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이 사람을 대변하는 카드가 되고, 오직 명문대를 향한 그들의 질주는 자신의 인생에서 즐거움을 빼내고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명문대를 나와도 그들의 질주는 끝나지가 않는다. 고학력, 넘치는 스펙을 가지고도 그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서 답을 구하고자 할 때 영화 한편을 떠올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영화의 배경은 1959년 미국의 명문 웰튼 아카데미다. 역사와 전통과 규율로 대학입시에만 전념하는 교육을 통해 명문대의 높은 합격률를 자랑한다.
자식에 대한 높은 교육열을 올리는 부모들의 희망이 된다. 그들은 그렇게 희생을 덮어서라도 자식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새학기가 시작되어 이 학교를 졸업한 출신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이 새 영어교사로 부임되어 오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학생 토드 앤더슨(에단호크)도 이 학교로 새로 전학을 온다. 그는 닐 페리(로버트 숀 레오나드)와 기숙사 한 방에 배정된다.
대학입시를 위한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엄숙하고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가 학교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부를 위해 과외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닐 페리의 아버지, 말대꾸도 거역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아버지는 닐이 의대를 가게 하는 게 목적이다. 과연 그 목표가 자신을 위한 목표이지 자식인 닐 페리의 목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무장된 표정에 아무말도 할 수 없다. 존 키팅이 말한 지옥학교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만든다.
'카르페 티엠'
# 존 키팅의 첫 수업
그는 앞문으로 휘파람을 불며 들어오더니 뒷문으로 나간다. 그리고 학생들을 따라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100여년 전 선배들의 단체 사진앞에서 '카르페 디엠'을 말한다.
라틴말로 표현하자면 '현재를 즐겨라.
우리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를 즐기라고 말이다.
우린 요즘 존 키팅의 외침 '카르페 디엠'을 삶에 받아들이며 소확행, 워라밸이라는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존 키팅은 자신을 캡틴이라 불러도 된다고 말한다. 내가 너희가 타고 갈 배를 운전할 테니 너희들은 즐겨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캡틴이 티쳐보다는 자유로워 보인다.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 존 키팅의 수업
그는 서문에 있는 문장을 학생에게 읽게 한다. 그리고 '쓰레기'라고 책을 찢어 버리라 한다. 한 장이 아닌 서문 전체를 찢어 버리라고 한다.
아이들은 선뜻 찢지 못한다. 그동안의 교사들과 너무 다른 수업방식을 가진 존 키팅에 어리둥절 하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볍률, 경제, 기술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거야.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그는 운율이나 운조가 아닌 말과 언어의 맛을 배우게 하고, 말과 언어는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빼 주고 내면을 끄집어 내 주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교육으로 돌려 말하면 시를 낭송하고 감상하고 자신의 정서를 끌어내는 것은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도움이 안된다. 그 시가 가지고 있는 문법과 운율과 저자의 철학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방식을 향해 저돌적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다.
시를 가슴에 담아야 하는데 우리는 머리에 담는다. 시속에 담긴 저자의 의도와 문법만을 배운다.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지, 인생을 위한 공부를 못한 거다. 그게 맞는건지 틀린건지도 재볼 여력도 없이 그저 달렸던 거다. 그러는 건지 알았다.
분명히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만을 하는 요구하는 학교 측에서는 그의 존재는 이물질이라 생각할 것이다.
내가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하는 거야
# 수업시간
그는 교탁위에 올라선다.
그리고 묻는다. 내가 이 위에 올라 선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땐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고 바보같은 일일 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만 고려하지 말고 너희들의 생각도 고려해 보도록 해."
한창 꿈꿀 아이들이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 박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을 조정해 나가지 못하는 삶이 보였기에 그는 자신이 선장이 되어 그 아이들의 시선을 가장자리에서 돌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보는 각도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벽이 높아도 시도해 보라고, 각자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끄집어 내고 찾아서 부딪히라고 말이다.
잘못된 교육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줄 모른다.
존키팅은 아이들과 야외 수업도 하고, 축구도 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무표정에서 꿈많고 장난 많은 십대들의 표정으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도 존 키팅의수업을 웃으며 즐거워 했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키팅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신념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
# 수업
존 키팅은 아이들에게 걸으라고 한다. 처음에는 각자 제멋대로 걷기 시작하던 아이들이 결국 서로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리고 지켜보던 아이들은 아이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박수까지 쳤다.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동작들을 하게 할까? 궁금해진다. 그는 일체감의 중요성을 보려주려고 한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관계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맞추어 가며 산다. 당연히 명문대를 가라는 부모말에 싫어도 따라가고, 누군가 공부를 하면 또 따라 간다.
그런데 존 키팅은 그러지 말라는 것 같다. 획일화의 위험성을 가르쳐 주기 위한 수업이었다. 우린 인간은 개성이 있다. 자신만의 독특함이, 또는 자신만의 선택이 자신의 성공이든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똑같은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상품이 아니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개성을 살리라는 것이다. 부모들이 찍어내는 의사말고 연극에 행복을 찾고 재능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 가고, 작가가 되고 싶으면 작가가 되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선택하라는 그의 가르침이었다.
즉 걷고 싶은 대로 걸으라는 것이다. 전통에 맞설 수 있는 의지를 용기를 가져야만 자신의 삶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교장은 그의 비전통방식의 교육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 곳 교육과정은 정해져있고, 이미 훌륭하다는 것도 명문대 합격률로 증명되었는데 존 키팅이 그 방식을 흔들고 아이들을 흔든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적은 사색하는 걸 가르치는 거라고 믿는다.
전통에 도전하여 학교의 교육방식을 탈피하여 획일화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아이들을 사고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고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방식이라고 교장에게 말한다.
전통적인 교육과 비전통적인 교육이 충돌한다.
학생들의 사색을 가두어야 하는 교육과는 달리 존 커팅은 학생들의 사색을 끄집어 내는 탈교육을 시도한다.
1950년대 남자 사립학교 웰튼을 배경으로 하여 입시 위주의 공부만을 위해 다른 모든 활동을 잠재워야 하는 시간싸움만 강조하는 삶에 가치는 없다. 그저 명문대를 향한 발걸음만 재촉한다. 선생도 부모도 학생도 말이다.
존 키팅의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은 좀 더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한다.
닐 페리는 하고 싶던 연극 무대에 서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강경하게 나온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던 닐 페리는 연극공연무대에 올라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내고 자신이 너무 잘한다는 걸 알게 되고 희열을 느낀다. 닐 페리는 아버지에게 사육되는 자식같았을 것이다.
벗어나지도 아버지를 설득할 수도 없다는 걸 인지한 건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부모가 바라는 것이 충돌하고, 자신은 거역할 수 없는 벽앞에서 자살을 선택해버리는 슬픈 상황.
이 사건은 아버지의 반성도 교장의 반성도 학교의 잘못도 아닌 오직 존 키팅의 교육방식에 의해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된다. 부모와 교장의 단합으로 학생들은 퇴학을 당하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존 키팅을내쫓게 된다.
오 마이 캡틴!
개혁과 도전은 그렇게 존 키팅 한 사람을 처단하는 것으로 다시 전통적인 교육방식에 아이들의 양심도 꿈도 묶어 버렸다. 토드 앤더슨은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자신의 내면을 끄집어 내주고, 야성을 일깨워 준 캡틴을 희생양으로 몰아버린 상황에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마음이 아프다. 학생들은 문을 열고 나가는 존 키팅을 향해 책상에 올라서며 마이 캡틴을 외친다.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책상에 올라서며 마이 캡틴을 부른다. 눈물 나는 장면이며,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학생들과 소통하려고 하고, 억압된 내면을 끄집어 현재를 즐기게 하려는 그의 교육방식은 아이들을 대신해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가슴에는 그는 영원한 캡틴으로 남을 것이다. 참교육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으나, 우리는 아직도 애들을 틀에 끼어놓고 쪼이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캡틴 같은 스승들이 교실을 가득 채웠으면 한다.
캡틴의 가르침대로 자기 걸음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기자. 불투명한 내일을 위해 투명한 오늘을 고통스럽게 가두지 말자.
18살이었던 에단 호크와 로빈 윌리엄스의 첫만남은 이렇게 이 영화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로빈 윌리엄스의 추천으로 에단호크는 에이전시 계약을 했다.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이 영화로 1990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다이애나(클레어 포이)에게 한 눈에 반한 로빈과 '아 이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 다이애나는 서로에게 마법처럼 끌려 결혼을 한다.
로빈은 사업을 하러 케냐까지 다이애나를 동행하며 달콤한 결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신은 장난꾸러기가 맞는가 보다. 갑자기 로빈이 폴리어 바이러스로 인해 전신이 마비된다. 목에 구멍을 뚫어 호흡기를 집어넣고 기계에 의해 숨을 쉬어야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앞에 만삭이 된 다이애나는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남편을 케냐병원에서 영국으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저렇게 호흡기에 의존해 숨만 쉴 뿐 전신마비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이렇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로빈은 우울증까지 겹쳐 다이애나의 면회도 거부한다.
그러나 남편을 포기할 수 없었던 다이애나는 계속 남편 곁으로 다가가 삶의 의욕을 부추기나 그는 죽게 해 달라고만 한다.
로빈의 감정으로 들어가면 나는 그 마음을 온전히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인간답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시체처럼 눈만 뜨고 사는 게 어찌 사는 거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아이를 안아 볼 수도 없는 이런 아빠로 사느니 없는 게 낫고, 젊은 다이애나가 새 출발할 수 있게 보내는 게 맞는 것이다.
짐만 될 것이다. 불행할 것이다. 죽는 게 낫다고 나 역시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냥 죽게 해 달라는 소리였다.
다이애나는 로빈에게 자신이 제일 힘든 것은 당신이 죽고 싶다고 말을 하는 것이라 했다. 자신이 "정말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고 말이다.
로빈은 일단 자신을 병원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경하게 막는다. 호흡기없이 살 수 없고, 만약에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면 2분안에 죽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다이애나는 간호사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로빈을 병원으로부터 빼내 집으로 옮긴다. 집에 호흡기를 설치하고 어린 아들과 아내 다이애나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점점 삶을 찾아간다.
로빈은 침대에서만 생활하다 우연히 아들이 끄는 유모차를 보고 친구 테디 홀에게 인공호흡기가 달린 휠체어를 제작해 달라고 한다.
아마 이것은 그 당시 혁신적인 기구였다. 중증 장애인도 병원을 나와 생활할 수 있게 삶의 활력을 주는 발명품인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를 가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의 말을 시작으로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휠체어를 타고 세계를 경험하며 다닌다.
오로지 아내와 아들때문에 살기로 했던 삶이 아내의 배려와 사랑으로 그는 불가능한 것 같은 삶을 아주 길게 살아냄은 물론이고, 병원에서 꼼짝없이 갇혀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자선기금을 모으고 휠체어를 제작하여 자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봉사한다.
그러나 로빈은 너무 오랜 세월 호흡기를 끼고 살아서 염증이 생겨 피가 나고,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고 있는 로빈의 모습에 놀란 아들의 표정에 로빈은" 괜찮아 괜찮아로" 말로 다독이지만 겁먹은 아들의 표정앞에 오히려 로빈이 더 걱정이 되었다.
로빈과 다이애나, 그리고 아들 조나단 세명이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로빈은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한다. 아내를 위해 살아보려고 했던 삶이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아내와 아들로 인해, 즉 상대로 인한 행복이었다. 그게 작다는 건 아니다. 절대적인 자신만의 행복일 수는 없다. 로빈은 케냐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감옥 같은데 갇혔다. 그러자 리더격인 사람이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허락한다고 말을 했고, 아침이 되어 보니 모두 죽어있었다.
영화초반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했다. '왜 살지 않았을까, 왜 죽었을까?'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로빈이 그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목숨만 부지한 채 포로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택했던 그들의 선택이, 그리고 지금 죽음을 선택하려는 로빈의 마음도 말이다.
다이애나는 흥분하지만 받아들인다. 로빈과 함께 한 삶이 자신의 삶이었기에 로빈의 결정이 아프고 힘들지만 아내나 친구나 아들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죽음이라면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당신이 그 선택을 하는 것이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절대적인 행복을 위해 선택한 죽음이라면 말이다.
"당신의 삶이 내 삶이야..내 사랑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로빈의 모습이 죽어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다이애나도 "미투"라 말하며 마지막 작별을 한다.
난 로빈이 상대적 행복으로 삶을 선택했고 절대적인 행복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같은 중증환자들에게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 주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
친구의 말처럼 로빈이 불행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힘을 얻어간 것이다.
로빈 캐번디시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 생존한 후천성 전신마비환자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같은 중증환자들을 위해 봉사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20대 후반에 목 아래로는 마비가 되어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었음에도 다이애나의 사랑으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다간 이야기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의 아들 조나단 캐번디시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러브스토리를 영화로 제작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영화를 가져오면서 달라지는 제목 때문이다. 어쩜 이 영화는 다이애나와의 사랑이야기보다는 로빈이 전신마비로 살아낸 삶에 더 비중을 둔 영화라고 본다.
그런데 달링이란 제목은 왠지 로맨스물로 착각하게 만든다. 포스터도 그렇구. 달달한 로맨스물처럼 유인하여 낚시질 당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일까? 물론 다이애나의 사랑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라는 건 알겠지만 굳이 제목을 <달링>이라고 지어야 하는 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얼마 전 본 <내사랑>이란 영화도 그랬다. 하지만 사랑이야기라기 보단 장애를 가진 여류화가의 전기적인 스토리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영화가 먹히지 않나? 왜 자꾸 로맨스물로 둔감시키는 걸까? 포스터나 제목에 좀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게 선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에는 세계 최대 마약의 도시 '후아레즈'가 있다. 이곳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조직이 지방정부의 힘을 능가하는 조직력과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멕시코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실제로 후아레즈는 세계의 살인 도시라 불리울 정도로 위험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사라지는 등 상상초월의 범죄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경찰 군대를 동원하여 소탕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세력은 갈수록 거대해지고 미국마저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
미국 내 마약중독자들이 늘고, 그로 인한 범죄도 꾸준히 증가하여 국가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멕시코 후아레즈를 배경으로 긴장감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범죄 스릴러로 우리를 숨 막히게 할 것이다.
하나의 작전안에서 조금씩 다른 태도와 목표를 두고 있는 세 인물
CIA 소속 작전 총책임자인 맷(조슈 브롤린)은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작전에 투입시킨다. 그리고 동행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맷은 알레한드로를 케이트에게 "우리 사냥개"라고 소개한다. 여기에서 이 사람을 왜 사냥개라고 소개했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난 사람은 알게 된다.
영화 초반부, 서로에 대한 정보도 믿음도 없이 작전에 들어선 케이트의 시선으로 몰입하면 처음에는 너무 답답하다. 왜냐하면 그녀도 모르니까,
시체를 난도질해 전시해 놓는 짐승의 도시에서 맷과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작전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고, 그저 뒤에서 보고 배우라는 식의 태도로 케이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맷은 '케이트를 왜 이 작전에 끼게 했을까' 라는 궁금증이 인다. '전투력이 필요했다면 남자들도 많았을텐데'하고 말이다.
케이트는 자신만 소외당하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균열의 조짐이 보이던 그들은 끝내 마찰을 일으키고 부딪힌다. 그리고 케이트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자들은 법 안의 테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법 위에 앉아 있다. 마약 카르텔조직은 마약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으로 그들은 정부, 경찰, 군대까지 손이 안 뻗은 곳이 없고, 그들의 무기는 이미 막강한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다.
아내의 목을 자르고 딸을 염산통에 처넣은 놈을 찾기 위해서 알레한드로는 복수할 기회를 주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붙을 수 있다. 법의 테두리 따윈 통하지 않는 마약 카르텔 조직에게 더 악으로 대응하여 그들의 모든 걸 가져오려는 복수심으로 이 작전에 기꺼이 사냥개가 된다. 맷은 그의 복수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고 알레한드로를 이용하여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면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악명높은 이 곳에서 법의 테두리라는 형식적인 것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명분은 항상 필요하게 되어 있다.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했던 것이다.
맷은 자신들이 하는 작전이 절차적이었는지 확인서에 서명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형식적인 절차에 서명해줄 사람으로 케이트를 이용한 것이고, 케이트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도 손 떼지 않고 끝까지 가본다. 어차피 목표는 같기 때문이다.
악은 악으로 응징하겠다는 그들의 방식에 케이트는 동조하지 않는다.
알레한드로는 "시계의 구조를 알려고 하지 말고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것을 보라"
맷은 "전체 인구 20%의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끊게 하지 못할 거라면 질서라도 필요한 거야.그를 찾는 건 백신을 발병하는 것과 같지"
마약운반책으로 경찰을 이용하는 카르텔과 부패한 멕시코 경찰들을 적으로 간주될 만큼 무법지대인 후아레즈에서 그들을 소탕한다는 것은 법의 테두리라는 경계나 질서 따위가 먹히지 않는다.
혼돈의 국경지대 후아레즈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는 짐승의 도시로 마약조직들의 살인과 폭력은 경계를 넘어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알레한드로, 그의 모든 행동을 묵인하며 임무만을 위해 움직이는 맷, 정의와 룰에 따른 원칙주의자 케이트, 세 배우의 감정선과 심리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일촉측발의 무법지대 안에서의 긴장감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알레한드로는 형식적인 서명을 받아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케이트를 찾아간다.
"당신은 늑대가 아니오. 지금 이곳은 늑대들 소굴이오....작은 도시로 전출 가시오, 법이 아직 살아있는 곳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법의 테두리는 얼마만큼의 원을 그려 놓고 있을까?
권력을 쥔 사람들이, 법을 만드는 계층들이, 이미 악과 결탁하여 울타리의 범위를 맘대로 조정하여 그들을 변호하고 있다면, 그들을 위장시켜 주고 있다면, 늑대들에게 양을 내어주는 양치기와 같다면, 양들을 지켜줄 테두리는 안전한 것인가? 그들은 양들을 잡아먹기 위해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 혼란 속에서 정의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공존을 정의로 지켜줄 수 있을까? 무법지대에서 자신을 지켜줄 건 악과 손 잡거나, 폭력으로 맞서야 지킬 수 있거나, 아님 떠나야 한다. 법이 가능한 곳으로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떠나는 난민처럼.....
악을 상대함에 있어 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느꼈다면 너무 슬픈 현실이 아닌가?
실제로 마약카르텔은 멕시코의 정치인들까지 살해하고 있다.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자신과 뜻이 다르거나 거부하는 후보를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있다. 정말 무법지대이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경찰도 지원하지 않는 도시가 되어버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끄집어 다시 볼 수 있는 영화는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프 온리'를 끄집어냈다.
길 정거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이다.
내 기억으론 여주인공 '사만다'역을 맡은 제니퍼 러브 휴잇이 평범해 보여서 더 정감 있게 다가온 줄도 모르겠다.
남자들은 여자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이 남녀관계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랑만 쫓아다니며 살 수는 없다.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는 통로를 때로는 막아서고 무관심으로 방치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이안(폴 니콜스)과 사만다(제니퍼 러브 휴잇)
이안은 회사 일로 사만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다. 바쁘고 힘들어서 사만다를 자주 서운하게 만든다.
그의 생각은 온통 일에만 머물러 있고, 회사 프레젠테이션에 정신이 팔려 사만다의 졸업연주회가 있다는 걸 잊는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바쁜 건 알겠는데, 이안에게 자신은 매번 2위라는 사실이 서운하다.
그리고 이안은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 투정대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너한테 항상 두 번째라는 게 너무 가슴 아파. 더 비참한 건 거기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거야. 난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이 느낌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서운하다가 비참해지다가 그러다 익숙해지고 또, 그러다 포기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랑은 잠식된다.
그날도 이안은 회사에서 중요한 PT 중이다. 그런데 사만다가 들어와 자리를 망치고 만다.
둘은 말다툼을 하고 차를 타고 가는 그녀를 잡지 못하는 그 순간, 사만다가 탄 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만다는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교통사고로 그녀가 떠나고 이안은 슬픔에 빠진다.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우리는 잃고 나서 깨닫는다.
항상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갑자기 곁에 없을 때 가슴 시리게 아픈 일이다. 진심으로 사랑을 담아내지 못한 이안의 입장에서 더 그럴 것이다.
항상 같이 있을 거라고 여기고 내일로 미루어만 온 발길들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 버린다면, 이안은 밤새 울면서 후회한다.
지금이 아니면 모든 것이 늦는다는 걸, 줄 수 있을 때 주어야 했던 것들 앞에서 좌절하며 잠이 든 이안은 다음날 아침 깜짝 놀란다. 자신의 옆에 사만다가 자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가 그에게 생긴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주어진다.
사만다에게 이안은 묻는다. "하루 밖에 못 산다면 뭘 하고 싶어?"
그녀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안, 지금 이 순간을 그녀만을 위해 소중하게 쓰고 싶은 이안의 질문에 그녀는 답한다.
"질문이 너무 쉽네. 당신이랑 보내야지."
너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의 사만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거창한 무엇인가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건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같이 공유하는 삶이 얼마나 값진 사랑인지를 여자들은 수시로 남자에게 일깨워주지만 알 아차리 지를 못한다. 그저 익숙함에 묻어가려고만 한다.
그런 면에서 택시기사는 남자 이안이 깨닫지 못하는 걸 일깨워 준다.
"그녀를 잃는다면 감당할 수 있겠소? 그럼 답이 나왔군. 계산 없이 사랑하시오."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게 두려워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은 이안,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 적 없는 이안.
그 남자의 과거가 현재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연결고리 같은 것이다. 그 남자를 사랑하면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가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그의 어린 시절과 부모와 모든 걸 알아가는 과정도 사랑 안에 들어가는 일부로 말이다. 그가 뚝딱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현재는 자신과 함께 하지만 자신이 함께 하지 못했던 그의 삶이 궁금한 것은 연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과거를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사만다에게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포장한 인생 안에 어떤 아픔이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상처를 내기 싫어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사랑은 했지만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고 계산적이었던 이안, 그런데 사만다가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떠날 거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안, 그에게 다시 주어진 하루,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시간이 별로 없다.
어제와 다른 행동으로 변화를 주어 보지만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나중에 라는 말을 자주 쓰는 나에게도 이 영화는 내 옆에 있는 존재에 대한 배려와 표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지금도 안 되는 것이 나중이라고 될까? 현재도 못 지키는 사람이 내일을 지킬 수 있는 걸까?
이안은 표현하지 않았던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사랑고백도 한다.
" 오늘 너에게서 배운 것 덕분에 내 선택과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 네가 5분이든 50년이든 네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배웠어. 오늘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영원히 사랑을 몰랐을 거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사랑받는 법도."
우리도 이안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을 모른다. 그래서 매번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들을 하는 것이리라.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한 사만다로 인해 이안은 진정한 사랑을 배웠고 , 진정한 사랑은 시간에 관계없이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나도 사만다처럼 그저 사랑받고 싶을 뿐이다.
If Only.... 거짓말처럼 사만다가 곁을 떠났고, 이안은 사만다처럼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택시기사의 말처럼 그녀를 가졌음에 감사하고 계산하지 말고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많은 걸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서로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음에 감사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