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가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강한 집념은 하루 전날부터 시작되었다.
"정말 예술이야. 같이 먹으러 가자고!!"
"칼국수가 칼국수지, 뭔 예술까지 들먹거리냐? "
그러나 어짜피 내가 질 싸움이었다. 자식이 먹고 싶다는데 도리가 없다.
낼 날도 춥다는데 굳이 장산까지 가서 먹어야 되나 ,싶은 맘이 크기도 했고 칼국수 한 그릇 먹자고 외출준비를 하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약속 콜을 외치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다음 날 다들 쉬는 날들이라 전부 늦잠을 잤다. 거기다 칼국수 먹자고 했던 딸은 밤새 영화를 본다고 새벽 5시가 넘어서 잠이 든 모양이다.
속으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침 베란다에 나갔더니 바람이 무지 차다.
나가기 싫었는데, 늦게 잔 딸을 깨워도 안 일어날 것이다. 아니 절대 못 일어날 것이다.
먹는 것보다 잠을 택할 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 칼국수 먹으러 못 갈 듯하다.
그래서 나는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책을 봤다. 그런데 11시에 알람이 울린다.
딸아이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람소리다. 무의식적으로 알람을 끈다. 미동도 안하고 자는 듯 싶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리는 딸아이의 목소리! "몇시야! 엄마 가자."
작은 애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이게 현실이야?'라는 표정이었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싶었다. 외출할때면 항상 화장하고 나가는 큰 애가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 쓰고, 패딩만 걸치고 나가자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잠을 포기하고, 화장을 포기하고, 큰 애를 움직이는 그 칼국수가 얼마나 맛있길래 이런 천재지변이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는 11시 30분에 집을 나서면서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쉬는 날이면 하루종일 잘 정도로 잠에 취하면 밥이고 뭐고 없는 아이라서 더 놀랬다.
잠결에도 수없이 망설였다고 한다.
자느냐, 먹으러 가느냐...수천번 갈등했는데, 결국엔 칼국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먹고 바로 집와서 잘거라고 했다.
대신 자기 다 먹을때까지 숟가락 내려놓지 말라고 경고장을 날렸다.
워낙 빨리 먹는 아빠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에 반해 딸아이는 먹는 속도가 느렸다. 서너번 먹을 때 쯤이면 다 먹고 숟가락 놓는 아빠때문에 식욕이 다 떨어진다고 속도 맞추어 달라는 말이었다. 12시 되면 손님이 너무 많아 줄을 서야 된다고 빨리 가자고 재촉도 했다.
다행히도 12시 안에 도착했고, 12시가 안 된 시간에도 손님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그러나 빈 곳도 몇 군데 보였다. 우리 가족 넷은 자리에 앉자마자 두가지 메뉴를 다 먹고 싶은 욕구로 실랑이중이다.
비빔도 먹고 싶고, 국물칼국수도 먹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말이다. 결국 물 셋에 비빔 둘을 시켰다.
아니 양이 많으면 어쩔려고 걱정이 앞섰지만 대세를 따랐다.
이미 먹어본 남편과 큰 애는 충분히 흥분 상태였다. 해운대 장산에서 칼국수는 이 집이 젤 유명하다고 한다. 손님들이 계속 들어와 자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채워졌다.
김치와 단무지 밑반찬이 나오고, 칼국수 넣어 칼칼한 맛을 내라고 잘게 자른 땡초가 나왔다. 칼국수 세그릇과 비빔 칼국수 두그릇도 이어 나왔다. 입맛을 다시던 딸아이가 열심히 비빔칼국수를 비벼낸다. 양배추가 듬뿍 들어가서 양이 많아보이지 다 먹을 수 있다고 미리 선제공격을 해온다.
음식 남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먹을만큼만 시키는 걸 좋아한다. 근데 사람 인원수보다 하나를 더 시켜서 걱정이 되는 날 의식해서 하는 말이다.
해운대 장산에 위치한 이 집은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고, 가게 이름도 '소문난 칼국수'로 자체 홍보를 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름 따라 가는 지 소문난 것은 맞나보다.
칼국수를 한 입 먹고,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국물 육수가 너무 진했고, 무엇보다 면발이 수타면이라 쫄깃 쫄깃, 쫀득 쫀득 했다.
면도 기계로 뽑은 면은 일정한데 여기는 제각각의 면 길이와 두께로 사람이 직접 손으로 밀고 잘라 만든 칼국수였다. 거기다 올라간 쑥갓향이 젤 먼저 코끝을 치고 들어왔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딸아이가 잠을 포기한 이유를....
"봐봐. 엄마 맛있지? 예술이지!,후회 안하지?"라고 내게 자꾸 답을 재촉한다.
내가 먹어본 칼국수 중에 제일로 맛깔난 칼국수였다. 추운 날이면 또 생각날 맛이었다.
앞접시를 이용해 칼국수와 비빔칼국수를 번갈아가며 열심히 먹었다. 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내 입맛을 사로 잡느라 양 조절에 실패하고 빵빵한 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딸아이도 양이 찼는지 일어서자고 재촉했다. 배가 부르면서도 남은 국물까지 싹 비우려 했다.
대기자가 있으니까 빨리 일어서주자고 했다. 이젠 이 아이는 배가 부른 것 같다. 배려를 해주는 것 보면, 작은 애가 시험이 있어서 지금쯤 일어서야 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꽤 차다. 그래도 든든하게 뜨근하고 얼큰한 칼국수를 먹어서 그런지 그리 추운 걸 못 느꼈다. 여름에는 밀면과 비빔밀면도 맛나니까 다음에 우리 저것도 먹으러 오자고 했다. 여름은 여름이고 겨울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다음에 또 오자고 하고 나왔다.
작은 아이로 인해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나왔지만 딸아이가 잠을 포기하고 올만큼의 맛이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먹느라 메뉴판을 찍지 못했다. 나오고 나서야 간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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