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4. 17. 21:38

감독 소피아 코폴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온 샬롯(스칼렛 요한슨)과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에 온 영화배우 밥 해리스(빌 머레이)의 만남은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낯선 도쿄에서 소외된 무료함과 외로움에서 비롯됐다.

같은 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밥과 샬롯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호텔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낯선 도시에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외로운 모습을 서로 발견한 것이다. 

도쿄 시내를 구경하고 노래방도 가고,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게 꼭 일본이란 낯선 장소를 설정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익숙한 곳이라 해도 혼자선 그저 외롭고 무료할 수밖에 없다.

 

 

샬롯은 철학 전공으로 졸업은 했지만  진로를 정하지 못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삶이 불투명하다.

"사는 게 힘들어요. 나이 들면 나아져요?" 중년의 밥에게 묻는다.

그는 "아니"라고 하더니 또다시 "아냐. 나아져."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샬롯의 눈에 밥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젊은 날의 삶도, 중년의 삶에도 외로움은 물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될수록 주변 상황에 덜 흔들리게 되지. 알면 괜찮아."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초조하겠지만 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가고, 자신과 주변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면 덜 흔들릴 것이다. 살다 보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슬슬 세상과 타협하게 살게 된다. 내가 덜 아픈 쪽으로, 내가 덜 피곤한 쪽으로, 두루두루 원만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내게 던져주게 된다.

샬롯은 또 묻는다.

"결혼생활은 살수록 나아져요?"

이번엔 밥 해리스는 "쉽지 않아."라고 대답한다.

샬롯은 이제 결혼 2년 차다. 바쁜 남편으로 인해 소외된 듯 외롭고 공허하다.

앞으로  나아질 것인가 묻는 건 지금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결혼생활을 오래 한 밥도, 이제 시작한 그녀도 힘들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밥도 한때 좋았다. 아내와 항상 붙어 다녔지만 이제 아내에겐 자신보다 애들이 먼저인 게 현실이다.

"내가 설 자리가 없어."

결혼해서 아이들이 생기면 사는 건 훨씬 복잡해진다.

"제일 두려운 건 첫 애 태어날 때야. 그 순간 지금까지의 삶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거지."

이 때부터는 개인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가중한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보람이 되고, 기쁨이 되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살아본 자로서, 앞으로 많이 나아간 본 자로서 미래가 아주 많이 남은 샬롯에게 "희망을 가져"라고 말해준다.

둘은 낯선 일본 도쿄에서 같은 이방인이라는 것만으로 친근해졌다. 이질 감속에서 드는 동질적인 느낌은 나이차와는 상관이 없이 소외감과 외로움이란 신호를 느꼈을 뿐이다.

처음엔 타지에서 그저 고향사람 만나 반가운 것 같은 친밀도가 생기는 정도였다.

일본 광고를 찍기 위해 잠시 온 곳이지만 일본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않는 상황에 놓이면 같은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만 봐도 반가운 것이다.

다른 세대, 다른 환경, 다른 인생인데도, 오랜 산 밥도 이제 살아갈 샬롯도 같은 향기가 난다.

그저 카펫 색깔이나 묻는 아내, 아이들은 아빠가 보고싶지만 없어도 그리 불편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걸 안다.

아이들도 아빠인  밥도 다들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다. 덜 흔들리며 사는 것이다.

잠들어 있는 남편 옆에서 잠 못 이룬 샬롯도 바쁜 남편으로 인해 호텔에서 혼자 붕 뜬 소외감이 드는 것도 아이가 생기면 옮겨갈 것이다. 덜 공허하기 위해서 적응할 것이다. 익수 해질 것이다.

 

이들은 육체적 공유가 아닌 정신적 공유를 하는 것이다.

영화의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으로 통역과정에서 사라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꼭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다 전달되는 건 아니다.

아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고 상대의 의사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 같다.

말의 의미를 해석해주거나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의견 충돌로 싸우다 보면 점점 그냥 내버려 두게 된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굳이 해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그냥 수용하는 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바람에 덜 흔들리기 위해 그냥 적당히 뭉개고 사는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는 것 , 서로 다른 환경으로 이입되지 않는 감정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통이 사라진 세상은 외로움만 더 크게 다가와 앉는다

나이차가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내면에 집중할 소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파스타가 먹기 싫다. 좀 다르게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밥의 말에 그럼 '일본에 눌러앉아 살라'는 아내의 말에 통역기를 가동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따지고 들면 피곤해지는 건 본인이니 그냥 사라지게 놔두는 것이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외로워지는 것 같다. 공허한 메아리처럼

사랑할 때 온통 그 사람의 마음에 가 앉아 있으려고 하니  통역이 필요 없지만 왠지 결혼생활은 통역이 필요할 것 같다. 오래된 부부 사이에도 말이다. 그러니 샬롯이 앞으로 통역할 내용이 얼마나 많이 펼쳐지겠는가?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경우가 많아지면 통역을 해야하거나 그냥 그저 상황에 맞게 내려놔야 살아지는게 아닐까. 

밥의 '좀 다르게 살고 싶다'라는 말이 언저리를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