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8. 12. 16. 10:59

The Post

스티븐스필버그 감독과 배우 메릴스트립과 톰 행크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크게 흥행을 거두지 못했다.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조합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미국 정부가30년간 감추어온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부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는 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68년 5월까지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로 다니엘 엘스버그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 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주요 부분만을 제공하여 언론에 누출시킨다.

뉴욕타임스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하였고 미국 전역에 보도된다.

1972년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던 닉슨행정부는 국가의 최고 기밀서류가 폭로되고 계속 연재되자 곤경에 빠지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둘러싸고 그 정당성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닉슨은 다니엘 엘스버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미국의 안보이익에 치명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언론 보도금지 가처분  소송을 하는 초유의 사태로 번지게 된다.

이에 경쟁언론사인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인 벤(톰행크스)'펜타곤페이퍼'의 입수에 사활을 건다.

'뉴욕타임스'는 '워상턴 포스트'지와 연합하여 법원의 금지명령에 대항해 15일동안 법정투쟁을 벌였고 그 기간중 연재기사는 중단되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메릴스트립)은 남편의 죽음으로 언론사를 상속받은 최초의 여성발행인으로서 정권의 위협에 맞서 이 엄청난 정부기밀을 밝힐 것인지, 덮을 것인지 자신의 회사인생을 걸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닉슨대통령은 권력을 총동원하여 그녀를 위협하고 4,000여장에 달하는 기밀문서를 손에 넣은 벤은 미정부가 개입하여 베트남전쟁을 조작한 사건을 세상에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바꿀 언론인으로의 사명감과 경영인으로 회사를 살려야 하는 책임감 또한 그녀의 어깨에 달려 있다.  캐서린의 결정을 기다리는 순간들, 모두를 초조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언론사가 언론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지만, 그들도 권력과 자본앞에서 살아내야 하는 기업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언론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런데 그 펜을 잡는 것은 사람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지도 기업이다. 언론사라는 기업. 그래서 여사장인 캐서린의 갈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과 진실앞에서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역을 해 낼 수 있는 메릴 스트립의 힘은 국가의 권력과 싸워야 한다.

압박하고 협박하고 위협하고 들어오는 권력앞에서 하나의 기업은 어쩌면 너무 나약한 토끼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론인이 아닌 기업인으로서  살아내려고 하면 진실을 덮어야 하고, 언론인으로 사명감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우리도 겪어왔다. 국가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려는 추악한 얼굴을, 국가권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진실을 묻어가기 시작한다면 민주주의는 어둠속에서 잠자고 만다.

언론이 정의를 위해 연대를 한다면 권력이나 자본에 침식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권력과 자본의 꼭두각시 노릇으로 전락해 버리면 우리의 삶은 어두운 터널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랜 세월 군부독재하 권력에 눌려 감추어진 진실이 이제야 세상밖으로 나오고 있다.

 권력의 약빨이 떨어진 것이겠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언론인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6대 3의 판결로 양 신문사에게 문제의 보고서를 다시 게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고 이 보고서의 공표를 제한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대법원으로부터 나란히 승소판결을 받고 법정을 나설 때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진실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언론사들이 가짜뉴스가 아닌 권력의 힘이 아닌 펜의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

"언론은 보도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그걸 포기하는 건 언론이 아니다."

캐서린(메릴스트립)은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택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공식표어처럼 '민주주의는 어둠속에서 죽는다'라는 마음으로 진실을 덮지 않기를 바란다.

기자들의 폭로가 쌓여 언론들이 진실에 대한 연대만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는 너무 미국의 시선 안에 가두었다.

픽션이었다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내주었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룸에 있어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시선이 아닌 베트남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장면도 집어넣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개인적으로 있다. 

미국 언론과 국가권력의 싸움으로만 비추어져서 아쉬웠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2. 2. 18:47

 

저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2005년 조 라이트 감독으로 인해 영화로 탄생했다. 영상과 배우들의 감정선이 살아 있고 캐릭터들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출연했음에도 각각의 인물들이 꽤 묘사가 잘되어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여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상을 잘 그린 연애소설이다.
당시 영국의 계급은 귀족과 대지주계급으로 나뉘고, 시골의 지주(젠트리) 사회를 그렸는데, 그 젠트리 계급에서도 재산정도에 따라 큰 격차가 있었다.


영국의 시골마을 롱본, 그곳에 시골의 지주인 베넷가에는 딸이 다섯이나 있었다. 당시 딸들에게는 상속권이 없었고, 지참금이 전부였다.
연수입 2000파운드에 불과했으나 지주계층은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겼고, 그렇게 좋은 가정환경이 아님에도 딸 다섯과 베넷 부인이 뒹글 뒹글 모여 하루를 보내는 장면이 이해가 갈 듯하다.


직업을 가진 중류계급은 자산이 많아도 낮은 신분 취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군인인 위컴이 많은 재산을 상속한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이유였다. 또 상속권이 없던 여자가 부유한 결혼상대를 찾아야 했던 것이었다. 


 베넷 부인은  자신의 딸들을 재산이 많은 남자에게 결혼시키려고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롱본에 찰스 빙리가 오게 되면서 베넷가의 집안은 분주해진다.
연수입 5000파운드의 재산을 가진 찰스 빙리가 베넷가의 첫째 딸 제인을 맘에 두고 있다.

언니 제인은 아름답고 차분하며 사려깊으나 말 수가 적고 감정표현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다. 

다아시는 빙리의 친한 친구로 자신의 친구가 제인과 결혼하는 것을 막는다. 베넷 부인이 욕심도 많고 경박해 보였고, 빙리에 비해 제인이 빙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베넷 부인이 극성스러움이 오히려 딸들에게 흠으로 비추어지고, 잘 표현하지 않는 제인의 성격 탓에 그리 생각할 수 있다.

다아시는 연수입이 1만파운드의 재산이 있는 명문가이다. 상냥한 빙리와 유쾌하고 잘생긴 위컴과 대조적으로 다아시의 차가움과 과묵함이 오만으로 더 비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아시가 가진 계급에서 오는 오만한 구석도 분명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꿈 꿀 상대임은 분명 하나, 엘리자베스는 오만한 그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감을 드러낸다.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재산이 없는 아가씨들이 결혼이 유일한 생계대책이 된 시대에 맞서 사랑을 갈구하는 재치 있고 당찬 성격의 아가씨이다. 그녀는 다아시가 거만하고 차가운 듯한 인상으로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말과 다르게 그에게 자꾸 신경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넷가를 업신여기고 기죽이려 하는 캐서린 부인 앞에서도 따박따박 기죽지 않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진면모를 볼 수 있다.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교양 없는 어머니와 자매를 들먹거리고, 자신의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계급에서 오는 당당함과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편견이 분명 그들에게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함으로서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와 편견이 있었음을 인지한다.  그렇게 서로를 가로막는 것이 편견임을 조금씩 알아가며 제대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위컴과 리디아의 도피로 베넷 가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기로에 서게 되고, 다아시는 그녀 모르게 조용히 위컴에게 막대한 재산을 주고 그 둘을 결혼에 이르게 한다. 그녀를 위한 행동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위컴을 싫어하면서도 말이다.

캐서린 부인은 다아시의 숙모로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소유한 자로 자신의 딸과 다아시를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나중에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약혼을 청했다는 소문을 듣고 한밤중에 베넷가로 찾아와 엘리자베스에게 모멸감을 안겨준다.
다아시는 마음이 깊고 배려가 많은 예의 바른 사람이다. 이게 엘리자베스가 새로 본 다아시의 진면모이다.

편견이란 장치를 치우고 나니 보이는 것이다.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나에 관련이 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가진 자의 오만과 없는 자가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허영을 지녔다고 보면 서로를 향해 있는 오만과 편견은 너무 지극히 당연하게 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청혼한 것은 오직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설사 그에게 오만함이 넘쳐 흘려도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갈 수 있다면 다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다.

캐서린 부인의 모멸감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다아시를 향한 배려 때문에 견디었다. 자신이 가진 편견이란 장치가, 오만이라는 도구가 서로를 얼마나 비툴어진 각도로 바라보게 하는지를 알게 한다.

오만과 편견이란 도구는 사랑의 장애물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을 얻는 일,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진실되게 갈구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라고 본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의 입에 제대로 겪어보지 않고 가지게 되는 편견에 우리는 얼마나 가깝게 가 있는가,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랑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억눌려 있던 그 시대의 여인들과 다르게 다아시의 청혼앞에서도 자신이 자신의 가족이 다친 자존심에 대해 당당하게 거부하는 그녈 보면서, 캐서린 부인 앞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캐서린 부인을 당혹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비어내는 모습으로 당시 여성들이  대리만족 같은 걸 하지 않았겠는가?

posted by 해이든 2018. 12. 2. 13:54

'나왈 마르완'이란 여자의 운명을 통해 전쟁이 주는 참혹함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 영화였다.

수많은 전쟁영화를 접했고,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참담한 고통의 무게를 알고 있었지만 패닉 상태에 빠졌던 영화는 이 영화가 첨이었다. 정말 충격이 크면 '아무 생각이 안 드는구나'를 실감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감상평을 짧게나마 쓰는 나지만 이 영화는 감상평이란 말 자체를 완전히 가두어 버렸다. 

나왈 마르완이란 여자가 사망하고 쌍둥이 남매에게 그 유언장을 공개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왈 마르완은 남매에게 두 통의 편지를 남긴다. 

한 통의 편지는 아버지를 찾아서 전하고, 또 한 통의 편지는 형을 찾아서 전하라. 그걸 전하기까지 자신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이었다.

쌍둥이 남매에게 아버지는 죽은 존재였고, 오빠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사실인데,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그 사실을 유언으로 남겼다.

쌍둥이 남매는 엄마가 살았던 흔적을 수소문하기 위해 중동으로 간다. 점점 과거속으로 들어갈수록 전쟁 속에서 인생이 그을린 한 여인의 운명과 마주한다. 바로 엄마!

 엄마, 나왈 마르완의 첫 출산 "형"

70~80년대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내전이 있었던 때다. 
기독교인 집안이었던 나왈 마르완은 이슬람교의 난민과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자 도망가려다 그녀의 오빠에게 사랑하던 남자가 살해당하고 만다. 

그 당시 내전으로 인해 가문을 더럽히는 일로 여겨 살인으로 죽여버려도 책임을 묻지 않았던 때다. 나왈 마르완은 임신중이었다. 가문을 더럽힌 일로 그녀의 아이는 낳자마자 고아원으로 몰래 보내진다. 

이 아이가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될 오빠인 것이다.

엄마, 나왈 마르완의 두 번째 출산 "쌍둥이 자매" 

나왈은 시간이 흘러 아이를 찾기 위해 고아원을 찾아갔지만 고아원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고아원 아이들이 보내졌다는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기독교 무장단체를 만나게 된다.

같이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몰살당하고, 버스 안에서 어린 아이라도 구하려 했던 그녀의 노력은 무참히 짓밟히고 기독교인이었던 그녀만 살아남게 된다.

불난 버스 옆에서 그녀는 어릴 적 이념의 차이로 사랑했던 남자가 죽임을 당해야 했고, 이슬람교의 피라는 이유로 고아원으로 보내야 했던 자신의 아이를 상기했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그녀는 레바논 기독교인의 핵심인물을 암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감옥으로 보내져 고문 기술자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고, 감옥에서 쌍둥이를 낳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과거와 운명 앞에서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알게 된다. 자신들의 탄생이 감옥에서 고문기술자에게 강간당해 생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전해졌다. 이 영화는 정말 믿기 힘든 결말로 내 뇌리를 강타했다. 충격적인 반전이 이거였다면, 

나왈 마르완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가?  진실이 아무리 사랑이라 해도 가끔은 몰라도 되는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 진실이 이 두통의 편지에 있다. 난 한동안 이 영화를 아무에게도 권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끄집어내서 볼 생각은 없다.  진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나왈 마르완의 유언이 남매에게 아버지에게 형에게 너무 잔인한 진실이라고 여긴다.

 쌍둥이 남매의 아버지 "고문 기술자"

진실이 너무 버거워 외면하고 살았으면서 왜 죽고 난 후 그 진실을 내어 놓았을까?

‘... 그 진실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너희의 몫이지만, 그 진실이 내가 받아들였던 현실 그 자체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단다. 그리고 그 진실로부터 너희들이 나왔다는 것 또한 ........'

'너희를 달랠 시간을 드디어 갖게 됐어. 너희들의 탄생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그 배경은 위대한 사랑이었단다.'

그녀가 유언으로 진실을 내어놓는 이유가 이 마음이더라도, 묻어야 되지 않았을까?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2. 1. 20:11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닭요리 책을 쓰는 남편 루, 그는 매일같이 닭요리를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의 아내 마고, 둘은 결혼한 지 5년 차 부부이다.

결혼으로 인해 서로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관계로 살아가고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 서로에게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의 생활 그 자체로 어느 부부와 다를 것이 없다.

어느 날 마고는 여행길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누구에게나 만남은 열린 관계에서 찾아드는 손님 같다.

하지만 마고는 열린 사랑을 할 수 없는 결혼한 여자다. 마음이야 움직일 수 있겠지만, 이성을 작동시켜야 한다.

남편 루는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샤워를 할 때마다 마고 몰래 찬물을 끼얹고 도망가는 장난기 많은 남편이었다. 갑자기 가슴에 침입한 다니얼로 인해 마고는 남편에게 죄의식을 갖는다. 누구나 권태기를 겪는다.

외식하는 부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아무 말도 없이 먹는 남편에게 뭔 말이라도 하라는 마고와 대화를 위한 대화는 싫다는 루,

그럼 "왜 외식하냐"는 마고의 물음에  "그냥 맛있는 것 먹으려고"라고 말하는 루,

불같은 사랑도 결혼을 하면 그저 흐르는 물처럼 감정도 흐른다. 

여자는 항상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한다.

남편과 집이 아닌 분위기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하는 건 먹는 것만이 아니다.

분위기 있는 곳은 여자들을 설레게 하고 연애하는 기분이 들만큼 센티해진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신을 설레게 했던 남자로 앉아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화도 하고 낭만도 건지고 싶은 것이다.

남편 루는 그저 집에서 있는 것처럼 먹는 것에 열중한다.

기껏 이쁘게 하고 나와 이렇게 분위기 있는 곳에 와 있는데,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같이 살고 다 아는데 뭔 얘기를 해? 뭔 대화를 하냐고, 그런 것이겠지! 여자는 알면서도 말로 표현해 주는 걸 좋아한다. 관심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표현에 약하다.

여자와 남자의 다른 언어, 다른 방식의 표현이 가끔씩 감정을 고장 나게 한다.

결혼이 사랑의 종점은 아니다.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다.

물이 식었다고 물이 아닌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도 식었다고 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이지 변한 것은 아니다.  설레는 가슴만 가지고 평생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에 맞게 감정도 소비되는 양이 적어질 뿐이다.

부부

끝내 마고는 남편에게 대니얼에게 마음이 가버린 것을 고백하고 남편 루는 상처를 입는다.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온다.

짧고 강렬하게 오기도 하고, 무책임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여우비처럼 잔잔히 적시기도 한다.

루는 사소하게 마고의 삶에 사랑을 심고 있었다. 그녀도 모르지 않는다.

대니얼의 짧고 강렬한 사랑에 그녀의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본다.

"가끔 길을 걸을 때 보도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떨어지면 그럼 그냥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어른이니까 순간적인 감상에 빠져서 울면 안 된다고 마음을 먹어요."

마고 역시 순간의 감상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나름 어른이니까 책임질 수 있는 이성을 잡고 있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감정이 물을 달라고 요구하는데 물을 주지 않고 계속 햇살을 비추어 준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걸 결핍으로 안고 있다가 다니엘에게 자신의 흔들림을 드러내고 만다.

결핍을 보여주고 만다. 남편 루가 그녀의 갈증을 눈치채고 채워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부 사이에 뭔 용기가 필요하냐고 묻는 루에게 마고는 끝까지 용기를 못 냈고, 루는 아내를 다 안다고 자만했다.

부부 사이라고 같이 있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다. 그건 아니다.

놀이기구를 탈 때는 짜릿하다. 하지만 순간이다. 계속 놀이기구를 타고 있을 순 없다.

대니얼은 지금 루에게 놀이기구가 아니었을까? 감정의 결핍은 그 누구와 해도 생기게 되어 있다.

사람이 채워줄 수 있는 감정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랑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걸 너무 과대 포장해 놓은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이상이고, 결혼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루와 마고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들의 애를 태우던 루의 누나의 한마디가 어쩌면 결혼을 대변해주는 말 같다.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다 잘될 것 같지? 망친 사람은 너야. 길게 보면 말이야. 인생엔 당연히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울 순 없어. "

감독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다 내보낸 것 같다.

인생의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굳이 비워놔도 되는 걸 꼭 꼭 채워 넣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새 것도 헌 게 되니까, 새 것도 바래고, 헌것도 원래 새 거였다.

다 끝난 놀이기구처럼 허무할 뿐이다. 새 장난감이 좋아 가지고 놀던 아이도 금새 식는다.

그 감정이 식는 걸 물 흐르듯 생활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맞게 살아야 한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루의 뒷모습만 맞이하는 마고, 그를 항상 뒤에서 안게 되는 장면으로 감독은 마고의 심리를 암시했다. 그녀는 외로웠고, 루의 관심도 부족했다.

그로 인해  다니엘에게 흔들리는 마고를 조금은 위로하게 만든 것인지, 짜릿함도 잠시 똑같은 공허함이 찾아온다.

결혼하여 살아가는 자로서, 수시로 들락거리는 권태와 결핍과 공허함이  수없이 흔들어대지만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익숙함이 메워준다.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자주 노크를 한다. 그때마다 떠오르던 말!

"별 남자 없다. 잘난 남자도 결혼해 살아보면 다 같아져. 사랑할 때나 남자지. 결혼하면 가족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돼. 그래야 살아. 그냥 포기해 줄 건 포기하고, 내줄 것 내주고 접을 건 접어줘"

살아본 자의 조언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마인드였다. 그리고 이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 보지만 결혼은 같이 앞을 보고 걸어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은 잡고 있지만 내 감정이나 내 시선은 그에게 없다. 우리 둘이 걸어갈 미래에 있다. 그 지점이 같으면 서로 인내하고 믿음을 줄 수 있어야 부부의 약속이 아닐까?

posted by 해이든 2018. 11. 10. 19:03

'완벽한 타인'이란 영화가 요즘 극장가에서 흥행의 질주를 하는 모양이다.

아직 시간적 여유를 내지 못해 가지 못하고 있는데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국영화가 계속 너무 흥행위주의 스토리만을 소재로 만들어내다 보니, 솔직히 영화에 대한 식욕

이 줄어들어 있는상태였다.


폭력성이나 코믹에만 집중된 상업성만을 노린 영화로 너무 뻔한 스토리.

웃음은 있는데, 감동이나 여운이 없는 영화에 돈을 지출하기 싫어졌다.

그런데 이번 건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일단은 7명의 배우들이 등장....

이들은 이미 연기력에서 나름대로 인정된 자들이고, 조합면에서 색다르다.

유해진, 염정아, 이서진, 김지수, 조진웅, 윤경호, 지우

이들이 한테이블에 앉았다.

40년지기 고향친구들과 그 배우자로 구성된 7명의 인물들이 저녁식사모임에 둘러앉았다.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드러내는 삶은 서로 잘  안다고 여기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지 않는 삶, 드러낼 수 없는 삶을 다들 핸드폰에 담아놓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손에서 핸드폰을 떼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핸드폰을 꼭 쥐고 사는 우리는 하루 24시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핸드폰과 모든 걸 공유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7명은 게임을 시작한다. 핸드폰을 공유한다.

저녁먹는 동안 오는 전화, 문자, 카톡,이메일까지 싹 다 공유하는 거다.

다들 가볍게 게임으로 시작해서  핸드폰을 통해 비밀들이 하나둘씩 들통나면서

전혀 예기치 못한 결말로 흘러간다는 내용인 것같다.

'그 예기치 못한 결말들이 무엇일까', '누군가 내 핸드폰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문젝 되지 않겠지만, 뭔가 있으니 영화의 소재가 될 것이고,

예측불허의 스토리가 전개될 것이 아닌가.

겉으로는 성공한 사람이고,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그들에게도 완벽한 타인이 될 결정적 위기가

 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너와 내 사이에 비밀은 없어' 그래서 친구라고 여겼던 사이..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변호사 태수(유해진)와 그의 아내역을 맡은 염정아는  

문학에 빠져있는 가정주부다.

신뢰도를 바탕으로 살아야 하는 부부사이에도 공유는 어느정도의 허용치가 존재했을까?

그럼 이 영화의 제목은 왜 '완벽한 타인'일까?

부부도 알고보면 타인이다, 친구도 알고보면 타인이다.

그럼에도 서로 친하다?

친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말하는 이들을 흔히 접한다.

친하다는 게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고 편견이다.

부모자식간에도 어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본다.

단지 보여지는 것을 다 안다고 판단하는 자만이 가족간에 더 강력하게 엮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혈연, 지연이 가져오는 상처가 더 깊이 묻히는 법이다.

관계를 맺는 건 서로에게 보여지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이고,

그들사이에도 틈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들 사이에도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필수품이 되어버린 핸드폰이 소재가 되어 이 친구들이 서로에게 공개와 비공개로 설정해놓았을

그 무언가가 우리의 상상력을 건들어 놓을 것임을 조심히 영화의 제목으로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전화벨이 울릴때마다 감춰왔던 비밀이 밝혀지고,

기를 맞은 그들의 표정연기가 클로즈업 되면서 카메라에 담기게 될때,

이들의 표정연기가 날 얼마나 몰입하게 만들까 하는 기대치가 있다.

우린 실생활에서도 타인에 대한 궁금증으로 화제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저사람은 변호사인데, 집에서도 와이프한테 변호사처럼 말할까,

아니면 완전 다르게 더듬거리는 건 아닐까'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화제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맺고 살아감에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실외용과 실내용, 외면과 내면 등 양면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본다.

혼자 있을때의 모습과 여럿이 있을 때 모습이 다를 것이다.

집에서는 이도 안닦고 머리도 안감고 지저분하게 있는 그저 인간에 지나지 않는 몸짓도

세상밖으로 나가면 의사요, 문학가요, 변호사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지 않을까?

내가 의식하는 세상이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명예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그러할 것이다.

재미있는 스토리인것 같다. 어쩜 인간의 본성에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공적인 삶에서 보여지는 그것과 사적인 삶안에 가려진 개인의 비밀을 드러다 보며

인간의 양면성의 장치가 관계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을 내밀게 한다.

스토리보다는 내면연기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산다고 여긴다.

왠지 이 영화는 그 양면성을 드러내보자는 감독의 의도는 아닐까?

그래서 기대된다.

왠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적나라하게 놀것 같다.

그리고 표정연기로 대부분의 심리변화를 보여줄 듯 하다.

망가지는 걸 서슴치 않는 연기에 열광하는 나다. 너무 고상떠는 연기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 있어 이번 연기자들의 케미가 내심 땡기는 이유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1. 4. 12:00

낙안읍성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떠난 여행이었다.

전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순천을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그렇게 달려간 곳이었다.

낭만을 잡은 채 건져올린 추억이었다.

가끔 내게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고, 불편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오르는 여정끝에 나를 맡길 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고된 노동 속에 맛보게 되는 새참 같은 거랄까, 고추 하나 된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물면 그 얼마나 맛나고 풍요하던지,

그런 맛을 느낀 여행이었다.

낙안읍성 근처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과거로의 여행을 산책하듯 걸어 걸어 들어갔다.

낙안읍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일대의 낙안분지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평지성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행정상 읍소재지였기 때문에 '읍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대한민국 3대 읍성 중의 하나로 사적 302호 지정되었다 한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부터 이곳에 성곽을 쌓아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시대 후기와 조선초기에 왜구가 자주 이곳을 침입했기 때문에 태조 6년 이곳 출신의 절제사 김빈길이 흙으로 다시 성곽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인조때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개축하였고, 평지에 직사각형으로 세워졌다 한다.

낙안 민속마을 성곽

낙안읍성의 민속마을은 다른 전시용 민속마을과 다르게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성내에는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는 국내 유일한 곳이다.

물론 생활방식마저 옛 전통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말이다.

밥짓는 냄새도 나고, 농사도 지어 수확하고, 감도 열려 있고, 빨래도 널어져 있다.

간혹 마당에 건조빨래대가 있는 것을 보고 웃었다. 생활의 불편함이 많겠다 생각은 했다.

왜?난 현대문명이 만들어놓은 편리성에 길들여진 사람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시대가 현재와 공존하는 듯 느껴졌다. 타임머신을 타고 난 조선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초가지붕 민속마을 , 성내 민박 집도 있고, 식당도 있다.

옥사체험도 할 수 있고 사당패들이 민속놀이 공연도 하고 있었다.

옥사체험

대장금 촬영지로 이미 유명세를 탄 듯하다. 여기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문 쌍청루의 넓은 마루에서 신발 벗고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마치 조선시대 낭인으로 온 느낌이랄까.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떤 신분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았으려나?

풍경도 좋고, 자연도 좋고, 바람마저 좋았던 지라 힐링의 맛을 제대로 느껴본 가을이다.

계단에 올라가니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여기를 다 둘러본 것이다.

초가지붕이 낯선 나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보아와서 마치 엄마 품으로 돌아온 것 같은 정겨움이 날 이끌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옛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가옥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정겨운 풍경이 따스하게 안기고 아이들이 뛰어나올 것 같은  골목 어귀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 그럼 여기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자격조건이 있을 것이다. 아무나 받아들이지는 않겠지?

혹시 이사 가고 오는 사람들은 또 어떤 절차가 있겠지?

아는 이는 없는 듯 하다. 주위엔 관광객들이 더 많다.

다들 경치를 즐기고, 힐링하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그런 이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기 싫다.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는 이상, 지자체에서 주민들에 대한 관리도 이루어지겠지' 하고 생각을 더는 담지 않았다. 

 담에는 여기서 민박을 하면서 주인장에게 물어봐야겠다.

오늘은 풍경과 내 감정에만 충실해보자. 힐링을 하러 온 것이 아닌가

순천 민속마을

성곽벽을 따라 걸으며 현대 삶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어릴 적 가진 게 별로 없어도 우리는 참 행복했다.

집집마다 웃음소리가 밖으로 나오고, 뒷 집에서 뭐 했으니 먹으라 오라고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오고,

'전설의 고향'을 하는 날이면 한 집에 모여 보면서 이웃사촌들의 정을 담는다.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같이 데려다 달라는 동무의 부탁으로 서로의 집을 여러 번 오갔던 추억마저 우리는 무엇에 빼앗기고 있는 걸까?

해가 넘어가면서 우리는 이런 풍경을 이렇게 관광지로 찾아 다녀야 하는 것에 많이 씁쓸했다.

오늘 저녁에 짓는 밥에는 정서를 듬뿍 담아볼까 한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1. 3. 20:59

니쉬 걸


 

영화 대니쉬 걸

덴마크 풍경화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와 초상화 화가인 아내 게르다는 부부이자 예술적 영감을 주는 파트너다.

 게르다의 발레리나 모델이 자리를 비우자 남편 에이나르에게 대역을 부탁한다.

드레스를 입고 캔버스 앞에 선 에이나르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혼란을 겪는다.

아내 게르다는 남편 에이나르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오늘밤 외출하자 색다른 모습으로게르다는 에이나르에게 여장을 시키고  파티에 가게 된다.

장을 한 에이나르는 여성 릴리였다. 남자로 보는 이는 없었다. 그의 여장은 완벽했다. 표정, 몸짓, 느낌.

처음에는 단순한 게임이었는데, 릴리가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릴리는 존재하지 않아. 우린 게임을 한거야분명 릴리에게는 중요한 내면의 변화가 오고 있다.

초상화 모델해주는 장면

게르다는 남편에게 내면의 릴리가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가끔 자신의 속옥을 입고 있던 남편인데도 말이다.

에이나르는 자신이 뭔가 달라지고 있음을, 자아에 엄청난 변화가 시작됐고, 그걸 억압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삶이 흔들리고 있다

대니쉬 걸은 덴마크 화가 베게너의 삶을 영화한 것이고, 세계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실존인물이다.

베게너의 여성인 릴리의 일기를 바탕으로 쓰여 졌다고 한다.

1920년대 남성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남자에서 여성으로 넘어가기 위해  5차례나 수술대 위에 오른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성전환수술을 1년여에 걸쳐 무려 5번의 수술을 한 그는 난소와 자궁이 성공적으로 이식된 그 해 나이  49살이었다. 여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후에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남자로 태어나 여성으로 죽은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나 역시도 그런 말이 나오니까.

하지만 아이를 갖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그를 5번이나 목숨을 걸고  수술대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의 갈증을 우리가 이해할 문제는 아니었나보다. 그들이 그렇게라도 감행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다고 여자가 되나?’ 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던졌던 나였다.

에이나르 베게너와 초상화 화가인 아내 게르다

세계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한 덴마크 풍경화가 베게너가 내면의 릴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걸음은 이해받고 이해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이해 따윈 필요 없는 그의 자아였고, 그의 행복의 척도라고 본다.

이를 연기한 에디 레드메인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통해 사랑이 얼마나 특별하고 깊은 감정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성이나 성별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남편을 잃게 되는 일임에도 정작 그의 선택을 지지했던 게르너사회적인 분위기나 편견보다 정말 그의 전부인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는 건 오직 사랑이었을 것이다.

이 사랑에 전 세계가 매료되었다고 본다. 성전환수술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용기는 벌써 백 년전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냥 용기로만 가능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에게 에이나르는 전 여자라고 믿어요라고 말하자,옆에 있던 게르다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포용력 끝에 분명히 아픔도 컸으리라. 난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나의 육체를 나눠가질 수 없는 슬픈 운명!

편견을 빼라, 그들은 잘못 태어난 것도, 하느님의 실패도 아니다. 병도 아니다.

하나의 몸 안에 두 개의 성이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이해된다고 위선 떨고 싶지는 않다.

하나의 육체에 남성인 에이나르와 여성인 릴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멋진 아내 베게너는 릴리를 끄집어내준다.

당신만이 나를 존재하게 만들어 줬어게르다는 릴리를 끝까지 사랑했다.

그 모습에 감명 받았고, 에이나르의 저 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리 개방적인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으로 이어질 수 없는 편견과 인식!

우리는 아직도 그 모진 눈빛을 에이나르같은 사람에게 보내고 있고, 문을 닫고 있다.

이 영화는 에이나르같은 성정체성을 갖고 태어난 그들에게 나의 잣대로 들이대지 말라고 말하는 듯 해 내 안의 편견에 칼집을 냈다.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자신의 자아를 갈구하는 에이나르의 용기 있는 삶에 비해 리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 얼마나 될 것인가조금이나마 유리의 색을 닦고 보면 어떨까?

에디 레드메인

톰후퍼감독이 에디 레드메인의 배우를 만난 게 축복이라 여긴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의 감정과 만난다. 그의 표정에 집중하면 그의 내면과 만난다. 이런 영화는 없었다.

만지지 않고도 촉감이 느껴지는 섬세한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력!

에이나르가 살아온 건 아닐까? 에디 레드메인의 육체를 빌어 들어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영화화면을 수없이 정지시키며, 에드 레드메인의 섬세함에 끝없이 감탄했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0. 28. 14:04

 

 

이 영화를 근친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장면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근친을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두 남매는 순탄하게 자라지 않은 것 같다.
두 남매가 어릴 적 어떻게 살아왔는지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인지 , 왜 그렇게 둘은 서로를 보듬지 않는지, 왜 그렇게 서로가 상처가 많은 것인지 감독은 보여주지 않는다.

 

shame은 수치심을 의미한다.
포르노로 가득한 그의 컴퓨터가 바이러스를 먹은 것처럼 그의 인생도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사람이다.

깨어나 잠 들때까지 섹스에 중독된 브랜든은 성도착증 환자다.
성도착증은 비정상적인 성적 상상이나 욕구로 강력한 성적 충동과 함께
정상적인 성적 행동에서 벗어난 자극으로만 성적흥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맘이 가는 회사 여동료에게 정상적인 관계에서 그의 성적기능은 불능이었다.
연애하고, 데이트하고, 결혼하는 그 흔한 교류가 그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결핍은 물론이고,
감정이 개입된 정상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내 놓을 줄 모른다.

관계에 대한 결핍으로 자신을 제어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에게 집이란 결핍을 해소하는 곳이고, 자신의 수치심이 담긴 곳이다.
포르노를 보고, 화상채팅을 하고, 콜걸을 불러 섹스를 나누고, 야한 잡지 등으로 온통 너저분한 공간에 여동생 씨씨가 침범한다. 동생에게 화장실에서 자위를 하다 들킨 그는 폭발한다

수치심을 자극시킨 것이다. 또 동생의 등장은 관계에 결핍된 그의 생활을 건들인다.

오고 갈 곳이 없는 동생은  "오빠니까 가족이니까 서로 돌봐줘야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는 동생에게  "넌 내가 끌어안은 부담이야. 넌 날 가라앉게 해."
결혼으로 인한 관계도, 가족으로 다가오는 여동생도 자신이 떠안아야 되는 부담이라 말하는 거로 봐서
그는 가족과 사람들의 관계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오빤 아무도 없지! 나와 변태 같은 상사뿐이지"
씨씨는 클럽 가수이다. 관계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다.
오고 갈때 없는 자신을 오빠라는 사람이 돌봐줘야 하는 거라고 말하고, 맘이 떠난 애인에게 전화로 매달리는 거로 봐서 씨씨의 삶은 의존형이다.

씨씨의 팔에 자해 흔적들은 그녀가 얼마나 상처와 마주했고 그때마다 오빠에게 전화메세지를 보내지만 오빠는 외면한다.

그 두남매는 지독히도 외로운 삶을 지독히도 비정상적인 해소를 하며 살아온 것 같다.

지독한 외로움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듯했다. 외면만 했던 동생의 외로움은 자신의 내면과도 닮아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의 손목에 수없이 그어진 자해 흔적은 자신의 성적 장애와도  닮아 있다.
사람들 속에서 왜 자신들은 정상적으로 관계를 이루며 살 수 없는 걸까?

지나치게 성에 의존하는 브랜든과 지나치게 관계에 의존한 씨씨의 결핍현대사회의 자화상같은 걸 그리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실로 인간관계가 상실된 현대인들은 외로움에 노출되어 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저마다 자신만의 동굴을 판다.
상처가 많은 두 남매의 관계결핍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아프게 그려 냈다.

현대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분리와 소외되는 외로운 삶들이 자신의 삶에 침투한 결핍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였다.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단지 상처가 많을 뿐인 거야."
씨씨의 대사처럼, 우리는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위로받으며 살아야 되는 존재들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터질 것 같은 감정은 숨이 멎은 듯이 나를 흡수했다.  그의 오열이, 그의 절규가 아프다.

남자의 수치심을 가슴 먹먹하게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의 표정 하나 하나가 다 살아있어서 좋았다.

스티븐 맥퀸 영화에는 항상 마이클 패스벤더가 등장한다. [헝거]에서도 [노예 12년]에서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포스터가 영화를 더 잘 표현해 낸 것 같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8. 10. 27. 15:57

사람냄새 나는 곳에 머물고 싶다.

너무 흔한 풍경이라 몰랐던 것이 요즘은 이 모습이 얼마나 힐링이 되는 줄 모른다.

도시생활 속에서 너무 찌들어 버린 삶이라 그런가  저기 한 그루의 나무에게도

하천에 흐르는 물소리에도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돈이 되는 곳에는 정서가 없다.

돈이 되는 것에는 의리가 없다.

밥 짓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밥이 타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나지 않고

김에 참기름 바르고, 소금 뿌려 굽는 그 잘잘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돈이 있는 곳엔 줄만 길게 늘어져

자극적인 냄새로 자극적인 가격으로 사람들을 유인한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꼬인다.

이 소리가 그리웠다.

이 냄새가 그리웠다.

신발 벗어두고 바지단 돌돌 말아 올려 첨벙 첨벙 담그던 그 장난꾸러기 시절이 그리웠다.

맑은 물줄기 사이로 유유히 빠져 나가던 물고기를

쫓아다니던 그 시간이 그리웠다.

잘도 도망다니던 그 작은 물고기로 인해 얼마나 약 올라 했던가.

잡은 물고기 가지고 얼마나 괴롭혔던가.

움직이지 않는 물고기가 죽은 줄 알고 미안해하며 톡톡 건들면

움직이는 것에 죽은척 했다고 또 얼마나 쪼물닥쪼물닥 괴롭혔던가.

재미없어 물가에 다시 놓아주면

잽싸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내 착함에 감사하라 하지 않았던가.

빨간 고추 몇 개 따 오라는 엄마 말에

짜증나서 파란 고추 마구 따서 얼마나 혼났던가.

'청개구리같은 녀석'이라고 말이다.

이제 보니 저 빨간 고추가 저리 탐스럽고 아름다웠던 것일까.

고추 대롱대롱 열려있는 고추밭 보며 행복해 하던 엄마의 미소가 안개처럼 번진다.

그래 이런 마음이셨구나.

어릴 적 저 노란 꽃심 잘라 소꿉장난한다고

노란계란자로 둔갑시키고

돌로 만든 상에 조개껍데기로 접시 만들어

코질질이 서방앞에 갖다 주고

"여보, 식사하세요" 했던 그 넘이 이렇게 피어있다.

 

미세먼지 가득한 도시에서

창문 틈 사이사이 테이프 다 발라가며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겠다' 무장하고 산 지 좀 됐다.

아침 일어나 보이는 저 광경은 수묵화가 따로 없었다.

왜 이런 풍경을 우린 잊고 살아갈까,

어릴 적 '저기에는 산신령이 살고 있다'는 엄마 말을 찰떡같이 믿고 살았다.

왜냐하면 정말 살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이 아니던가.

돈이 있는 곳에는 감정의 풍요가 없다.

삶의 풍요가 없다. 인간미가 없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웃의 방해를 원치 않는다.

자신의 영역만을 지키려는 개인적인 사심만 가득하다. 

여기는 모두가 한공간이다. 한 집이다. 한 이웃이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빌딩사이로 사람이 모인다. 아바타들이다.

다들 캐릭터가 우리의 표정을 대신하고 있다.

점점 감정표현에 무뎌지고 있다.

나중에 소리내는 법을 잃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posted by 해이든 2018. 10. 27. 15:50

끝 없는  감정들에 치여서 숨을 곳이 필요했다.

지칠때면 나를 숨겨 놓을 곳이 필요했다.

집착같은 감정들이 나를 묶어 두려하고, 한번도 여유란 옷을 걸쳐보지 못했다.

현실의 옷을 벗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들 그러겠지. 유난 떨지 말자' 했다.

홀로 서보니 알겠다. 내가 죽어라 살아온 곳을 멀리서 들여다 보니 알겠다.

'다들 그러겠지'가 아니었다. 유난 떤게 아니었다. 미련 그 자체였다.

삶은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 아니라, 마주해야 하는 것임을

들여다 봐야 했다. 한번쯤 들여다 봤어야 했다.

검고 어두운 것이라,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 버리지 말아야 했던 것을

세상의 아무리 높아도 내 마음의 담보다는 낮았다. 자신의 담은 어디까지 쌓아놓은 줄도 모른채,

'그저 그런 세상이겠거니, 나와 상관없는 높은 세상이겠거니' 무심했었다.

이제 작별인사를 해야 할 듯 하다. 나의 무지한 청춘에게, 나의 어리석은 구속에게

자유로워지리라.  마음의 담을 허물어 버리리라. 그리고 여유와 마주하리라.

posted by 해이든 2018. 10. 20. 13:37

택배기사의 폭행이 누군가의 sns를 타고 이슈화가 되고 있었다.
30살인 이 택배기사는 초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적장애인 어머니와 1살 위인 형을 돌보는 가장이었다.
폭행을 가한 당사자는 맞은 사람은 친형이고, 자신은 친동생이라고  해명에 나섰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지적장애, 형은 환각. 환청 장애란다. 형이 휴지를 모아 불을 지피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형을 집에 놔두고 나올 수 없어 택배일을 하는 동생이 형을 데리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하고 형에게 폭행을 가했다고 했다.
형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자신보다 형임에도 데리고 다닐 수 밖에 없는, 그의 고된 삶이 그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으리라는 건  안보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형을 폭행한 것에 대한 시민들의 공분은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의 삶의 무게가 너무 안쓰러워 안타까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어찌 이 한사람의 어깨에 다 올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매번 사회제도와 연결지지 않고는 인간다운 삶을보장할 수 없다.
장애인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사는 이들이 스스로의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채,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야 한다는 것은 '살기위한', '살아내기 위한' 이 아닌 견디어 내지 않으면 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벼랑끝에 매달린 버팀 그 자체이다. 어쩜 버티고 있는 손을 놔버리는 게 더 편안한 일일 수도 있을 만큼 그들은 사회속에서 철저히 외면된 죽음보다 더한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안은 칙칙하고 썩은 내장같은 냄새로 얼룩져있을 것이다. 피가 나야 오히려 빨리 낫는 법이다. 안으로 곪는 것이 더 위험한 일임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피흘리는 삶보다 눈물 흘리는 삶보다 소리내는 힘마저 잃어버린 그들의 삶에 우리는 너무 둔해있다. 왜? 내일이 아니니까.
비난이나 위로할 입만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장애인 가족의 답답한 현실앞에 안타깝고 무거운 절망이 내려앉는다.

 

폭행이 정당화 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이 장애인을 둔 가족은 백조처럼 얼굴을 물 밖에 두고 그 밑에서는 수없이 발버둥치고 있다. 종이한장만 어깨에 내려앉으면 그 무게에 내려앉고 마는 삶을 겨우 버티고 있을뿐이라는 말에 겪고 보지 않고는 그들에게 우리는 마냥 인륜이 어떻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같은 입장의 장애인을 둔 가족들은 하나같이 택배기사 동생의 어깨에 얹힌 무게의 고통에  같이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회제도는 장애인에게도 제대로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않다. 하물며 그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에게는 한톨의 동전만큼의 약도 없다. 나눠가져야 할 몫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같이 죽는 걸 택하고 싶을 만큼 삶이 곪고 피폐해져 있다.
장애인을 둔 엄마의 소원이 장애인인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거라는 말을 들었을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에 울 수도 없었다.

30살, 자신을 위해 꿈꾸고 사랑하며 살아야 그가, 지적장애인 엄마와 환청장애인 형을 다 감당하고 살아가는 건 더 어려운 일이리라.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숙명처럼 내 운명처럼 가슴으로 끌어안을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그리고 형을 안고 가장으로 사는 건 더 감당키 어려운 일인 것은 분명하다. 왜 이렇게 사회가 아프고 아픈 걸까?

 

 

posted by 해이든 2018. 10. 20. 09:22

이제는 슬프지 않아.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는 게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걸 절감해서 그런 거 같아.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말한 삶의 의미 같다고 할까?

20살에 죽든 80살에 죽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물론 네가 살지 못한 여분의 삶이 아프긴 해. 누구나 새벽이 밝아오기를 바라고 스며드는 햇살이 따뜻하게 다가오기를 바라겠지만 내일에 대한 불투명한 희망때문에 오늘의 슬픔을 다 감당하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겠지.  오늘의 고통때문에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꼭 모든 걸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인생이잖아.

목련이 피면 항상 네 생각이 났어. 미움으로 얼룩져 갈갈이 찢어버린 편지를 창문밖으로 뿌렸던 그 날,  뿌려졌던 종이가루가 공중에서 벚꽃처럼 날리는 모습을 보며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지 몰라. 난 지금도 그때 가진 감정까지 고스란히 놓지 못하고 살았어. 그래서 너의 죽음이후 난 너를 더 많이 미워했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미웠던 것 같다. 너는 내게 그저 따뜻한 동생의 손길을 원했을 뿐인데, 너와 같은 아픔을 가졌다 생각해서 너와 같은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인데 그게 널 미워하게 만든 동기가 되어버렸고 난 그것으로 널 마음껏 미워해버렸지. 그게 아마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흉터처럼 남아버렸어.

우리같은 자매가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너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더라. 너와 마주앉아 서로 주고받은 말이 너무 없더라. 그래서 보낸 너의 마지막 편지가 너로서는 내게 보낸 애정이었는데 나는 그걸 잔인한 서사시로 묶어버렸던 거지. 서로를 너무 몰라서, 서로의 방향이 너무 달라서 우린 그렇게 어긋나기만 했나보다.

이제 와 누굴 탓할까, 다 부질 없는 것을.

너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했을 뿐.....우리 모두 가엾은 인생이었어.

 

posted by 해이든 2018. 9. 23. 18:53

                              

영화 나 없는 내인생

23살에 내려진 암선고,

여기서 멈추었다.
겨우 2달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나 있는 삶을 준비한다.

 

17살에 만난 남자와 첫사랑을 하고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빠로 관계를 맺었다. 
능력 없는 남편으로 경제적인 터전을 만들고 못하고 친정 엄마 마당에 트레일러안에 가정을 이루고 사는 앤(사라 폴리)은 23살에 자신에게 닥친 이 절망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야간 청소부로 일하고 6살, 4살 두 딸의 엄마이기도 한 자신의 자리....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낳고 가정의 경제까지 짊어지고 산 삶에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후회하고 아퍼할 시간도 원망하고 미워할 시간도, 흔들릴 시간도 그녀에게는 없다. 
 
가족들이 같이 흔들리고 좌절하는 걸 지켜보는 것 또한 그녀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더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조용히 삶을 정리하려고 죽기전에 하고 싶은 10가지 리스트를 작성한다. 삶에 미련을 가지고 흔들릴 시간이 없었기에 운명처럼 받아 들인다,
나 없어도 이들은 살아갈 것이다.

 

나 없어도 이들은 금방 적응할 것이고, 나 없어도 이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없는 내일이 이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나만 지금 끄덕거리고 있고 나만 지금 휘청거리고 있고 나에게만 내일이 미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는 과거로 남겨질 것이다. 

그래서 내게 부여된 2달을  날 위해 적어보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나름 행복했다. 자신의 몸에 자란 암세포를 끌어안고 울지 않는다. 무심하게 두달이지만 자신을 향한 여행보따리를 싸듯 엄마의 죽음으로 아내의 죽음으로 이어진 그들의 삶과 자신을 삶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10가지 리스트 내용을 보면 그녀가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자와 남겨놓고 가야 하는 자의 입장으로 연결고리를 이어놓은 것 같았다. 

 

비록 삶과 죽음으로 나뉘지만 그건 왠지 다른 건물에 들어가 있을뿐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진 것 같이 말이다.

 

그녀의 리스트는 남편에게 착한 신부감 구해주기, 애들의 18살이 될 때까지  생일 축하 메세지 녹음하기, 담배와 술을 맘껏 즐겨보기, 딸들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보기, 감옥에 계신 아빠 만나기, 머리 모양 바꾸기, 날 몸 바쳐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들기...등  
사는 모습이다. 누군가 사는 사람의 계획을 보는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의 리스트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통해서 또는 그들을 통해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들의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에서 그녀는 그들의 시작에 자신을 올려놓은 것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8. 9. 23. 12:50

 

미국에서 발생한 실제 에어 프랑스 도난 사건, 루프트한자 도난 사건을 근간으로  3명의 갱스터 토미 데비토 ,지미 콘웨이,헨리 힐  30여년의  삶을 그린 영화, <좋은 친구들>이다.

 

 

청소년이었던 헨리 힐(레이 리오타)의 눈에 대통령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갱스터!

그는 항상 갱스터가 되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고, 그 세상에 속하고 싶었다. 헨리는 폴리의 심부름을 해주며 그 세상에 들어갔고 그 속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자신들이 원하면 가지면 되는 세상,아무도 그들을 건들 수 없다 생각했다.  자신을 달리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린 헨리는 그들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여겼다.

어느 날 그 바닥에서 알려진 지미 콘웨이(로버트 드니 로)를 알게 된다. 그의 주 특기는 트럭을 훔치는 것이었다. 트럭을 훔쳐 그 물건들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  지미의 소개로 토미 데비토(조 페시)를 알게 된 후 세 사람은  항상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돈이 필요하면 공항 화물을 훔쳤고 원하면 남의 것을 가지면서 말이다.

 

 

21살의 헨리는 카렌(로레인 브라코)이란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결혼 후 알게 된 카렌은 그에게 매료되어 그를 떠날 수 조차 없었다. 항상 갱스터의 군중속에서 함께 했고 점차 그의 삶에 익숙해졌다.

그는 빌의 심부름을 하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돈으로 경찰, 변호사, 판사를 매수했던 그들은 감옥안에서도 다른 생활을 했다. 매수된 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몫을 챙기고 갱들의 온갖 나쁜 짓을 덮어주었다. 그런 자들이  존재했기에 그들의 무법천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헨리는 감옥에서 나와 지미, 토미, 그리고 다른 조직원들과 루프트 한자 공항 화물을 거액의 금액을 털게 된다. 하지만 강도 사건 후 몇 달이 지나 조직원들은 하나둘 시체로 발견되었다. 훔친 돈을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지미는 돈 대신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그들을 차례차례 제거했다. 그리고 헨리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혹시나 헨리가 밀고할까 지미는 불안했고 헨리는 지미가 자신을 죽일까 불안했다.

 

 

토미는 마피아 조직의 빌리 배츠를 죽인 대가로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헨리는 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폴리는 헨리에게 마약을 팔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고 화를 낸다. 폴리는 주머니에서 현금뭉치를 꺼내 헨리에게 건네며 우리 관계는 끝났다고 말한다. 평생 봉사한 것에 대한 보상치고는 관값도 되지 않음에 크게 실망한 헨리. 마약을 판매하는 헨리로 인해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고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좋은 친구라 칭했던 그들로부터 외면받고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향해 살인의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친구라 믿었던....

 

 

그는 죽지 않기 위해서는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미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눈치 챈 이상, 살기 위해 그들을 쳐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바친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갱들의 세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세상이었다. 헨리는 경찰서에 찾아가 증인보호프로그램에 신청하고 폴리와 지미의 범죄를 다 증언한다. 헨리는 증인보호시설에서 폴과 지미는 감옥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과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좋은 친구들>이 갖는 진짜 의미는 나쁜 친구들을 말함인가.

 

 

 

 

posted by 해이든 2018. 9. 16. 15:36

밀양, 빛이 빽빽하게 모인 이 곳에서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허락지 않은 용서를 한 하느님을 향해 보란 듯 자신의 고통을 널어놓는다.

보이는 것도 안믿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했던 건 아들을 잃고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고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고통에서  그나마 목구멍을 통해   눈물이란 걸 토해내게 해 주어서다. 원수도 용서하라는 그 뜻에 따라 아들을 빼앗아 간 살인범을 용서하려 했다. 아니 죽을 힘을 다해 용서해보려 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믿고자 했고, 그 뜻을 전하고자 했고 힘겹게 용서란 걸 하려고 했다. 그런데 산산히 부서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을 눈물로 덜어내주고 살아짐에 살아진다고 믿고 당신에게 기대려했는데 내 안에 당신을 끌여들였는데 아들을 지키지 못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 용서받고 싶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100% 진심으로 끌어올린 건 아니지만 용서란 걸 허하여  죄를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는데  하느님, 당신이 그 죄많은 사람을 먼저 용서하였다 한다. 난 이렇게 가슴이 짓이기듯 아픈데 아직도 찢어지는 고통에 매일이 힘든데  내가 그 살인범을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었는데  하느님이 그를 너무 쉽게 용서해 버림에  억장이 무너진다. 범인이 죄를 용서받고 평안하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다고 믿었던 하느님의 뜻이 거짓말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 삶에 빛을 허하실 생각이 없던 거였고, 당신은 애초에 나의 아픔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죄 많은 그가 저리 쉽게 용서받고 교도소 안에서 너무 건강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니,축복은 그 쪽에만 행복도 그곳에만 비추어지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죄 지은 사람에게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주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이제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지,죄라는 걸 열심히 펼쳐 볼테니 보라고, 당신이 볼 수 있는 곳에 햇빛 비치는 밝은 곳에서 보여줄테니 보라고....

 

슬퍼할 자격도 없는 엄마라서 스스로 가두어버렸는데 햇볕 한 줌에도 다 뜻이 있다 하여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해준다 믿었는데 죄를 지은 범인에게 한 용서로 인해 신애의 고통에 소금을 뿌렸다.

어떤 사람은 슬프면 소리지르고 기절하고 내보낼 수 있는 눈물로 목구멍으로 토해내듯 쏟아낸다. 그런 사람을 보면 그래 다 쏟아라.  바닥까지 빡빡 긁어내 다 비우면 뭔가 다시 채워질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슬퍼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몸의 구멍은 다 닫혀버린 듯 쏟아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걱정이 된다. 어찌 되는 거 아닌가, 저러다 미쳐버리는 건 아닌가, 아슬아슬하고 위험해보인다. 고여 썩지 않을까, 곪지는 않을까, 부패하지 않을까, 그러다 끝내 삶을 놓아버리지는 않을까.

 

신애가 그래보였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무엇에 빗대어 말해야 통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가. 죽은 남편의 고향에서 자신을 아는 이 하나 없는 밀양에서 인생을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세팅하고 싶었는데  새롭게 출발하고자 연고지 하나 없는 이곳 밀양까지 왔는데 아들마저 하늘은 빼앗아 가버렸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모든 것을 잃고 그녀는 삶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신애는 밀양에 피아노 학원을 열었다. 그는 얼마 있지도 않은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좋은 땅을 소개해달라며 말하고 다닌다. 남편 죽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과부를 보며 사람들은 측은해 한다. 그녀는 그런 눈빛이 싫었다.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속으로는 어찌됐든 겉으로나마 씩씩해보이고 싶었고  땅 살만큼 돈이 있다는 걸 과시하려했던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말라는 신애 나름의 발악이었다. 서울 여자가 시골로 그것도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와 살려고 했던 건 그녀는 도시에서 아이와 살 경제적 여력도 되지 않았고 남편의 배신도 남편의 죽음으로 젊은 나이에 혼자도 된 자신을 향한 동정의 눈빛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아는 이 하나 없는 남편의 고향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말들이 많다. 생각해준답시고 위로해준답시고 건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무시하는 사람들보다 무관심한 사람들보다 더 아프게 다가와 꽂힌다. 위로의 말도 불쌍하게 보는 것도 다 싫다. 남에게 초라하게 보여지는 자신을 감당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밀양으로 내려와버렸다. 집을 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들 준과 함께 무작정 밀양을 향해 내려왔다.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곳으로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곳으로 죽은 남편의 고향이라는 연줄 하나 가지고 남편에게 사랑받았던 여자로 남편을 못 잊고 사랑하는 여자로 여겨지게 자신을 쉽게 보지 않게 새로운 삶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도 없이 돈도 없이 아들 데리고 사는 과부로 보이기 싫었다. 돈이라도 있어 초라하지 않다고 가려보려 거짓말을 했다. 땅에 투자할 만큼 돈을 가지고 있는 여자처럼 있는 척 했던 것이다. 땅을 보러 다니는 자신의 행동이 아들의 삶을 앗아가버렸다.

돈을 노린 유괴범이 아들을 유괴한 것이다. 아들을 유괴한 남자에게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고를 다 찾아 넘겨주었다. 유괴범은 얼마되지 않은 돈 때문에 신애에게 전화로 화를 내고 있다.

가진 게 그게 다라고, 있는 척 하려고 거짓말 한 거다. 남편 연금으로 빚 갚고 여기 집 구하고 남은 게 그거뿐이다. 자신을 결국 다 드러내고 동정을 구했다. 동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도로 동정을 구한다. 아들을 돌려달라고..

아들 준은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시체가 발견된 날도 햇볕 좋은 날이었다. 하늘은 너무 맑고 밝은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 자신을 현실 밖으로 보내버린 것인지 아들의 시체 앞에서도 아들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못했다. 못한 것이었다. 아들의 죽음도, 자신도 스스로 박제시켜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가두어버렸다.

이제 정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다 잃은 마당에 살아가고 싶을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아들 흉내를 내며 아들의 음성 테이프를 들으며.

 

난 아들 잃은 엄마 신애만 보였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신애 역시 종찬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 그녀에게 빛 한줌이 들어서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어떻게든 어울려 보내지만 그녀는 누군가 받쳐주지 않으며 금방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종찬(송강호)은 그런 그녀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유괴범과 마주할 때도,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러 간 날도, 길에서 짓누르는 고통으로 가슴을 움켜잡을  때도,교회에서 처음으로 목구멍 밖으로 소리내어 통곡할 때도, 그녀가 종교에 의지해 교회를 다닐때도, 교도소에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찾아갈 때도,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그녀 옆에 항상 있었다. 신애가 신경쓰든 말든.

고통스러워도 살아진다고 하는 삶, 아들과 살아보려는 밀양에서 아들이 죽었다. 모든 걸 잃은 여자, 그녀의 삶에 앞으로 무얼 담을 수 있을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하늘을 노려보며 화내는 신애 온전하다 말할 수 없었다. 종교에 기대어 안보이는 것에 기대어 숨으려 헸는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러 교도소로 살해범을 면회간 날, 그녀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만다. 빛이 그곳에만 비추듯 범인은 너무 평안해 보였다. 정작 고통속에 살아야 할 자가 하느님이 용서해주어 평온을 찾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무슨 권리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느냐고.

어떻게 해야 신애가 살수 있을까, 사람을 살게 하거나 고통으로부터 버티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중에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그 중에 미워하는 마음도 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했다면 지금 신애는 하느님을 미워하며 버티고 있다. 모든 것을 빼앗가 가는 것도 모잘라 살인자를 용서하고 그가 사는 세상을 지옥이 아닌 천국을 만들어 놓았다.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하느님이 죄인의 삶에 빛을 비추어주었다. 그래서 하느님이 보란듯이 죄를 짓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했다. 죄 짓고도 저리 쉽게 용서받고 행복해지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그래 발악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혹독한 걸음이다.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이상, 하늘을 마주해야 한다.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있음에도 삶은 계속된다. 아침은 어김없이 오고 밤 역시 어김없이 온다. 사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또한 죽는 것도. 

사람 사는 곳이라면 다 똑같다는 종찬의 말처럼 사람 사는 곳이라면 사람으로 인한 상처와 치유가 있고, 빛과 그림자가 있다.

솔직히 힘들어하는 신애만 보여 종찬의 서툰 표현방식이 탐탁치는 않았다. 신애와 종찬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안다. 그림자처럼 옆에 있어주는 사랑이 흔하지 않다는 걸, 저런 사랑이 요즘 같은 세상에 많지 않다는 걸....

밀양이라는 도시, 연기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웃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2007년에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한국 배우 최초로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종찬이 신애를 뒤에서 묵묵히 있어줬듯이 송강호가 전도연이 빛나게 해준 면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