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5. 28. 20:31

감독 안톤 후쿠아

영화 사우스포

사우스포란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왼손잡이 투수를 지칭하는 말로 유래되어 복싱에서는 왼손 펀치를 뜻한다.

주인공 빌리 호프(제이크 질렌할)은 라이트 헤비급 복싱 세계챔피언으로 무패 신화를 달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이다.

아름다운 아내 모린 호프(레이첼 맥아덤스)와 사랑스러운 딸 레일라 호프(우나 로렌스)와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삶에 비극이 시작된 건 시비를 걸어오는 복서 때문이었다.

아내를 모욕하는 말에 끝내 폭발하고 만 것이,

한 순간의 실수로 아내를 잃게 되고, 그의 삶은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무시만 했더라면, 아내 모린의 말처럼 무시만 했더라면.

또 그렇게 믿었던 매니저와 친구들마저 모두 떠나버린다.

아내는 빌리에게 그의 주변에 그를 이용하려는 자들로 들끓고 있다는 걸 경고했었다. 아내 말만 좀 들었더라면, 모린은 그의 아내이기도 했지만 빌리 삶의 관찰자 역할도 했다.

''사람들은 당신을 거품에 빠지게 만들 거야. 그리곤 자기들 몫을 챙기겠지! 하지만 그 거품이 터지면 모두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버릴 거야.그러면 나와 레일라는 부스러기나 주어야 돼... 부스러기도 없겠지.''

 

모린은 빌리가 경기할 때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켰고, 그와 그의 주변인들을 관찰했을 것이다.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내 모린이었다.

빌리가 그 아내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아내를 잃는 일도 자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이용하려는 바퀴벌레들도 치워버렸을 것이다.

그가 화려함을 잃자 바퀴벌레처럼 다 흩어졌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화려한 타이틀은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을 너무 하고 싶어 진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화려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보다 가장 어려울 때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가장 진정한 친구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불빛에 온갖 나방들이 몰려들지만 어두운 자신에게 누가 머무를 것인가.

그가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ᆢ화려함에서 부족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항상 높은 곳에 있을 때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절망 속에서 모든 의욕이 말라버린 채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이제 하나뿐인 딸의 양육권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는 딸을 지키기 위해 불구덩이라 뛰어들어야 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주먹뿐이다.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했다.

절박한 그가 찾아간 곳은 다 무너져가는 동네 체육관이었다.

세계챔피언이었던 그가 아마추어 복서들을 가르치는 체육관을 찾아갔다는 건 그에게 딸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 체육관에는 은퇴한 복싱선수 틱(포레스트 휘태커)이 있었다.

분노로 가득한 빌리에게 틱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싸움법과 왼손잡이 펀치 '사우스포'를 가르친다.

오른손 훅이 주특기인 빌리에게 새로운 무기를 가르쳐준 것이다.

"껍질 속에 숨어있어. 너를 보호해, 그리고 기회가 오면 잡아!"

어쩌면 권투라는 것이 공격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주먹과 자신을 흔드는 주변의 비난과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자신이 잘하는 오른손 훅으로 세계챔피언이 된 빌리지만 그만큼 자신의 전술이 많은 선수들로부터 간파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강점이 다 노출되어 그들은 그걸 분석하고 빌리를 상대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등진 매니저가 상대 선수의 코치라면 누구보다 더 자신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다 노출된 전술은 무기로서 약발이 약하다. 상대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한편, 그의 약점을 파고들 것이다.

 

선수로서 우승을 하는 것만큼 그 자리를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일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스포츠 세계일 것이다.

산은 올라가면 내려와야 한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삶이란 없다.

 

그렇기에 선수가 우승으로 승승장구하거나 화려한 무대에 오른 스타들이 성공하여 부를 가졌을 때 추락할 때를 대비하지 못하면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화려함은 순간이다. 그 순간의 즐거움은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것은 없다.

 

선수들이 정상에서 추락하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견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선수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본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삶이 통째로 좌절할 것이고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 정상에 오른 운동선수들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하는 것이 그런 이유이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상에 오른 화려한 명성을 지키고 은퇴를 하고 물러나는 것에 나름 공감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틱은 아내가 그렇게 원하던 진정한 코치였다.

살아있었다면 모린이 정말 좋아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지켜내지 않으면 세상 누구나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뼈저린 경험으로 그가 받아들인 삶이 아닌가

 

빌리가 돈도, 부도, 명성도, 바닥까지 추락하고 나서야 ,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다시 재기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마음도 있겠지만 경험으로서 시련의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듯이

그의 실패로 인해,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가족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임을 알고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내려와 봐야 또 멀리서 봐야 자신의 삶을 관찰자로서 들여다볼 시야가 생기는 것 같다.

그는 자랑스러운 아빠로 거듭나기 위해 생애 가장 어려운 시합에 오르기로 결심했고 피나는 노력으로 죽어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승부를 펼치기 위해 링에 오른 것이다.

 

엄마를 잃은 레일라에게 아버지의 무너짐을 견뎌야 하는 것 또한 너무 버거운 무게인데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없다는 건 더욱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보호소에서 레일라가 겪었을 그 슬픔과 절망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에 레일라의 눈빛에 머무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어떤 것인지 감정이입이 되었다.

아빠의 경기를 눈뜨고 지켜봐야 했던 저 어린 가슴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나가는 듯했다.

긴장감 넘치는 경기와 레일라의 표정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혀왔다.

링 위에서의 경기가 진행되는 순간, 긴장과 초조함으로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TV 화면으로 아빠의 경기를 지켜보는 레일라의 표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만약 나라면 가족으로서, 딸로서 아빠의 복싱경기를 볼 자신이 없다. 아빠가 시합에서 눈이 찢어지고 맞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엄두를 못 낼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기가 끝나고 아빠에게 온몸으로 달려들어 목을 끌어안은 채

''아빠가 걱정돼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다고, 정말 걱정 많이 했어!"라는 말에 소름이 돋을 만큼 레일라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