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5. 25. 00:20
감독  왕가위
''실력이란 두 가지다.

수평과 수직

지면 수평으로 쓰러지고

서 있는 자만 말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자는 진화순의 마지막 제자로 불산무적 엽문이다.

왕가위 감독의 무협 액션이 어떨지 기대하면서 봤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왕가위감독만의 색채로 무술,사랑,인생이  입혀져 있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가슴 안에 고이는 듯한 슬프고 쓸쓸한 선율, 무심한 듯 스치는 사랑, 홍콩 무림 고수들의 일대기를 아름답게 펼쳐 놓는다.


영춘권의 전설이고  예술의 경지에 오른 무인 엽문은 마흔 이전에 물려받은 재산으로 끼니걱정이 없었다.

인생에 사계절이 있다면 마흔 이전의 그의 삶은 봄이었다.

말이 적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그의 아내 장영성(송혜교)과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남방권법의 무림고수인 궁가는 대련을 통해 엽문과 무술을 겨루기 위한 도전장을 내민다.

남방과 북방의 무술을 하나로 합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기위한 그의 마지막 대련이자 도전장이었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다는 만류에도 그는 자신의 수제자이며 후계자인  마삼을 통해 마지막 남방 권법을 북방에 전수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삼은 엽문이 속한 북방도장을 찾아가 거칠게  위협을 가하고 온다. 

그때 궁가가 자신의 후계자인 마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칼에 왜 칼집이 있는지 아는가?''

마삼은 ''칼의 참 뜻은 죽이는게 아닌 살리는데 있다.''고 대답한다. 

''네 칼은 날카로워. 칼집속에 잘 넣어두어라!'' 엄하게 꾸짖자 마삼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드디어 궁가와 엽문의 대련이 시작되고,궁가의 마지막 대결은 무술이 아닌 생각을 겨루자고 한다.

그리고 엽문의 대답을 들은 궁가는 ''생각에서 질 줄이야!'' 라고 아름다운 패배를 인정하고서 등불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말을 건네고 물러난다.

궁가는 한번도 져 본적은 없지만 생각으로 지게된 것을 깔끔하게 인정한다. 

궁가가 무림고수의 자리를 넘기기위해 엽문과 대련하는 장면은 '이게 정말 진정한 무인의 모습이다'라는 생각에 머물게 했다.

궁가에게는 64수 절세 무공을 물려받은 외동딸 궁이가 있다. 

궁가는 자신의 딸이 의사가 되어 강호와는 무관하게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엽문에게 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엽문과 금루에서 대련을 한다.

궁이와 엽문의 대결장면
궁가의 말처럼 궁이는 승부욕이 강했다.

궁가가 딸인 궁이에게 한 말이 있다.

''넌 눈에 승부만 있고 세상이 없어.사람은 멀리봐야해.산을 넘어야 시야가 넓어지지.남의 장점 못 봐주고. 나의 단점을 못보면 사람을 포용못해!''

이 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을 뽑자면 난 단연 엽문과 궁이가 무술를 겨루는 이 장면이다. 아름다웠다.

무술의 경지가 이런 거구나!

예술이란 무대위에서 가볍게 승천하는 한쌍의 나비춤을 보는 것 같았다.

양조위와 장쯔이

그리고 그들은 이 대련으로 교감하게 된다.서로 마음을 품었던 것이라 여긴다.


1938년 일본의 공격으로 불산이 함락되고 엽문의 집이 일본군의 거주지로 변해 버린다.

그의 봄은 한순간 차거운 겨울이 된다.


일본의 공격으로 가난을 처음 겪는 그에게

먹고 사는 일이 가장 높은 산이 된다. 무술도 가난앞에서 무기력했다. 

엽문은 대일항전시기에 두 딸을 잃고 가장 넘기 힘든 삶이 생활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다. 그는 모든걸 잃었다.돈도, 친구도 가족마저 잃었다. 

무술로도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돈을 벌기위해 홍콩에서 무술을 가르치게 된다.


한편 마삼은 일본에 투항하고 봉천협화회 회장이 되어 궁가를 찾아온다.

궁가는 친일파가 된 마삼에게 궁가의 것을 네게 물려줄 수 없다고 발을 들여놓지말라고 내치려고 하자 궁가와의 설전이 벌어진다.

그 끝에 궁가가 죽게 된다.

궁가는 복수하지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궁이는 복수를 하지않고는 행복해질수 없고, 궁가의 것을 뒤찾기위해 기회를 엿본다.

일본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한  마삼과 기차역앞에서 만나 대련을 하여 승리를 거두고, 궁가의 것을 되찾아온다.

궁이와 마심의 대결장면

궁이와 마삼의 대결장면도 이 영화에서 의미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궁이의 모습이 더욱 빛나보였던 장면이기도 했다.


10여년이 지나 홍콩에서 만난 궁이와 엽문,

궁이는 너무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엽문을 마음에 담은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라며, 하지만 거기까지다.


참 왕가위스럽다. 봄인가 싶으면 겨울이고, 겨울인가 싶으면 봄이지만 봄은 너무 짧아 꽃이 피지 않는다.

왕가위감독이 표현하는 사랑은 정열적인 꽃망울을 펴보인 적이 없다.

감추고, 담고, 묻는게 다이다.

우리 응어리는 바둑판처럼 놔두자는 궁이의 말에 엽문은 당신에게 응어리가 없다. 만약 있다면 짧은 인연이라고 말한다. 뭔가 사랑이 불탔으면 하고 바랬지만 이게 끝이다. 둘의 인연은.



궁가와 궁이는 한번도 진적이 없다.

졌다면 자신에게 진것이다. 방향을 바꿀줄 몰라서 계속 걸어간 것이다. 아버지인 궁가가 가지말라는 길을 말이다.

길은 사람이 걸어 생기는 것이다.

그녀는  궁가가 말한 3가지 수련의 단계 중 자신을 봤고, 천지를 봤다고 할 수 있지만 중생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나는 궁가가 살아있을 때 엽문과 대련하기전 만난 무림고수의 말이 젤 가슴에 와 닿았다.

''요리할 때  불의 때를 보지.

때가 안되면 최고의 맛이 안나고, 때가 지나면 몽땅 타버리지. 사람도 똑같아.

나쁜 짓은 쉽고, 좋은 일은 어렵지. 

억지로 익으면  버리거든!''


이 영화는 기억에 남는 명장면과 가슴을 두드리는 대사가 참 많았다.

궁이와 마삼이 기차역앞에서 무술을 겨루는 장면과 궁이와 엽문이 대련하는 장면은 무술이 아닌 예술적 행위같았다.

 화려한 무술과 함께 인생의 길을 안내하는 듯한 대사들과 양조위와 장쯔이의 연기조합 또한 좋았다.

송혜교가 양조위의 아내로 나오지만 왠지 영화속에서의 존재감이 없어보여 좀 아쉬웠다.

그리고 좀 난해하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일선천이다.

일선천과 궁이가 기차안에서 잠시 스치듯 만나는데그 다음 일선천이 궁이나 엽문과 전혀 연관성없이 혼자 뚝 떨어진 느낌으로 영화속에 들어있다. 

왜 영화속에 집어 넣었는지 잘 모르겠다. 일선천에 대한 부분이 영화속에서 배제하는 것이 더 매끄럽지 않았을까?

아마도 홍콩 무림고수를 다 표현하려는 욕심이 이런 연출을 만들어냈다거나 일선천에 대한 지나친 생략이 스토리를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게 만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