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20. 5. 30. 11:37

 

영화 <일요일의 병>

 

키아라(바바라 레니)는 8살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35년이 지나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10일간 함께 보내줄 것을 부탁한다. 지금 키아라의 나이는 43살,

헤어질 때 8살이었던 아이가 마흔을 훌쩍 넘어 찾아왔지만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어머니 아나벨, 오히려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딸을 버리고 떠난 아나벨(수지 산체스)은 사교계에서 성공한 유명 인사가 되어 지금의 남편과 딸과 함께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아나벨은 지금의 남편에게 자신의 35년전에 버리고 온 딸이 자신을 찾아왔고 10일간 자신과 함께 있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는 말을 건넨다.

남편은 왜 굳이 이제와서 10일을 같이 지내자고 하는 걸까, 자신을 버렸다고 복수하려는 걸까, 아니면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걸까 의심스러워 변호사 입회하에 키아라와 대면한다. 키아라는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달리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10일을 같이 보내달라는 것뿐이라는 뜻을 전한다. 아나벨의 남편은 키아라의 요구 조건에 응하면 친족 포기서를 작성해달라는 계약서까지 들이민다. 키아라는 고민할 것도 없이 서명한다. 남편과 변호사가 그 모든 과정을 키아라와 협의하는 동안 아나벨은 창밖만을 응시할 뿐 키아라를 쳐다보지 않았다.

영화 일요일의 병 아나벨 역 '수지 산체스'
   영화 <일요일의 병> 키아라 역 '바바라 레니'

 

키아라가 어머니를 데리고 간 곳은 아나벨이 35년 전에 떠나온 시골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허영심과 자기 애착이 강한 아나벨이 시골에서 옷에 흙을 묻히며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키아라는 아나벨과 10일을 함께 하려고 모셔 온 어머니와 아무것도 함께 하지 않았다. 혼자 있게 두었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당신도 기다림이 어떤 건지 외로움이 무언지 느껴보라고 혼자 두는 것처럼.

키아라는 주로 혼자 시간을 보냈다. 홀로 호숫가에 앉아있거나 마당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러려면 왜 데리고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버린 원망으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도 도대체 딸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아나벨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왜 멀쩡히 살아있는 전남편 마티외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는지도 의문이었다. 딸이 자신을 버린 것에 대해 사과받으려는 건가 싶어 미안하다고 말하자 키아라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는 것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도 사과를 받으려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아나벨은 딸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어가고 있는 딸이 병 때문에 자신이 필요해서 데려온 거로 여긴다. 그래서 키아라에게 묻는다. 내가 널 돌봐주면 좋겠니? 그렇다면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에 갑자기 이제 와 가여운 듯 동정하는 엄마의 태도에 화가 난 키아라, 침체되었던 감정을 쏟아내며 말한다. 딸을 버리고 간 여자는 아무것도 몰라, 늘 창가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고 지금도 여기 앉아 기다린다고 .. 억눌렸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지고 순간 치솟은 분노에 그만 들고 있던 컵을 아나벨에게 집어던지고 만다. 아나벨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자신을 아프게 한 엄마지만 키아라는 엄마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아나벨은 놀란 키아라를 달랜다. 엄마에 대한 상실과 끝없는 기다림에 보낸 날들로 하염없이 창가에 앉아 엄마를 기다려 온 키아라의 마음에 상처에 비하면 아나벨 이마의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영화 일요일의 병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키아라
꽃씨를 심고 있는 아나벨

 

아나벨은 우아하게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마당에 꽃씨를 심었다.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꽃을, 딸이 죽어가는 사실이, 자신이 비운 척박한 땅에서 아프게 자란 딸이 행복하지 못했고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간다는 것에 대한 아픔으로 작용했을 터.

씨앗을 심는 엄마의 모습을 창가에 서서 지켜보던 키아라는 사진에 담는다.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딸의 모습, 난 이 모습이 참 아프게 느껴진다. 마흔이 되어 노년의 된 엄마 앞에서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보다 더 말이다. 성장하는 일상 속에 있어야 할 엄마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던 삶이었기에 더 애잔한지도 모르겠다.

키아라는 엄마에게 다가가 매일 물을 줄 수도 없으면서 왜 씨를 심느냐는 듯 묻는다. 아나벨은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강한 녀석, 캄파뉼라라고 말한다. 엄마의 손길 없이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 딸이었으면 했을 테지만 죽어가는 키아라에 대한 죄책감이 아나벨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키아라는 아직 약속한 10일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혼자 죽어가는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아나벨. 매정하고 차갑던 아나벨에게도 엄마라는 피는 흐르고 있었다.

키아라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원하는 것이 있어 자신을 찾아 데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재차 묻는 아나벨이다. 키아라는 진짜 원하는 걸 말해줄 테니 원치 않으면 돌아가라고 하면서 아나벨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끝까지 키아라의 의도를 대사로 내보내지 않고 두 배우의 행동이나 표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왜 그렇게 표정이 돌처럼 굳은 것일까?

아나벨은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전남편 마티외를 만나러 간다. 키아라가 만나보라고 말한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티외와 나눈 대사로 짐작해볼 뿐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키아라, 세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감정에 대한 정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아나벨로 인해 침체되어 있는 아픈 기억과 녹슬지 않는 고통을 이제 털어내는 것,

시골에서 사는 지루한 삶보다 성공에 대한 열정을 가진 아나벨의 행동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가도 그녀의 부재와 상실은 키아라나 마티외에게 힘든 여정이었다. 아나벨은 마티외에게 원한이 있냐고 묻는다. 마티외는 그러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변했으니까, 시간이 흘러 아픔이 사그라들고 미움이 희미해지지 않으면 사람은 그 덫에 갇혀 제대로 살 수 없다. 우리가 살게끔 기억은 희미해져 우리가 앞을 향해 살아가게 도와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도 더러 있다. 키아라에게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고 마티외에게도 말없이 떠난 아내 아나벨이었을 것이다. 인사도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그들의 내부에 침체되어 있었고 그 기억에서 아빠가 살아갈 수 있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것 같다. 서로에게 인사할 수 있게 서로의 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일요일의 병> 전 남편 마티외를 만나는 아나벨

 

아나벨은 마티외를 만나고 다시 키아라에게 돌아온다. 방이 아닌 헛간 땅바닥에 누워있는 키아라, 일으켜 세우려 하자 피곤해 더는 힘을 낼 수 없다는 딸, 죽어가는 고통으로 하루를 힘겹게 견디던 키아라, 키아라를 수레에 싣고 호숫가로 데리고 간다.

그녀가 엄마에게 원했던 부탁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키아라가 아나벨에게 부탁했던 것이 존엄사였고 아버지가 "누구나 쉴 자격이 있어 "라고 말한 것은 이 죽음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멈추어주는 것, 생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엄마의 품에서 죽는 것,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버렸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던 아나벨과의 마지막 인사, 엄마의 품에서 쉬고 싶은 키아라의 희망이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엄마에게 마지막을 부탁한 건 인사 없이 떠난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고 생을 마감할 생각을 굳힌 그녀가 이 생에서의 엄마와의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키아라는 마지막 "엄마"라고 부르며 "이해해요. 전부 다요." 말했고 아나벨은 딸을 꼭 끌어안았다. 호수에서 조용히 키아라를 보내는 아나벨의 표정은 너무 압권이었다. 처음 딸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보다 내적 변화는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슬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재로 살아온 딸을 보내고 그녀가 돌아와 딸이 머물던 집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수지 산체스가 맡은 아나벨은 속을 알 수 없이 차겁게 잘 도포된 여자이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을만큼 사교계에서 잘 포장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직도 만족한 삶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힘든거고. 10일간 함께 하자는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리고 딸과 그동안 추억을 쌓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그녀의 품에서 삶을 부여받았듯이 그녀의 품에서 그녀의 죽음을 거두었다. 아무리 딸이 원한 부탁이지만 그녀는 너무 침착해서 내내 고여있는 아픔처럼 분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그곳에서 다시 자리를 옮겨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딸은 이해했고 용서했다지만 자신은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가 버린 35년동안 딸과 보낸 10일이 아마 더 큰 무로 다가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스페인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잔잔한 것은 아닌가했는데 역시 후반부 강렬하게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