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19. 4. 18. 23:13

감독 피터 위어(Peter Weir)

죽은 시인의 사회

 

대학입시교육이 학생들의 가슴에도 부모의 가슴에서도 마음을 빼내 버린 것 같다. 
스펙이 사람을 대변하는 카드가 되고, 오직 명문대를 향한 그들의 질주는 자신의 인생에서 즐거움을 빼내고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명문대를 나와도 그들의 질주는 끝나지가 않는다. 고학력, 넘치는 스펙을 가지고도 그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서 답을 구하고자 할 때 영화 한편을 떠올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영화의 배경은 1959년 미국의 명문 웰튼 아카데미다. 역사와  전통과 규율로 대학입시에만 전념하는 교육을 통해 명문대의 높은 합격률를 자랑한다.
자식에 대한 높은 교육열을 올리는 부모들의 희망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희생을 덮어서라도 자식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새학기가 시작되어 이 학교를 졸업한 출신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새 영어교사로 부임되어 오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학생 토드 앤더슨(에단호크)도 이 학교로 새로 전학을 온다. 그는 닐 페리(로버트 숀 레오나드)와 기숙사 한 방에 배정된다.
대학입시를 위한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엄숙하고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가 학교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부를 위해 과외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닐 페리의 아버지, 말대꾸도 거역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아버지는 닐이 의대를 가게 하는 게 목적이다. 과연 그 목표가 자신을 위한 목표이지 자식인 닐 페리의 목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무장된 표정에 아무말도 할 수 없다. 존 키팅이 말한 지옥학교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만든다.

 

'카르페 티엠'

 
# 존 키팅의 첫 수업
그는 앞문으로 휘파람을 불며 들어오더니 뒷문으로 나간다. 그리고 학생들을 따라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100여년 전 선배들의 단체 사진앞에서 '카르페 디엠'을 말한다.
라틴말로 표현하자면 '현재를 즐겨라. 
우리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를 즐기라고 말이다.
우린 요즘 존 키팅의 외침 '카르페 디엠'을 삶에 받아들이며  소확행, 워라밸이라는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존 키팅은 자신을 캡틴이라 불러도 된다고 말한다. 내가 너희가 타고 갈 배를 운전할 테니 너희들은 즐겨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캡틴이 티쳐보다는 자유로워 보인다.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 존 키팅의  수업
 
그는 서문에 있는 문장을 학생에게 읽게 한다. 그리고 '쓰레기'라고  책을 찢어 버리라 한다. 한 장이 아닌 서문 전체를 찢어 버리라고 한다.
아이들은 선뜻 찢지 못한다. 그동안의 교사들과 너무 다른 수업방식을 가진 존 키팅에 어리둥절 하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볍률, 경제, 기술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거야.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그는 운율이나 운조가 아닌 말과 언어의 맛을 배우게 하고, 말과 언어는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빼 주고 내면을 끄집어 내 주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교육으로 돌려 말하면 시를 낭송하고 감상하고 자신의 정서를 끌어내는 것은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도움이 안된다. 그 시가 가지고 있는 문법과 운율과 저자의 철학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방식을 향해 저돌적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다. 
시를 가슴에 담아야 하는데 우리는 머리에 담는다. 시속에 담긴 저자의 의도와 문법만을 배운다.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지, 인생을 위한 공부를 못한 거다. 그게 맞는건지 틀린건지도 재볼 여력도 없이 그저 달렸던 거다. 그러는 건지 알았다. 
분명히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만을 하는 요구하는 학교 측에서는 그의 존재는 이물질이라 생각할 것이다.

 

내가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하는 거야
책상위에 올라선 캡틴
# 수업시간
그는 교탁위에 올라선다.
그리고 묻는다. 내가 이 위에 올라 선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땐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고 바보같은 일일 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만 고려하지 말고 너희들의 생각도 고려해 보도록 해."

 

한창 꿈꿀 아이들이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 박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을 조정해 나가지 못하는 삶이 보였기에 그는 자신이 선장이 되어 그 아이들의 시선을 가장자리에서 돌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보는 각도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벽이 높아도 시도해 보라고, 각자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끄집어 내고 찾아서 부딪히라고 말이다. 
잘못된 교육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줄 모른다. 
존키팅은 아이들과 야외 수업도 하고, 축구도 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무표정에서 꿈많고 장난 많은 십대들의 표정으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존 키팅의수업을 웃으며 즐거워 했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키팅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존 키팅의 수업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신념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
 
# 수업 
존 키팅은 아이들에게 걸으라고 한다. 처음에는 각자 제멋대로 걷기 시작하던 아이들이 결국 서로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리고 지켜보던 아이들은 아이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박수까지 쳤다.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동작들을 하게 할까? 궁금해진다. 그는 일체감의 중요성을 보려주려고 한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관계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맞추어 가며 산다. 당연히 명문대를 가라는 부모말에 싫어도 따라가고, 누군가 공부를 하면 또 따라 간다. 
그런데 존 키팅은 그러지 말라는 것 같다. 획일화의 위험성을 가르쳐 주기 위한 수업이었다. 우린 인간은 개성이 있다. 자신만의 독특함이, 또는 자신만의 선택이 자신의 성공이든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똑같은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상품이 아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개성을 살리라는 것이다. 부모들이 찍어내는 의사말고 연극에 행복을 찾고 재능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 가고, 작가가 되고 싶으면 작가가 되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선택하라는 그의 가르침이었다.
즉  걷고 싶은 대로 걸으라는 것이다. 전통에 맞설 수 있는 의지를 용기를 가져야만 자신의 삶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교장은 그의 비전통방식의 교육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 곳 교육과정은 정해져있고, 이미 훌륭하다는 것도 명문대 합격률로 증명되었는데 존 키팅이 그 방식을 흔들고 아이들을 흔든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적은 사색하는 걸 가르치는 거라고 믿는다.
18살의 에단호크
전통에 도전하여 학교의 교육방식을 탈피하여 획일화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아이들을 사고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고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방식이라고 교장에게 말한다. 
전통적인 교육과 비전통적인 교육이 충돌한다. 
 
학생들의 사색을 가두어야 하는 교육과는 달리 존 커팅은 학생들의 사색을 끄집어 내는 탈교육을 시도한다. 
1950년대 남자 사립학교 웰튼을 배경으로 하여 입시 위주의 공부만을 위해 다른 모든 활동을 잠재워야 하는 시간싸움만 강조하는 삶에 가치는 없다. 그저 명문대를 향한 발걸음만 재촉한다. 선생도 부모도 학생도 말이다.
존 키팅의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은 좀 더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한다. 
 
닐 페리는 하고 싶던 연극 무대에 서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강경하게 나온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던 닐 페리는 연극공연무대에 올라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내고 자신이 너무 잘한다는 걸 알게 되고 희열을 느낀다. 닐 페리는 아버지에게 사육되는 자식같았을 것이다.
 
벗어나지도 아버지를 설득할 수도 없다는 걸 인지한 건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부모가 바라는 것이 충돌하고, 자신은 거역할 수 없는 벽앞에서 자살을 선택해버리는 슬픈 상황. 
이 사건은 아버지의 반성도 교장의 반성도 학교의 잘못도 아닌 오직 존 키팅의 교육방식에 의해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된다. 부모와 교장의 단합으로 학생들은 퇴학을 당하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존 키팅을 내쫓게 된다.

 오 마이 캡틴!

개혁과 도전은 그렇게 존 키팅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으로 다시 전통적인 교육방식에 아이들의 양심도 꿈도 묶어 버렸다. 토드 앤더슨은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자신의 내면을 끄집어 내주고, 야성을 일깨워 준 캡틴을 희생양으로 몰아버린 상황에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마음이 아프다. 학생들은 문을 열고 나가는 존 키팅을 향해 책상에 올라서며 마이 캡틴을 외친다.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책상에 올라서며 마이 캡틴을 부른다. 눈물 나는 장면이며,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학생들과 소통하려고 하고, 억압된 내면을 끄집어 현재를 즐기게 하려는 그의 교육방식은 아이들을 대신해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가슴에는 그는 영원한 캡틴으로 남을 것이다. 참교육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으나, 우리는 아직도 애들을 틀에 끼어놓고 쪼이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캡틴 같은 스승들이 교실을 가득 채웠으면 한다. 

캡틴의 가르침대로 자기 걸음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기자.  불투명한 내일을 위해 투명한 오늘을 고통스럽게 가두지 말자.
 
18살이었던 에단 호크와 로빈 윌리엄스의  첫만남은 이렇게 이 영화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로빈 윌리엄스의 추천으로 에단호크는 에이전시 계약을 했다.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이 영화로  1990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posted by 해이든 2019. 2. 13. 17:15
블랙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 
 
 
영화리뷰 블랙

 

이 영화 참 좋은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게 된다. 광고의 메시지처럼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떻게 딱 부러지게 표현할 길이 없는 영화! 표현이 서툰 내 탓인지, 영상을 언어로 주워담기에 부족한 건지..... 이걸 기록하려고 하니 첫 글자부터 막힌다. 그래서 몇 번 포기했다.

막상 몇 번을 보아도 머리속과 가슴속에서만 머무르고 글씨로 형체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거다. 
왠지 글씨라는 것이 기록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지 감정이 반토막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가보다.
 
어느 날  말 못하는 어린 아이들과 안되는 몸짓 발짓 다 사용하면서 소통을 하면서 이 영화가 계속 뇌리에 떠올랐다. 
그나마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의사전달을 할 수 있는 너희들 세상과 소리와 소음으로 가득한 내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들을 수 있는 세상과 들을 수 없는 세상이 만나면 어떤 충돌이 일어날까?

솔직히 우리는 어릴때부터 홍콩,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영화를 보다보면 눈에 선해지는 결말과 스토리에 맥이 빠지곤 한다. 이 영화는 인도 영화이다.

인도식 영화에 익숙하진 않지만 스토리만으로 충분했다. 각 나라마다 문화나 정서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본능적인 부분이 있다.

생존은 인간의 1차적인 본능이다. 그리고 관계없이 홀로 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꿈과 욕망을 담당하는 심리적인 욕구 또한 모든 인간에게 같은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결과를 만들기 위해 거쳐 온 과정이 투박하고 거칠지만 지나고 보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열정에 가슴 뜨거워지는 순간이 온다. 이 영화에서 사하이 선생(아미타브 밧찬)이 그랬다.

거칠고 투박해서 자꾸 팅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저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리고 불쌍한 아이일 뿐인데, 그렇게 안쓰러움으로 아이의 인간적인 삶을 계속 어둠 속에 방치하는 줄도 모르고 연민으로 묶어 둔다.

어린시절의 미셸을 만나다

어둠은 갑갑하고 답답하고 두렵게 한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침묵 또한 갑갑하고 답답하고 두려움이다.

그러나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보다 그 주위의 사람들의 삶이 더 답답하고 갑갑했다.

왜 버릴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식이고 부모이기 때문에 쉽게 놔버릴 수 없는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무너질 수 없는 노릇이다. 미셸(라니 무케르지)은 태어나 보니 블랙이었다. 부모는 절망했다.  

소리는 미셸에게 침묵이었고, 빛은 미셸에게 어둠이었다. 8살이 된 미셸은 두려움에 엄마만을 찾는 손길만 살아있고 모든 것이 들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 전혀 정형화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모습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어린 동생을 다치게 하거나 집에 불이 나는 등 사방이 지뢰밭이다.

아버지는 미셸도 안쓰럽기는 하지만 집안 전체의 삶이 미셸로 인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는 게 힘이 든다. 결국 그녀를 지체 장애 수용소로 보내기로 맘을 먹고, 엄마는 마지막으로 가정교사를 구하자고 한다. 자식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이겨 사하이 선생이 가정교사로 오게 된다.

처음 미셸을 대면한 사하이 선생은 참담했다. 미셸에게는 방울이 채워져 있었고, 인간으로서의 면모보다 통제불 야생마 같았다. 엉망진창이었다. "부모가 아이를 짐승 취급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게 그가 뱉은 말이었다.

그는 미셸에게 강압적이고 거칠게 다루는 문제로 부모와 마찰을 빚지만 자신의 방식을 꺽지 않는다.

사하이선생은 미셸을 어떻게 세상과 소통시켜 줄 것인가?

손가락을 사용하여 세상이 가진 정보를 입력하고 그 진동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수업을 시작한다. 동물 같은 습성을 버리고 인간으로서 성장시키려는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미셸

20살의 미셸은 가수의 입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고 진동을 느끼며 리듬을 타면서 춤을 춘다.

사하이가 바라던 대로 미셸은 손으로 소통을 한다. 데브라이 사하이 스승을 만나 빛을 찾고, 소리를 찾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함은 물론, 남들과 같이 춤을 추고 , 지식을 위해 대학 입학을 꿈꾸고 있다.

 "어둠이 필사적으로 널 집어 삼키려 해도 넌 항상 빛을 향해 가야 해'' 사하이 선생은 그녀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한 가이드였다. 사하이 선생님은 그녀의 곁에  항상 같이 한다. 그녀가 우리들 세상보다 더 밝게 더 나아간다.

인간은 잘났건 못났건 부자건 가난하건 누구에게나 생존은 제1의 목표다. 살아 있어야 하니까. 배고프면 생존을 위해 허기를 달래야 하고, 잠이 오면 자야 살 수 있는 동물이다.

먹고 자고 그 생존의 허기가 채워지고 나면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세상의 두려움이나 무서움으로부터, 그래서 집이란 보호장치로 외부로부터의 위험요소를 차단한다.

보호장치가 채워지고 나면 그다음 인간의 심적인 요소를 채우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까, 어떻게 하면 외로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나면 그 관계로 인해 자신이 행복해지는 걸 추구하게 되고, 자신의 내면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려 한다. 자기만족, 욕망,희열 등 자기만의 욕구가 생긴다.

그녀의 욕구나 행복은 세상의 지식을 갖고 싶은 것이다. 만져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형체의 그걸 갈구하게 된다. 그게 자신을 지탱하게 해 주거나, 마음을 채워주거나 존재가치를 높여주거나 삶의 휘발유를 붓어 주기도 한다.

1차적인 욕구 말고 2차적인 삶을 소유하고 싶어 지는 것과 같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높은 곳에 오르고 성취감도 가지고 싶다.  지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녀의 답이 그렇다. "지식은 전부입니다. 지식은 정신이고, 지혜,용기,빛 소리예요. 성경이자 하느님이고, 나의 선생님입니다."

라니 무케르지(미셀 맥날리)

꿈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실현해 나가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조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을 뗄 수 있다. 

우리 몸의 도구는 1차적인 걸 충족시켜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정상적으로 작동 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작동으로 그 꿈에 다가가기 수월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쉽게 갈 수 없는 장애물들이 넘쳐난다. 그녀에게는 지금 눈도 소리도 작동하지 않는다. 손가락만을 작동하여 남들보다 더 피나는 노력으로 지식과 접촉해야 한다.

더딘 발걸음에 포기하지 않고 빛을 향해 꿈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남들보다 훨씬 긴 싸움이다.

사하이 선생님이 그녀의 눈과 소리가 되어주어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공부한다.

사하이 선생은 미셸에게 "불가능은 제가 유일하게 가르치지 않은 단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공을 축하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축하한다." 실패로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더 노력할 테니까. 불가능은 없으니까. 자신의 어둠속에 빛이 선생님이고 이제 더 이상어둠도 갑갑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셸은 동생의 결혼식으로 인해 경험해보지 못한 또, 앞으로도 경험해 보지 못할 것 같은 사랑이란 단어 앞에가슴에 영문모를 감정이 파고든다. 머리에 담는 것 만큼이나 가슴에 채워져야 하는 감정들이 수시로 그녀의 삶을 흔들어 댈 수도 있다.

드디어 졸업하는 미셸

사하이 선생도 늙어가고 있다. 선생님이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하이 선생은 미셸이 제자로서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셸의 인생의 가이드로 빛나고 싶을 뿐이다. 이별이 온다.홀로 빛을 향해 달려야 한다.

"제게 여자의 품격을 주시려고 당신은 선생님으로서의 모든 품위를 잃으셨습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불가능을 끌어안지 않은 덕에 졸업을 하고, 사하이 선생 앞에 서 있는 장면은 너무 감동적이었다.

소리와 빛을 다 가지고도 꿈을 향해 그녀처럼 열정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어진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것에 나 스스로 정말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던 영화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2. 4. 15:35
빌리엘리어트
(Billy Elliot) 

감 독   스티븐 달드리
 
빌리 엘리어트 포스터
1984년영국 동북부 더럼 주의 탄광마을, 그 안에 11살의 소년  빌리 엘리어트(제이미 벨)가 특별한 꿈을 꾼다. 이 영화는 꿈을 향한 빌리의 질주와 그 질주를 향한 가족들의 갈등과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로 좋아서 하는 즐거움보다  미쳐서 하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빌리는 보수적인 아버지의 프레임속에 갇혀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두려워하기보다 아버지에게 표현할 줄 아는 아이라는 것이다.  무뚝뚝하고 보수적이기는 하나 그는 두 아들과 노모를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었으며 신념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
탄광촌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형, 돌봐주어야 하는 할머니와 그리고 빌리 네 명의 가족이 살고 있다. 권투를 배우라는 아버지와의 뜻과는 다르게 빌리는 권투가 적성에 맞지 않다. 한대도 때리지를 못하고 피해다니기만 한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어떤 계기나 기회로 인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기회를 잡는 선택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기도 한다.  
빌리에겐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첫번째 계기가 생긴다. 권투 도장옆에서 하게된 발레수업이 그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계기를 제공해 준다.
윌킨슨 선생님이 가르치는 발레수업을 구경하다 어느새 동참하게 된다.  빌리는 권투 글러브보다 발레슈즈가 자신을 끌어 당긴다는 것을 알고 여자애들만 있는 발레수업을 계속 하게 된다. 
발레수업중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몇 달동안  파업중이다. 이 영화는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파업으로 기록된 광부 대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아침마다 노조 규정을 어기고 탄광으로 복귀하여 출근하는 버스를 향해 계란을 던지며  "배신자"라고 외치며 시위 농성을 한다. 탄광노조원들과 경찰들이 버스를 겹겹히 에워쌓으며 대치하는 풍경을 자주 보여준다.
 
어느 날 빌리가 권투도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빌리를 찾아 간 아버지는 발레 수업중인 여자아이들 사이에 서 있는 빌리를 발견하고 당장 나오라며 끌고 나간다.
 
"발레는 남자가 하는 게 아니야."라고 보수적인 마인드로 강경하게 말한다. 발레는 여자가 하면 정상이지만 남자가 하면 왠지 게이라는 느낌을 지워낼 수 없었던 아버지 재키의 표정을 간파한 빌리는 "게이가 아니라 발레무용수!"라고 말해 준다. 그러나 남자는 축구나 권투,레슬링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보수적인 프레임에 부딪히고 만다.
 
아들이 꿈꾸는 꿈과 아버지가 자식에게 바라는 희망이 충돌하여 갈등의 시작이 된다. 결국 아버지의 벽에 막힌 빌리는 윌킨스 부인을 찾아간다.
빌리와 윌킨슨 부인
 #
오디션을 보기 위해 윌리슨 선생님과 함께 빌리는 열심히 훈련한다. 그리고 빌리와 윌킬슨 부인이 티렉스의 <I Love Boogie>에 춤추는 장면은 몇번이나 돌려볼 만큼 좋았다. 
 
그리고 오디션 당일이 되었다. 아버지 몰래 준비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파업중인 탄광노조원들을 폭력사태로 규정하여 경찰은 주도자인 형을 잡아가게 된다.
 
빌리가 나타나지 않자 빌리의 집을 찾아간 윌킨스 부인은 오디션을 망쳤다고 가족과 충돌한다.
가족과 윌킨스부인 사이에서 빌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자신의 꿈이 가족과 충돌하고 윌킨스 부인과 자신의 가족이 충돌하는 것을 보면서 빌리는 폭주하는 불꽃처럼 탄광마을을 질주하며 분노의 춤사위를 펼친다.

 

 #

크리스마스 밤, 친구와 권투도장에서 친구에게 발레를 가르쳐 주고 있는 빌리 앞에 아버지가 나타난다. 잠시 당황한 빌리는 아버지 앞에서 느닷없이 스텝을 밟으며 미친 듯이 춤을 선보인다.

그 춤사위가 얼마나 멋지던지 입을 벌리고 보았다.

아들의 춤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정지된 표정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빌리가 춤을 끝내고 아버지 앞에 딱 서자 아버지는 돌아서 나가버린다.

빌리에게 집에 가 있으라고 하고는 윌킨슨 선생집으로 찾아간다. 따지러 가는 줄 알았는데, 오디션 비용이 얼마드냐고 묻는다. 그리고 빌리에게  해 준 모든 것들 고맙다고 말한다. 아버지도 빌리의 실력을 인정한 것 같다.

파업중단하고 버스로 오른 아버지

 

 #
아들의 꿈을 지원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신념을 버리고 탄광촌으로 출근하는 버스에 올라 탄다. 아들을 위해 파업을 포기한 것이다.
버스에 탄 아버지는 어느때와 다름없이 버스에 계란을 던지며 시위하고 있는 큰 아들을 보고 고개를 돌리고, 그 버스에 아버지가 타고 있는 걸 발견한 형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빌리를 위해 돈이 필요했다.
장기간 파업으로 인해 아들의 오디션을 보러 갈 돈이 없었던 아버지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

우린 끝났어.  우리는 선택이 남았니? 하지만 빌리는 남았어." 
11살인 빌리에게는 자신과 토니와는 다르게 선택이 주어졌고, 그 선택을 자신의 가난함으로 막아버릴 수 없는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보다 자식의 인생이 먼저인 것이었다. 우는 아버지를 안고 토니의 가슴에도 흥건한 물기를 남았다.
투박하고 ,거칠고,무뚝뚝하고, 단단한 보수적인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신념이 무너지는 것이 참 힘들게 다가왔다. 마치 내 아버지의 오열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꿈을 위해 누군가의 신념을 버려야 하고, 또 가난한 현실이 누군가의 꿈을 지켜줄 수 없는 관계, 그게 가족이라면 더 아프다. 

 

빌리의 오디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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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아버지,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런던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 빌리는 면접이 끝나고 면접관으로부터 마지막 질문을 받는다
"빌리! 춤 출 때 어떤 기분이니?"
빌리는 "일단 추게 되면 모든 걸 잊어버려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어서  한마리의 새가 되어 나는 것 같아요. 마치 감전된 것 처럼요."
그랬다. 빌리가 춤을 출때는 몸에 붙은 사람처럼, 또는 새가 날개짓하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천상 빌리는 춤을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춤속에서 희열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오디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합격통지서가 날라온다.
빌리는 이제 탄광촌을 떠나 발레학교에 가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동생에게 다정다감한 표현을 하지 않는 형이 버스에 탄 동생에게 "보고 싶을거야"라고 말하는 장면과 아버지가 아들을 하늘높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빌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는 뭉클한 장면이었다.
표현해 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족의 사랑은 가끔 말보다 마음이 먼저 가 마중하는 것 같다. 꿈을 향해 떠나는 빌리와 형과 아버지는석탄을 캐러 지하로 내려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아린지 음악은 왜 그리 슬픈지......<빌리 엘리어트> 영화의 장면은 항상 꿈과 현실의 간극을 보여준다. 춤을 추는 아이의 꿈과 충돌되는 현실을 준다.
발레는 여자들만 한다는 아버지의 편견과 충돌하고 ,꿈을 향해 오디션 보러가는 날 형이 잡혀가는 현실로 첫 걸음을 막아서고, 아들의 재능을 알고 지원하려 하지만 오디션 보러 갈 돈이 없는 현실에 부딪히고, 아들의 합격소식과 함께 파업중단이라는 비보가 날아들게 한다.
그런 현실과 충돌하며 꿈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에게 선사하는 희망이 극대화될 것이라는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현실에 부딪쳐도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이루어진다는 성공의 메시지와 함께  가족의 희생과 사랑이 결실로 우리의 인생에 커다란 격려를 주려고 말이다.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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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년이 지나 정장을 갖추어 입은 형과 아버지는 빌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국립극장으로 향한다.  무대를 향한 아버지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맺힌다.
무대를 준비하는 빌리는  백조가 되어 높이 도약하여 날아 오른다.  무대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가슴 찡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 무대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뜨겁고 벅찬 눈물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등장과 울려퍼지는 음악소리와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전율이 쫘악~  다 전달되었다.
빌리의 <백조의 호수>공연은  그동안 충돌하며 희생한 아버지의 선택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 놓았다. 빌리 혼자만의 꿈이 아니었다. 빌리 혼자만의 선택지가 아니었다. 사랑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고, 열정없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꿈이었다. 모두의 응원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그래서 더 뜨겁고 감동스러웠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posted by 해이든 2019. 1. 18. 13:00

영화 쉰들러 리스트

내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로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로 회자되고 있는 명작 <쉰들러 리스트>이다.

수많은 영화를 접하면서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물가물해지고, 흐릿흐릿 감성을 반토막내거나 소멸시키는 반면, 기억의 방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도 있다는 걸 .이 영화로 나는 증명한다. 가슴에 각인된 영화이다.

내게 이 영화는 유태인이라는 민족보다 히틀러라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했다.

왜 그토록 이나 잔인해야 했을까? 어떤 상황이면 이렇게 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의 깊이가 깊게 파고 들었고,도저히 어떤 상상을 갖다 놓아도, 어떤 이유를 갖다 놓아도 히틀러의 만행은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저지를 수 없는 짓거리였다.

유태인 대량학살은 어떠한 명목도 어떠한 전쟁에도 비유할 수 없는 비극적인 대참사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역대 최악의 살인마라는 수식이 더 어울릴 법하다. 매번 홀로코스트 영화를 접할 때마다 히틀러의 정신감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여기에 다 펼치다보면 난 이 영화에 대해 한마디도 못 적어 내려 갈 것이다.

영화는 오스카 쉰들러라는 실제 인물을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에 의해 스크린으로 펼쳐진다.

1993년에 제작된 쉰들러 리스트는 독일 사업가이자 나치 당원이었던 쉰들러(리암 니슨)가 폴란드에서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거는 내용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크라코프 마을에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독일인 사업가인 오스카 쉰들러가 찾아온다. 그의 속셈은 전쟁을 이용하여 유태인 노동자를 인건비없이 고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은 관심 밖이고 사업으로 인한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업가였고, 독일군에게 잘 보여 자신의 사업에 이득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자로, 나찌 뱃지를 달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해 사업을 번창시키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독일인 사업가인 그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공장을 인수한다.

인건비 없이 수 백명의 유태인을 고용한 오스카 쉰들러는 우연히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가까워지면서 나치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되는 유태인들의 참혹한 실상과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다.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독일의 만행은 히틀러와 나치들은 유대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는 그토록 잔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 한장면

어느날 오스카 쉰들러는 언덕에 올라가 독일의 만행을 눈으로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잔인하게 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독 눈에 들어오는 빨간코트 여자아이, 흑백 화면속에 빨간 코드를 입은 소녀가 그가 독일의 만행으로부터 유태인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저 여자아이는 자신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전쟁에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민간인, 여자, 아이들까지 죽이는 데는 더 많은 명분을 들이대야 한다. 최소한의 도덕성도 인간성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치들!그들이 사람이라는 게 더 소름끼친다. 그들도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게 더 소름끼치고 치떨린다.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생각하는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다는 게 그저 끔찍할 뿐이다. 오히려 귀신들이 더 따뜻하게 다가올 정도다.

그 소녀를 끌고가는 독일장교의 표정을 보라. 영화를 보면 독일군의 장교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다. 광란의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건조하고 냉정하다.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

독일군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이다. 그의 만행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쉰들러는 사업가로서 필요에 의해 그를 상대하지만, 그 잔인성에 기회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쉰들러마저 흔들리게 된다.

유태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독일군들은 샅샅이  찾아내 무자비하게 죽인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난무하다.

아몬 괴트는 매일 아침 숙소의 발코니에서 밑에서 일하는 유태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미친 넘이었다. 그냥 미친 넘이다.이 장면은 머리속에서 지우고 싶은데 수시로 기억이 들락거려 미치겠다.

수프가 따뜻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하다 멈추었다는 이유로,걸음이 늦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그가 죽인 유태인이 500명은 족히 넘는다. 더 미친 건 그 시체를 자신의 애완견에게 먹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크라코프의 살인자라 불렀다.욕 도 아깝다. 저런 인간은 땅에도 묻으면 안되는데

도대체 독일군의 피는 흐르고 있는 걸까? 저들도 심장은 있는 걸까?를 연속 되뇌었다. 밖에서는 잔인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는데 안에서는 독일군 장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온 쉰들러는 매일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유태인에 대한 독일군의 만행을 보면서 서서히 그의 양심이 흔들리고 마침내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유태인들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유태인 회계사인 이작 스턴(벤 킹슬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구해낼 유태인 명단을 작성한다.

이작 스턴은 리스트를 보여주며 이렇게 아름다운 명단은 없을 거에요. 생명부에요 죽음의 폭풍을 막아주는 방패에요”.라고 말한다.

쉰들러는 군수품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독일군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노동자들의 명단을 리스트를 제시해 유태인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빼돌린다. 1,100명의 유태인들을 수용소에서 구해낸다. 쉰들러는 사업가였다. 그가 독일군 장교를 매수하고 유태인들을 먹여 살리느라 가진 재산을 모두 날린다그가 세운 군수품 공장은 7개월 동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전을 맞이한다.

1945년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유태인들도 자유의 몸이 된다. 반면에 나치 당원이었던 쉰들러는 연합군에게 체포될 위험에 처하게 되고 유태인들과 작별하기 전 더 많은 유태인을 살려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어. 어쩌면 더 살릴 수도 있었는지도 몰라. 차를 팔았다면 열 명을 더 구했을 지 모르고, 뺏지를 팔았다면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인물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쉰들러의 무덤에 차례로 참배하는 장면으로 끝난다.그가 살려 낸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제 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부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미술상, 음악상, 촬영상, 편집상을 수상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명작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1998년에 이 영화로 유대인 대학살을 공론화하는데 기여했다는 내용으로 독일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독일 최고의 명예인 십자 훈장을 받는다.

자신의 공장을 이용해 전 재산을 걸고 장교들을 매수하고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라는 것을 알려줘서?

독일이 유태인에게 행한 만행은 오직 히틀러의 독재만의 문제였을까? 그 많은 독일인들이 악 앞에 침묵했다.

오스카 쉰들러라는 제2의 존재들이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이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독일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악을 행한 히틀러나 나치만큼이나 악 앞에 침묵하는 많은 자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앗아갔다.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유태인을 살렸다는 것에 자신들의 죄를 다 속죄할 수는 없겠지만,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세계를 구한 것이라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오스카 쉰들러는 용기를 내어준 것 이상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