독으로, 그 기억의 자리가 없는 대학시절로 가 앨런존슨과 공유하는 것이다.

 

허리 끊어지게 웃어도 그 웃음이 아프고, 게임에 중독되어도 몰입할 수 없는 삶, 매일같이 아내와 애들이 원했던 부엌 싱크대를 바꾸어도  용서되지 않고, 자신이 도망갈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더 지옥인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줄거라고 믿어보고 싶지만, 그가 세상에 나와 어울릴 때 가능한 말이지 혼자 저러면 그는 평생 그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남의 아픔을 드러다 볼 수는 있어도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들에게 위로의 손을 내미는 게 또 다른 상처를 낼까봐 두렵다.
너무 어둡고 칙칙하고 메마른 그의 삶이 밝은 세상과 같이 아퍼하는 법을 권하고 싶다. 아퍼도 사람들 속에서 아퍼해주기를 그와 같은 고통을 받는 모든 분들이 혼자 삶을 멈추어 세우지 않기를 바래본다.

결국 'Reign Over Me' 뜻은 나를 통제하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게 9.11 사건으로 잃은 가족에 대한 상처로 찰리 파인맨의 삶이 지배당한 것 같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 00:52
비긴 어게인(Begin Again)

 감독 존 카니

<원스>를 만들어낸 존 카니 감독은 또 한 번 거리밴드를 만들어 녹음실을 뉴욕 거리로 옮겨 감성을 음악에 녹여낸다. 영화  OST 'Lost Stars'와  더불어 'Tell Me If Wanna Go Home', 과 'Like A Food'같은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을 탄생시킨다. 음악만큼 사람들을 하나로 소통시키는 도구는 없다고 본다. 음악만큼 사람의 감정의 질감을 어루만지는 건 없다고 본다. 

음악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독보적인 정서의 도구요. 소통의 도구요. 사랑의 멜로디라 본다. 슬프면 슬픈대로 음악을 듣고, 아프면 아픈 대로 가서 만져주는 손길 같고, 힘들 때 위로가 되는 토닥임 같고, 지친 어깨에 쉼표를 올려주고, 상처 받은 가슴에 쓰다듬어 준다.  잠시 나를 멈춰 세우고 싶은  영화였다. 

노래도 가수를 잘 만나야 빛나듯이 사람도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런 면에서 데이브(애덤 리바인)는 자신이 빛나길 원하는 사람이다. 환경에 쉽게 변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이지만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하면서 변한다. 하지만 사랑마저 환경에 지배당하며 변질되어 가는 것은 너무 안타깝다.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별이 길게 봤을때 더 고마울 수도 있다. 사랑보다는 덜 변덕스러운 열정이 이 영화안에서 우리에게 좀 더 나은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별할 때 여기가 끝인 것처럼 슬퍼한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 이의 눈에는 또다른 시작이다.
이별이 사랑의 종착지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의 시작점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냥 한 사람이 지나간 것이다. 내게 인연이 아니었던 사람, 환경에 너무 쉽게 변질된 사랑, 유통기한이 없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마셔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었다. 인연이 아니었던 사람이기에 어짜피 스쳐갈 바람인 것이다.

 

사랑에 눈이 가려 못 보고 있었던 것일뿐이다. 환상에서 깨어 현실로 나온 것 뿐이다. 남자보는 눈이 모자른 것으로 발길을 돌려 세워 다시 비상하면 된다. 여기가 다시 시작되는 곳이다. 
데이브의 성공으로  사랑을 변한 게 아니었다면 그의 오래된 연인으로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역시 그의 음악적 파트너로 같이 행복했을 지 모른다. 

 

정상에 올려가고 보면 자신이 그 곳까지 올라간 여정은 까맣게 잊고 자신의 자리에서의 화려함에 도취되기 싶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도 망각하고 큰 것을 보느라 작은 걸 놓치고 만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게 만들어진 걸 잊게 된다.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못느끼는 것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 길게 봤을때 불행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 나는 믿고 있는 사람이다.
 
오랜 연인이었던 데이브가 성공하여 메이저 음반회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같이 뉴욕에 오게 된 그레타,
오직 데이브만의 청으로 결정한 뉴욕행이었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이며 데이브의 작곡가로 서로 연인이며 음악적 파트너로 함께 생활한다. 

 

그저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레타는 그가 점점 스타로 성공해 감으로 혼자있는 시간이 늘어간다. 지방공연으로 바쁘지만 그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행복했다.
순례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오랜 연인이었기에 눈빛만 봐도 그가 만든 데모 가사만 들어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그레타는 그에게서 떠나온다. 사랑으로 데이브를 따라 온 뉴욕인데, 대책없이 무작정 나와 버린 그녀는 길거리 버스킹을 하고 있는 친구 스티브(제임스 코든)을 찾아간다.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친구, 또 한번 사랑보다 우정이 주는 믿음에 조용히 박수치고 싶어진다. 그는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지만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없다. 그래도 스티브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다. 힘든 그녀를 그저 편안하게 맞이해 준다.

그레타 혼자 집에 두기 싫었던 스티브는  자신이 노래하는 클럽에 데리고 간다. 우울한 그녀가 노래할 수 있게 무대로 끌어올린다.

담백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 같은 멜로디에 가사에 밥처럼 올라가 있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음악이 다 내꺼처럼 감기는 것은 아니다. 날 감동시킬 음악이 있듯이 사랑도 그러하다. 
실패한 선곡으로 귀를 혹사시키지 말고  원하는 곡에 내 귀를 맡기면 그 귀를 통해 내 마음의  정서에 단비를 내려준다. 
사랑이라고 다 뜨겁지 않고, 사랑이라고 다 아름답지 않다. 배려가 있기에 그 사랑이 지속되는 것이다.
수량화할 수 없는 사랑에 완벽함이란 없다. 그건 오직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질감같은 것이다. 
 
음악이 주는 것은 사랑이 주는 것보다 강하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기교없이 기타하나로 자신의 색을 담아내는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음반 제작자 댄이다. 그는 나름 왕년에 잘 나가던 음반제작자였지만 지금은 가진 건 아무 것도 없고,  실패의 끝자락에서 좌절하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 상처의 끝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댄(마크 러팔로)은 아내의 외도로 아내와 딸과 떨어져 혼자 조그만한 빌라에서 남루하고 살고 있으며,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마저 쫓겨났다. 주머니는 맥주값 한 푼 없이 빈털털이지만 음악적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다. 댄은 그녀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음반을 제작하자고 제안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그녀가 마음을 돌리고 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음악적 열정은 있는데 경제적인 제작비가 받쳐주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경제적으로 뒤따라주지 않으면 고생하게 되어 있다. 음악이 감이나 실력으로만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번번히 실패만 하던 댄에게 회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댄은 뉴욕거리를 무대로 데모테이프를 만들기로 한다. 시련은 또 다른 인연으로 열정에 불을 당겼다.

 

 
음반을 제작할 돈이 없는 그는 뉴욕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연 그대로의 소리와 꾸미지 않은 그레타의 목소리를 담아간다. 그리고 그동안 잘못 살아오지 않았는지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음악은 서서히 옷을 입어간다. 
녹음실에서 기계로 담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의 웃는 소리, 지나가는 차소리 모든 자연이 주는 소리가 악기가 되어준다. 뉴욕 거리 곳곳을 배경으로 .현장의 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사랑, 예술, 인생이 하나로 모이게 된다.

 

이 영화는 뉴욕의 거리마저 우리에게 여행가이드처럼 안내한다. 뉴욕지하철, 센트럴파크 호수 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옥상, 차이나타운 등 
가면에 가려 덪입혀진 스타의 음악처럼 웅장하지 않아도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도시의 소리와 그들의 진심이 담긴 소리는 그 어떤 합주보다 빛났다
사랑, 우정, 진심, 인생, 실패, 좌절, 기쁨 그 모두를 담아내는  뉴욕거리와 음악이 만나 생동감이 넘쳤다.
 
사는 건 별 거 없다. 그래 스타가 되지 않아도 이렇게 살면 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열정 불태우며 주위사람들의 손 함부러 놓지 않으며 
그저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자체로 주위와 어울리며 사는 것이  행복한 것임을 알게 된다. 

 

높은 곳에 올라 화려하게 산다고 마음까지 화려한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기초공사가 차곡차곡 쌓여간 건물이 오래가듯, 긴 세월 같이 한 가족이 말하지 않아도 음악으로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 사람사는 것 같아 좋았다.
그레타, 댄, 가족 ,친구들이 진심을 다하여 엮어낸 음악은  서로를 이끌어 주며 하나가 될 수 있는 음악으로 관계들을 엮어 준다.

 

댄은 그렇게 멀어지던 아내와 딸과의 거리도 음악으로 좁혀지고,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노래로 전해진다.

그레타가 추구하는 음악과 댄이 추구하는 음악이 어느 정점에서 만나 불꽃이 된다.

음악으로 치유된 그레타는 이제 데이브에 대한 마음을 치유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자신의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원스>에서도 화려한 무대가 아니어서 좋았다. 그저 어디서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이야기라서 그들이 들려주는 노래라서 좋았다.

 

< 비긴 어게인>도 뉴욕거리가 무대가 되어주어 더 정감어렸다. 티켓을 예약하고 콘서트에 가서 듣는 것이 아니고 문득 지나다 음악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같이 공감하며 보답으로 동전을 넣어주고 싶은 그런 음악이라서 좋았다.
posted by 해이든 2019. 2. 28. 15:20
사랑의 순간

 감독 존 메이버리 

 
영국 웨일즈 출신의 시인이자 방송작가였던 딜런 토마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종잡을 수가 없는 이야기이다. 사랑을 위장한 우정인 것인지, 우정을 포장한 사랑인 건지, 
사랑의 가장자리를 메우는 질투인지, 질투로 포장된 사랑인지 참 헷갈리게 한다.

때는 1940년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중이다. 런던 지하 방공호에서 베라 필립스(키이라 나이틀리)가 돈을 벌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윌리엄 킬릭(킬리언 머피), 그리고 다시 만난 어릴 적 친구인 딜런 토마스(매튜 리즈), 그의 아내 캐틀린 토마스(시에나 밀러) 

총 4명이 끌어가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사방으로 번진다. 마음은 움직이며 갈등을 유발하고, 그 갈등속에서 욕망과 질투와 사랑과 상처로 얽힌다. 
전쟁중에도 사람들은 삶을 나름 즐기고, 방공호에서는 춤과 노래가 흐른다. 그리고 사랑도 꽃피운다. 
시인인 딜런과 베라는 어릴 적 웨일즈에서 자란 친구이다.  딜런은 오랫만에 만난 베라에게 첫 눈길에 별들에 불을 지른 듯 고뇌한다. 딜런은 이미 캐틀린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쓴다고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바람둥이이고, 생활능력은 없다.
아내 캐틀린이 딜런을 찾아오고 베라를 소개시켜준다. 그러나 여자의 직감은 첫 눈에 딜런이 베라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딜런과 캐틀린은 잘 곳이 없이 여기저기 전전긍긍하다 혼자 살고 있는 베라의 집에 얹혀 지내게 된다. 가운데 커텐 한장을 사이에 두고 베라와 딜런, 캐틀린이 동거하게 된다. 

베라가 자고 있는 걸 정신 나간 듯 바라보고 있는 딜런, 그런 딜런을 바라보는 캐틀린은 "그 몸 내게 돌려줘."라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시를 써주지 않고 베라를 향해 있는 딜런에게 상처 받지만 쿨한 척 베라와 우정을 나눈다. 

실은 딜런과 베라는 15살에 첫 경험을 나눈 사이이다. 
어릴 적 순수하게 아무 것도 모를 때 한 것이라고 하지만 베라나 딜런의 표정은 친구이상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묻어난다. 
베라에게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그녀에게 끝없이 애정을 표현한다.
그는 군인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쟁에서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를 밀어낸다. 

하지만 윌리엄은 사랑하는 동안 최선을 다할 것이고 절대 나쁜 일은 없을 거라고 그녀에게 구애를 한다. 절대 내 말에 상처 받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결국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베라의 집에 윌리엄이 와 사랑을 나눈다. 베라를 원하는 딜런은 윌리엄이 탐탁치 않다. 딜런은 '거짓 불빛에 발하는 이에게 그녀가 사로잡혔다'고 시를 지어  질투와 시기로 문장을 만들어간다.

캐틀린은 그녀와 딜런의 첫 경험을 알고 있고, 베라는 딜런과의 첫 경험은 추억으로만 간직할 뿐  딜런을 돌려받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캐틀린에게 말한다.

캐틀린은 섹스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난 이해하지만 윌리엄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윌리엄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딜런과의 첫 경험을,

윌리엄이 부대배치를 받아 전쟁터로 가야하고 베라와  결혼을 하게 된다.
베라를 보는 딜런의  끈적한 눈길을 캐틀린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역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딜런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자를 갈구하는 남자의 눈빛과 사랑을 하는 여자의 눈빛은 쉽게 숨겨지는 그림이 아니다. 

윌리엄은 악몽을 꾼다. 그건 그가 꿈을 꿀만큼 딜런과 베라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질투로 쌓여간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내 친구일거야."라고 말하지만 캐틀린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 윌리엄은 베라에게 사랑하냐고 묻자 "살아 돌아오면 말해줄게"하고 그를 떠나 보낸다.그는 불안하 마음으로 전쟁터로 떠난다.

그렇게 셋은 남고 윌리엄은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임신인 걸 알게 된 베라는 더 이상 가수를 할 수 없었다. 아무 능력이 없는 딜런과 캐틀린에게 고향 웨일스로 가서 살자고 한다. 자신에게 빌붙어 살고 있는 그들을 그녀는 끌어안았다. 우정이었든 사랑이었든 웨일스로 이사를 가서 이웃으로 같이 산다.

딜런은 정말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역겹기까지 했다. 최소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로서, 아내를 먹여 살려야 남편으로서 책임지고 살아야 정상인데 베라의 도움으로 생계도 책임지지 않고 시나 적으며 살았다.  

 딜런은 캐틀린의 존재가치를 자기 재능을 키우는 토양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요리하고, 애 낳고, 청소나 하는 존재로 갖다 놓은 것 같다. 그것뿐이라고 말한다.

캐틀린이 베라와 딜런 사이의 관계에서 왜 견디고 사는지 나중에는 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챙겨주는 베라를 그녀는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다가도 한 편으로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세 사람이다.

정말 윌리엄을 사랑하고 또 캐틀린을 걱정하고 우정이었다면 딜런에게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유혹의 눈길을 철저히 차단해야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계속 미묘한 관계들이 이어지고 시를 쓴다고 벌이조차 없는 딜런으로 인해 캐틀린은 돈벌이용으로 뭇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돈 한 푼 못 벌어 아내가 그 짓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다닌다.

시인이란 허울을 쓰고 삶을 먹어치우는 모습이 정말 이 두 여자에게 딜런은 기생충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부끄럼도 없이 캐틀린이 딴 남자랑 하니 나도 딴 여자랑 잔다고 베라에게 말하는 거 하고는?

베라는 딜런에게 캐틀린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거야. 돈벌이로 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캐틀린은 누구 앤지 모를 애를 임신하고 중절 수술비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고, 베라는 기꺼이 그녀에게 돈을 대준다. 

 웨일즈에서 베라와 캐틀린은 아이를 키우며 캐틀린은 베라에게 의지하고, 베라는 외롭고 능력 없는 그들에게 돈을 대주며 살아가고 있다. 남편 없이 애를 키우며 편지해도 답장도  없는 윌리암으로 인해 그녀 역시 삶이 외롭고 불안했다. 그래서 캐틀린의 존재가 힘이 되고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라 여겼다.

남녀사이에 여자친구가 끼어있는 그림은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 그것도 예전에 감정이 있는 사람이고 현재도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면 말이다.
경계를 허물것이 아니라 완벽한 차단을 했어야 했다.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고, 서로를 배려하고, 상처주지 않는 법이다. 자신들의 그 경계없는 감정이 캐틀린과 윌리엄에게는 상처였다. 

그렇게 되지 않길 빌었지만 베라와 딜런은 관계를 하고 만다.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것이다. 어떤 변명을 갖다 대도 이해받기 힘들다. 난 딜런과 베라에게 좋은 감정을 내어 줄 수 없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베라 역시 후회하고 미안해서 문을 두드리는 캐틀린에게 떳떳하지 못해 뒷걸음질 치며 집에 없는 척 숨은 것이 아닌가.

 

마을 사람들이 윌리엄의 아들마저 딜런의 아이라고 오해할 정도라면 자신의 행동에도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고, 딜런 역시 저런 상태로 두 여자의 삶을 갉아먹으면서 시를 쓰는 것이 너무 위선스럽고 화가 났다. 그런 영혼에서 어떤 단어를 내 뿜어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윌리엄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많이 피폐해져 너무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안아주지도 않았고,그녀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담보로 고통스럽게 보내 온 월급이 바닥이 난 것에 좌절하고 분노했다. 자신의 월급으로 엉터리 시인을 돌봐준 것에 자신의 아들 로왓마저 딜런의 자식아니냐고 뱉어버리고 만다.

"저들은 내 친구야, 돌봐 준 것뿐야. 굶길 순 없잖아."

사랑보다 질투에 힘을 더 실어준 건 베라의 잘못이라고 본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윌리엄은 술에 취해 딜런의 집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윌리엄은 자신의 아들을 안아주고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총을 난사한 문제로 그는 법정에 세워지고 재판을 받게 된다.

캐틀린마저 베라가 딜런하고 잔 사실을 알고 베라에게 등을 돌린다. 이미 물은 엎질러 졌다. 딜런과 잔 사실도 총을 난사한 사건도 말이다. 수습해야 할 일만 남았다.

베라는 딜런에게 윌리엄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윌리엄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딜런은"날 죽이려고 했던 게 분명합니다. "라며 불리한 증언을 한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동안 베라의 도움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나올 수 있지?

배신감에 베라는 "왜?"라고 묻자 딜런은 "넌 내 별이었어 예전처럼 살 수 있어. 방해물을 제거했잖아."

그러자 그녀는 "캐틀린과 헤어지라고 나랑 살아"라고 말하자 딜런은 아무 말도 없다.

"넌 그 해변의 15살 소녀를 원하는 거야. 지금 내가 아니고, 네가 가진 건 머릿속의 이야기뿐이야. 단어들 "

지금 현재의 베라에게는 윌리암뿐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감옥에 보내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진작에 보여줬어야 했다. 두 사람의 입장이 이렇게 다르다는 걸, 마음의 중심을 제대로 잡았더라면 윌리암도 캐틀린도 상처받지 않고 사랑도 의심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추억마저 쓰레기가 되고 외면하게 되었다.

어쩌면 베라와 캐틀린에게는 남자 없는 세상이 더 낫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 감정은 순간이고, 외로움은 영원했다. 그 외로움의 공간을 베라와 캐틀린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사랑했던 것 같다. 캐틀린의 말처럼 "섹스는 아무 의미 없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근질근질해서 긁어야만 했다."

 딜런은 캐틀린 인생에 외로움을 지독하게도 짙은 안개처럼 만들어 냈다. 부부에게는 서로 함께 살아갈 사랑이 필요하다. 섹스로 긁어대는 것 말고 책임 있는 사랑말이다.

어쩌면 캐틀린을 더 돕고 의지하고 있었던 베라였지만 혼자 남편을 기다리던 근질근질함에 딜런의 품에 안긴 것이 잘못이었다. 그건 사랑과 다른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세상도 그렇게 봐줄 거라는 건 아니다. 

자신이 딴남자랑 관계를 해서 돈을 벌든 말든 질투조차 가지지 않는 딜런보다 자신을 위해 돈을 내어주고, 아프면 위로해주는 베라가 자신에게 거짓말한 것이 더 화났을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나쁜 넘은 딜런이다.
이런 사람이 사랑을,  인생을 문장같은 것으로 적는 걸 시라고  낭독하고 싶지 않다. 

캐틀린과 딜런이 떠나는 날, 베라는 딜런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캐들린에게 다가간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항상 외로움에 응해주던  베라의 미소를 보고 캐틀린이 한 말이다.

"바로 그 미소였어."

그리고 베라가 캐트린에게 진심을 넘긴다. 
"상처 줄 생각 전혀 없엇어"
"그랬을거야. 외로워 마"

"너도,  외로워 마."

세상에서 여자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사람은 남편이자 남자이다. 그들은 아내를 자신의 토양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아내의 내면의 외로움에 답해준 적이 없다. 자신들만 세상에서 인생에서 고통받는다는 착각 속에 잘난 척하며 살기 바쁘다.

어쩌면 그녀가 남편의 월급을 탕진해가며 도와준 것은 딜런이 아니라 캐틀린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 줄 존재가 캐틀린이었고, 캐틀린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던 베라의 미소로 외로움을 채우며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중간에 딜런이란 줄이 있었지만 어쩌면 딜런 없이 그들은 흔들림 없이 지냈을지도 모른다.

캐틀린의 말처럼 섹스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남자들에겐 섹스의 의미는 달랐다. 그래서 아내의 사랑에 답하지 않고 아이마저 부정했던 윌리엄이었고, 딜런 또한 시적인 망상에 잡혀 원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남자는 과거가 중요할 지몰라도 여자는 현재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고 하지만 여자는 마지막 사랑만 간직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