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20. 1. 31. 16:47


지금부터 등장할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우리와 다르다는 건 아니다. 가족은 남들이 알 수 없는 강한 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의 관계는 밖에서 보는 풍경과 안에서 보는 풍경이 다르다. 그 체감 또한 다르다.

 

 

 

길버트(조니뎁)는 가장이다.
엄마 같은 누나 에이미가 살림을 맡고, 길버트는 식비를 대려고 시간 외 근무를 할 뿐 아니라 지적장애인 18살의 남동생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감당 해야했다. 일터를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고 하루종일 쏘다니느라 엉망인 어니의 목욕도 매일같이 시켜야했다. 어니에게 길버트는 따뜻한 형이다. 아빠 같은 형이다. 길버트는 아빠의 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10살에 죽을거라던 어니는 18살이 되었고 걸핏하면 높은 가스탱크에 올라 경찰차가 출동했다.
15살의 사춘기 소녀 여동생 엘렌도 있다. 형은 이미 오래 전 집을 나갔다.

길버트가 일하는 램슨 식료품점은 대형 푸드랜드로 인해 파리만 날리고 아버지가 지은 집은 낡고 낡아 손 볼 곳이 너무 많았다. 어머니가 앉아 있는 거실 소파 아래는 어머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낡아 아슬아슬했다. 임시방편으로 튼튼한 합판을 대놓았다.
17년 전 아버지가 한마디 없이 목을 매 자살을 했고 그 후 어머니는 충격으로 먹을 것을 달고 살았다.
그 후유증으로 초고도 비만이다. 7년간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고래 아줌마'라 부르며 창문으로 구경한다. 구경거리, 놀림거리의 대상이다.
길버트는 자신의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구경하러 온 아이를 안아 자신의 엄마를 보여주기도 하고 엄마를 '뭍에 올라온 고래'라 표현했다. 붙박이장처럼 거실 소파에서 자고 먹으며 자신의 삶도 자식도 몸무게도 감당 못한 채 살아 있다. 자식들이 생계와 어니를 감당하고 사는 데도 말이다. 한 때는 미인에 쾌활했던 그녀가 아버지가 사라진 후 그 충격으로 서서히 망가져 간 것이다.

 

 

 길버트의 기억 속 아버지는 속마음을 알 수 없고 표현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의 어떤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서도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길버트는 어른들의 무너짐으로 많은 것을 떠안았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가족이란 가까이 있고 싶은 반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가 하면. 예속 되고 싶은가 하면 독립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미움과 사랑이 동시에 왔다갔다 한다. 반대 감정이 양립하는 것이다. 관계가 주는 중압감이 크면 클수록 , 가족으로 인해 힘들거나 심적 부담이 크면 클수록 더 자주 ㅡ
어니가 살아있었으면 하다가 반면 그 반대이기도 하는 길버트의 마음이 그렇다. 눈을 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어니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이 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엄마에 대한 마음 역시 그럴 것이다. 사랑과 미움, 부끄러운 반면 불쌍하기도 한.
에이미나 길버트의 표정에 지친 그늘이 질 법도 한데 삶이 버겁기도 할텐데 에이미,길버트, 엘렌 어느 누구 하나 엄마에게 불평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고 엄마와 어니를 돌봤다. 정말 모두 착하다.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무게는 다르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다. 내리사랑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 같지만 그 반대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게가 있다.

그가 사는 작은 마을 엔도라를 벗어난 본 적이 없는 길버트, 어쩌면 가족한테 꽁꽁 묶여 자신을 위해 어떤 자유도 어떤 변화도 시도조차 해 볼 생각도 못했다. 매일 답답하고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고 변화도 없는 마을과 길버트의 일상이 닮아 있다.

 

 

 

그런 마을 엔도라에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하던 베키(줄리엣 루이스)가 자동차 고장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된다. 베키는 길버트와는 다른 면을 가졌다. 엔도라를 벗어난 적이 없는 길버트와는 달리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자유로운 삶을 산다. 베키는 어니를 대하는 따뜻한 길버트에게 호감을 느낀다. 길버트도 그렇다. 하지만 길버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베키가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다가간다.

길버트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베키가 묻는다.
엘렌도 얼릉 컸으면 좋겠고, 어니도 멀쩡해줬으면 좋겠고, 어머니도 에어로빅 수업을 들었으면 하고, 새집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족에게 삶의 코드가 맞추어지듯 원하는 게 다 이런 것이다. 너 자신을 위한 것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을 감당하고 살아야 길버트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로 들렸다. 달리 말하면 자기가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고 싶은 갈망일 줄도. 엘렌이 얼릉 커 독립하고 어니가 멀쩡해져 돌봄이 필요없게 되고 엄마가 바깥 세상과 어울려야 부담없이 자신을 꿈꿀텐데. 가족이란 게 그렇다. 가족의 고통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가 없다. 때론 외면할수록 가슴을 더 옥죄여 온다. 죄책감과 사랑은 다르지 않다. 가까이 있는 감정이다.

 

18살 생일 파티를 위해 더러운 어니를 씻겨야 했던 길버트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어니를 심하게 때리고 만다. 사고치는 어니로 힘들었던 그가 폭발한 것이다. 길버트는 그 길로 차를 몰고 집을 나가 버린다. 엔도라를 벗어나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멀리 못가 다시 어니를 찾아 돌아온다. 그는 가족이 밟혀 떠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심성을 지녔다. 착한 아들, 착한 형이다.
엄마는 길버트가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엄마 역시 자신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놀림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괴물 보듯 쳐다보는 이웃의 시선에 상처받은 엄마의 표정에 길버트는 어떤 말도 못한다.

차를 고친 베키도 엔도라를 떠나고 18살 어니의 생일에 엄마는 갑자기 계단을 힘겹게 올라 2층 침대에 눕는다.그리고 아들 어니가 보고 싶다던 엄마는 어니가 2층에 올라왔을 때 이미 죽음으로 사라진 후다.
아들에게 사라지지 말라더니.

 

 

엄마의 죽음도 슬프지만 엄마의 시신을 옮기려면 크레인을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사람들이 몰려들거고 엄마는 구경거리가 될거다. 길버트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엄마를 더 이상 놀림거리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다.

엄마가 움직일 때마다 거실바닥이 흔들렸다. 엄마의 무게를 감당 못한 건 자식이 아닌 엄마 자신과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아버지가 목을 맨 집, 여기저기 낡은 집, 붙박이처럼 엄마가 앉아 있던 집, 엄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집과 함께 침대에 고운 얼굴로 잠든 엄마를 놀릿감이 되지않게 이별식을 치른다.

집을 불태운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타는 집을 한없이 바라볼 뿐이다. 아, 삶이 무어라 말인가. 가슴이 아프다. 가족 이야기만 하면 가슴의 추가 흔들린다.
마음이 이쪽 끝에 가 있다가도 저쪽 끝에 가 매달린다.
가족의 구성원은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이다. 가족은 사랑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연으로 엮여 있다. 책임이나 사랑의 크기를 수치로 드러낼 수 없고 한쪽 끝에만 있을 수 없는 감정과 무게다.

 

 

 

일단은 작품 속에서 나와 배우들 이야기를 좀 하자면 어니 역을 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지적 장애를 가진 연기실력이 26년 전에 이 정도라면 그냥 타고난 연기꾼이다. 그런데 상복이 안 따라준 거네. 잘 모르는 사람은 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서너 번 받은 줄 안다. 하지만 후보로만 오르고 상을 거머쥐지 못했다. 오죽하면 오스카가 버린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2015년에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길버트그레이프, 이 남자가 바로 조니 뎁이다. 와우?
캐리비안 해적의 잭 스패로우, 그 남자다.
젊을 때 무지 꽃미남이었네.
이런 모습을 보니 세월이 야속하네.

 

posted by 해이든 2019. 3. 25. 22:45

행복 목욕탕


감독 나카노 료타

 

잔잔하면서 강하다. 따뜻하면서 슬프다. 기대이상으로 감동적이다. 
이 영화를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호출을 받고 학교로 간 엄마는 딸아이의 모습에 망연자실한다. 
딸 아즈미(스기사키 하나)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  
이유없이 당하고도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는 아즈미의 고통 앞에서 엄마 후타바(미야자와 리에)는 그동안 딸아이가 '머리아프다, 배 아프다' 말한 것이 투정이 아닌 왕따로 인한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두려움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저 힘든 시간을 견뎠을 아즈미에게 엄마는 감정을 안으로 감추고 유니폼으로 갈아 입히고 학교를 빠져 나온다.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과 모욕으로 가슴이 멍 들었을 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어떤 위로의 말도 어떤 동요도 하지 않고 자전거에 태운다.
 
아즈미는 체육시간에 교복을 잃어 버렸다.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아즈미를 향해 엄마는 학교에 가라고 떠민다. 
"엄마 나는 맞설 용기가 없어. 너무 하찮은 인간이라, 엄마는 절대 몰라 내 마음!"
"도망치면 안돼! 맞서야지. 네 힘으로 이겨내야 해."
아즈미가 용기내어 맞서주기를 바란다. 물러서지 않고 언젠가는 맞서서 그 이유없는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  자신도 없는 세상에서 강하게 스스로 이 난관을 버티고 이겨내어 세상에  나갈 수 있게 아즈미가 선택해야 한다. 
계속 이유도 없는 희생양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님 강하게 부딪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용기내어 이 말도 안되는 장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선생님과 엄마는 지켜줄 수 없다. 스스로 성장해가고 이겨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당당해지지 않으면 이겨낼 수 없고, 맞서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아즈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즈미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맞섰다. 한번이 어렵지 막상 용기를 내고 나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찾은 교복을 입고 엄마 앞에 당당히 선다.
 
엄마 후타바는 말기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암선고를 받는다. 
남편 가즈히로(오다기리 죠)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집나간지 1년이다. 남편을 찾아 헤매느라 목욕탕은 문 닫은지 오래 되었고, 지금은 남아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자신없는 삶을 살아 갈 딸을 위해 준비를 해야한다.
 
사립탐정을 통해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 찾아간다.  어떤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파칭코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던 사람이다.
철없는 남편이 좋아서 찾은 것은 아닌데 사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다.
남편은 여자아이 아유코(이토 아오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고작 집나가서 산다는 것이.남편은  항상 방관자처럼 무책임했다.
"나 이제 얼마 살지 못해 그러니까 돌아와" 그렇게 네 가족이 되었다. 사라졌던 아빠와 낯선 여자꼬마 동생 아유코까지 모여 살게 된다.
남편이 집 나가는 바람에 열지 못했던 목욕탕을 열고, 가족 모두가 역할을 분담하여 목욕탕을 청소하고 카운터를 지키고 각자 제 몫을 해 나간다.

 "이제 목욕탕을 열거니까 밥 값을 해야 해. 다같이 열심히 일하는 거다."

가족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

 
후타바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아즈미와 아유코를 데리고  잠시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 여행은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매년 4월 25일이면 아즈미네 집에 커다란 게 한상자가 배달되어 온다.
엄마는 아즈미에게 키다리 게를 보내 준 먼 친척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쓰라고 했었다.

여행 중에 엄마는

어느 게식당에 들어가 키다리게를 주문하고 ,오랜 세월 감추어둔 비밀 하나를 꺼내 놓는다. 그건 아즈미가 자신이 낳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즈미 아까 만났던 그녀가 바로 네 엄마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너는 강해져야해. 그리고 네엄마를 받아들여야 해."
 
아즈미의 친엄마는 청각장애인이었고 키다리게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청각 장애인인 친엄마가 어떻게 수화를 할 줄 아냐는 질문에 아즈미는 수화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언젠간 반드시 필요한 날이 올 테니 배워두라고 했어요."

이유도 모른 채 수화를 배웠던 아즈미, 언젠가 꼭 필요할 때가 이 날이었던 것이다.
청각장애자였던 엄마는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엄마가 아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먼 친척인 것처럼 매년 키다리게를 보내온 것은 친엄마였던 것이다.
 
이러고 보니 저 남편 가즈히로가  더 형편없어 보인다. 결국 아즈미는 후타바의 친딸도 아닌데, 아즈미와 후타바를 버리고 누구의 딸인지도 모를 여자애를 키우고 있었던 것  아닌가?
무능하다 못해 무책임한 남편을 대신해 억척스럽게 산 후타바에게 연민의 정이 눈물처럼 솟는다.

최선을 다해 산 것도 죄이던가?  기다리는 건 죽음밖에 없는 그녀가 너무 안쓰러워 미치겠다.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지금 그녀는 철없는 남편으로 인해 아즈미를 키우느라 억척스럽게 산 세월을 원망하기도 바쁠텐데,
청각장애인 엄마를 위해 딸에게 수화를 배우게 하고, 딸이 그리웠을 청각장애인 엄마에게 딸을 보여주고,아즈미에게 엄마를 만나게 해주고,무능한 남편과 그 남편이 데리고 온 아유코까지 원없이 끌어 안고 있다.

후타바는 기준 이상의 몫을 해내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다. 

후타바가 가족에게 보여준 만큼 두 아이와 남편도 그녀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니 눈물을 참아내려 한다. 
어떤 사정이었건 아즈미와 후야코의 친모는 자신을 버렸다. 그런 자신들을 후타바는 누구보다 뜨겁게 끌어 안아준 유일한 엄마였다. 삶의 용기를 내어주고 따듯한 품을 내어주고 강한 정신력의 유전자를 주었다.

그런 후타바에게도 아픈 비밀이 있다. 후타바 역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  자신을 버린 엄마이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한번 안겨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탐정의 도움으로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엄마는 삶과 죽음을 통틀어 가혹하고 잔인했다. 자신을 거부했다. 딸이 없노라고 거부했다. 

엄마가 되어 자식에게 한 없이 주면서 자신을 낳아준 엄마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안아주고 싶지 않을까,  그게 엄마이지 않을까 찾아나선 그녀의 발걸음이 참 아프다.

 

한 번쯤 강인한 엄마에서 물러나 한없이 안기고 싶은 연약한 자식이고픈 후타바의 바램은 너무나 아프게 무너진다. 
원망도 없이 다 내려놓고 그저 그리움 하나로 안아보고 싶었을 뿐이었을텐데, 진정한 가족이 된다는 건 꼭 내가 낳은 피붙이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엄마의 부정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슬프고 화났다. 
처음으로 그녀가 분노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가족들 속에서 웃음짓는 엄마를 향해서 말이다.
 
"조금 더 살겠다고 삶의 의미를 잃고 싶지는 않아"
엄마의 강인함과 포용력으로 이 붕괴된 가족을  행복목욕탕으로 집결시키고 그녀는 떠난다.
가족들은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힘을 합쳐 가업인 목욕탕을 이어간다.

가족이라는 공간을 쥐어주고 간 후타바,

무능하고 철없는 남편이  지탱하게 가족의 각자 자신의 밥값을 하게 몫을 놓고 간 후타바,

청각장애인 엄마까지 자식을 못 보고 사는 슬픔을 더는 갖지 않게 그 모든 것을 해주고 그녀는 떠났다.

행복목욕탕은 후타바의 품이다. 

 

posted by 해이든 2019. 3. 19. 22:01

미스 리틀 선샤인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대학 강사로 성공하려고 발버둥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한 남편 리차드(그렉 키니어),

이런 남편을 경멸하는 엄마 쉐릴(토니 콜렛), 헤로인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 난 할아버지(앨런 아킨),

투 조종사가 될때까지 9개월째 자신의 의사를 노트에 적어 전달하며 묵음 수행하는 아들 드웨인(폴 다노),

게이 애인한테 차인 후에 자살을 시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 이 집에 얹혀 살게 되는 외삼촌 프랭크(스티브 카렐),

마지막으로 7살짜리 막내 딸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슬린)는 유난히 미인대회에 집착한다.

 
자신의 실패에만, 자신의 꿈에만, 자신의 걱정거리만,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불행으로 상처내느라

각자 자신의 무게만을 감당하기 바쁘다. 다 벽만 만들고 소리내지도 듣지도 않는 세상, 한 공간에 담겨도 고립된 삶과 다르지 않다.

봉고버스에 탄 가족들 표정
고물 봉고차 안의 가족의 모습

그러던 어느날, 올리브에게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인대회 '미스 리틀 선샤인'대회 출전 기회를 잡게 된다.

딸아이의 소원을 위해 온 가족이 낡은 고물 봉고차를 타고 1박 2일 동안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 고물 봉고차는 이 가족을 암시해준다.

멈추고, 망가지고, 문짝도 떨어져 나가고,엉망진창인 고물차이다. 이 가족의 모습처럼  서로 의견이 충돌하고, 자살 시도하고, 마약 하고, 묵언으로 가족과의 소통을 차단하고, 엉망진창인 가족의 모습이다.

올리브의 꿈을 향해 온 가족이 다 한 곳을 보다보니 서로가 다 위로받고 싶고,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차가 굴러 가게, 힘을 낼 수 있게 ,아퍼도 일어설 수 있게, 많은 장애물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위로와 응원해 주어야 하는 가족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 

뒤에서 다같이 밀어야 가는 차, 온 가족의 힘으로, 도움으로 움직이는 차, 가족도 그렇다. 인생도 그렇다.

삶이란 여정속에서 어쩌면 삶은 어른이나 아이나, 늙거나 젊었거나, 책임이 크거나 적거나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아픈 것 보다 가족이 더 아픈 것이 나와 상관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 아픔에 너무 거리를 두고 타인처럼 살아온 자신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가족은 내가 타인으로 취급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그들과 떨어져서 내 행복을 꿈꿀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 소중함을 망각하고 산  자신들을 알아간 여정이었다고 본다.
 
색맹이라 비행기 조정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드웨인은 차에서 뛰쳐 내린다. 

 "이혼, 파산, 자살, 다들 패배자인 이 가족에  끼고 싶지 않아"

어떻게 달래보라는 아버지 리차드의 말에 엄마는 말한다.

 "뭔 할말이 있어. 그냥 기다려주는 수밖에"   가족은 원래 그렇게 기다려준다. 

그리고 오빠에게 조용히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아무 말없이 위로해 주는 올리브처럼 유일하게 나의 절망과 나의 희망을 안아줄 품이었다.
가족의 크기가 다 담겨 있는 장면 같았다. 
 
패배자집단이라고 거기에 합류하기 싫다고 뛰어 내려도 그저 기다려 주는 것 밖에 할 게 없는 엄마라도 아들은 돌아간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누구보다 안기고 싶은 가족의 품이라는 걸 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힘들 때 자신을 담을 곳은 가족이 유일하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가족은 수식어가 아니다. 
가족은 목표나 꿈이 아니다. 가족은 존재 자체로 힘이 된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설득시켜야 하고, 강요 당해야 하고, 이해 받으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곳,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 그대로를 안아 줄 집단이고, 존재함으로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된다.

딸의 공연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가족

 

빌어먹을 대회 '미스 리틀 선샤인'
보이는 것에 전부인냥 미쳐 있다. 어린 아이들이 화장을 떡칠하고,억지웃음으로 포장하며, 거기에 부모들은 열광하고, 평가받고, 점수 매기고,다들 미쳐있다. 이건 어른들 미인대회였다. 아이들의 동심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다워야 할 나이에  동심이 추락하고 있다.
미인대회를 개최한 사람들도, 점수를 매기는 사람들도, 부모들도 미쳤다. 
어린이 미인대회라는 것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삶을 상업적 용도로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 대회에 어울리는 아이는 올리브 뿐이었다.
미인대회라는 이름하에 그들이 만든 건 어른들을 위한 스트립쇼와 다르지 않았다. 어린이들을 이용한 퇴폐적인 대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환상적이야라고 말하는 사회자마저 변태 같았다. 속물덩어리들
"무대에 세우기 싫어"
"둘러보세요. 저런 놈들이 올리브를 평가하게 만들고 싶지 싫어요"
"원하는 대로 놔두자"

올리브 가족은 일제히 모두가 한마디를 던진다. 남이 내 가족을 평가하게 두고 싶지 않다. 

저런 미친 무대에 딸을 세우기 싫은 아빠, 동생을 저런 사람들에게 평가받게 하기 싫은 오빠, 딸이 집착하며 꿈꿨던 대회였기에 딸의 선택에 맡겨 두자는 엄마, 모두 가족으로서 갖을 수 있는 애정이고 보호이고, 선택이다.
올리브 역시 느낀다. 꼴등이라는 걸, 이런 무대에서 1등이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올리브는 이 대회를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과 그리움을 담아 할아버지에게 바치기 위해 무대에서 열심히 춘다.

할아버지(알란 아킨)와 올리브가 열심히 준비한 미스 리틀 션샤인 대회의 마지막 무대를 통해 가족 모두가 변화하게 된다.

올리브 눈에도 이 무대가 개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걸까?  '니들에게 그럼 나도 보여줄게' 하면서 스트립쇼를 하는 올리브의 춤은 정말 통쾌했다.
올리브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가족의 마음은 하나로 통일된 사랑이었다.
아버지는 딸을 무대에서 끌어 내려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딸과 같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
가족들도 다같이 올라가 춤을 추며 난장판으로 바꾸어 놓는다. 어짜피 대회자체가 말도 안되는 난장판이었다.

딸을 응원하던 가족들의 따뜻함은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사랑이다.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무대를 마치고 처벌을 기다리는 장면

다들 부족하면 어때. 좌절하면 어때, 치고 박고 막말을 하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그들은 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가장 강하게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성장하게 되어 있다. 
이 영화는 우리의 아이가 내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리지 않고 살아가게 어른들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유일한 존재들이다. 차가운 육신으로 떠나 간 할아버지도 손녀의 마지막 무대에서 살아서 가족들을 뭉치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올리브를 통해서 말이다.
 
외삼촌은 프랑스 작가 프루스트를 이야기하며 색맹으로 좌절했을 조카 드웨인에게 말한다.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해서 뒤를 돌아보고는 이런 결론을 내렸어. 자신이 가장힘들었을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 했어.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가장 힘든 시기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낼테니 이겨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