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은 역사적 사건 말고 가족사에 집중하여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을 조명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냥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진 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은 광기를 넘어섰다는 느낌이었다.
영조의 정통성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인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난 연잉군이었다.
숙종은 우리가 잘 알듯이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왕이다. 그의 업적은 몰라도 장희빈을 떠올리면 따라오는 존재이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앉히지만, 인현왕후가 퇴출 된지 6년만에 다시 중전으로 복귀하자 중전이었던 장옥정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중전의 자리를 내놓게 된 장희빈의 간악함은 극에 달하고 인현왕후는 궁으로 입궁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게 된다. 영조의 어머니였던 최씨의 고변으로 희빈 장씨의 악행이 드러나 사약을 받게 된다. 그 후 숙종은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법으로 금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몸이 허약했던 경종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에 다음 왕위에 오른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과 천민 신분의 후궁 소생이라는 출신으로 인해 콤플렉스가 심했던 왕이었다. 그 콤플렉스가 자신을 평생 괴롭혀왔고,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리게 했다.
영조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거친 왕으로 다소 날카롭고 변덕이 심했다. 자신의 콤플렉스로 인해 학문과 예법에 완벽을 추구할 만큼 집착했던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한 것이었다. 사도는 두살이 되기 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어렸을 때는 매우 영특하여 영조의 지지속에 자라다가 크면서 무술이나 그림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영조는 급격히 실망으로 바뀌게 된다.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갈등
어쩌면 그의 과도한 기대가 사도세자에게는 숨막히는 일이었다.
세자의 교육에 숨 막힐 정도의 집착은 두 사람의 서로 어긋나는 갈등을 초래했고, 아들에 대한 집착과 과욕이 결국 사도세자를 점점 궁지로 몰아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못 마땅히 여기면서도 대리청정을 시키며 신하들 앞에서 다그치고 면박을 주는가 하면, 사도세자에게 양위 의사도 없으면서 양위 의사를 밝히며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하는가 하면 세자를 석고대죄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진짜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속이 다 보이는 유치함이고, 이거야 말로 권력의 갑질이다.
대리청정과 양위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사도의 불안 증세는 가중된다.
심심찮게 변덕을 부리고 자신에게 왕위를 뺏길까 두려운 것인지, 신하는 물론 자식마저 자식에게 충성하기를 바라는 영조의 본심 같았다.
자식을 위해 권력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한테까지 뺏기고 싶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예법이니 왕권강화니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야.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
그럼 아비는요? 하고 묻고 싶었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불신도 너무 강했고, 아들에 대한 미움도 너무 강했다. 그래서 뭘 해도 꼴 보기 싫은 걸 넘어서 내 쫒고 싶었을 것이다. 노론의 하수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자,영조는 세자가 미웠는데 ‘옳다구나’ 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 같다. 자식에게 사약을 내리면 세손에게 그 영향이 미칠까하여 자결을 명하나, 세자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노론의 하수인의 말만 듣고 대질심문도 없이 세자의 죄를 묻자,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석고대죄 하여도 이미 이성이 없는 영조는 뒤주 안에 세자를 가두어 8일 만에 숨지게 한다.
그 왕이 무엇이길래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단 말인가.
비운의 사도세자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1762년 임오년 왕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갇어 죽인 왕으로 기억된다. 자신의 형제도 아니요, 자기 자식을 그리 만든 왕은 52년간을 왕위에 재임했다. 권력으로 자식을 죽인 왕이 그 아무리 좋은 업적을 남기었다 해도 우리는 그의 업적 따위 아는 게 없다. 그저 후대에 알려진 사도세자를 비운의 세자로 만든 무자비한 왕일뿐이다.
자식 하나 제대로 품지 못한 왕이 어찌 백성을 제대로 품었다 보는가?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그렇다. 사도세자의 말처럼 영조는 그를 세자로도 자식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비극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미워해도 자식을 죽게 하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가 비극적인 데에는 가족의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가 없었다.
특히 혈연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것으로 안다. 아비가 자식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드는 데에도 어미인 영빈도, 사도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신하들도 그를 따뜻하게 옹호해 주지 않았다. 사도 혼자 안고 가기에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한 미움이 너무 컸고, 매일같이 다그치기만 하는 왕에 대한 두려움도 너무 컸다.
사도세자는 자신에게 인사하러 온 아들 내외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부부란 서로의 단점을 가려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외로웠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아내인 혜경궁마저 영조의 눈치를 보느라 그의 편에 있어주지 못했다.
힘없는 어미나 영조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여인들의 몸부림이 사도를 더 사지로 몰고 간 것이라 생각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고 불편했다. 한 두 사람만 세자를 품어주었더라면,
영조, 사도, 정조 3대에 걸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가족관계가 아닌 권력관계로 숨 막히는 신경전만 있었다.
아들의 의견에 매사 못마땅한 영조는 세자를 자식도 아니고,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적을 대하는 표정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기회만을 잡으려는 여성들만이 눈에 보였다.
모성애도 부성애도 없는 곳에서 사도세자가 겪었을 고통!
세손 정조의 말 :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나는 영조의 인간적인 고뇌를 못 보았다. 자식을 죽게 만든 아비의 아픔도 못 느꼈다. 왕의 자리가 아무리 중차대한 자리라 해도, 역사에 자식을 죽인 왕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린 세손에게 배우셔야 했다. 아비는 자식은 이래야 한다고 말이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단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저는 그날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자식이 아비의 마음을 보듯, 아비또한 자식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못한 것일까?
저 어린 아이의 눈에도 왕의 자리나 권력보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 보이는데 저 광기어린 영조의 마음에 자신의 자식에게 따뜻한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못해 자식들 저리 외롭고 괴롭게 했던 것일까? 못해도 격려해주고 끌어줄 것이지, 질책하고 비난하는 아비 밑에서 어찌 세자가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겠는가,
나는 자식을 죽인 임금으로 기록 될 것이다.
사도가 바란 것은 아비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다.
이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부모라면 응당 가질 수 밖에 없는 사랑 아닌가?
그런 사랑도 갖지 못한 자가 콤플렉스로 인해 자식을 믿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해서 아들을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로도 모자라서 자식을 고통스럽게 죽게 했다.
“나는 자식을 죽인 임금으로 기록 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그래 내가 보기엔 광인이다. 왕도 아버지도 아닌 그저 권력에 미친 자!
아버지와 대한 분노와 절망, 두려움,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자식으로서 아비로서 나누지 못했던 한탄 등을 유아인의 연기력에 녹아 사도의 감정변화에 스며들었다.
송강호와 유아인은 정말 훌륭한 배우이다. 정말 몰입해서 영조가 너무 미웠고 세자가 너무 안쓰러웠다.
부모 자식 간의 견해와 세대 간의 갈등을 어느 누구나 겪는 문제이다.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서 영조는 너무 독선적이고 무매했다.그것도 자식을 상대해서 말이다.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사탕도 물리면서 끌어 안아야 하는 것임을 그러지 못함이 결국 28살에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져오고, 어린 세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10대 소년 알렉스(말콤 맥도웰)는 학교도 가지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그저 신나게 세상을 휘젓고 다닌다.
코로바 밀크바에서 우유에다 약을 타서 마시면 폭력적인 걸 즐기게 된다.
같이 다니는 3명의 부하들과 노숙자에게 이유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다른 패거리와 패싸움을 벌이고, 차를 훔쳐 광란의 질주를 하는가 하면 어느 한적한 작가 알렉산더의 집을 습격해 그를 폭행하고 아내를 강간한다.
작가 알렉산더(패트릭 마지)의 집 내부적인 색감과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알렉스의 방은 더 인상적이다. 마약과 온갖 강도짓과 폭력,강간을 하고 다니는 것과는 다르게 그의 침대와 이불이 주는 컬러감과 벽에 걸린 스피커와 베토벤 사진, 가지런히 진열된 LP판들이 그의 바깥 세상과는 다르게 깔끔하다.
그리고 그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그 곡만 들으면 마치 여성을 둘러싸인 신선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원초적 본능만을 추구하는 사탄의 모습같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폭력적인 장면을 음악으로 커버하거나 두 명의 여자와 섹스하는 장면 역시 빨리 감기기법으로 빠르게 회전시키고, 강간당하는 모습이나 죽이는 장면에서는 벽에 걸린 예술적 그림으로 확대시켜 화면을 덮는다.
아트적인 것으로 살짝 숨기는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강렬하게 흐르는 베토벤 교향곡으로 미쳐 날뛰는 그의 범죄를 쿵쾅쿵쾅 놀이처럼 만들어 버린다.
노숙자를 때리는 장면도, 강도하러 들어간 집에서도 남편의 입에 테이프로 막아놓고 아내의 옷을 가위로 오리며 노래를 부르면서 한바탕 즐기는 놀이쯤으로 생각한다.
죄의식은 없다.그저 놀이에 불과하다.
어쩌면 영화가 상당히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금지됐던 영화라 많은 부분 삭제하거나 편집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무리에서 리더이기를 원했다. 나머지 부하들은 알렉스가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하들이 반발하자 그들을 제압했고, 자기가 위임을 보여준다.
어느 날 부하들과 돈이 많다는 저택에 잠입해 들어간다.
여자의 집안에는 값나가는 그림과 성기모양의 예술품이 있다. 예술품을 만지지말라고 여자와 몸싸움하게 되고, 집주인을 남자성기모양의 예술품으로 죽이고 만다.
현관앞에서 기다리던 부하들이 그의 머리를 내리치고 부하들의 배신으로 알렉스 혼자 잡혀 14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가게 된다.
수감 후 2년 알렉스는 간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좀 더 빨리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루도비코 요법으로 약물과 충격요법으로 범죄자를 교화하는 실험이었다.
정부에서 새로 추진하는 것으로 교도소를 새로 짓고 세금을 낭비하는 것보다 루드비코 요법으로 범죄자를 교화시킨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실험용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에 지원한다.
검증되지 않아 위험하다는 목사의 충고도 들리지 않는 알렉스는 그 실험에 지원하고,병원으로 옮겨서 2주간의 실험을 받고, 감옥으로 가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된다는 사실하나로 사인을 한다. ,
눈을 뜬 채로 고정하고, 고개를 못 돌리게 억압하고, 약물을 투여하여선정적인 폭력물과 집단강간 당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구토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약이 실험대상의 몸에 퍼져 죽음같은 마비증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장 열광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그런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게 된다.
알렉스는 '베토벤 9번 교향곡'만 들어도 구토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한다.
2주후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알렉스는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2주후 그는 성공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언론과 관계자들의 참여한 무대에 올려지고 폭력적인 상황과 성적 유혹을 만들어 그를 테스트한다.
그는 폭력에 무기력했고, 성적 유혹 앞에서도 구토감을 느꼈다. 정부측에서는 성공적이었고, 신문에서는 실험에 성공한 것이 기사화되고 그는 풀려나게 된다.
어쨌든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에서 그는 환영받지 못한다. 아들이 살인자였던 것만으로도 부모도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손가락질과 질타속에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하숙생인 청년이 자신의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아들처럼 자신의 부모를 챙기고 있었다.
자신에게 함부러 말하는 하숙생을 때리려고 하나 구역질하며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걸 알고 거리로 나와 강물을 바라보다 노숙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 노숙자는 자신이 전에 그토록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이었다. 알렉스는 힘없는 노인과 노숙자에게 둘러싸여 폭행에 무기력하게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내 경찰들이 다가와 말리는데 ,하필이면 그 경찰들이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이었다.
그들이 경찰관이 되어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 끌고 가 알렉스에게 물고문하며 폭행한다.
폭력를 행사하지도, 자기방어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게 된다.
알렉스는 예전의 알렉스가 아니다. 실험으로 그는 철저히 무능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도움을 요청하러 간 집이 자신이 전에 망쳐놓은 작가 알렉산더의 집이다.
알렉스에게 강간당한 아내는 그 이후 죽고, 알렉산더는 휠체어 신세다. 알렉산더는 그를 몰라보고 그가 신문에 난 비도덕적인 실험의 희생자로만 알고 그에게 뜨거운 목욕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알렉스는 알렉산더를 기억하지만 알렉산더가 가면을 쓰고 범행을 했던 터라 못 알아봄에 안심한다. 그리고 목욕하러 들어간다.
여기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1이라도 죄의식이 있었다면 그 집에서 목욕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와인을 마시고 밥을 먹는 짓거리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1도 양심의 가책도 못느끼는 악인이다.
알렉산더는 반정부 글을 쓰는 작가이다.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알렉스를 이용하려고 생각한다.
정부가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양아치들을 모아 경찰을 시켜주고, 죄수에게 말도 안되는 실험을 한다고 비도덕적인 실험이라는 비판을 하기 위해 지인들을 불러 알렉스를 인터뷰하게 하려고 연락한다.
알렉산더는 알렉스가 목욕하면서 부르는 Singing in the Rain을 듣고 강간범인걸 알게 된다. 분노로 참아내며 저녁을 내주고,수면제를 탄 와인을 마시게 한다. 그리고 지인들이 와서 알렉스를 인터뷰하는 동안 분노를 속으로 참아내며 그가 실험에 대한 것을 인터뷰하는 것을 듣고 있다. 수면제로 인해 기절한 알렉스를 2층방에 가둔다.
작가는 알렉스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으면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걸 알고 그가 있는 2층을 향해 베토벤 9번 교황곡을 크게 틀어 그에게 복수한다.
단지 육체에 가해진 무기력증이 실험의 결과이다. 그저 2주동안 주입된 것에 대한 학습된 몸의 반응이다. 베토벤음악을 들으면 음악이 주는 고통이 아니라 베토벤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깔린 장면에 대한 연상으로 고통스러운 반응이다.
알렉스는 너무 고통스러워 창문으로 자살을 결심하고 뛰어 내린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치료를 받고 본성 그대로 몸도 반응하게 된다.
범죄치료 청년을 둘러싸고 비인간적 범죄갱생방식이란 비난이 쏟아지고,엄청난 비판을 받은 내무부장관은 이번 선거에서 알렉스로 인해 궁지에 몰리고, 알렉스가 죽게 되면 고소당하게 될 위기에 놓였다.
이로 인해 언론은 루드비코 요법 실험에 향한 정부를 향해 부정여론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진 내무부장관은 병원에 입원한 알렉스를 찾아와 직업과 돈을 주겠다고 제의를 한다.
내무부장관이 찾아와 그를 이용해 언론을 불러 전세역전을 노리는 것이다.
알렉스가 좋아하는 큰 스피커가 들어오고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으면 고통스러워 하던 알렉스는 사라지고 다시 예전처럼 음악을 들으며 여자와 뒹구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나는 완벽히 치료가 되었다.' 라는 말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주인공 알렉스의 방과 작가의 집 인테리어와 죽은 여자의 집은 굉장히 아트적인 감각이 강하다. 뛰어난 인테리어와 색채에서 오는 부분들이 굉장히 살아있다.
알렉스는 처세술에 강하고 지능이 높은 인간이다.그리고 내면을 숨기고 교화된 척 아부하는 그의 내면은 쉽게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좋아하는 데 그게 나중에 고통의 요소로 그의 인생을 자극하게 된다. 물론 다시 원상복귀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나 예술품으로 가려도 인간의 사악한 본성은 가려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질서가 있는데, 인간의 마음은 질서가 없다.
사람의 본성은 정리될 수 없다. 범죄본능은 교화되지 못하고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더 강력해진다.
사이코패스들이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죄의식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그들에게서 교화는 별나라 이야기일뿐이다.
그는 그냥 2주후의 나가고 싶다는 의지로 임한 것이고 무대위에서도 여자를 자빠트리고 싶은 본성은 끓어오르는데 속이 매쓰겁고 육체적 고통이 느껴져 멈춘 것 뿐이다.
몸만 어떤 반응에 무기력해 졌을 뿐 본능은 사악하다.
교화가 불가능한 사이코패스같은 이들에게 어쩌면'눈에는 눈'이라고 말한 교도관의 말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영화 <안녕, 헤이즐>을 단순히 로맨스 영화라 짐작하지 말자. 이 영화를 암에 걸린 두 남녀가 죽어가는 슬픈 영화라고 짐작하지 말자. '대충 이런 내용 아니야?'라고 짐작하지 말자. 스토리나 줄거리에 치중하지 말자.
삶 속에서 안고 가야 할 고통이나 비극이나 슬픔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감동을 선사하고, 둘의 사랑이 부럽다기보다 응원해 주고 싶었다. 너무 많은 공감으로 어른인 내가 너무 많은 걸 배웠다.
내가 얼마나 얕은 사랑을 하고, 내가 얼마나 얕은 생각을 하고, 내가 얼마나 얕은 삶을 살고 있는지 느끼게 해 주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삶은 유한하지만 그들의 깊이있는 사랑은 무한했다. 이 영화는 암으로 죽어가는 두 주인공이 죽음이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죽음 뒤의 삶을 남아있는 이들에게 선사해 주고 가는 시작을 선사한다.
죽으면 끝나는 게 삶이 아니다. 죽음 뒤에 그들의 삶은 계속 가족들에게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삶과 죽음의 관계, 죽음이 주는 삶, 남겨진 자들의 삶, 죽음을 준비하는 그들의 시간을 통해 가슴 한편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긴 시간보다 짧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깊은 사랑을 보여준 <안녕, 헤이즐>이란 영화는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소설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2012년 아마존닷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2014년 YA소설 부문 미국 전체 판매량 1위를 기록할 만큼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책이다. 그리고 1979년생의 감독은 원작의 느낌을 살려서 스토리보다 각 캐릭터의 삶에 대한 무한한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고 본다.
'안셀 엘고트'가 연기한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뻔뻔한 듯 로맨틱하고, 위트 있고, 너무 멋졌다. 매 대사마다 순간순간의 표정과 능청스럽게 또는 저돌적인 고백도 다 뇌리에 남을 정도다.
그리고 '쉐일린 우들리'가 연기한 '헤이즐 그레이스 랭커스터'는 자신의 죽음이 고통스럽기보다는 그 죽음으로 인한 남아있는 가족들의 삶을 더 염려하는 아주 깊이 있는 역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얼마 전 <미드나잇 선> 영화를 감상하고 후기를 적었었다. <미드나잇 선>이 태양이라면 <안녕 헤이즐>은 하늘 같았다.
자신의 딸이 밥도 잘 안 먹고, 밖에도 안 나가고, 방 안에만 있다고 엄마는 암의 부작용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치료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암환자들의 모임에 헤이즐을 보낸다. 좀 친구들도 사귀고, 외부활동도 하면서 십 대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엄마들 마음은 다 그래)
하지만 헤이즐은 그 모임이 내키지 않는다. 우울증은 암의 부작용이 아니고, 죽음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소통을 캐리어처럼 끌고 다니는 헤이즐은 17살, 갑상선암이 폐로 전이되었고, 임상실험에 반응한 탓에 아직도 살아있다. 그 모임에서 자기를 계속 쳐다보는 어거스터스의 시선이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의 주인공이 싫지 않다. 어거스터스는 골육종으로 다리 한쪽을 절단한 상태였다.
첫 날부터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보자는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고, 서로의 병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헤이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터 반 호텐'이 쓴 책을 추천한다. (소설에서는 [장엄한 고뇌]라고 나오며, 헤이즐에게는 성경 같은 책으로 묘사된다)
헤이즐의 추천한 책을 읽고 공감한 어거스터스는 헤이즐과 더욱 친밀해졌다.헤이즐은 소설의 다음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 책 속의 주인공이 죽고 나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 말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메일로는 유출이 예상되어 소설 뒷이야기를 말해줄 수 없다는 것, 시간이 되면 암스테르담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생애 처음으로 하는 여행과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간다. 의사들은 헤이즐이 암스테르담에 가는 걸 반대한다. 의사들과 부모님과 헤이즐이 다같이 모여 그녀의 상태를 설명할 때 엄마와 아빠가 초조해하며 꼭 웅켜 잡은 손이 헤이즐의 시선에 마음에 들어온다.
헤이즐은 어거스트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 골칫덩어리뿐이고 수류탄같은 자신의 존재가 그 모두의 삶을 폭발시킬 것 같은 두려움에 무거워진다. 너무 유별나게 사는 자신의 삶이 슬프고, 하늘만 봐도 슬퍼지고, 어릴적 아버지가 만들어 준 그네만 봐도 슬퍼진다. 그런 헤이즐에게 어거스터스는 "니가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밀려나지 않을 거야. 내 마음이 아프건 말건 그건 내 자유야."라고 말한다.
어쩌면 삶은 고통과 같이 운행된다. 그렇다면 그 비극을 누구와 동행할지, 누구에게 상처 받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아프건 말건 자신의 자유이고 그의 몫인 것이다. 물론 헤이즐도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란다. 어거스터스가 너무 멋지다. 헤이즐을 바라보며 씩 웃는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다.
지금 내가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내 앞에 있고, 그걸 밀어낼 용기로 밀어낼 힘으로 헤이즐에게 힘껏 끌어 안으라는 선택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거스터스의 소원으로 엄마와 어거스터스와 동행하여 암스테르담을 향해 비행기를 탄다. 불을 붙일 수 없는 담배 한 개비를 상징처럼 물고 처음 떠나는 여행에 어거스터스도 흥분하고 헤이즐도 기대에 차 있다. 하루를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것보다 하루를 가슴뛰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준 엄마의 배려가 좋았다.
레스토랑에서 예쁜 옷을 입고, 정장을 입은 두 아이가 어찌나 멋지고 이쁘던지, 눈물이 날 정도로
둘은 여행의 목적처럼 네덜란드 작가 피터 반 호텐을 찾아간다. 그런데 느낌이 쎄하다. 알코올 중독자에 말은 또 얼마나 못되게 하는지 나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엎어 버리고 나오고 싶을 만큼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 더 힘든 그녀에게 피터 반 호텐 작가의 뒷 이야기가 희망적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바람으로 좋아했던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정말 헤이즐의 듣고 싶은 이야기 같은 건 없다고 두 사람에게 폭력 같은 언어들로 상처를 준다.
그들은 안네 프랑크가 숨어지내던 건물을 보러 간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가파른 계단만이 있다. 산소통을 끌고 다녀야 하는 그녀에게 버거운 길이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오르고 안네 가족이 숨어 지내야 했던 꼭대기까지 오른다. 그곳에서 안네 프랑크의 음성이 울린다.
"그 순간에 저는 비극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어요. 아름다움만이 남았죠. 당신안에 있는 행복을 되찾으세요.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행복해지세요"안네는 그런 상황에서도 비극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말한다. 헤이즐도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주변의 아름다운 것을 생각했을까?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에게 키스를 한다.
그리고 헤이즐의 안의 행복은 어거스터스를 사랑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밀어버리고 숨긴 마음을 내 놓은 것이다. 어거스터스의 선택의 자유처럼 헤이즐도 어거스터스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지금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 그렇게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 펼쳐놓는다. 작가를 만나는 일로 시작된 여행은 결국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받으며 행복을 그리게 된 셈이다.
헤이즐과의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어거스터스는 자신의 온 몸에 암이 퍼진 것을 헤이즐에게 털어놓는다. 죽는 것보다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어거스터스, 그래서 죽어서라도 자신이 모두에게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공장이었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을 정리정돈하듯 받아들이며 준비한다.
어거스터스는 자신의 친구 이삭과 헤이즐에게 자신의 추도사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삶과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에게 제대로 삶의 마무리 지으려 한다. 마치 새로운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마치 여행을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녀의 추도사에는 "너를 만나 내 삶은 무한대가 되었어. 넌 내게 한정된 나날 속에 영원함을 줬어"라며 어거스터스를 향한 사랑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며칠 후 어거스터스는 죽는다.
응급차에 실릴때마다 지금의 통증이나 아픔이 얼마인지를 1~10중에 말해 보라고 한다. 가장 죽음의 고통을 느꼈을 때도 그녀는 10이 아닌 손가락 9개를 펴 보인다. 10은 남겨놓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죽음으로 인한 아픔은 10이다.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읽으려 쪽지를 편 헤이즐은 그의 슬퍼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신의 준비한 추도사를 접어둔다. 그리고 그의 집에 부모님이 걸어둔 격려의 말로 시작한다. 장례식은 죽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자식보다 암으로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고통이 더 크고, 죽은 어거스터스보다 죽은 자식으로 인한 부모님의 슬픔이 더 크다는 걸 안다.
'누가 날 엄마라고 불러줘'라고 울던 엄마의 절규를 가슴에 품었던 13살의 헤이즐은 그냥 포기해 주었으면 하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부모로 인해 깨어나는 게 두려웠다.
효과가 없는데도 필사적인 부모로 인해 그저 시간을 조금 더 벌면서 살아 가게 할뿐인데, 자신의 죽음이 부모의 삶의 종착점이 될까 봐.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의 엄마가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삶의 의욕도 없이 삶을 닦아내지 않고 뿌연 채로 살까 봐서 엄마. 아빠의 삶이 주저앉을까 두려웠다.
자식을 위해 그 고통을 끌어안은 건 엄마의 선택이다. 그 선택을 버리는 것보다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행복하고 더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자식을 감성적으로 받아 들일 부모는 없다.
죽어가는 딸을 향해 자신의 사랑으로 힘껏 행복해질 선택을 끌어안은 것이고, 버릴 수 있는 선택보다 품는 행복이 더 컸기 때문에 끌어안은 선택이다. 그런 헤이즐의 맘을 안 엄마는 헤이즐에게 딸이 죽고 나서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사회복지사를 준비 중이라 했다.
헤이즐은 자신에게 '최고의 뉴스'라고 엄마에게 안기며 기뻐한다. 어쩌면 작가에게 듣고 싶었던 뒷 이야기의 희망을 엄마에게 듣게 된다. 이제 그녀의 두려움을 보내버린다.
삶은 삶속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삶을 덮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삶은 삶으로서 시작하고 삶으로서 마무리 짓는 어거스터스를 보며 행복도 고통과 같이 다니는 따라다니는 건데 나는 고통을 피하려고만 했던 삶이었다. 고통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며 행복을 기다려야 되는 것임을, 그래서 더 큰 행복을 안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로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로 회자되고 있는 명작 <쉰들러 리스트>이다.
수많은 영화를 접하면서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물가물해지고, 흐릿흐릿 감성을 반토막내거나 소멸시키는 반면, 기억의 방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도 있다는 걸 .이 영화로 나는 증명한다. 가슴에 각인된 영화이다.
내게 이 영화는 유태인이라는 민족보다 히틀러라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했다.
왜 그토록 이나 잔인해야 했을까? 어떤 상황이면 이렇게 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의 깊이가 깊게 파고 들었고,도저히 어떤 상상을 갖다 놓아도, 어떤 이유를 갖다 놓아도 히틀러의 만행은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저지를 수 없는 짓거리였다.
유태인 대량학살은 어떠한 명목도 어떠한 전쟁에도 비유할 수 없는 비극적인 대참사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역대 최악의 살인마라는 수식이 더 어울릴 법하다. 매번 홀로코스트 영화를 접할 때마다 히틀러의 정신감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여기에 다 펼치다보면 난 이 영화에 대해 한마디도 못 적어 내려 갈 것이다.
영화는 오스카 쉰들러라는 실제 인물을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에 의해 스크린으로 펼쳐진다.
1993년에 제작된 쉰들러 리스트는 독일 사업가이자 나치 당원이었던 쉰들러(리암 니슨)가 폴란드에서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거는 내용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크라코프 마을에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독일인 사업가인 오스카 쉰들러가 찾아온다. 그의 속셈은 전쟁을 이용하여 유태인 노동자를 인건비없이 고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은 관심 밖이고 사업으로 인한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업가였고, 독일군에게 잘 보여 자신의 사업에 이득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자로, 나찌 뱃지를 달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해 사업을 번창시키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독일인 사업가인 그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공장을 인수한다.
인건비 없이 수 백명의 유태인을 고용한 오스카 쉰들러는 우연히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가까워지면서 나치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되는 유태인들의 참혹한 실상과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다.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독일의 만행은 히틀러와 나치들은 유대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는 그토록 잔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날 오스카 쉰들러는 언덕에 올라가 독일의 만행을 눈으로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잔인하게 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독 눈에 들어오는 빨간코트 여자아이, 흑백 화면속에 빨간 코드를 입은 소녀가 그가 독일의 만행으로부터 유태인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저 여자아이는 자신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전쟁에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민간인, 여자, 아이들까지 죽이는 데는 더 많은 명분을 들이대야 한다. 최소한의 도덕성도 인간성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치들!그들이 사람이라는 게 더 소름끼친다. 그들도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게 더 소름끼치고 치떨린다.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생각하는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다는 게 그저 끔찍할 뿐이다. 오히려 귀신들이 더 따뜻하게 다가올 정도다.
그 소녀를 끌고가는 독일장교의 표정을 보라. 영화를 보면 독일군의 장교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다. 광란의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건조하고 냉정하다.
독일군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이다. 그의 만행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쉰들러는 사업가로서 필요에 의해 그를 상대하지만, 그 잔인성에 기회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쉰들러마저 흔들리게 된다.
유태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독일군들은 샅샅이 찾아내 무자비하게 죽인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난무하다.
아몬 괴트는 매일 아침 숙소의 발코니에서 밑에서 일하는 유태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미친 넘이었다. 그냥 미친 넘이다.이 장면은 머리속에서 지우고 싶은데 수시로 기억이 들락거려 미치겠다.
수프가 따뜻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하다 멈추었다는 이유로,걸음이 늦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그가 죽인 유태인이 500명은 족히 넘는다. 더 미친 건 그 시체를 자신의 애완견에게 먹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는 ‘크라코프의 살인자’라 불렀다.욕 도 아깝다. 저런 인간은 땅에도 묻으면 안되는데
도대체 독일군의 피는 흐르고 있는 걸까? 저들도 심장은 있는 걸까?를 연속 되뇌었다. 밖에서는 잔인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는데 안에서는 독일군 장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온 쉰들러는 매일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유태인에 대한 독일군의 만행을 보면서 서서히 그의 양심이 흔들리고 마침내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유태인들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유태인 회계사인 이작 스턴(벤 킹슬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구해낼 유태인 명단을 작성한다.
이작 스턴은 리스트를 보여주며 “이렇게 아름다운 명단은 없을 거에요. 생명부에요 죽음의 폭풍을 막아주는 방패에요”.라고 말한다.
쉰들러는 군수품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독일군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노동자들의 명단을 리스트를 제시해 유태인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빼돌린다. 1,100명의 유태인들을 수용소에서 구해낸다. 쉰들러는 사업가였다. 그가 독일군 장교를 매수하고 유태인들을 먹여 살리느라 가진 재산을 모두 날린다. 그가 세운 군수품 공장은 7개월 동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전을 맞이한다.
1945년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유태인들도 자유의 몸이 된다. 반면에 나치 당원이었던 쉰들러는 연합군에게 체포될 위험에 처하게 되고 유태인들과 작별하기 전 더 많은 유태인을 살려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어. 어쩌면 더 살릴 수도 있었는지도 몰라. 차를 팔았다면 열 명을 더 구했을 지 모르고, 뺏지를 팔았다면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인물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쉰들러의 무덤에 차례로 참배하는 장면으로 끝난다.그가 살려 낸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제 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부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미술상, 음악상, 촬영상, 편집상을 수상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명작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1998년에 이 영화로 유대인 대학살을 공론화하는데 기여했다는 내용으로 독일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독일 최고의 명예인 십자 훈장을 받는다.
자신의 공장을 이용해 전 재산을 걸고 장교들을 매수하고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라는 것을 알려줘서?
독일이 유태인에게 행한 만행은 오직 히틀러의 독재만의 문제였을까? 그 많은 독일인들이 악 앞에 침묵했다.
‘오스카 쉰들러’라는 제2의 존재들이 더 많이 나와 주었으면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이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독일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악을 행한 히틀러나 나치만큼이나 악 앞에 침묵하는 많은 자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앗아갔다.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유태인을 살렸다는 것에 자신들의 죄를 다 속죄할 수는 없겠지만,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세계를 구한 것이라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오스카 쉰들러는 용기를 내어준 것 이상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매력적이고 세련된 심리 스릴러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공감 한 표를 던지고 시작할까 한다.
M.나이트 샤말란 감독만의 특유의 연출과 스토리를 엿볼 수 있는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원제는 <Split>라는 분열의 뜻을 가진 스릴러 영화다.
스릴러로서 심장을 쫄게 한다기보다 계속되는 심리전과 수많은 인격들에 대처하느라 초반에는 스토리의 흐름을 이해 할려고 초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다 마지막 인격체의 등장으로 인해 전체적인 구도를 잡아갈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몸 안에 24개의 인격체를 상상하기란, 또 그걸 연기해 내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표정의 변화를 보며 그 인격체를 추리해 내고 성격, 나이, 취향을 얻어 내는 과정이 좀 복잡했다.
그러나 그 많은 인격 중에 영화에 등장하는 인격은 6~8개정도이다. 나머지는 그가 컴퓨터에 기록해 둔 영상일기 속에 있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인격체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을 관찰하며 영화에 집중했다.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보았다.
우선 우리는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해리성 인격 장애'에 대해서 먼저 인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흔히 '다중인격자'를 말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몸 안에 각각의 개별 인격들이 서로를 지배하고 또는 통제한다는 것이다. 케빈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인 '빌리 밀리건'은 해리성 인격장애를 가진 범죄자이다.
1977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일어난 실제 성폭행 용의자로 체포되어 수사하던 중 정신감정을 통해 24명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에게 생소했던 해리성 인격 장애 환자인 것이다. 3세부터 26세까지 종교, 목소리, 억양, 성격이 모두 다른 24개의 다중인격을 가진 '빌리 밀리건'은 본래의 인격은 26세이고, 아달라나는 19세인 여성이며 동성애자로 다른 인격들 몰래 여대생 3명을 성폭행하고, 이로 인해 빌리는 체포되게 된다. 빌리가 체포되는 계기를 만든 성폭행 사건의 주범 인격체이다.
그리고 ‘선생’은 26세로 23개의 인격을 하나로 융합한 인격이라는 것이다.
이 선생인격으로 인해 빌리의 24개 인격을 모두 알 수 있었고 인격을 통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원래 인격인 빌리는 학교에서 놀림을 당해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인격들이 막아주어 긴 시간 잠들어 있다가 범행 후 정신병원에서 깨어나게 된다.
‘아서’ 인격은 뛰어난 지적능력으로 자신의 몸에 다른 인격이 있음을 깨닫고 다른 인격들을 주도하며 다스리기도 했다.
다른 인격이 전면에 나와 있는 동안에는 전면에 나와 있는 인격 말고는 다른 인격들은 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며,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류검사나 뇌파검사를 통해 다른 신체적 반응을 확인하여 무죄선고를 받아낸다. 영화상의 허구가 아닌 실제 존재한 인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소름끼친다.
클레어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반친구들, 파티가 끝나고 클레어의 아버지는 클레어의 친구들을 직접 집에 바래다 주기로 한다.
먼저 차에 오른 클레어와 단짝 마르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케이시가 차에 타게 되는데, 운전석에 탄 낯선 사람으로 인해 정신을 잃는다.
세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때는 그녀들 앞에 '케빈'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케빈이 아닌 '데니스'라는 인격체이다. 원래 몸의 주인인 케빈은 어렸을 때 학대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정갈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안경을 쓴 인격 '데니스'는 그녀들을 납치한 인격으로 감정의 기복이 없고 결벽증이 있다.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고 꽃을 꽂아주고 식당에서 식사대접까지 해주는 '패트리샤'는 구두와 목걸이를 하고 뛰어난 리더십을 가졌고, 9살 꼬마 인격 '헤드윅'은 겁이 많다. 대외적인 활동을 맡던 '배리'는 디자인에 소질이 있는 인격으로 플레처 박사를 신뢰한다. '오웰'은 역사에 해박한 인격, '제이드'는 당뇨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최종 악역 ‘비스트’는 다른 인격들 사이에서 인간 그 이상의 존재로 여겨진다.
세 여학생 앞에 데니스, 패트리샤, 헤드윅 새로운 인격들이 나타난다.
다중인격인 '케빈'과 외톨이인 '케이시'는 어쩜 어릴 적 학대받았다는 것에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다.
'케빈'이라는 몸에 23개의 인격이 공존하고 발현되는 인격에 따라 능력과 성격, 지능이 다르고 주로 몸을 지배하는 것은 데니스와 패트리샤,헤드윅이다.
'데니스'가 아닌 다른 인격들이 몸을 지배할 때 플레처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낸다. 플레처 박사는 다중인격자들이 인격이 바뀌면 몸의 화학적 구조도 바뀌고, 서로 다른 성격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중인격자들의 여러 인격들이 각자 지능도 다르고, 체력도 다르다고, 말하는 것을 감안하여 데니스 인격일 때 그의 근육은 굉장히 단단해 보인다. 그리고 헤드윅 인격일 때는 진짜 아이처럼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가 최고라고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3 아이덴티티’를 통해 케빈은 소녀들을 납치하여 24번째 인격체인 '비스트'를 완전한 인격체로 탄생시켜 세상에 나오게 한다.
제어 맥어보이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표정과 동작만으로 서로 다른 인격체들을 구사해 냈고,여러 인격체를 오가는 다중인격자를 완벽하게 표현해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마지막 시리즈인 '글래스'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 사무엘L.잭슨,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으로 통제불가한 24번째 인격 비스트를 깨운 케빈, 강철같은 신체 능력을 지닌 의문의 남자 던, 천재적 두뇌를 지닌 미스터리한 설계자 미스터 글래스, 마침내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24개의 인격, 강철같은 신체, 천재적 두뇌가 만난 영화 ‘글래스’가 2019년 상영된다.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스릴러를 기대해 볼만하다.
개봉을 앞둔 ‘글래스’를 보기 위해서는 두 편의 시리즈인 ‘언브레이커블’과 ‘23아이덴티티’를 미리 보기를 권장한다.
조선의 26대 왕이고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과 귀인 양 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덕혜옹주! 솔직히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다. 이 영화로 인해 우리는 덕혜옹주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60살의 나이로 얻은 늦둥이이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이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고종의 사랑은 아주 남달랐다.
고종에게는 명성황후 민씨사이에서 얻은 아들 제27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순종이 있다. 그는 일제의 강요로 양위하면서 즉위하였으나, 1910년 국권을 일본에 뺏기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일곱번째 아들인 영친왕,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민비의 몸종 상궁 출신이던 귀빈 엄 씨의 몸에서 얻은 자식으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의 인질로 잡혀간다. 그리고 일본왕족의 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마사코가 영화에서 나오는 이방자 여사이다.
그리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 귀인 장 씨의 아들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인과 정략 강요받으나 끝까지 거부하여 조선인과 결혼한 이우 왕자로 더 알려져 있다. 바로 고수가 열연한 의친왕이다.
그리고 귀인 양 씨사이의 덕혜옹주는 고종의 넷째 딸인 대한제국의 황녀이다.
아버지 고종은 영친왕과 같은 정략결혼을 성사시키지 않기 위해 은밀히 그녀의 약혼을 추진하여 김장한을 부마로 내정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에 의해 무산되고 덕혜옹주의 약혼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던 중 고종이 사망하게 된다. 고종이 사망 후 14살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 유학이란 명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어머니인 귀인 양 씨마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정신적인 충격은 컸으리라 본다. 영친왕에 이어 덕혜옹주에게도 정략결혼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일본 백작인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으나 정신분열증이 심해지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무려 15년이란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외롭게 살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일본은 일본과 조선의 한일 융합정책의 일환으로 영친왕과 덕혜옹주는 희생양이었다. 물론 나라를 잃은 왕족이 볼모로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과 같이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고 영친왕 곁을 지켰으나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다케유키는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있는 그 기간에 이혼을 하였고, 딸도 죽음으로 잃고 만다.
영화는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해 주었다면 하는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영화를 보면서 고수나 덕혜옹주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한 개인으로서 비운 했던 그녀의 삶은 참 안되었으나, 왕족으로서 그들의 안위 말고 목숨과 전재산을 걸고 나라를 되찾겠다고 싸운 의병들 속에 그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일본에 볼모로 잡혀있는 신세라 할지라도 대한제국의 왕족으로서 자신으로 인해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총을 맞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나약함에 참 통탄스러웠다.
일본 땅에 끌려와 손가락이 잘리고 개돼지만도 못한 처우로 학대받고 고통받는 백성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의병과 애국단체에 대한 경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웠다.
저런 힘없는 왕이라도 상해로 데리고 가려고 목숨을 내어놓는 그들에 비하면 정말 영친왕이나 다른 왕자들의 모습은 그저 일본이 주는 대우라도 받는 게 어디냐고, 우리가 어디 가서 이렇게 살 수 있겠냐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받는 건 힘없는 백성이라는 말에 또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지언정, 어차피 볼모로 살바에 차라리 당당히 조선의 왕으로 죽기를 자처했더라면 나라를 위해 싸우는 저 의병이나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힘이라도 되어 주지 않았을까? 그럼 우리가 저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지낼 수 있었을까?
그 아무리 왕의 후손일지라도 나라가 없는데 그저 일본의 볼모로 그들이 하던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로 살아야만 했을까?
그들의 한마디는 동포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덕혜옹주 역을 맡은 손예진이 일본 수용소에서 고생하는 동포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그러니 견디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아리랑을 부르는 동포 때문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들이 그 긴 겨울을 버티어내서 그들이 목숨을 던져 그 시린 겨울에 투쟁하였기에 이 땅에도 봄은 왔고 우리는 독립을 맞이했다.
빼앗긴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그들이 외친 한마디는 대한민국 만세! 죽어서라도 독립을 이루겠다는 외침에 하늘은 답을 해주었다.
이 영화는 그 당시 나라 잃은 민족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수치와 고단함을 이 덕혜옹주를 통해 나라 잃은 백성이 얼마나 힘든 겨울을 보내야 했는지, 나라 잃은 왕족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능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들의 귀국을 막는 바람에 그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으로 바뀌고 김을한이라는 기자의 노력으로 인해 일종의 황족들의 입국을 허락하면서 정신병원에 있는 옹주를 데려올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박해일을 고종이 맺어주고자 했던 김장한으로 설정하여 그녀를 찾게 하지만 이건 실제와 다르다. 영화는 덕혜옹주라는 인물을 좀 더 극대화시키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만신창이인 그녀는 귀국 후 낙선재에서 지내다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었던 비운의 인물로 살아야 했던 덕혜옹주를 손예진이란 배우를 통해 잘 표현했으나, 독립운동이라는 것보다 친일파에 가까운 그들이 삶이 나는 내내 불편했다.
이 영화는 사실과 픽션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역사왜곡을 논하기 전에 사실과 픽션을 구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연기자들의 캐릭터와 연기 감정선도 느끼며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권비영 작가 소설 <덕혜옹주>을 원작으로 스크린에 담은 것이라 하니 한번 책으로 더 접해볼 생각이다.
영화의 배경은 1964년 미국 워싱턴 주의 작은 마을, 노래와 춤이 유일한 즐거움인 셀마는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의 수술을 위해 체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다.
수술비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셀마 역시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고된 노동과 앞이 점점 안보인다는 절망같은 건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상황도 환상속의 무대를 만들며 춤과 노래로 현실을 상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뮤지컬 속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시력이 한층 더 어두워진 것을 깨달은 그녀는 사실을 감추고 일을 하지만결국 셀마는 공장에서 해고되고 쓸쓸히 공장을 나온다. 그녀에게 미국이란 아들의 수술과 자신의 꿈인 뮤지컬을 꿈꿀 수 있는 꿈의 나라이다.
그녀의 이웃에는 셀마모자에게 자신들의 트레일러를 빌려준 빌 부부가 살고 있다.
이주해온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였겠지만 고된 노동으로 그녀는 아들의 수술비마련으로 넉넉한삶을 누릴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앞도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집에 돌아온 셀마는 일하고 받아온 보수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돈 통에 넣으려고 통을 열었다.
하지만 돈 통은 텅 비어있다.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그녀가 눈이 안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의 짓이었다.
그녀에게 집을 세주는 빌이 아내 린다의 사치를 감당하기 힘들어 셀마의 돈을 훔쳐간 것이었다.
셀마에게는 아들의 수술비였기에 꼭 있어야 하는 돈이었다.
셀마는 빌의 집에 가서 돈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빌에게 총구를 겨누고 빌을 쏘고 만다.
셀마는 그길로 재빨리 병원에 가서 선불로 돈을 내고 아들의 눈 수술을 약속받는다.
한번 돈을 잃은 셀마는 무엇보다 아들의 눈을 수술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셀마는 빌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결국 경찰에게 붙잡힌다.
아들이 바라 볼 세상을 꿈꾸고, 힘든 노동도 자신의 즐거움인 뮤지컬로 승화시켰던 셀마에게 미국은 아들의 수술비를 훔쳐가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다.
영화에 대한 평은 각각의 견해차이로 다양하게 나뉘지만, 영화의 내용은 그저 그럴싸한 스토리라고 말하지만 그 내용의 맛은 다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인간이라면 자식이고, 부모이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살아있는 감정 중에 가장 강한 사랑의 무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슬픈 스토리로 그냥 관객들을 울려 보겠다라는 의도였다면 나도 이 영화에 점수를 못 주었을 것이다.
나는 울리겠다고 작정한 영화를 극장에 가서 보지 않는다.
슬픔을 드러내는 영화도, 슬픔을 너무 희극화시키는 것도, 너무 억지스러운 것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물을 자극할 수 있는 뻔한 설정이 드러난다.
첫째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셀마가 자신을 닮아 아들마저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 엄마로서의 사랑과 희생은 너무 진부하다.
모성애로 항상 울리려는 작전을 들이민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해온 이민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환경은 참 고단하다라는 느낌으로 다가오고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라면 난 이 영화를 굳이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슬픈 영화를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이보다 더 슬픈 영화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뮤지컬이 그 중심이 된다.
셀마가 나오는 장면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뮤지컬이 작동되고, 공장안의 소음도 리듬이 되어 뮤지컬 무대가 된다.
뮤지컬이 들어감으로써 이 영화는 슬픔이 아니고, 희망을 부르는 셀마로 인해 더 값어치가 오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절망보다는 희망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리는 하나의 소통이 된다.
그녀에게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모든 것에 리듬을 부여하고, 내면의 언어인 뮤지컬로 암울한 현실에 주저앉지 않게 한다.
어떤 현실이든 그걸 끌고 가는 사람의 의지가 희망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의지가 절망으로 끌고 간다면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끔 나는 현실도피용으로 상상을 동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도피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는 않는 눈을 원망하기보다 들리는 귀에 더 감사하고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또 이 영화는 찬반양론으로 격돌했던 작품이다.
1960년대 미국은 장애인의 아들을 둔 눈물겨운 모정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이민자 여성을 너그럽게 끌어 안아주지 않고 재판과정에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방인에게 냉혹한 미국, 검사측 증인으로 나선 공장 감독, 자신의 아내의 사치를 감당못해 눈이 먼 셀마의 돈을 빼앗간 빌의 모습으로 드러냈다.
자신들을 꼬집은 듯한 모습에 좋은 평을 줄 수 없었던 저들의 속내일 수도 있다.
꿈의 나라였던 미국은 그 꿈을 무대가 아닌 사형대에 올려버린 무정하고 냉혹한 나라에 대한 비판을 다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미국에게 셀마는 분노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꿈인 뮤지컬이 그녀의 내면의 빛이 되고 언어가 되어 표현한다.
셀마를 연기하는 비요크의 목소리로 영화는 멋지게 통속적인 스토리를 벗어 났다고 본다.
체코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온 시력을 잃어가는 이민자가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는 슬픈 이야기를 뮤지컬로 안았다.
감옥에 갇힌 그녀가 누명을 쓰고 갇힌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소리도 없는 감옥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너무 조용하다'그 대사에 그녀의 고통이 표현되었다고 본다.
셀마는 소음이 없는 조용한 감옥생활을 답답해한다. 환풍기에서 들리는 찬송가를 들으면서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먼저일 수도 있으련만, 그녀가 환풍기에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은 기억을 파고 든다. 자
신의 우상인 뮤지컬 스타 '올드리치 노비'를 아버지라 하는 것과 법정에서 만나는 장면은 마치 그녀의 꿈이 이루어진 듯 했다.
위증이라는 죄가 더 가미되어 불리해지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아들 진의 수술과 항소라는 두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캐시의 말처럼 아들의 눈을 낫게 하고 엄마가 없는 것보다 그 돈으로 항소하고 살아있는 엄마가 되어 주는 것 말이다.
셀마는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이 밝혀졌는데도 자신 때문에 아들마저 눈이 멀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아들을 수술시키고 자신이 풀려날 수 있는 유예 신청을 철회하게 된다.
결국 선택에서 그녀는 수술을 위해 항소를 포기한다.
아들은 아직 보지 못한 세상이 너무 많고, 어두운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는 엄마의 선택은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의 빛을 선택했다.
결국 그녀는 일급 살인죄를 적용받아 사형을 선고받는다.
여간수가 그녀를 위해 사형대로 걸어들어가는 발걸음을 리듬으로 바꾸어주는 장면에서 나는 무방비상태로 슬픔에 노출되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욕망의 나라였다.이방인의 돈을 뺏고 이방인의 꿈을 뺏고 이방인의 빛을 차단시켰다.
주인공을 극단적인 벼랑까지 몰고 갔지만 그녀의 선택은 우리를 아프게 했다.
한 아이의 엄마라기보다 순수했고, 눈이 멀어가고 있음에도 해맑았고, 고통속에서도 그녀의 밝음은 너무 아름다웠다.
현실은 셀마의 시선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슬펐는데 셀마가 슬프게 끌고 가지 않았을 뿐이다.
이민자를 떠나 시력을 잃어가는 힘없는 장애여성을 사형시키는 과정에서 미국이란 나라에 불쾌함을 드러낸 것이 그들이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 것이라면 그들은 이 영화를 볼 자격이 없다.
영화 <명량>은 우리나라 영화 중에 가장 많은 관객을 유입한 영화이다. 누적관객수 17,615,437명으로 역대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만 관객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선택한 데에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역사속의 인물을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를 소환해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말이다. 조선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으로 기록된 명량대첩! 우리의 정서에 깊은 감동을 울리게 했다.
영화는 1597년 8월 임진왜란 6년,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끔찍하다 못해 참담했다.
그에 누명을 쓰고, 파면당했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고,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들과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12척의 배를 가지고 그는 왜군을 상대해 조선의 바다를 지켜야 했다.
구루지마(류승룡)는 우리의 병사들의 목과 코와 귀를 베어 그 끔찍함을 우리에게 보내고, 우리 조선의 바다에 330척의 배가 집결하고 수의 열세에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에도 이순신 장군은 실망하지 않고, 지형적인 환경과 치밀한 전술로 승리로 이끈다. 거북선도 없이 출전했던 전쟁이었다.
우리는 명량대첩이란 승리보다 인간이 가진 한계로 역사를 바꾼 그 원동력이 어디인가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에 마음이 가 닿았을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토마스 브레너는 "이렇게 훌륭한 장군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순신이란 역을 훌륭히 해낸 최민식이라는 배우도 있지만 백성들의 모습, 애환, 여정, 감성 그 모두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보통 명량대첩이라는 전쟁에 포커스만을 맞춘 게 아니라,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그 승리를 이끌기까지 힘없는 백성이 이순신의 운명이 되어준 승리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에게 명량은 고위 관직에 있는 부조리함을 들어내 절망하게 만드는 타 작품과는 다르게, 무능한 왕에게 실망하여 '그렇지 뭐'라는 탄식을 하게 만드기 보다는 힘없는 백성들의 슬픔, 그 슬픔을 묵직하게 속으로 담아내는 이순신, 그 슬픔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까지 전할 수 없기에 그는 그 길목을 병사, 의병들과 함께 지켜낸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나약하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두렵다. 그러기에 그 두려움은 저 높은 왕이라고 다르지 않다. 저 밑에 천민이라고 다르지 않다. 같이 총칼을 겨루고 싸워내야 할 적군이라고 다르지 않다.
같이 한솥밥을 먹던 어제의 동지들이 그리 처참하게 돌아왔을 때두려움에 도망친 병사는 "나도 저리 되지 말라는 법 있냐, 다음은 내 차례이지 않겠는가"라고 떨고 있을 때이순신은 울분짓는 병사를 한칼에 베어버린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백성과 병사들이 그 두려움으로 인해 싸우지도 않고 무너질까 봐, 병사들의 떨어진 사기에 두려움마저 개입될까 봐.그는 두려움으로 이탈하는 걸 군율로서 막고자 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여 도망간다면 이 나라의 운명은 무너질 것이다. 다들 떨고 있다. 적군에 비해 우리가 가진 무기와 인력은 참으로 참담했기 때문이다. 승산 없는 싸움이고 기댈 수 없는 승리였다.
왕마저 포기하고 누구 하나 지원해 주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독버섯처럼 퍼진 두려움이 문제였다. 병사들의 두려움이 전쟁을 실패로 가져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자신 안의 두려움이나 의지가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순신은 마음을 다룰 수 아는 장군이었다.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안을 줄 아는 장수였다.
그는 말한다."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죽자고 덤비는 넘은 두려운 법이다.
죽는 게 두려워 사람들은 도망친다. 죽는 게 두려워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접는다. 죽는 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솔선하여 보여준다. 왕에게 포지 하지 마라고 한다. "아직 저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았사옵니다"
그는 단 한척의 배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니 아직 내 목숨이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라 말하는 듯했다.죽어서라도 막아내야 하는적군이였다. 왜군이 가는 길목에 단 한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막아내야 한다고 믿는 이였다. 330척의 배를 가진 왜군을 상대함에 있어 그는 단호하였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이다. 몇 번 이순신에게 패한 왜군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은 두려움이 될 수 있다.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대적하였다. 고작 12척으로 330척의 배를 대적하다니, 왜군의 입장에서는 우스웠겠죠.
장군의 배가 회오리바다로 빨려 들어갈 무렵 작은 나룻배를 탄 백성들이 힘을 합쳐 배를 끌어 그를 구하고, 이순신을 향해 달려가는 배가 화약을 실은 위험한 배라는 걸 죽음을 불사하고 알리는 임준영(진구) 장면과 정씨 여인(이정현) 역)이 치마를 벗어 흔들며 위험을 알리는 장면에서 가슴이 찡했다.
바다의 해류가 운인 것 같으냐? 백성이 살려준 게 운 같으냐? 는 이순신의 질문에 우리는 하나같이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가끔 생각한다. 자원하나 없는 우리가 지금 이 정도의 눈부신 발전을 한 데에는 우리의 끈기와 우리의 단결력과 우리의 긍지에 비롯된 것임을, 우리나라는 위기때마다 국민들에게서 나타나는 저력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갖다 대어도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에 비할 바가 못된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한다. 이 영화를 본 모든 국민이 그랬을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우리는 이렇게 뭉치면서 살아온 민족이다.
명량대첩은 세계사에 가장 완벽한 승리로 불리어지고 있다. 330척의 왜군의 피해는 막대했고, 우리의 피해는 그에 비해 적었다. 모두가 뭉쳐서 이루어낸 승리이고, 어떠한 환경에도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교훈을 남긴 전쟁이었다. 우리가 이순신을 기리는 마음 또한 포기하지 않는 그의 용기에 감흥해서이다.
싸움은 머리로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잡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멋진 영화이다. 수작이다. 이 나라를 지켜내는 것은 백성의 의지라고 말이다.
우선 '최민식'이란 배우에 대해 또 한 번의 감동을 느낀다. 이렇게 묵직하게 이순신장군의 면모를 그려낼 줄이야!
참 대단한 배우이다. 그에게서 여러 가지 모습과 여러 가지 감성을 보았다. 그는 따뜻하고, 온화하고, 묵직하고, 근엄한 그 모든 감정을 이순신이라는 배역에 쏟아부었다.백성들의 아픔에 같이 속으로 우는 뭉클한 장군의 모습도,임금을 향한 충신의 모습도, 어머니를 향한 효성 지극한 아들의 모습도 그는 다 담아냈다. 그래서 더 몰입하고 더 빠져들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우린 이순신을 얻었고, 또 그를 잃었다. 하지만 우리들 가슴에는 아직도 살아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 광해군 15일간의 행적을 상상력으로 구성하여 만든 추창민 감독의 작품이다.
왕위에 오른 광해는 시시때때로 왕권 다툼과 정적들의 역모로 인해 독살의 위기에 놓이게 되자 점점 예민해지고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며 그는 급기야 난폭해져 갔다.
절대 권력 '왕'이라는 자리임에도 중전의 오라비를 역모를 죽이려는 자들앞에서 그를 지키고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왕,
음식조차 독이 들어 있을까 맘 편히 먹지 못하는 왕' 광해'
자신의 아내를 지킬 수 없는 왕,
작은 것부터 모든 일상이 기록되는 왕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리임에도 무기력해 보이고 가련하기까지 한 왕!
점점 예민해지고 난폭해지는 광해는 급기야 '이리 살 수는 없다' 생각하여 방책을 내놓는다.
모든 것이 노출된 왕, 그를 죽이려 드는 세력들로부터 자신을 대신하여 위협에 노출될 대역이 필요하다고 여긴 광해는 도승지인 허균에게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한다.
명을 받은 그는 은밀히 광해를 대신할 대역을 수소문하고, 마침내 천민 출신인 만담꾼 '하선'을 발견한다.
영문도 모르고 하룻밤 왕의 대역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 진짜 광해군이 알 수 없는 독극물로 의식을 잃게 되고, 도승지 허균은 광해가 의식을 차릴 때까지만
어의와 왕을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는 상선과 도승지인 자신만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하선에게 왕의 자리를 대역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왕이 될 수 없는 천민 출신 하선은 가짜 왕이 된다.
광해와 똑같은 외모와 타고난 말솜씨로 왕의 흉내를 제법 내는 하선에게 도승지와 상선은 왕과 같은 흉내를 내기 위해 교육을 시키게 되며 중전과는 절대 만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아무리 그래도 부부로 지낸 세월이 있는데 중전이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눈치채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웃지 않는 중전을 위해 웃으라고 하는 장면이나 중전의 오라비를 구해주는 모습이나 조금씩 호패법이나 대동법에 대해 정치적인 색이 아닌 백성의 입장이 되는 장면에서는 상상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개입이 되었다.
천민 출신의 하선은 점점 왕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백성을 위한 왕말이다.
백성들의 편에서 생각하는 왕!
사대의 예를 갖추라는 신하들의 말에 "적당히들 하시오.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뭔데, 2만의 백성을 사지로 몰아야 하오. 임금이라면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 지라도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곱절 백 곱절 더 소중하오."라고 말하는 광해 아니 가짜 왕 하선! 우린 이런 왕이 필요했다.
상선이나 나인들의 개인 사정을 듣고 같이 분노하고 공분하는 왕이 있었고, 그런 달라진 왕의 모습에 다들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
웃지도 않던 광해에 비해 웃음이 많고, 아랫사람들에게까지 한없이 따뜻했던 하선의 따스한 면모에 상선도 도승지도 점점 매료되어가는 표정들이었다.
왕이 달라진 모습에 궁인이나 신하들이 점점 의심을 하기 시작하고, 왕을 가까이에서 모신 도 부장마저 왕의 손에 굳은살이 있는 걸 보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중전마저 그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왕이 가짜임을 눈치챈 세력들은 왕을 살해하기 위해 팥죽에 독극물을 넣으라고 상궁에게 지시하고, 상궁은 나인 사월이에게 팥죽에 넣으라 한다.
안 그러면 우리가 죽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사월은 그동안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왕을 차마 죽게 할 수 없어 본인이 삼키고 만다.
독극물을 먹고 죽어가는 사월에게 '내가 임금이다'말하라 누가 널 이리 했는지를...
하선은 사월이를 죽게 만든 자들을 잡아들이고, 그들은 왕이 자신들의 목을 조이게 되자 그가 진짜 임금이 아니라는 궁인의 말을 듣고 군사를 몰고 들이닥치게 된다.
도승지 허균은 하선에게 떠나라 한다.
그러나 그는 "싫소. 사월이를 저리 만든 자들을 벌하지 않고는 못 떠난다" 라 말한다.
이에 도승지는 하선에게 말하기를 "하면 진짜 왕이 되시던가, 사월이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백성의 고열을 빠는 저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 드리리다."
이 장면에서 반전을 꿈꾸었다.
허구를 역사적인 배경에 집어넣은 건 알고 있지만, 도승지가 하선을 진짜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선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왕이 되고 싶소이다. 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 죽어야 하고, 또 그로 누군가 죽여야 한다면 나는 싫소. 진짜 왕이 그런 거라면.. 내 꿈은 내가 꾸겠소이다."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러면서 하선은 임금의 자리가 그리 편할 수 없는 자리라는 걸, 또 권력을 쥐었다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자신의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리라는 걸 알았나 보다.
두 왕을 섬긴 도승지는 하선이 그동안 한 일을 적은 보름간의 승정원일기를 진짜 광해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불충을 알뢴다.
그리고 이 엄청난 비밀을 묻고자 했던 광해는 그동안 가짜 왕 '하선'을 죽이라 어명을 내린다.
가짜인 줄 알지만 진정 마음으로 섬기었던 하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운 도 부장, 그리고 배를 타고 떠나는 포구에서 배에 탄 하선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머리를 숙이는 허균의 모습에 또 뭉클했다.
두 왕을 섬기었다는 도승지의 말처럼 허균의 마음 안에는 하선이 백성을 생각하는 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소불위 같은 왕의 자리도 어쩜 한낱 천민의 자리보다 힘들어 보이는 위치라는 걸 내게 보여준 것 같고, 높은 곳에 오를수록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무리 화려한 궁전이라도 그 안의 사람들에게 웃음이 존재하지 않는 걸 보면 가진 거 없는 하선의 마음이 궁안의 왕보다 더 편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은 피 냄새만 가득했다.
그런 곳에 하선이 웃음으로 사람들을 끌어안았고, 그 웃음이 그 따스함이 그들의 언 마음을 녹여 주었다고 본다.
연기자 각자의 캐릭터가 그 역에 잘 스며들었고, 1인 2역을 맡은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예민하고 난폭했던 광해와 인간미 넘치는 천민 만담꾼 하선 역을 너무 훌륭하게 연기해 냈다.
충신 도승지 허균 역을 류승룡은 마치 자신의 옷을 걸친 듯 자연스러웠으며, 도부장 역을 한 김인권, 나인 역을 한 심은경, 조내관 역을 한 장광, 중전 역인 한효주까지 모두 모두 훌륭했고, 따뜻했고, 아련했다.
사랑은 훅 들어오기도 하고, 서서히 흘러 들어오기도 한다. 사랑은 슬프든, 아프든,아름답든 가슴이 뇌를 마비시키는 묘약과도 같다.
뻔한 스토리, 뻔한 결말이라는 후기들이 올라와 있음에도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항상 영화를 택함에 있어 역에 몰입한 주인공들이 내게도 몰입할 감정선을 넘겨줄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연기가 영 어색했다는 후기에 나는 아무리 좋은 평이 있어도 연기가 서툴러서 내가 그 주인공들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으면 그 영화는 내가 선택하지 않는 이유의 당연 1위이다.
영화를 볼 때는 객관점의 관점에서 관객의 입장에서 평가를 하기 위함이 아니고, 내가 그 영화속으로 얼마나 빠져들어가 영화 속 주인공들과 똑같이 아프고 사랑하는 것에 같이 몰입할 수 있느냐다.
몰입할 수 있는 영화는 내게 선물같은 하루를 넘겨준다. 물론 기억과 가슴 한켠에 감동도 선사해 주는 영화일 것이다. 사랑이 단 맛이 있다고 믿는 나이는 아니다. 여러 맛이 적절히 믹스되어 서로의 삶을 빛나게 하는 게 사랑이라는 것도 아는 나이다.
# 한 소녀가 창문 밖으로 한 남자애를 내려다본다.
이 소녀 이름은 케이티(벨라 손), XP라는 색소성 건피증을 앓고 있다.
걸릴 확률이 백만명의 한 명이라니까 아주 희박한 희귀병으로 태양을 피해야 하는 병이다. 낮에는 집 대문을 나서 본 적이 없는 케이트, 빛이 차단된 특수 유리창문으로 내다보는 게 그녀의 일상이다.
어릴 적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빠와 친구 모건만이 자신의 삶의 통로였던 케이트가 유일하게 창문 너머의 찰리(패트릭 슈왈제네거)를 10년째 짝사랑한다.
다른 십 대와 다르게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한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겨진 기타를 가지고 밤에 기차역에서 버스킹을 한다. 그녀에게 노래는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편, 졸업파티가 흥이 나지 않던 찰리는 기차역 앞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 케이티를 보게 된다.
창문 밖으로 매일같이 내려다보는 찰리가 바로 앞에 있는 것에 놀란 케이트는 바쁘다는 핑계로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느라 노래 가사 노트를 흘리고 오고 만다.
# 노트를 찾기 위해 다시 만난 찰리와 케이트
찰리는 수영선수였다. 그는 어깨에 부상을 잃고 수영을 포기하고 좌절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찰리와 케이트와의 만남은 서로의 삶에 시너지를 극대화시킨다. 두 사람의 만남은'최선을 다하고 선택은 나중에. 우린 안 해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이잖아'라며 찰리에게는 다시 수영을 할 수 있게, 케이트에게는 노래를 할 수 있게 서로의 삶을 열어주고 빛나게 해 준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으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사는가 하면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둘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둘은 서로를 빛나는 쪽으로 이끌어준다.
자신이 병이 걸렸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일 밤마다 만남을 이어간다.
"낮에는 바쁜데, 밤에는 한가해"라고 말하는 케이트로 인해 매일 밤마다 즐거운 데이트를 즐긴다.
사실을 알리라는 모건과 아버지의 충고에 "며칠이라도 더 병균이 아닌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라고 말을 한다.
그녀에게서 어두운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케이트의 상처가 느껴졌다. 세상은 그녀가 희귀병에 걸렸다고 하면 병균 취급을 한다. 지금 케이트는 짝사랑해 온 찰리와 여자로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 이해할 것 같다. 어떤 마음인지
찰리는 케이트와 여행을 간다. 처음 기차를 타고, 처음 라이브 카페를 가고, 사람들이 많은 도시 한가운데에서 버스킹을 하고 이 모든 것들이 찰리로 인해 맞이한 세상이었다. 행복해 보였다. 둘이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정말 퍼펙트한 데이트였다. 케이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만 해가 뜨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 케이트는 찰리와의 행복한 순간들을 즐기느라 놓치고 만다.
해가 뜨기 전이라는 말에 거의 미친 듯이 집을 향해 질주한다. 이유를 알 수 없던 찰리는 놀라 그녀를 쫓아가고 케이트는 해를 맞이하고 만다. 이 모든 상황에 놀란 찰리에게 모건이 그녀의 병을 이야기해주고, 그녀의 병은 악화된다.
너무 희귀병이라 임상실험 중이라지만, 재정적 지원마저 끊겨 중단되고, 케이트를 살리고픈 아버지는 딸의 삶에도 빛 같은 축복이 있기를 빌지만 현실은 너무 아득할 뿐이다.
어릴 적 햇살 가득한 해변가에서 기타 치는 엄마에게 기대어 누워있던 그 날을 꿈꾸는 케이트, 그 기억이 꿈이라고 말하는 케이트에게 저 햇살마저 머금을 수 없다.
사소한 것이 너무 사소해서 무감각한 우리에게 너무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접하는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목숨을 걸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게 아프다.
시간싸움이었지만 케이트에게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절망한다.
이렇게 되려고 그동안 한 번만 나가고 싶다고, 울고, 애원하고, 사정하는 딸아이를 밖으로 내 보내지 못했던 것인가?
이렇게 되려고, 이렇게 되려고.....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케이트
찰리는 그녀의 곁을 지킨다. 창밖으로 지나가던 찰리를 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최고의 순간이었던 케이트에게 찰리의 사랑은 하루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최고로 만들어 준다.
찰리는 그녀가 노래를 녹음할 수 있게 녹음실을 대여해 그녀가 잘하는 걸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게 바로 노래이다. 그리고 유튜브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녀가 하고 싶은 것, 평생 태양을 피하고 살았던 그녀가 그 태양 아래서 보고 싶은 것이다. 찰리와 함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일출을 맞이한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녀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평생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라고 말하며 햇빛을 받아내는 손길 눈빛....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꿈꾸었던 낮도, 10년간 짝사랑했던 찰리도 그녀에게는 행복이었다. 모든 순간이 선물이었다. 오래 산다고 삶이 풍요한 것은 아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어가는 삶이 더 풍요로울 수 있다.
흐르는 노래도,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도, 요트 위에 쏟아지는 태양도, 그녀를 바라보는 찰리의 눈빛도 그저 그저 아름다움이 케이트의 영혼처럼 녹아내렸다. 그녀의 삶을 찬란하게 해 준 건 햇빛도 아닌 찰리의 사랑이었다.
죽음이 결코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일본 영화의 '태양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영화라는 사실과 찰리 역을 맡은 '패트릭 슈왈제네거'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아들이란 점도 놀랬다.
그녀는 죽고 라디오에서 유튜브에서 200만명을 넘긴 노래, 케이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정말 OST들이 예술이다.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곡은 Bella Thorne -Walk with me
낼 날도 춥다는데 굳이 장산까지 가서 먹어야 되나 ,싶은 맘이 크기도 했고 칼국수 한 그릇 먹자고 외출준비를 하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약속 콜을 외치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다음 날 다들 쉬는 날들이라 전부 늦잠을 잤다. 거기다 칼국수 먹자고 했던 딸은 밤새 영화를 본다고 새벽 5시가 넘어서 잠이 든 모양이다.
속으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침 베란다에 나갔더니 바람이 무지 차다.
나가기 싫었는데, 늦게 잔 딸을 깨워도 안 일어날 것이다. 아니 절대 못 일어날 것이다.
먹는 것보다 잠을 택할 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 칼국수 먹으러 못 갈 듯하다.
그래서 나는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책을 봤다. 그런데 11시에 알람이 울린다.
딸아이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람소리다. 무의식적으로 알람을 끈다. 미동도 안하고 자는 듯 싶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리는 딸아이의 목소리! "몇시야! 엄마 가자."
작은 애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이게 현실이야?'라는 표정이었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싶었다. 외출할때면 항상 화장하고 나가는 큰 애가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 쓰고, 패딩만 걸치고 나가자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잠을 포기하고, 화장을 포기하고, 큰 애를 움직이는 그 칼국수가 얼마나 맛있길래 이런 천재지변이 있단 말인가? 결국 우리는 11시 30분에 집을 나서면서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쉬는 날이면 하루종일 잘 정도로 잠에 취하면 밥이고 뭐고 없는 아이라서 더 놀랬다.
잠결에도 수없이 망설였다고 한다.
자느냐, 먹으러 가느냐...수천번 갈등했는데, 결국엔 칼국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먹고 바로 집와서 잘거라고 했다.
대신 자기 다 먹을때까지 숟가락 내려놓지 말라고 경고장을 날렸다.
워낙 빨리 먹는 아빠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에 반해 딸아이는 먹는 속도가 느렸다. 서너번 먹을 때 쯤이면 다 먹고 숟가락 놓는 아빠때문에 식욕이 다 떨어진다고 속도 맞추어 달라는 말이었다. 12시 되면 손님이 너무 많아 줄을 서야 된다고 빨리 가자고 재촉도 했다.
다행히도 12시 안에 도착했고, 12시가 안 된 시간에도 손님들이 제법 앉아 있었다. 그러나 빈 곳도 몇 군데 보였다. 우리 가족 넷은 자리에 앉자마자 두가지 메뉴를 다 먹고 싶은 욕구로 실랑이중이다.
비빔도 먹고 싶고, 국물칼국수도 먹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말이다. 결국 물 셋에 비빔 둘을 시켰다.
아니 양이 많으면 어쩔려고 걱정이 앞섰지만 대세를 따랐다.
이미 먹어본 남편과 큰 애는 충분히 흥분 상태였다. 해운대 장산에서 칼국수는 이 집이 젤 유명하다고 한다. 손님들이 계속 들어와 자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채워졌다.
김치와 단무지 밑반찬이 나오고, 칼국수 넣어 칼칼한 맛을 내라고 잘게 자른 땡초가 나왔다. 칼국수 세그릇과 비빔 칼국수 두그릇도 이어 나왔다. 입맛을 다시던 딸아이가 열심히 비빔칼국수를 비벼낸다. 양배추가 듬뿍 들어가서 양이 많아보이지 다 먹을 수 있다고 미리 선제공격을 해온다.
음식 남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먹을만큼만 시키는 걸 좋아한다. 근데 사람 인원수보다 하나를 더 시켜서 걱정이 되는 날 의식해서 하는 말이다.
해운대 장산에 위치한 이 집은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고, 가게 이름도 '소문난 칼국수'로 자체 홍보를 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름 따라 가는 지 소문난 것은 맞나보다.
칼국수를 한 입 먹고,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국물 육수가 너무 진했고, 무엇보다 면발이 수타면이라 쫄깃 쫄깃, 쫀득 쫀득 했다.
면도 기계로 뽑은 면은 일정한데 여기는 제각각의 면 길이와 두께로 사람이 직접 손으로 밀고 잘라 만든 칼국수였다. 거기다 올라간 쑥갓향이 젤 먼저 코끝을 치고 들어왔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딸아이가 잠을 포기한 이유를....
"봐봐. 엄마 맛있지? 예술이지!,후회 안하지?"라고 내게 자꾸 답을 재촉한다.
내가 먹어본 칼국수 중에 제일로 맛깔난 칼국수였다. 추운 날이면 또 생각날 맛이었다.
앞접시를 이용해 칼국수와 비빔칼국수를 번갈아가며 열심히 먹었다. 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내 입맛을 사로 잡느라 양 조절에 실패하고 빵빵한 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딸아이도 양이 찼는지 일어서자고 재촉했다. 배가 부르면서도 남은 국물까지 싹 비우려 했다.
대기자가 있으니까 빨리 일어서주자고 했다. 이젠 이 아이는 배가 부른 것 같다. 배려를 해주는 것 보면, 작은 애가 시험이 있어서 지금쯤 일어서야 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꽤 차다. 그래도 든든하게 뜨근하고 얼큰한 칼국수를 먹어서 그런지 그리 추운 걸 못 느꼈다. 여름에는 밀면과 비빔밀면도 맛나니까 다음에 우리 저것도 먹으러 오자고 했다. 여름은 여름이고 겨울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다음에 또 오자고 하고 나왔다.
작은 아이로 인해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나왔지만 딸아이가 잠을 포기하고 올만큼의 맛이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사랑이야기로 쉽게 접근할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좀 더 깊게 들어가자니 무거워질 수밖에 없어서다.
이 영화는 그리스가 처한 국가적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민, 가족, 그리고 개인의 삶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밀도 있게 펼쳐져 있다.
감독이 영화 한 편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넘치다 보면 영화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구성면에서 흐트러지고 이도 저도 아닌 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는 중동의 위기로 인해 유럽으로 유입된 난민 문제와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유럽에 닥친 국가재정위기에 인물들의 사랑을 가미하여 다룬 짜임새 굵은 영화라고 본다.
세 편의 스토리는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언어를 쓰는 20대, 40대, 60대의 커플들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사랑의 힘으로 강하게 끌어 나간다. 마치 사랑의 신 에로스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모습이다.
# 부메랑
정치를 전공하는 그리스인 여대생 다프네는 밤길을 가던 중 두 명의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파리스가 그 광경을 보고 그녀를 도망치게 도와준다.
며칠 후 버스에 탄 그녀를 우연히 발견한 파리스는 그녀가 흘리고 간 아이폰을 돌려주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를 구해준 파리스는 시리아 난민이다. 5년째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으로 그리스로 이주해 온 불법 이민자였다. 이민자였다.
거리에서 하루하루 부메랑을 팔며 생활하고, 폐공항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자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깊어간다.
중동의 위기로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 난민들이 진입점인 남유럽으로 몰려 꾸준히 환승 국의 하나인 그리스로 유입되고
유럽에는 난민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로 인한 난민들의 범죄 또한 날로 급증하는데 유럽연합과 정부의 대응이나 지원은 늦장만 부리자 유럽 각국에서는
파시즘이 일어나게 된다.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난민 수용으로 세금이 충당되고 그로 인해 국가의 빚이 증가한다.
그러면 세금은 오를 것이고 경제적 부담을 끌어안아야 하는 사람들은 난민들이 결코 달가울 수가 없다.
기생충처럼 자신들의 삶을 좀 먹고 있다고 생각한 다프네 아버지는 난민들로 인해 자신의 일도, 삶도,자존심도 다 사라졌다고 여겨 자신이 직접 그들을 처단하려고 발 벗고 나선다.
소위 필그림이란 극우파 조직에 가담하여 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게 된다.
겁에 질린 난민들은 또 목숨을 걸고 망명을 하려 하고 극우파 조직의 폭력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폭력사태로 번지게 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넘어온 곳에서 또 파시스트에 의해 또 다른 곳으로 가야 되는 운명에 놓인 파리스는 그들 앞에 놓여있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그 두려움도 사랑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파리스는 끝내 다프네로 인해 캐나다로 망명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에 남게 된다.
그러던 어느 밤, 필그림 조직은 난민들과 파리스가 있는 폐공항을 습격한다.
마침 다프네는 파리스와 낡은 비행기 안에서 자고 있었다.
소리에 놀라 일어난 도망가던 중 다프네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고, 아버지도 도망가는 난민들 속에서 서있는 다프네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다프네가 총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이 첫 번째 제목은 부메랑이다. 아버지는 난민들을 몰아내려고 강압적인 폭력을 휘두르다 자신의 딸을 잃었다.
공존하며 살 방도를 찾아갔더라면 잘못 방향을 잡은 분노의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리스가 첨에 정치를 공부하는 다프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정치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게 한다는 말을 한다.
억압된 정치와 종파 갈등으로 난민이 되어야만 했던 파리스도, 국가의 경제위기로 실업자가 된 아버지도 결국 다 정치적인 문제로 빚어진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리스와 시리아가 다 같이 힘든 상황이고, 그나마 같은 나라 사람끼리 죽이지 않으니 그리스가 훨씬 낫다고 말한 파리스였다.
시리아 내전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하고, 난민들은 국경을 넘어 배를 타고 유럽으로 넘어오다 배가 침몰하여 수많은 난민들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저 남의 일로 여겼다.
그러나 난민 문제는 이제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예맨의 난민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어서 그리 쉽게 스쳐갈 문제는 아니었다.
# 로세프트 50mg
어린 아들은 "우리 집도 경제위기인 거야?"..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면 부모들이 잠을 같이 안 자? "라고 아빠에게 묻는다.
소위 요즘 말처럼 웃프다. 저 어린아이까지 가정의 경제위기라 토로하는 것이 말이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요 산업인 관광업. 해운업이 경기가 나빠지면서 세수가 감소하고 자영업자의 몰락, 실업자의 증가 등으로 그리스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다.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 수를 대폭 증가시켜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복지를 통해 사회안정을 꾀하려 한다.
부족한 돈을 외국에서 빌려다 과도한 복지와 과도한 정부지출의 증가로 재정은 더 악화되고, 또 개인들은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아 투자율만 키우다 보니 빚은 늘고 경상수지 적자규모는 커지고 제조의 경제력이 약한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는 정책 실패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구제금융과 긴축재정으로 대량학살이라 할 만큼 대량해고로 이어지고, 지오르고의 회사도 비켜갈 수 없었다.
주택담보대출에 생명보험금, 가스, 전기비 , 재산세 , 집세를 내고도 의료보험료 카드대금을 다 내지 못해 지오르고는 빚에 허덕였다. 평생 이뤄 온 것들이 없어지고, 그건 마치 자신의 무능이 되어버린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우울증. 불안장애로 로세프트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우연히 바에서 한 여자를 만나 원나잇을 즐긴다. 그렇게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흘리고 간 로세프트약을 핑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지오르고가 다니는 회사에 매각을 위해 파견된 사람이었고, 지오르고는 매각 회사의 직원임을 알게 된다.
엘리제는 지오르고를 로제프트 약에 의존하는 약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지오르고, 두 사람은 엄연한 불륜이다.
하지만 불륜이라고 비난할 틈도 없이 대량해고가 주는 압박감이 스토리를 강하게 끌고 갔고 견디기 힘들었다.
나도 IMF를 겪은 세대로서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 나라가 겪는 현실에, 아니 지금 세계 인구의 2/3가 고통받는 위기에서 엘리제는 회사에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는 달리 35%의 인원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으로 지오르고의 해고를 강행하지 못하고 본사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
지오르고의 친한 동료의 해고와 그의 자살소식을 들은 그는 '불공평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이라고 말하는 동료의 충고와 비난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끝내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남유럽 국가에 대해 유럽연합이 제시한 경제 정치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비인간적인 긴축정책에 따른 공포와 압박감으로 회사의 분위기는 인간관계에 대한 것까지 마비시키고 있었다.
공공서비스와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던 유럽연합을 스웨덴에서 온 엘리제로 표현했고, 임금과 퇴직연금의 급격한 감소로 세금 충당하기도 벅찬 40대의 가장은 아들과 가족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우울증 약을 매일같이 먹어야 한다.
지오르고의 친구는 은행 담보대출로 집이 날아가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임신한 아내가 중절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그저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취급을 당한 회사로부터의 해고, 그리고 자살로 이어졌다.
다들 자기가 되지 않기를, 옆에 사람이 해고로 짐을 싸고 나가는데도 차마 고개 숙이고 눈을 못 마주치는 모습, 서로의 정면을 마주할 수 없는 사람들,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한 엘리제, 그녀 역시 로세프트 약을 먹으며 손 놓고 떠난다. 그렇게 유럽연합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부작용만 잔뜩 남겨놓고 떠나간다.
# 두 번째 찬스
마트 앞에서 장을 본 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리스어를 할 줄 모르는 그는 버스를 기다리는 마리아에게 허리가 아파서 주울 수가 없으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마리아는 그것들을 봉지 안에 주워 담으며 그리스어로 자신은 돈이 없어 치즈도 못 사는데, 돈이 없어 토마토도 못 사는데 하면서 불공평한 현실에 화를 낸다.
그게 세바스찬에게 내는 화는 아니라는 걸 안다. 세바스찬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말을 못 알아듣지만 화가 난 것은 표정으로 봐 안다. 그녀는 매주마다 마트에 온다. 살 돈은 없지만 그저 마트에 매주 온다.
세바스찬(J.K시몬스)은 독일 역사학자로 그리스가 맘에 들어 퇴직 후 이주해 온 65세의 싱글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가정주부라고 소개한다. 그렇게 둘은 매주 같은 시간에 마트 앞에서 만난다.
젊었을 때 사랑했지만 두려워 용기를 못 낸 세바스찬은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처럼 두 번째 기회를 위해 용기를 내려한다. 국립 도서관에서 일하는 세바스찬은 마리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선물하고, 조금씩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다른 언어로 표현해도 느낌을 아니까, 문을 밀고 나가는 법을 가르쳐 준 세바스찬으로 인해 두 번째 찬스를 갖게 된 그녀는 그 기회를 선뜻 잡을 수 없다. 남편과 자식이 있다.
감독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마리아를 통해 다프네와 지오르고, 그의 아들인 손자까지 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으로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딸인 다프네가 난민과 사랑에 빠진 것과 남편이 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아들인 지오르고의 불륜도....
어려운 살림살이도 그래서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저 집과 마켓을 오가며 답답한 현실에 나만 외로운 것인가, 나만 힘든 것인가를 마켓 안의 사람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옷에 피를 묻히고 들어온 남편은 자신의 실패를 남탓하며 자신이 저주하는 정치인과 똑같이 남에게 해를 가하고 있다.
남 탓하는 남편에게 일침을 가하고 가방을 싸는데,한통의 전화로 그녀는 좌절한다.
다프네가 총에 맞았다는 비보를.....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세바스찬은 매일같이 마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다.
딸의 죽음과 아들의 이혼, 그녀의 가정은 따뜻함을 찾을 수 없는 황량함만이 깃든다.
1년 후, 지오르고가 발견한 책 '세컨드 찬스'에 적힌 내용을 보고 세바스찬을 찾아가고, 사정을 알게 된 그는 마리아를 찾아가 재회한다.
늦었다고 생각하며 놔버린 것들이 어쩜 시간문제가 아닌 용기나 두려움의 문제였다면 어쩔래 라는 말하는 듯하다.
진정한 사랑은 외부요인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독은 각 스토리에서 사랑과 정치 간의 대결구도로 그리스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대입시키며 그리스라는 배경하에 그리스가 처한 현실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장애물을 설치해놓고 그 안에 사랑이 보여주는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난민 문제를 다룬 #부메랑에서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고통받는 난민을 표현하기 위해 시리아인 파리스를, 로세프트에서는 북유럽 스웨덴에서 온 엘리제를 , 세 번째는 세컨드 찬스에서는 독일인 세바스찬을 말이다.
유로화가 만들어지자 유로존의 대부분의 부를 독일이 독식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로존의 통화정책은 유럽 중앙은행에서 담당했고 그곳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미국발 경제위기에도 제조 강국으로서 수출로 인한 높은 성장률과 노동에 따른 저임금과 저금리로 빌려준 통화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각종 이득을 취하게 된다. 거기다 과감한 구조개혁과 경제사 회개 혁등 정치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견고한 성장을 해 나가게 된다.
그에 반해 그리스는 2001년에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과도한 정부지출로 유로화로 인해 화폐가치는 절상되어 수출 경쟁력이 없는 그리스는 무역수지 적자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리스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유로존의 통합은 독일에게는 부를 안긴 셈이다. 세계는 다 연결되어 있고 시리아의 정치상황이 난민을 만들었고 그게 그리스의 사회문제로 유입되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 경제의 위기로 전해지고 그리스 가정을 파괴하였다.
거시적 문제를 그리스의 가족 이야기로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으로 묶어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사랑의 신 에로스와 그리스의 정치와 경제문제를 그리스를 배경 삼아 훌륭히 스크린에 담아냈다.
바로 지오르고로 명연기를 펼친 사람이 감독이다. 감독과 배우인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의 첫 연출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게 그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참 많은 느낌과 감동과 회한을 내게 남겨주었다. 그래서 결코 가볍게 사랑이야기로 풀어헤칠 수 없었던 영화였다.
낭만과 신화의 나라가 현재는 국가적 경제위기 속에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 사랑은 위로이고 용기이고 희망이 되어준다. 더 극한 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떤 모습으로든 그들이 매개체로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이다.
그리스 내부의 문제가 아닌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각기 다른 이유 생존을 위해, 또는 매각을 위해 또는 사랑을 위해 그리스로 왔고 그 가혹한 그리스의 현실 앞에서도 그들은 사랑을 키워나갔다.
꼭 제목이 호러물이나 좀비스럽지 아니한가? 아마 제목 때문에 그리 당기지 않았다고 하면 웃으려나?
그런데 사실이다. 너무 유치하거나 기괴스러울 것 같았다. 또 편견이었음을 인정한다.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들의 만남이 시작점이 되어야 하겠다.
병원에서 우연히 주운 [공병문고], 그 안에 담긴 비밀, 췌장에 이상이 생겨 곧 죽는다는 내용을 보아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비밀을 적은 [공병문고]의 주인이 하필이면 같은 반 여학생인 사쿠라(하마베 미나미)였다.
사쿠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 치고 지나치게 활발하고 인기도 많은 여학생이고, 하루키(키타무라 타쿠미)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엮이지 않는 자신 자체의 삶을 사는 아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 때문에 슬픔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다. 주변인들이 슬퍼하고 애쓰는 모습으로 남은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는 게 두려워 주변인이나 친한 친구에게까지 말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도 무덤덤한 하루키에게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하루키는 의도와는 다르게 사쿠라의 버킷리스트에 얹히게 된다.
사쿠라가 도서관에 도서위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임을 아는데, 그런 사쿠라를 이해할 수 없는 하루키는 그녀에게 묻는다.
"짧은 여생을 이런 일에 써도 돼? 많이 있잖아? "
나도 하루키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지금 도서위원으로 들어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뭔가 못해 본 일을 하려고들 하니까 말이다. 오히려 주변정리를 해 나가는 이들도 있고, 여행을 간다거나 나름의 버킷리스트를 적어가지 않는가!
"너야말로 하고 싶은 일 안해도 돼? 내일 갑자기 네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잖아,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요즘 묻지 마 폭행도 많고 말이야.시한부인 나도, 너도 하루의 가치는 똑같아!"
그런 하루키에게 던진 사쿠라의 말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내 인생에서의 하루는?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면 오늘의 가치는?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일부분인 하루인 '오늘', 하루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인생의 가치를 운운하며 내일은 내게 당연히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퍽하면 오늘 할 일도 '내일 하지'로 미루었던 것들이 하나 둘 뿐이겠는가 말이다.
시한부로 사는 사쿠라도 그저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사는 내 하루와 똑같다. 그러나 그 가치는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이 벚꽃의 대사로 작은 반성을 하게 된다.
이왕 옆길에 샌 김에 한 마디를 더 보태자면, 일본 영화는 우리의 정서와는 참 다르게 전개해 나간다. 담백하고 덤덤하게 사랑, 죽음,이별을 다룬다. 한국영화는 울려야, 아니 꼭 울리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시한부 인생을 다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영화는 죽음에 대해 이별보다는 긴 여행을 떠난 슬픔 정도로 다가오게 한다. 그리곤 문득문득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솔직히 이 영화 '가볍게 영화 한 편 때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영화인데, 내게 너무 큰 울림을 주었다.
"난 남과 관계를 안 맺는 걸로 내 영역을 지켜 왔거든."
이 말은 하루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모든 관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변에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다. 그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 그럴 수도 있겠다. "에이~ 왕따네" 그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쿠라의 눈에도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만큼 강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쿠라,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소유자로서 밝고, 긍정적이고, 사교성이 좋은 편이다. 시한부 인생인 자신보다 사랑하는 주변인들의 마음을 더 헤아리는 심성 착한 아이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인데, 벚꽃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같이 보내게 되는 '친한 사이 소년'으로 그녀의 하루하루에 본의 아니게 올라타게 된다. 자신의 영역이 조금씩 벚꽃으로 인해 무너지고, 그녀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리스트에 동행하게 된다.
그러다 조그마한 마찰이 생기고 하루키는 사쿠라에게 소중한 시간을 더 잘 사용하라는 의미로 말을 건넨다.
"그 날 우연히 너랑 마주쳐서 그냥 흘러온 것뿐이야. 나 같은 놈보다는 정말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우연이 아니야. 흘러온 것도 아냐. 우린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해 온 선택과 내가 해 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한 거야.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만난 거야."
아! 진짜.... 또 파동이 인다. 틈만 나면 운명 탓으로 빠져나가는 나의 비겁함에 소나기 같은 시원함이었다. 그래! 선택과 선택이 맞물려 인연이 만들어지는 거지. 결국 사쿠라가 비밀을 털어놓은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고, 여행을 떠난 것도 그녀와 그의 선택이었다. 서로의 선택이 쌓이고 손 잡으면서 시간을 공유하며 오늘의 가치에 그들을 공존하게 했다. 운명이나 우연 따위로 비껴가지 말자. 스스로의 의지에 마음을 내주며 선택해 간 시간들이었다. 우연이니 운명으로 치부했던 것들이 결국 사람들의 선택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는 느낌에 확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영화 초반, 12년이 지나 성인이 된 하루키(오구리 슌)는 자신의 모교의 선생님이 되어 있다. 선생님이 된 지금의 모습은 아직도 관계를 맺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사직서 봉투가 들어있고, 수업시간에도 학생과 선생님은 한 공간에 두 세상으로 나누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도서정리를 억지로 떠맡게 된 그가 벚꽃과의 추억이 쌓인 도서관에 들어서면서 과거로의 회상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키는 "너에게 있어 산다는 건 어떤 거야?" 벚꽃에게 묻는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일까? 누군가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손을 잡고, 서로 껴안고, 스쳐 엇갈리고, 그게 산다는 거야. 혼자 있으면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없어. 그런 거야. 좋아하면서도 밉고 , 즐거우면서 우울하고,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과 남과의 관계들이 내가 살아있단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사쿠라는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감정을 나누며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친한 친구 쿄코와 하루키를 친구로 엮어주고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고, 쿄코가 하루키를 오해하는데 해명하려면 자신의 병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이고, 자신이 죽고 나서도 그들이 친한 친구로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겉으론 밝고 긍정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리고 상처 받기 쉬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애써 강한 척 밝은 척하며 살아온 그녀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가던 하루키도 실은 사쿠라의 삶을 동경하고 있었고, 사쿠라 역시 하루키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는 강해. ....고백을 하자면 나는 네가 되고 싶어. 남을 사랑할 수 있고,남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누군가와 더 많이 마음을 나누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나는 그런 네가 될 수 있을까?....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처음 내가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 비웃었다. 기괴스럽다고. 그러나 그 뜻은 영화를 다 본 입장에서 미안하기 그지없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속뜻은 이런 거였다.
'누군가의 신체를 먹으면 영혼이 그 사람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표현이 더디고 잘 내비치지 않는 하루키가 사쿠라에 대한 마음을 문자로 다 드러낸 것은 왠지 덤덤하게 끌고가던 길을 이탈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야 하루키가 되고 싶어.하루키 안에서 계속 살고 싶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과거에서 관계를 맺지 않던 하루키에게 사쿠라의 존재가 현재 그의 몸안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본 영화가 내게 큰 울림이 되어 마음에 들어 앉았다. 일본영화는 날 소리내어 울게 하지는 않는다. 여운을 남긴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에는 세계 최대 마약의 도시 '후아레즈'가 있다. 이곳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조직이 지방정부의 힘을 능가하는 조직력과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멕시코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실제로 후아레즈는 세계의 살인 도시라 불리울 정도로 위험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사라지는 등 상상초월의 범죄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경찰 군대를 동원하여 소탕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세력은 갈수록 거대해지고 미국마저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
미국 내 마약중독자들이 늘고, 그로 인한 범죄도 꾸준히 증가하여 국가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멕시코 후아레즈를 배경으로 긴장감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범죄 스릴러로 우리를 숨 막히게 할 것이다.
하나의 작전안에서 조금씩 다른 태도와 목표를 두고 있는 세 인물
CIA 소속 작전 총책임자인 맷(조슈 브롤린)은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작전에 투입시킨다. 그리고 동행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맷은 알레한드로를 케이트에게 "우리 사냥개"라고 소개한다. 여기에서 이 사람을 왜 사냥개라고 소개했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난 사람은 알게 된다.
영화 초반부, 서로에 대한 정보도 믿음도 없이 작전에 들어선 케이트의 시선으로 몰입하면 처음에는 너무 답답하다. 왜냐하면 그녀도 모르니까,
시체를 난도질해 전시해 놓는 짐승의 도시에서 맷과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작전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고, 그저 뒤에서 보고 배우라는 식의 태도로 케이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맷은 '케이트를 왜 이 작전에 끼게 했을까' 라는 궁금증이 인다. '전투력이 필요했다면 남자들도 많았을텐데'하고 말이다.
케이트는 자신만 소외당하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균열의 조짐이 보이던 그들은 끝내 마찰을 일으키고 부딪힌다. 그리고 케이트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자들은 법 안의 테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법 위에 앉아 있다. 마약 카르텔조직은 마약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으로 그들은 정부, 경찰, 군대까지 손이 안 뻗은 곳이 없고, 그들의 무기는 이미 막강한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다.
아내의 목을 자르고 딸을 염산통에 처넣은 놈을 찾기 위해서 알레한드로는 복수할 기회를 주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붙을 수 있다. 법의 테두리 따윈 통하지 않는 마약 카르텔 조직에게 더 악으로 대응하여 그들의 모든 걸 가져오려는 복수심으로 이 작전에 기꺼이 사냥개가 된다. 맷은 그의 복수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고 알레한드로를 이용하여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면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악명높은 이 곳에서 법의 테두리라는 형식적인 것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명분은 항상 필요하게 되어 있다.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했던 것이다.
맷은 자신들이 하는 작전이 절차적이었는지 확인서에 서명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형식적인 절차에 서명해줄 사람으로 케이트를 이용한 것이고, 케이트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도 손 떼지 않고 끝까지 가본다. 어차피 목표는 같기 때문이다.
악은 악으로 응징하겠다는 그들의 방식에 케이트는 동조하지 않는다.
알레한드로는 "시계의 구조를 알려고 하지 말고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것을 보라"
맷은 "전체 인구 20%의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끊게 하지 못할 거라면 질서라도 필요한 거야.그를 찾는 건 백신을 발병하는 것과 같지"
마약운반책으로 경찰을 이용하는 카르텔과 부패한 멕시코 경찰들을 적으로 간주될 만큼 무법지대인 후아레즈에서 그들을 소탕한다는 것은 법의 테두리라는 경계나 질서 따위가 먹히지 않는다.
혼돈의 국경지대 후아레즈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는 짐승의 도시로 마약조직들의 살인과 폭력은 경계를 넘어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알레한드로, 그의 모든 행동을 묵인하며 임무만을 위해 움직이는 맷, 정의와 룰에 따른 원칙주의자 케이트, 세 배우의 감정선과 심리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일촉측발의 무법지대 안에서의 긴장감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알레한드로는 형식적인 서명을 받아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케이트를 찾아간다.
"당신은 늑대가 아니오. 지금 이곳은 늑대들 소굴이오....작은 도시로 전출 가시오, 법이 아직 살아있는 곳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법의 테두리는 얼마만큼의 원을 그려 놓고 있을까?
권력을 쥔 사람들이, 법을 만드는 계층들이, 이미 악과 결탁하여 울타리의 범위를 맘대로 조정하여 그들을 변호하고 있다면, 그들을 위장시켜 주고 있다면, 늑대들에게 양을 내어주는 양치기와 같다면, 양들을 지켜줄 테두리는 안전한 것인가? 그들은 양들을 잡아먹기 위해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 혼란 속에서 정의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공존을 정의로 지켜줄 수 있을까? 무법지대에서 자신을 지켜줄 건 악과 손 잡거나, 폭력으로 맞서야 지킬 수 있거나, 아님 떠나야 한다. 법이 가능한 곳으로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떠나는 난민처럼.....
악을 상대함에 있어 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느꼈다면 너무 슬픈 현실이 아닌가?
실제로 마약카르텔은 멕시코의 정치인들까지 살해하고 있다.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자신과 뜻이 다르거나 거부하는 후보를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있다. 정말 무법지대이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경찰도 지원하지 않는 도시가 되어버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끄집어 다시 볼 수 있는 영화는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프 온리'를 끄집어냈다.
길 정거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이다.
내 기억으론 여주인공 '사만다'역을 맡은 제니퍼 러브 휴잇이 평범해 보여서 더 정감 있게 다가온 줄도 모르겠다.
남자들은 여자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이 남녀관계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랑만 쫓아다니며 살 수는 없다.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는 통로를 때로는 막아서고 무관심으로 방치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이안(폴 니콜스)과 사만다(제니퍼 러브 휴잇)
이안은 회사 일로 사만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다. 바쁘고 힘들어서 사만다를 자주 서운하게 만든다.
그의 생각은 온통 일에만 머물러 있고, 회사 프레젠테이션에 정신이 팔려 사만다의 졸업연주회가 있다는 걸 잊는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바쁜 건 알겠는데, 이안에게 자신은 매번 2위라는 사실이 서운하다.
그리고 이안은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 투정대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너한테 항상 두 번째라는 게 너무 가슴 아파. 더 비참한 건 거기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거야. 난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이 느낌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서운하다가 비참해지다가 그러다 익숙해지고 또, 그러다 포기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랑은 잠식된다.
그날도 이안은 회사에서 중요한 PT 중이다. 그런데 사만다가 들어와 자리를 망치고 만다.
둘은 말다툼을 하고 차를 타고 가는 그녀를 잡지 못하는 그 순간, 사만다가 탄 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만다는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교통사고로 그녀가 떠나고 이안은 슬픔에 빠진다.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우리는 잃고 나서 깨닫는다.
항상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갑자기 곁에 없을 때 가슴 시리게 아픈 일이다. 진심으로 사랑을 담아내지 못한 이안의 입장에서 더 그럴 것이다.
항상 같이 있을 거라고 여기고 내일로 미루어만 온 발길들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 버린다면, 이안은 밤새 울면서 후회한다.
지금이 아니면 모든 것이 늦는다는 걸, 줄 수 있을 때 주어야 했던 것들 앞에서 좌절하며 잠이 든 이안은 다음날 아침 깜짝 놀란다. 자신의 옆에 사만다가 자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가 그에게 생긴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주어진다.
사만다에게 이안은 묻는다. "하루 밖에 못 산다면 뭘 하고 싶어?"
그녀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안, 지금 이 순간을 그녀만을 위해 소중하게 쓰고 싶은 이안의 질문에 그녀는 답한다.
"질문이 너무 쉽네. 당신이랑 보내야지."
너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의 사만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거창한 무엇인가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건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같이 공유하는 삶이 얼마나 값진 사랑인지를 여자들은 수시로 남자에게 일깨워주지만 알 아차리 지를 못한다. 그저 익숙함에 묻어가려고만 한다.
그런 면에서 택시기사는 남자 이안이 깨닫지 못하는 걸 일깨워 준다.
"그녀를 잃는다면 감당할 수 있겠소? 그럼 답이 나왔군. 계산 없이 사랑하시오."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게 두려워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은 이안,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 적 없는 이안.
그 남자의 과거가 현재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연결고리 같은 것이다. 그 남자를 사랑하면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가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그의 어린 시절과 부모와 모든 걸 알아가는 과정도 사랑 안에 들어가는 일부로 말이다. 그가 뚝딱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현재는 자신과 함께 하지만 자신이 함께 하지 못했던 그의 삶이 궁금한 것은 연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과거를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사만다에게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포장한 인생 안에 어떤 아픔이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상처를 내기 싫어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사랑은 했지만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고 계산적이었던 이안, 그런데 사만다가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떠날 거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안, 그에게 다시 주어진 하루,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시간이 별로 없다.
어제와 다른 행동으로 변화를 주어 보지만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나중에 라는 말을 자주 쓰는 나에게도 이 영화는 내 옆에 있는 존재에 대한 배려와 표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지금도 안 되는 것이 나중이라고 될까? 현재도 못 지키는 사람이 내일을 지킬 수 있는 걸까?
이안은 표현하지 않았던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사랑고백도 한다.
" 오늘 너에게서 배운 것 덕분에 내 선택과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 네가 5분이든 50년이든 네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배웠어. 오늘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영원히 사랑을 몰랐을 거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사랑받는 법도."
우리도 이안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사랑하는 연인에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을 모른다. 그래서 매번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들을 하는 것이리라.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한 사만다로 인해 이안은 진정한 사랑을 배웠고 , 진정한 사랑은 시간에 관계없이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나도 사만다처럼 그저 사랑받고 싶을 뿐이다.
If Only.... 거짓말처럼 사만다가 곁을 떠났고, 이안은 사만다처럼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택시기사의 말처럼 그녀를 가졌음에 감사하고 계산하지 말고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많은 걸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서로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음에 감사하라는 것이다.