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해이든 2020. 2. 2. 23:26



어느 날 멋진 차를 타고 행복한 표정을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그 모습이 근사하고 행복해 보였던  가드너는 그에게  두 가지 물음표를 던졌다.
"무슨 일 해요. 어떻게 성공했어요?"
"주식 중개인이에요."
"대학 나와야 하죠?"
"아뇨. 숫자에 밝고 사람과 잘 어울리면 돼요."
말을 마친 그가 계단을 올라 빌딩 속으로 들어간다.
그 주위로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보였다. 밝은 미소와 햇빛이 주위에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런 표정으로 살 수 있을까?
근사한 남자가 들어간 높은 빌딩을 올려다 보며 기회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다. 행복을 찾아서ᆢ

크리스 가드너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나름 수학을 잘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증권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낸다. 60대 1이란 경쟁률을 뚫기 위해 회사 입구에서 자주 눈도장을 찍으며 기회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고 어렵게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한다. 여기까지가 다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에게 기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어떤 것부터 들을래?" 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먼저 선택하는지?  나는 나쁜 소식부터 듣는다. 다음에 들을 좋은 소식이 나쁜 감정을 조금 덜어줄 거란 기대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소식부터 전했다. 그가 증권회사 인턴생활할 기회 만들어냈다고.

그가 기뻤을까? 당연히 기뻐겠죠. 면접을 보기까지 그가 공들인 노력에 비하면. 그런데 마냥 기쁘지가 않다. 생활고에 지친 아내가 그를 떠났다. 거기다 밀린 집세로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상황이고 미납된 세금 독촉과 아들의 유치원비 등 그는 지금 살기 위해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6개월간의 인턴생활이 월급 한 푼 없다는 것이다. 또한 6개월의 견습이 끝나면 20명의 인턴 중에 단 1명만 정직원이 된다. 그 한 명이 자신이 되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또 6개월간의 경력으로 다른 곳에 취직하는 것도 어렵다는 게 현실이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를 절박하게 몰고 갔다. 아내가 떠나고 엄마를 잃은 아들과 살아내야 하는 그로서는.

또 한 편으로는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걸 그가 모를리 없다. 고민 끝에 그는 기회를 잡기로 한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어린 아들과 노숙생활을 하면서도 6개월의 인턴생활을 성실히 해나간다. 그의 삶은 바닥이고 절망적이지만  아들의 행복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집은 없지만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기회를 잡아야 했고 어린 아들을 위해서라도 절박했다. 6개월의 힘든 과정을 견디고, 드디어 단 한 명만이 정직원이 되는 기회를 가져온다. 그 짧은 순간의 기쁨이 그에게 행복이었다. 

 

한 남자의 성공적인 스토리보다 한 아들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부성애에 눈물이 나는 영화였다.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가드너가 자신의 아들만은 아버지 없는 삶을 살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도 아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아내에게 아들만은 넘겨주지 않았다.  낮에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밤에는 아들을 재우기 위해 교회 쉼터 긴 줄을 서야했고 아들이 잔 후 합격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이 영화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 가슴 먹먹하게 했던 장면이 두 군데가 있다. 첫째는 지하철 화장실 안에서 아들을 재우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이 장면에서  눈물 흘렸을 것이다. 가드너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합격통보를 받고 회사를 나와 인파속에서 기쁨의 순간을 표현했던 장면, 단숨에 아들의 유치원을 찾아가 아들을 꼭 끌어안던 크리스 가드너의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장면이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물도 마시지 않고 고객에게 전화를 돌리던 그가 정직원이 되었다는 걸 전해 들을 때  속에서 올라오는 많은 감정을 억누르는 듯, 눈물을 참는 듯 하얀 눈동자가 뻘개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모든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을 각색해서 만들어졌다. 노숙자에서 최고 경영자가 된 투자회사 가드너 리치의 설립자 '크리스 가드너'의 인생을  윌 스미스가 맡아 연기한 것이다. 영화 맨 마지막 부분에 윌 스미스가 아들과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스쳐 지나간 남자가 실제 크리스 가드너이다. 깜짝 출연했다는 사실.


영화에서 크리스 가드너의 아들 '크리스토퍼'를 연기했던 배우는 윌 스미스의 친 아들 제이든 스미스다. 
윌 스미스와 그의 아들 제이든 스미스가 동반 출연한 <행복을 찾아서>는 2006년에 상영된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지금에야 봤다. 세상에는 모성애를 다룬 영화가 많고 부성애를 다룬 영화도 많다.
이 영화에서 다룬 부성애는 좀 남다르다. 보면 안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은 남자,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던 그 남자는 행복을 찾아서, 무엇보다 아들을 위해서 매 순간을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해냈다. 부모를 강하게 하는 존재...그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posted by 해이든 2020. 1. 31. 16:47


지금부터 등장할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우리와 다르다는 건 아니다. 가족은 남들이 알 수 없는 강한 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족의 관계는 밖에서 보는 풍경과 안에서 보는 풍경이 다르다. 그 체감 또한 다르다.

 

 

 

길버트(조니뎁)는 가장이다.
엄마 같은 누나 에이미가 살림을 맡고, 길버트는 식비를 대려고 시간 외 근무를 할 뿐 아니라 지적장애인 18살의 남동생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감당 해야했다. 일터를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고 하루종일 쏘다니느라 엉망인 어니의 목욕도 매일같이 시켜야했다. 어니에게 길버트는 따뜻한 형이다. 아빠 같은 형이다. 길버트는 아빠의 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10살에 죽을거라던 어니는 18살이 되었고 걸핏하면 높은 가스탱크에 올라 경찰차가 출동했다.
15살의 사춘기 소녀 여동생 엘렌도 있다. 형은 이미 오래 전 집을 나갔다.

길버트가 일하는 램슨 식료품점은 대형 푸드랜드로 인해 파리만 날리고 아버지가 지은 집은 낡고 낡아 손 볼 곳이 너무 많았다. 어머니가 앉아 있는 거실 소파 아래는 어머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낡아 아슬아슬했다. 임시방편으로 튼튼한 합판을 대놓았다.
17년 전 아버지가 한마디 없이 목을 매 자살을 했고 그 후 어머니는 충격으로 먹을 것을 달고 살았다.
그 후유증으로 초고도 비만이다. 7년간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고래 아줌마'라 부르며 창문으로 구경한다. 구경거리, 놀림거리의 대상이다.
길버트는 자신의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것인지 구경하러 온 아이를 안아 자신의 엄마를 보여주기도 하고 엄마를 '뭍에 올라온 고래'라 표현했다. 붙박이장처럼 거실 소파에서 자고 먹으며 자신의 삶도 자식도 몸무게도 감당 못한 채 살아 있다. 자식들이 생계와 어니를 감당하고 사는 데도 말이다. 한 때는 미인에 쾌활했던 그녀가 아버지가 사라진 후 그 충격으로 서서히 망가져 간 것이다.

 

 

 길버트의 기억 속 아버지는 속마음을 알 수 없고 표현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의 어떤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서도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길버트는 어른들의 무너짐으로 많은 것을 떠안았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가족이란 가까이 있고 싶은 반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가 하면. 예속 되고 싶은가 하면 독립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미움과 사랑이 동시에 왔다갔다 한다. 반대 감정이 양립하는 것이다. 관계가 주는 중압감이 크면 클수록 , 가족으로 인해 힘들거나 심적 부담이 크면 클수록 더 자주 ㅡ
어니가 살아있었으면 하다가 반면 그 반대이기도 하는 길버트의 마음이 그렇다. 눈을 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어니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이 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엄마에 대한 마음 역시 그럴 것이다. 사랑과 미움, 부끄러운 반면 불쌍하기도 한.
에이미나 길버트의 표정에 지친 그늘이 질 법도 한데 삶이 버겁기도 할텐데 에이미,길버트, 엘렌 어느 누구 하나 엄마에게 불평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고 엄마와 어니를 돌봤다. 정말 모두 착하다.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무게는 다르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다. 내리사랑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 같지만 그 반대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게가 있다.

그가 사는 작은 마을 엔도라를 벗어난 본 적이 없는 길버트, 어쩌면 가족한테 꽁꽁 묶여 자신을 위해 어떤 자유도 어떤 변화도 시도조차 해 볼 생각도 못했다. 매일 답답하고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고 변화도 없는 마을과 길버트의 일상이 닮아 있다.

 

 

 

그런 마을 엔도라에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하던 베키(줄리엣 루이스)가 자동차 고장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된다. 베키는 길버트와는 다른 면을 가졌다. 엔도라를 벗어난 적이 없는 길버트와는 달리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자유로운 삶을 산다. 베키는 어니를 대하는 따뜻한 길버트에게 호감을 느낀다. 길버트도 그렇다. 하지만 길버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베키가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다가간다.

길버트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베키가 묻는다.
엘렌도 얼릉 컸으면 좋겠고, 어니도 멀쩡해줬으면 좋겠고, 어머니도 에어로빅 수업을 들었으면 하고, 새집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가족에게 삶의 코드가 맞추어지듯 원하는 게 다 이런 것이다. 너 자신을 위한 것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을 감당하고 살아야 길버트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로 들렸다. 달리 말하면 자기가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고 싶은 갈망일 줄도. 엘렌이 얼릉 커 독립하고 어니가 멀쩡해져 돌봄이 필요없게 되고 엄마가 바깥 세상과 어울려야 부담없이 자신을 꿈꿀텐데. 가족이란 게 그렇다. 가족의 고통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가 없다. 때론 외면할수록 가슴을 더 옥죄여 온다. 죄책감과 사랑은 다르지 않다. 가까이 있는 감정이다.

 

18살 생일 파티를 위해 더러운 어니를 씻겨야 했던 길버트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어니를 심하게 때리고 만다. 사고치는 어니로 힘들었던 그가 폭발한 것이다. 길버트는 그 길로 차를 몰고 집을 나가 버린다. 엔도라를 벗어나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멀리 못가 다시 어니를 찾아 돌아온다. 그는 가족이 밟혀 떠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심성을 지녔다. 착한 아들, 착한 형이다.
엄마는 길버트가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엄마 역시 자신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놀림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괴물 보듯 쳐다보는 이웃의 시선에 상처받은 엄마의 표정에 길버트는 어떤 말도 못한다.

차를 고친 베키도 엔도라를 떠나고 18살 어니의 생일에 엄마는 갑자기 계단을 힘겹게 올라 2층 침대에 눕는다.그리고 아들 어니가 보고 싶다던 엄마는 어니가 2층에 올라왔을 때 이미 죽음으로 사라진 후다.
아들에게 사라지지 말라더니.

 

 

엄마의 죽음도 슬프지만 엄마의 시신을 옮기려면 크레인을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사람들이 몰려들거고 엄마는 구경거리가 될거다. 길버트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엄마를 더 이상 놀림거리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다.

엄마가 움직일 때마다 거실바닥이 흔들렸다. 엄마의 무게를 감당 못한 건 자식이 아닌 엄마 자신과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아버지가 목을 맨 집, 여기저기 낡은 집, 붙박이처럼 엄마가 앉아 있던 집, 엄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집과 함께 침대에 고운 얼굴로 잠든 엄마를 놀릿감이 되지않게 이별식을 치른다.

집을 불태운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타는 집을 한없이 바라볼 뿐이다. 아, 삶이 무어라 말인가. 가슴이 아프다. 가족 이야기만 하면 가슴의 추가 흔들린다.
마음이 이쪽 끝에 가 있다가도 저쪽 끝에 가 매달린다.
가족의 구성원은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이다. 가족은 사랑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연으로 엮여 있다. 책임이나 사랑의 크기를 수치로 드러낼 수 없고 한쪽 끝에만 있을 수 없는 감정과 무게다.

 

 

 

일단은 작품 속에서 나와 배우들 이야기를 좀 하자면 어니 역을 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지적 장애를 가진 연기실력이 26년 전에 이 정도라면 그냥 타고난 연기꾼이다. 그런데 상복이 안 따라준 거네. 잘 모르는 사람은 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서너 번 받은 줄 안다. 하지만 후보로만 오르고 상을 거머쥐지 못했다. 오죽하면 오스카가 버린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2015년에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길버트그레이프, 이 남자가 바로 조니 뎁이다. 와우?
캐리비안 해적의 잭 스패로우, 그 남자다.
젊을 때 무지 꽃미남이었네.
이런 모습을 보니 세월이 야속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