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10. 1. 20:59

감독 린 램지 

케빈에 대하여 

이 영화는 엄마로 사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 비추어 보게 만들고,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 있는 고민을 던져 주고 있다.

자꾸 영화 속 캐릭터들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케빈의 감정을, 엄마 에바의 감정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 사람의 감정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케빈의 입장이 되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엄마인 에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한다.

또 나라면, 하고 대입도 해본다. 영화 속 미스터리 한 부분에 대해 왜 그랬을까? 를 곱씹게 만든다.

왜 케빈은 아버지를 죽였을까? 케빈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길래? 엄마에 대한 케빈의 진짜 마음이 무얼까? 저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을 수는 있을까?

인생에는 엄마와의 관계만 있는 게 아닌데 왜 케빈은 엄마에게 저렇게까지 집착하며 분노하는 것일까?

왜 아무 상관도 없는 학생들을 죽이면서까지 엄마에게 잔인하게 굴까?

엄마에 대한 분노나 증오였다면 그냥 엄마를 죽이고 말 것이지, 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여야 했을까?

살인을 통해 엄마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엄마는 케빈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무얼 보여주고 무얼 표출한 것일까?

한참 생각해보면 케빈은 엄마를 미워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케빈의 세상에는 엄마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증오심이 지배적인 것 같다. 확인하고 싶은 심리와 원망이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 듯한.

 

 

자유로운 여행가로 살던 에바가 원치 않은 임신으로 엄마가 되고 육아로 인해 힘들어했다. 마치 아이는 에바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케빈은 어린애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엄마 에바를 괴롭혔다. 아빠와 엄마에게 대하는 어린 케빈의 이중적인 모습을 통해 에바가 가졌을 감정에 가까이 가니 엄마가 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사실, 교묘한 방법으로 에바를 괴롭히는 어린 케빈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어린 케빈의 증오가 엄마에게 보내는 것이라서.

보통의 아이들은 사랑을 확인하고 인정받고 싶어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한 행동을 하는데 케빈은 끊임없이 엄마를 괴롭히고 조소하는 행동만을 자행했다.

케빈과 에바는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엇나갔다. 에바는 엄마로서, 케빈은 자식으로서 서로를 제대로 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서툴렀다.

그렇게 서서히 쌓아 올린 불신과 증오가 그런 끔찍한 불행의 예고편이라는 걸 몰랐다. 아버지는 에바와 케빈 사이에서 훌륭한 조율자가 되지 못했고 계속 방관자처럼 존재했다.

케빈은 분명 엄마에 대한 갈증이 깊은 아이였다. 가족으로 만들어졌지만, 가족으로 담아지지는 못했다.

어려서도 커서도 그들의 틈은 메워지지 않았다. 서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케빈이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 엄마는 타고나야 하는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케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또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나는 자식이기도 하고, 또 엄마이기도 하다.

과연 엄마는 자식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일까?

엄마도 사람이다. 엄마라고 그 모든 행동을 감수할 만큼의 아량을 가진 신이 아니다.

엄마는 본능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자리이다. 여러 사람의 응원과 도움으로 말이다.

케빈도 성장해 가지만 엄마인 에바도 엄마로서 성장하는 자리다.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준비되고 완벽한 엄마는 없다.

엄마이기에 그 모든 걸 감내하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요구다.

엄마가 된 그 순간부터 육아는 마치 엄마 혼자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게 만들어 놨다. 그러나 육아는 나누어 가져야 할 아주 힘든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다.

사랑으로만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환상 따위는 엄마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환상이다.

남편을 비롯한 사회는 여자에게 엄마라는 족쇄를 채웠고 희생을 숭고하게 미화시켜 놨다.

엄마들은 감정을 많이 짓누르면서 절제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사랑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감당해 내지만, 육아로 인해 자유를 가장 많이 억압당하는 존재임은 확실하다.

엄마로 산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그 무게감과 두려움을 모든 여자가 다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가슴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들의 고민에 대해 남자들은, 사회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무조건 사랑스럽다면 문제 될 게 없겠지. 아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포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

오랜 세월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서 모성은 여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본성처럼 길들어 왔다.

엄마라면 ~~ 엄마라면 당연히 제 자식을 위해 자신을 놓아버릴 만큼 희생적이어야 하고 자식은 다 소중하다고 자연스럽게 심어줬다.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아도, 원치 않은 임신이고 출산이라도 엄마니까 양육은 물론이고 아이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어야 할 건 엄마의 몫이라고 말이다.

엄마로 살기 위해 자신을 얼마만큼 내려놓을 수 있는지 끝없이 자극하고 위협받아 본 적이 있다면 에바만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공사 현장의 소음으로 덮어버릴 만큼 육아를 버거워해 본 적이 있다면 에바를 모성애도 없는 여자로 치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한 행동에 대한 세상의 비난과 마을 사람들의 공격을 다 받아들이고 살아낸다.

감옥은 케빈이 갔지만, 감옥 밖 현실에서 죗값을 치르는 건 엄마 에바였다. 부당하다 억울하다 생각지 않고 누구보다 살 떨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엄마에게 자식이 때로는 견뎌내야 할 대상으로, 때로는 살아낼 이유로, 때로는 존재 이유로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자식이 주는 게 다 행복이지 않듯이, 부모가 주는 것이 다 사랑이지 않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