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8. 10. 20. 13:37

택배기사의 폭행이 누군가의 sns를 타고 이슈화가 되고 있었다.
30살인 이 택배기사는 초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적장애인 어머니와 1살 위인 형을 돌보는 가장이었다.
폭행을 가한 당사자는 맞은 사람은 친형이고, 자신은 친동생이라고  해명에 나섰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지적장애, 형은 환각. 환청 장애란다. 형이 휴지를 모아 불을 지피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형을 집에 놔두고 나올 수 없어 택배일을 하는 동생이 형을 데리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하고 형에게 폭행을 가했다고 했다.
형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자신보다 형임에도 데리고 다닐 수 밖에 없는, 그의 고된 삶이 그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으리라는 건  안보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형을 폭행한 것에 대한 시민들의 공분은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의 삶의 무게가 너무 안쓰러워 안타까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어찌 이 한사람의 어깨에 다 올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매번 사회제도와 연결지지 않고는 인간다운 삶을보장할 수 없다.
장애인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사는 이들이 스스로의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채,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야 한다는 것은 '살기위한', '살아내기 위한' 이 아닌 견디어 내지 않으면 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벼랑끝에 매달린 버팀 그 자체이다. 어쩜 버티고 있는 손을 놔버리는 게 더 편안한 일일 수도 있을 만큼 그들은 사회속에서 철저히 외면된 죽음보다 더한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안은 칙칙하고 썩은 내장같은 냄새로 얼룩져있을 것이다. 피가 나야 오히려 빨리 낫는 법이다. 안으로 곪는 것이 더 위험한 일임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피흘리는 삶보다 눈물 흘리는 삶보다 소리내는 힘마저 잃어버린 그들의 삶에 우리는 너무 둔해있다. 왜? 내일이 아니니까.
비난이나 위로할 입만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장애인 가족의 답답한 현실앞에 안타깝고 무거운 절망이 내려앉는다.

 

폭행이 정당화 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이 장애인을 둔 가족은 백조처럼 얼굴을 물 밖에 두고 그 밑에서는 수없이 발버둥치고 있다. 종이한장만 어깨에 내려앉으면 그 무게에 내려앉고 마는 삶을 겨우 버티고 있을뿐이라는 말에 겪고 보지 않고는 그들에게 우리는 마냥 인륜이 어떻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같은 입장의 장애인을 둔 가족들은 하나같이 택배기사 동생의 어깨에 얹힌 무게의 고통에  같이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회제도는 장애인에게도 제대로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않다. 하물며 그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에게는 한톨의 동전만큼의 약도 없다. 나눠가져야 할 몫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같이 죽는 걸 택하고 싶을 만큼 삶이 곪고 피폐해져 있다.
장애인을 둔 엄마의 소원이 장애인인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거라는 말을 들었을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에 울 수도 없었다.

30살, 자신을 위해 꿈꾸고 사랑하며 살아야 그가, 지적장애인 엄마와 환청장애인 형을 다 감당하고 살아가는 건 더 어려운 일이리라.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숙명처럼 내 운명처럼 가슴으로 끌어안을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그리고 형을 안고 가장으로 사는 건 더 감당키 어려운 일인 것은 분명하다. 왜 이렇게 사회가 아프고 아픈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